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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눈꽃산행을 다녀 와서 ----------------------------------- 문 숭리
사랑합니다.
설령, 이 말이 듣는 이로 하여금 99%의 순금과 같은 느낌이 다가오지 않을지라도 미워한다는 말보다는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아니 그리고는 <말이 씨가 된다.>라는 격언을 교훈 삼아 문숭리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 번 외쳐보았습니다.
오늘 내 고향 충청도에서 91세 되시는 어머니와 교회차를 타고 면 소재지 어머니교회를 다녀오면서 배워온 것을 처음으로 써 먹어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어쩌다 그 교회에 예배를 참석할 때마다 담임목사가 설교에 앞서 두 손을 흔들면서 하는 첫 마디입니다. 그러면 약속이라도 하듯이 모든 성도가 다시 그렇게 화답을 하고 설교가 시작되지요.
문숭리도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문숭리는 한국식 새해를 맞아 마음을 새롭게 하고자 의미에서 방송대 문화기행 카페회원들과 일행의 한 사람으로 태백산 눈꽃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미 지난해 12월 이후 카페계획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일정을 전후하여 다녀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눈이 거의 안와서 태백시에서 금년으로 제 16회를 맞이하는 눈꽃축제 일정이 미루어 지고 있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다.>고 우리 일행이 떠나기 전 하루 전에 대설이 내려 태백산 눈꽃축제는 말할 것도 없고 눈꽃산행을 하기에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2009.1.30. 오후 10:40. 청량리역에서 출발하여 1.31. 출발시간을 전후하여 무박 2일에 걸친 눈꽃 산행이자 여행이었습니다.
출발지가 문숭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었지만 잠시 내 고향 충청도에 머무르는 일정 가운에 일부러 서울로 상경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젊은 시절 사용하던 등산도구는 그들도 주인을 잘 못나 탓에 이산가족이 된지 오래라 필수적인 장비를 새롭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다시 구입을 하여 길을 나서야만 했었습니다. 젊은 학창시절 군대를 다녀와서 1학년 2학기 첫 장학금의 절반을 등산도구 풀세트를 구입하고 그 후 등산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이었지요. 그런 날에 필자는 정말이지 안 가본 산을 빼고는 가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남한에서 유명하다는 산은 거의 한 번쯤 섭렵해 보았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그 중에는 경기도 가평에 있는 유명한 유명산도 가보았습니다. 내려오다가 양평해장국을 하는 집이 몇 군데 있는데 등산후 피로를 풀면서 먹는 얼큰한 양평해장국이 정말 죽여줍니다. 그런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문숭리는 마흔 살 이후 이번에 태백산 눈꽃 산행을 다녀오기까지는 태백산을 가기전 한국에서 가장 길다고 하는 어느 터널을 지나듯 지난 10여년을 긴 터널 지나듯 그런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습니다.
이번 산행은 문숭리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방송통신대 졸업을 위한 자축 졸업여행이자 지난 10여년의 생과 투쟁 하면서 어두웠던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자 하는 의식이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의 안좋은 추억과 기억들은 태백산 눈꽃과 더불어 눈으로 다 덮어버리고 오기로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학창시절 겁도 없이 한 학기 전액 장학금의 절반을 털어 등산도구를 구입했는데 그 당시 18만원이면 일제 올림푸스 카메라까지 구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려면 실로 100여만원 이상은 가져도 마음에 드는 장비나 의류를 구입할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등산복 한 벌에 무슨 수 십 만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가고 마음이 약해서 쳐다 볼 수가 없었답니다. 등산용 장갑 한 컬레에 3만 5천을 달라고 해서 엄두가 안 나서 재래시장 등산도구 파는 집에서 1만 원짜리로 시작해서 어지간한 등산도구를 제외 하고도 십 여 만 원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더라고요. 하여간 그렇게 해서 충주역에서 역으로 청량리역을 향하여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서 중간에서 미리 기다리면 덜 피곤하고 비용도 약간 절약하고 시간도 여유가 있는데 일행중 한 사람이 처음에는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면 모두에게 조금은 어색할 것 같아서 이유를 불문하고 이런 저런 불편을 감수하고 충주에서 제천을 거쳐 청량리역으로 시간에 맞추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을 할까? 하다가 주차장에 1박 2일 정도 주차비가 2 만원 정도 내라고 해서 그 비용이라도 조금 절약해 볼까? 하는 마음에서 무료주차장을 이용할 수 있는 충주역에 차를 세워놓고 상경을 시도 했었지요. 2만원 주차비면 열차요금은 절약되고 다시 고속버스에서 내려 청량리역으로 가야하는 번거로움도 없겠다 싶어 그렇게 한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출발하기에 앞서 내 고향 충청도 충주역을 배경으로 58년 개띠가 개폼을 한버 잡아 보았습니다. )
(옆 좌석 젊은이에게 부탁을 해서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이려고 했는데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하겠지요?)
그런에 이게 왠일입니까? 열차 안에서 배낭을 다시 정리하고 준비물을 챙겨보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충주에서 청량리로 가는 열차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천에 다와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제천역사에 내려 이를 잡듯이 배낭까지 다 뒤져보아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시 만원 전후하여 열차표를 다시 샀습니다. 그러니까? 주차요금이 무료가 아니라 유료인 셈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런 생각이 섬뜩 스쳐가더라고요. 금년 액땜을 미리 하는가!
세상에 공짜가 없다.
이런 교훈을 간직하면서 상경을 해야만 했던 날이지요. 청량리 역에 다 도착하도록 영 기분이 그렇다라고요. 그러나 이런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까봐 애써 마음의 안정을 찾으니까 금새 평상심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 (문숭리를 포함해서 동행이 10명인데 방송대 문화기행 카페지기가 사진기사 역할로 나서서 9명만 보이는 것이랍니다. 잠시 후 면 골드 미스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열차안에서 문숭리가 캔 맥주와 안주 정도는 한 턱 내려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심야열차 는 열차안에 홍익매점 운영을 안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진행을 담당한 회원이 만원씩 갹출을 하는 바람에 그 기회가 사라지는 아쉬움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을 준비를 안한 것은 아니었지요. 회원들에게 필자가 쓴 시를 한 부씩 나누어 주려고 준비를 했고, 또 한 두사람에게 줄 수 있는 미니 라디오를 두개 산 것도 있었습니다. 미니 라디오를 마음만 먹으면 10명에게 전부 선물로 나누어 줄 만큼 정말 살다가 그렇게 저렴한(?) 가격에 FM 미니라디오를 구입할 수 있는지는 영원히 미지수 입니다. 얼마냐? 고요. 혹시 그 가격을 여기에 쓰면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가 아는 사람이 전부 그 미니 라디오을 그 가격에 사 달라고 할까봐 참기로 했습니다. 3개를 산 것들 중에 필자의 이어폰이 하루 종일 시달리다가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이어폰을 하는 곳에서 사려고 하니까 최소한 5원원에서 2만원 전후였습니다. 그런데 그 미니 라디오는 그 이어폰 하나면 10명의 일정을 같이 했던 회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상상이 갈 것입니다. 중국산이기 말이지 국산은 하나에 최소 2만원을 가져야 구입을 할 수 있는 제품인데 상상이 안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필자의 눈이나 생각으로 믿을 수 없는 가격에 3개를 구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필자가 10명에게 캔 맥주와 안주를 사려면 5만원은 가져야 하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졸작이나마 시를 준비했지요. FM 미니라디오를 덤으로 횡재한 회원이 있으니 그만하면 된 것이라고 자위를 해도 되지 않을까요. 기대해도 좋습니다. [문숭리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의 회원님들은 이 보다 열배 이상을 기대해도 좋습니다. 선물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필자와 함게하는 나날을 살면서 행복을 못 느끼는 회원은 무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드린바 있으니 작은 선물에 대해 연연하지 맙시다. 하여간 그 바람에 한턱은 쏘지는 못했지만 캔맥주는 그래도 마시게 되고 그것도 두캔이나 마시며 대화를 하다보니 보니 문숭리가 표를 잃어버리고 허둥대던 제천역에 되돌아 온 것입니다. 새벽 4시에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기에 한 두 시간일지라도 잠을 자 두어야 한다기에 술기운을 빌어 억지로 잠을 청하여 두어 시간 자고 나니 태백역에 도착을 했다는 것입니다.
(태백역에 내려 역사안으로 들어가기전 여기가 태백이라는 문구를 넣어 추억을 남기다)
문숭리가 일행과 더불어 드디어 백두대간의 허리인 태백산 산행에 앞서 태백에 인생 50년만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디었습니다. 이번 산행을 기획한 방송대 문화기행 회원은 이번이 3번째라고 하던군요. 문숭리는 2번 이상 가본 산이라고는 지리산이 전부인데 그것도 코스를 달리했는데 우리 일행 중 그 회원은 태백하고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지 않고서야. 서울 토박이 인데 강원도 사람보다 태백을 더 사랑하고 있으니 태백시장 내지는 강원도시사는 표창을 이 회원에게 표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 오늘 아침부터 눈꽃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라 태백시 자원봉사 부녀회원들이 나와서 열차에서 내리는 모든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초상권 보호를 하라는 의미인지 사진이... 그래도 커피를 나누어 주는 장면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태백역에서 약간 외진곳을 선택하여 해장국으로 문숭리 인생에서 가장 이른 아침을 먹고 4시에 일단 산 입구까지는 택시로 이동을 하기로 하고 산행에 앞서 해장국집에 들어가 각자 마음에 드는 해장국을 시켰습니다. 문숭리는 뼈다구 해장국을 좋아하는 지라 뼈다구 해장국을 시켰습니다. 든든히 먹어야 추위도 이기고 산도 오른다기에 다른 여자 회원들이 남긴 밥을 다 쓸어서 그냥 체면을 가리지 않고 만땅으로 배를 채웠습니다.
(태백역 앞에는 말할 것도 없고 10명이 동시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온통 역사 근처 식당은 눈꽃 축제와 더불어 시작되는 태백산 산행 인파를 맞아 새벽 3시임에도 불구하고 불야성을 이루고 며칠간은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택시를 타고 20여분 태백산 등산로 입구 중 하나인 가장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유일사(절) 입구 매표소 도착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람과 추위와 눈과 체력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지라. 일단 신진대사를 해결할 사람은 해결하고 등산화에 미끄럼 방지를 위한 아이젠 착용이 시작되었습니다.
( 유일사 입구 매표소에서 산행준비를 위한 아이젠 착용을 하고 있는 모습들)
우리 일행중 여자 회원들은 이미 이런 경험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이라는 듯 혼자서도 아이젠 착용을 비롯해서 더 이상 남자회원이 도와줄 일이 없을 정도로 철저한 준비를 해오고 잘 하고 있는 모습에 문숭리는 이미 한 세대 흘러가는 구세대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제 아내와 동행했더라면 하나부터 열가지를 문숭리가 챙겨주어도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자고 하지 않을런지? 아직은 산행을 시작전이라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산행 준비를 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인 문숭리도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여러코스가 있었지만 우리 일행이 오르는 코스는 가장 일반적인 코스로 원만한 경사에 반대편이 급경사로 내려가는 코스를 택한 것입니다. 등산로라기 보다는 산책로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오랜세월 인적이 만들어 낸 산속의 오솔길이었습니다.
(태백역- 유일사 입구 매표소- 유일사-천제단- 당골매표소-눈꽃축제 행사장(석탄 박물관-태백역)
생각보다 바람도 잔잔하고 포근한 날씨이다 보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행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침 7시가 되기까지는 어둠속에서 그냥 앞사람을 따라 군대행군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등산을 시작한 이래로 줄을 서서 2시간이면 오르는 산을 5시간 이상 걸려 오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등산객이 너무나 많이 와서 눈꽃 감상에 앞서 어두움 속에서 인간군상을 만나 그들이 떠둘어 대는 소리에 단지 산속이라는 것만 말고는 서울 시내 한 복판에 서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태백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려던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등산로를 채우다 시피하여 (滿人山) 시간에 마추어 정상까지는 오전 10시 이전에는 불가능해 보였고 날씨가 흐리고 새벽부터 많이는 아니지만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으므로 일출은 이미 물건너 간지 오래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매표소부터 필자의 디카가 추위를 먹었는지 신규 건전지를 교환해도 사진을 찍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안 한다는데 할 수 없지 어떡합니까? 휴대폰 카메라로 여기 저기 설경을 담아보려고 애쓰지만 마음에 안 차는 것이었지요. 그냥 다른 회원들의 성능좋은 카메라에 모습을 위탁하고 필자는 여기 저기 담고 싶은 사진을 몇 장 담는 수준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회원들이 이 글을 쓰기전 사진을 카페에 올리면 화질 좋은 사진을 활용하면 되는데 어제 너무 무리들을 하셨는지 아직...하지만 필자는 내일부터 또 생업과 투쟁을 하러 경상도로 이동하는 지라 오늘 이 글을 보내고 싶은데 마음만 급하지 악~ 소리가 날만큼 그런 눈꽃 설경을 첨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정상을 오르는 도중 눈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어 산을 등지고 서 보았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안 쓰는 것보다, 안 보는 것보다(아나로그 카메라에 비하면 화질이 4-5배 좋은 것)는 낳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글만 내 보낼 수가 있나요.
(이 나무가 고산지대에 서식한다는 주목이라는 수종인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합니다. 이 주목은 살아있는 것인데 한 700년 정도 나이들 드셨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도 6배는 더 살아야 할 나무앞에 문숭리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죽어서도 또 천년동안 그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줄 것인데 그저 함구무언이 최상책이라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미록 식물이지만 인간보다 수명에 있어서는 한 수 위가 분명합니다. 인간은 백년도 못 살면서 그렇게 애련에 떨다가 한 많은 세상을 살다 가는 것이지요. 이 나무가 죽으면 고사목(古死木 . 오래되어 수명이 다해서 죽은 나무)가 되는 것인데 중간 중간 몇 그루 보았지만 사진은 안 찍었습니다. 살아있는 나무 찍기에도 여한이 없는데 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에게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태백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미 일출은 물건너 간줄 알면서도 오후 3시가 되면 해가 보일것이라며 그 광경을 찍는다고 사진 동호회 회원들과 개인 애호가가 수 백만원 하는 망원렌즈가 부착된 고가의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기약없는 시간과 자신들의 인내심을 걸고 투쟁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우측에 한 사람은 카메라를 접어놓고 무슨 자세인지? 사진을 찍고 보니 ...점퍼 쟈크를 올리는 모습인데 착각을 할뻔 했지요. 아저씨!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태백산 정상에서 문숭리가 태백산 정기를 하늘만큼 땅만큼 받아왔습니다. [문숭리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의 회원님들에게 마음껏 나누어 드리려고 말입니다.
태백산 정기를 나누어 드립니다.
(제단 옆에 세워진 태백산 천제단 이라는 안내표지판 옆에서)
정상에서는 여러 산악회와 기업체에서 단체 산행을 와서 시산제를 올리고 한해 동안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모습이 수 백미터를 사이에 두고 마련된 두 제단과 그 주변에서 의식을 올리는 모습들을 여러팀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마음이라도 그렇게 소망한다면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 지는 것이기에 필자도 그들은 물론 일행과 문숭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하늘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그래도 태백산 정상에는 바람이 불고 날씨가 겨울답게 차갑다 못해 세몰아치는 지라 잠시 머물다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또 남아 있기에~
내려오는 길에 어느 산사에서 컵라면과 커피, 그리고 일행 중 카페지기가 가져온 오미자 술인가? 하여간 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과실주 서너잔으로 추위를 말끔히 해결하고 그 분이 비장의 무기로 가져온 비료마대를 가지고 10명이 전원 돌아가면서 신나게 눈썰매를 타면서 내려오는 길이 동심으로 돌아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산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눈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문숭리 앞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문숭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눈사람을 보는 순간 인간 눈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염된 오욕을 남이 볼수 없게 산속 외진곳에 눈속에 파 묻어 놓고 하얀 마음이 되어 하산을 했습니다. 그 결과가 살아 가면서 하나 둘 삶에 반영될 것입니다. 회원님들도 그 결과를 [문숭리로부터 온 편지]를 읽다 보시면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느끼시는 날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보니 어느덧 오후 12시를 넘기면서 눈꽃축제 행사장에 도착을 했습니다. 눈꽃 축제를 즐기려는 일정이 아니었기에 행사장에 접해있는 석탄 박물관에 들려 잠시 광부들의 지난 탄광의 역사와 광부들의 삶을 잠시 들여다 보았습니다. 탄광 사업소가 1985년 전후로 해서 클라이 막스로 올라 갔다가 지금은 그야 말로 탄광이 한국땅에도 아직도 존재한다는 상직적인 숫자에 불과 할 정도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전성기에는 탄광사업소가 380여개가 조금 넘었는데 지금은 전국에서 10곳만 남아있다고 하니 반세기 전후한 변화치고는 상전벽해 정도가 아니라 이런 경우를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문숭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다가 아시는 분이 있다면 배우기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눈꽃 축제가 열리는 눈 조각공원 앞에서)
눈꽃축제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눈꽃산행을 목적으로 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날에 눈꽃축제가 열리고 있어 행사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추억으로 사진 한장을 찍어 보았습니다. 내려오다 행사장 입구에서 백반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서는데 거짓말을 1%도 안 보태여 눈꽃축제를 보러 10만명이 온다는 말을 아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이지 사람 반, 차량 반 ... 태백시 전체가 눈에 파묻혀 흥분의 도가리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어제(1.31)를 시작으로 열흘간 눈꽃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으시면서 눈꽃축제가 시시하다고 생각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나 일정상 눈꽃 축제를 즐길 시간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지 볼것이 없거나 즐겁지 않다면 전국에서 16년 동안 추운 날씨에 산간오지에 달려오지 않을 겁니다.
子非魚 安知魚之樂 (자비어 안지어지락) - 그대가 물고기가 아니기에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습니까? 라는 말처럼 눈꽃 축제를 즐겨보지 않고 어찌 눈꽃축제를 논할 수 있으리요. 처럼 필자의 일행은 이미 산행으로 10시간 이상 지칠대로 지쳐서 빨리 점심을 먹고 찜질방에 가서 몸을 녹이다가 상경하는 것으로 되어있던 차라 눈꽃축제의 진면목을 다음으로 남겨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무박 2일의 여정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관광버스다, 열차다, 자기 차량으로 어두움이 내리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쉬지 않고 몰려드는 것을 마주하면서 태백역을 기점으로 산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행은 고속버스와 열차 시간을 앞 당겨 당일 중으로 귀가를 하기 위해서 필자보다 두 시간 먼저 태백역을 떠나갔습니다. 필자는 서울로 갈 것이 아니라 다시 충주로 와서 다음 일정을 준비하기로 되어 있어서 또 혼자가 되었습니다.
충북선을 제천에서 갈아타고 귀가를 하다가 음성역에서 근무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을 수 십년 만에 만나보고 이 글을 쓰는 오늘 오전 1시를 전후에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오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면소재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마치고 옆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한장 찍어습니다.
(충주 신니면 용원장로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어머니와. 2009.2.1.)
필자의 어머니가 91세를 사시고 있는 중입니다. 필자를 마흔살(40)에 나아 51년을 같이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 필자의 어머니가 몇 해를 더 사실지, 아니면 100살을 넘기실 지도 모르지만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그래서 어머니가 살아계실적에 어머니와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던 날을 기념으로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추억도 추억이지만 앞으로도 필자가 어머니 만큼, 아니 고인이 되었지만 아버지 만큼(85세 전후)만 생이 허락된다고 가정하고 지금까지는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인생여정이었더라도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기에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사진을 보면서 마음의 다짐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주간과 더불어 2월에도 행복한 모두가 되어지시기를 기원하면서
2009. 2.1. 내 고향 충청도 충주에서 미명의 아마추어 소설가 문숭리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