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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암 박제인(篁 朴齊仁)은 본관이 경주인데, 건원릉 참봉(建元陵參奉)을 지낸 모암 박희삼(茅庵 朴希參)을 아버지로,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강회백(姜淮伯)의 증손자인 부사직(副司直) 강신범(姜信範)의 딸을 모친으로 가정 병신(1536:중종31년) 12월 29일 함안군 평광리(平廣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후중(厚重)한 자품(資稟)이 드러나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독서를 하면서는 안자 사물잠(顔子四勿箴)과 주자십훈(朱子十訓)를 벽에다 걸어놓고 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범상하지 않은 면모를 나타내었다. 특히 성낸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정도로 종일을 숙연히 학문에 침잠했는데 밤이 이슥할 때까지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급기야 남명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흠모하여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경의(敬義)의 요체를 가르침 받았을 뿐 아니라 문하의 준걸(俊傑)들과 사귀면서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때 교유한 대표적 인물들로는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각재 하항(覺齋 河沆)이 있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워서 특히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들로는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道)와 송암 김면(松庵 金沔), 황곡 이칭(篁谷 李), 모촌 이정(茅村 李瀞)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암은 조종도, 이칭, 이정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당시 함안군수로 초유사(招諭使) 막하(幕下)의 중위장(中衛將) 이었던 류숭인(柳崇仁)에게 보내기도 했다. 황암은 거처하는 집의 당호(堂號)를 ‘정적(靜寂)’으로 하고 바위 위에 대를 심은 다음 이때 비로소 스스로의 호를 황암으로 고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는데, 이전의 호는 ‘정묵재(靜默齋)’였다. 이로서 미루어 보면 그의 학문상의 득력(得力)함이 ‘정(靜)’으로부터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황암의 이 거처에 찾아와서 지은 각재 하항의 시가 유명하다. 황암은 당시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문자를 깨치게 하는데 치우쳐서 기품의 막힘을 열어주는 교육을 등한시하는 풍조는 결국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결국 ‘도에 어긋나고 덕을 무너뜨리는 곳(反道悖德之歸)’으로 귀착하게 하여 유교의 올바른 가르침이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의 소학공부를 예로 들면서 ‘물 뿌리고 마당 쓸며 응대하는 절차와 앉고 서고 걷고 종종걸음치는 법도며, 절하고 사양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灑掃應對 坐立步趨 揖讓進退)’것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몸을 통한 훈련을 통해서 그 본원을 함양하는(制其外以養其中) 하학상달(下學上達)의 공부를 특히 강조하였다. 이는 스승인 남명의 공부론(工夫論)을 철저히 이어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독서법은 한자 한자의 뜻도 깊이 천착하는 정독(精讀)의 방법을 통해 마음에 터득될 때까지 완색(玩索)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입으로만 읽고 의리에 투철히 통하지 못하는’ 독서법을 배격하는 것으로 이 또한 한훤당에서 남명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 학맥의 독특한 독서법이었다. 동문(同門)의 대유(大儒)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황암을 만나본 뒤 그 침중(沈重)함에 감복하여 “도덕과 도량이 넓고 꿋꿋함은 내가 미치지 못할 바(德量弘毅非吾所及)”라 하면서 ‘은덕유조(隱德有操)’로 평가하였고, 함께 살았던 이웃의 문인 학자들이 ‘집지산천조자입각(執贄山天早自立脚)’(李明호), ‘두류부급각근초(頭流負脚初)’(成好正), ‘문풍산해명추향(聞風山海明趨向)’(趙任道)이라고 하였듯이 그는 남명의 사상을 철저히 이어받아 준행(遵行)한 학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학덕이 점차 널리 알려지자 갑오년(1594)에 천거를 통해 태릉참봉(泰陵參奉)이 제수(除授)되고 곧 이어 왕자사부(王子師傅)의 벼슬자리가 잇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기해년(1599)에 송라도 찰방(松羅道 察訪)이 제수되자 나아갔다가 버리고 돌아왔으며, 임인년(1602)에는 다시 시직(侍直)벼슬이 내렸으나 취임치 않았다. 그 해 겨울 다시 임금이 왕자사부로 임명하여 불러 “왕자가 무슨 책을 먼저 공부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하고 묻자 황암이 대학과 대학소주(大學小註)를 강조하였는데 임금이 왕자가 밝은 스승을 얻었다고 흡족해 하였다. 을사년(1605) 가을에 형조좌랑으로 옮겼고 겨울에 군위현감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전원으로 돌아갈 뜻을 굳히고 있어서 왕자에게 주자훈몽절구(朱子訓蒙絶句)를 남겨 권면하였다. 왕자사부로 두 번이나 부름을 받았던 것에서 보듯이 그는 교육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신증양몽대훈지(新增養蒙大訓志)>, <가훈(家訓)> 그리고 <서상훈몽절구 왕자인이헌규(書上訓蒙絶句于 王子因以獻規)>는 그의 교육사상 뿐 아니라 남명학파의 교육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며, 남명선생을 향사(享祀)하는 용암서원(龍巖書院) 창건과 임란에 불타버린 덕천서원 중건을 크게 기뻐하고 있는 데서도 그의 교육적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성호정(成好淨), 서호정(成好正), 정효생(鄭孝生), 한몽일(韓夢逸), 한몽삼(韓夢參), 이행주(李行周) 등이 있다. 그의 인품은 “충담홍의 혼후확실(沖澹弘毅 渾厚確實)”(澗松 趙任道), “패복경의 지독심전(佩服敬義 志篤心專)”(門人 鄭孝生), “덕기천성 침묵혼후(德器天成 沈默渾厚)”(梅竹軒 李明호)로 표현하고 있듯이 일견 스스로의 수양에 모든 것을 걸고 침잠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시폐(時弊)를 극론(極論)하는 소장(疏章)을 만들어 상소하기 직전에 수우당이 소초(疏草)를 보고 놀라 만류한 일이 있을 정도로 과단(果斷)한 면모를 갖고 있기도 했다. 무오년(1618) 11월 5일에 거처하던 집의 정침(正寢)에서 운명했는데 향년 83세였다. 향리의 후배로서 곁에서 황암의 일상(日常)을 지켜 본 이 매죽헌이 만사(輓詞)에서 “산천재(山天齋) 문 앞에 공경히 서서 일찍이 남명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더라. 경의(敬義)의 가르침을 오로지 하여 그 쌓인 공이 높았는데(立雪山天早得師 敬義學專功有積)”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 글은 운명한 당시의 글로서 황암의 면모를 가장 방불()하게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노파 이흘(蘆坡 李屹)이 행장을 짓고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이 묘갈명을 지었다. 현종 신축년에 도림서원(道林書院)에서 향사하다가 헌종 병오년에 평천서원(平川書院)으로 이봉(移奉)하였다. 문집으로는 『황암집(篁集)』이 있는데, 만성 박치복(晩醒 朴致馥)이 서문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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