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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절, 삶 그 여덟 갈래 그림자 - 고흥 팔영산 산행기
삶, 그 불가해한 기호
벚꽃이 하롱하롱 지는 날, 들르고 싶은 절집이 있다. 봄비에 속절없이 꽃이 이울고, 산벚꽃 연분홍 꽃잎이 절마당에까지 내려앉는 날이면 더욱 좋으리라. 꽃이 벙그는 아름다움과 환희, 한 점 꽃잎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 저린 슬픔이 한 몸을 이루는 팔영산 능가사 뜨락에서 삶과 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다. 해마다 봄이 되면, 황학주 시인의 시 ‘능가사 벚꽃잎’이 능가사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를 가슴앓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여인을 본 날이었다 놀랍게도 이불을 끌어안은 것처럼 빗소리를 바짝 붙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낮술에 취해 비스듬히 베어진 남자가 물 묻은 가지를 집은 채 여인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여인과 잠깐 눈이 마주친 동안 산벚꽃 잎이 날아왔다
빗소리 깔린 길 멀리 데려간 단 한 발자국만큼의 인연을 생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같다 이미 울다 간 바 있는 봄, 사랑이 결정되기라도 하면 숙명이 책상다리를 하고 노랑 병아리 같은 것을 깔고 앉는
그런 전철이 있는 것 같다 서서히 기울며 지워지는 어둠은 그날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잎도 져 내리었다 한참 후 양쪽 발소리가 다른 여인이 입구 쪽으로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
젖은 꽃잎이 날아 내리며 입구를 간신히 비추어 주었다
봄날은 가고, 사랑도 가고 있다. 꽃이 피듯 사랑이 피어나는 봄날은, 꽃이 지고 이별을 하게 되는 슬픔, 그 모순성을 잉태하고 있다. 사랑의 날은 저물고, 꽃잎보다 여린 어느 여인의 마음밭을 비가 적시고 있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는 깊은 침묵만이 흐르고, 말없이 꽃잎이 내려앉을 뿐이다. 사내는 낮술을 빌려 별리의 말을 내뱉은 후, 비에 젖은 여린 가지에 기대어 곤혹스럽게 앉아 있는 듯하다. 그와 달리 여인은, 소리 없이 내리는 봄비처럼 속울음을 애써 참아내고 있다. 능가사 꽃자리에는 신록이 피어나지만, 사랑이 저무는 여인의 어두운 가슴에는 퍼런 멍이 번지고 있으리라. 이 애처로운 봄날,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나와 여인의 눈이 잠깐 마주친다. 그 찰나, 비에 젖듯 어느 여인의 삶이 나의 삶 안으로 들어 왔다가 이내 사라진다. 나 또한 바람 따라 날리는 꽃잎처럼, 바람에 비끼는 봄비처럼, 사랑이 기울어지고 지워진 옛 추억을 떠올린다. 이윽고 여인은 다리를 절며 사천왕문을 거쳐 절집 밖으로 사라진다. 어찌하리, 이승의 인연이 그 뿐인 것을. 내 전(全) 생을 태워 이름 모를 저 여인의 어둠을 밝힐 수도 없는 봄날, 나는 속절없이 그저 여인의 뒷모습만 응시하고 있다. 젖은 꽃잎만 여인의 쓸쓸한 삶의 행로를 비추며 따를 뿐이다.
팔영산 능가사, 암호의 해석학
6월 4일, 알프스 산우회 제 52차 산행지는 전남 고흥 팔영산이다. 산행 코스는 ‘강산초교 - 강산폭포 - 신선대 - 1봉~8봉 - 깃대봉 - 탑재 - 능가사’로 잡았다. 일반적으로 능가사에서 절골 - 마당바위를 거쳐 1~8봉, 깃대봉을 오르지만, 우리는 팔영산 남쪽에서 북쪽으로 종주를 하기로 했다.
2011년 1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팔영산이 편입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팔영산은 전라남도 육지와 아슬하슬하게 이어진 고흥반도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한려수도 섬을 조망하며 산행하기에 적합한 명산이다. 땅끝지맥의 산들은 대부분 암릉 산행을 즐기기에 좋은데, 팔영산(609m)은 이웃 장흥 천관산(723m)보다는 고도가 낮지만 험해서, 해남 주작산이나 두륜산보다도 스릴 넘치는 암릉 산행을 더 즐길 수 있었다.
지난 주에 태백 대덕산, 금대봉 산행이 전국적인 호우로 취소되어 팔영산 능가사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하다가 의문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팔영산과 능가사의 명칭이 지닌 의미, 능가사 동종(보물 제 1557호), 능가사 사적비 등에 주역의 8괘가 나타나는 이유 등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화순 운주사(雲住寺)가 거대한 기호 텍스트인 것처럼, 팔영산 능가사 또한 암호를 담고 있는 열린 텍스트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흥군청 홈피, 혹은 카페나 블로그의 자료를 아무리 검색해 보아도 만족할 만한 답변을 얻을 수는 없었다.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팔영산 능가사에 숨은 심오한 의미를 밝히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해석자의 상상력과 주관이 개입되어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기호의 속성임을 전제로 하여, 나는 나름대로 팔영산 능가사로의 탐구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것은 <문학지리․한국인의 심상공간>(전3권), 고은의 <절집기행>이나 박욱규, 남성숙, 이형권 등 남도의 여행 작가들의 책에도 능가사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어 있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또한 기존 자료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도올 김용옥의 <사랑하지 말자>(2012)를 정독하면서 주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즐거웠다.
고통의 축제, 혹은 혼자서 가는 먼 길
전주-순천 고속도로를 거쳐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남으로 방향을 틀어 국도를 타고 고흥반도 동강면으로 접어든다. 녹동 50km 이정표가 나타난다. 830 국도, 851 국도를 따라 고흥반도의 서쪽으로 줄곧 내려가면 소록도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을 따라 한 사내가 걸어 갔다. 한하운 시인(1920~1975). 1937년에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바 있는 ‘문둥이 시인’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길’을 간 것이다. 팔영산 가는 길, 나병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시인이 삶의 아픔을 달래며 떠도는 모습이 떠오른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피 - ㄹ 늴리리 // 보리피리 불며 / 꽃청산 / 어린 때 그리워 / 피 - ㄹ 늴리리” (‘보리피리’ 일부)
10 : 15. 산행 출발지인 강산초등학교 주변은 마늘 수확이 한창이다. 아주머니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마늘을 캐서 남도 황토밭에 펼쳐놓고 있다. 산행의 들머리인 밭길을 오르는데, 항긋한 마늘 내음이 온 산에 그윽하게 감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11 : 00. 물이 메마른 강산폭포를 거쳐 너덜지대를 지나 신선봉에 올랐다. 등산객이 그리 많지 않은 까닭에 이 구간 등산로는 아직은 정비가 덜 되어 있다. 가까이 여호리 여호항, 우두 해수욕장, 해창만 간척지 등이 보이고, 적금도와 그 뒤에 있는 둔병도, 그리고 조발도, 낭도 등의 섬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팔영산을 제외하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구릉과 둥글둥글한 섬들이 정겨운 모습으로 점점이 뿌려져 있다. 문득 진도 운림산방 4대 임전(林田) 허문의 운무산수(雲霧山水) 수묵화가 떠오른다. 물안개에 싸인 남도의 둥글둥글한 섬들을 그린 그림들이.
11 : 30. 산비둘기 소리를 들으며, 가파른 암릉을 타고 선녀봉에 오른다. ‘소리새’ 산악대장님과 ‘바람소리’님이 오른 암릉을, 스릴을 느끼기 위해 나도 뒤따라 올랐다. 위험한 구간이라서 뒤에 오는 일행들은 우회하는 길로 오시라고 내가 소리치는데, 우리를 뒤따르는 알프스 여성 회원님들도 안전줄도 없는 암벽을 타면서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팔영산 종주는 2봉인 성주봉(聖主峰, 538)을 거쳐 1봉인 유영봉(儒影峰)에 다녀오게 되어 있다. 2봉에서 1봉은 직선 거리로는 100m 밖에 되지 않지만 가파른 암릉과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 1봉인 유영봉(儒影峰, 491m)은 선비의 그림자를 닮았다 하고, 2봉인 성주봉(聖主峰)은 성스러운 명산의 주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2 : 48. 2봉 아래서 식사를 마친 후, 3봉인 생황봉(笙簧峰, 564)에 올랐다. 10분 걸린 셈이다. 봉우리가 관악기 생황을 닮았다 하여 그리 이름을 지은 것이다.
13 : 15. 사자 모양을 한 4봉 사자봉(獅子峰, 578m), 5신선의 놀이터였다는 오로봉(五老峰, 579m)을 지나, 제 6봉인 두류봉(頭流峰, 596m)에 올랐다. 하늘과 땅(건곤)이 맞닿는 통천문이라 한다. 두류봉에서 바라본 다도해 경관이 실로 아름다웠다. 선녀봉 너머로 여수시 화양면이 보이고, 적금도, 조발도, 여수 돌산읍, 낭도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두류봉에서 제 7봉인 칠성봉(七星峰)에 이르는 구간은 떡갈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진 숲이다. 이 구간 역시 때죽나무 흰 꽃들이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한 듯 산행길에 흩뿌려져 있다. 두류봉을 50m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북쪽으로 3.2km 내려가면 능가사요, 동쪽으로 0.17km 올라가면 칠성봉에 이르게 된다.
13 : 50. 제 8봉인 적취봉(積翠峰, 591m)에 이르렀다. 주변의 신록이 이름다울 뿐만 아니라 조망이 매우 아름답다. 가까이는 소옥태도 대옥태도 비사도 첨도 등 섬들이 펼쳐져 있고 해창만 방조제와 나로도가 눈에 들어온다. 적취봉 정상에서 ‘하나로1’을 만나 팔영산 최고봉에 해당하는, 9봉인 깃대봉(608.6m)을 동행한다. 친구는 능가사에서 적취봉에 곧장 올라 온 것이다. 적취봉에서 깃대봉은 0.4km, 탑재는 1.1km, 능가사는 2.9km가 된다. 하산을 위해서는 깃대봉에 들렀다가 다시 적취봉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깃대봉 주변은 통신 시설물 등으로 인해 어수선하여 실망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깃대봉은 정상 등정이라는 상징적 의미, 다도해 조망을 새로운 각도에서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 외에도 팔영산 8봉우리들을 한눈에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좋은 위치이기 때문에 다녀올 만하다고 생각한다.
14 : 05분 깃대봉 도착. 대장님 일행은 현수막을 두르고 인증샷을 찍고 있다. 깃대봉 능선에서 산행을 되돌아보며 상념에 젖는 사이, 일행들이 보이지 않는다. 또 하산길 역시 혼자서 하게 된다. 굴곡진 생의 여덟 구비마다 만나고 헤어졌던 사람들의 자취를 좇아 산을 내려간다. 팔영산 산행이 그러했듯이, 본질적으로 인생은 ‘고통의 축제’이며, ‘혼자서 가는 먼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남쪽 바다에 드리운 산 그림자
팔영산(八影山), 8봉우리의 모습이 비친다는 뜻을 지닌 산 이름이다. 사물의 이름이 본질을 규정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이름을 지은 사물에는 그 명칭을 부여한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 산 또한 다도해 깊은 바다에서 솟아올라 무량수의 시간을 그렇게 지나왔지만, 인간은 팔전산(八田山), 팔영산(八靈山), 팔점산(八点山), 그리고 팔영산(八影山)이라 부르며 이 나무와 흙과 돌무더기에 의미를 부여해 왔다. 팔영산의 빼어난 그림자가 한양에, 혹은 중국 위왕(조비)의 세숫대야에까지 비쳤다는 전설이 생길 만큼 팔영산 여덟 봉우리가 곁고 틀고 있는 형상은 실로 장관이다. 특히 한려수도 바다에서 팔영산을 바라보면 그 자태가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우리라 생각해 본다.
팔영산 산그늘이 진 남해 바다를 바라본다. 오늘따라 바다는 고요하고, 가슴을 열어 놓으며 선선한 바람을 능선으로 보내주며 말없는 말을 건넨다. 마음의 거울이 고요해야 실상(實相)을 볼 수 있다 한다. 모든 괴로움과 번뇌 망상은 큰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과 같으니 고요하게 관조해야 참나(眞我)를 볼 수 있다 한다.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각각이 전부 진리다. 선가(禪家)의 눈으로 보면, 팔영산의 산과 바다, 숲과 나무, 그리고 꽃과 새와 돌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팔영산의 돌과 바다의 물은 둘이면서 하나였다. 바다가 산을 안고 산이 바다에 깊이 몸을 누인 채 억겁 세월을 바라보고 있다. 길이 다한 곳에 길이 있듯이, 인간의 언어가 다한 곳에 또한 길이 있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 말하면 도가 아니듯이, 자연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종종 길을 잃는다. 침묵은 이토록 훌륭한 대화일 수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불가에서는 인간의 언어가 진리를 깨닫는데 방해되거나 진리를 오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이를 경계한다. <능가경(楞伽經)>은 “어리석은 사람은 진흙 속의 코끼리처럼 말속에 묻혀 버린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나와 같이, 언어를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패배가 전제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숙명이다. 언어를 넘어설 만큼의 깨달음에도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를 매개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卍자가 새겨진 능가사 대웅전 문고리에서, 문안으로 침전하고자 하는 욕구와 문밖으로 밀치고 나가고자 하는 모순된 욕망을 읽어내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너, 문안과 문밖을 분별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 다만, 이 험한 생의 골짜기에서 능가산 산허리를 비상하는 까마귀의 눈과 지혜를 단 한 번이라도 얻길 바랄 뿐이다.
계곡에서 잠시 발을 담그고, 등의 땀을 씻은 후 산자락을 내려선다. 산의 경사가 끝난 곳에 능가사가 있으니, 능가사는 전형적인 평지사찰이다. 숲을 벗어나니 펜션인 듯한 집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놀라워라, 연보라 흰꽃이 계곡 이쪽과 저쪽에 만발해 있는 것이 아닌가? 향기는 진하지 않았지만 그윽한 향기가 팔영산 계류를 따라 흐르면서 불국정토를 이루고 있다. 자생하는 나무인 듯한데, 키가 족히 5~7m는 될 듯하다. 황학주의 ‘능가사 벚꽃잎’의 여인을 본 것일까? 이름 한번 불러주지 못하고, 부도탑을 향하는 데 자꾸만 눈에 밟힌다. (‘멀구슬나무’ - ‘들국화’님이 카페에 사진과 설명을 올려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직 마음뿐, 경계는 없어라
추계당(秋溪堂)과 사영당(泗影堂) 등의 부도가 있는 부도밭에 잠시 들른다. 전형적인 종형 부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추계당 부도탑의 하단에 아로새겨진 게의 형상은 여전히 뚜렷하다. 진흙(사바세계)에서 살면서도 청정 바다(정토세계)를 꿈꾸었던 분, 차가운 가을 계곡물처럼 냉엄한 계율에 충실했던 고승이었으리라 상상해 본다. 그의 제자로 알려진 사영당의 부도탑은 조형미가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기단부 네 모서리에 용두를 조각한 모습이 이채롭다.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해남 대흥사와 더불어 호남의 4대 사찰로 일컬어졌던 능가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일주문도 없고, 석등과 석탑마저 없다. 공교롭게도 목조 4천왕과 능가사 동종(보물 제1557호)마저 전각과 종루 등을 해체 보수 수리하는 중이라서 볼 수 없어 아쉬움과 황량함이 더 한다.
하지만 능가사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더 많은 것을 보여 주는 절이라고 생각한다. 경주 불무사(佛無寺)에서 부처를 만나듯,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대상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는 유식사상의 핵심은 ‘유자심소현(唯自心所現)’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외부에 실재(實在)하는 듯 보이는 대상들이 꿈처럼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영상일 뿐이므로, 우리의 마음만이 실재(實在)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을 대할 때도 그러해야 하듯이, 절집과의 만남 또한 외물(外物)의 크고 많음에 집착하지 않아야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마음 뿐임을 깨달아 경계와 허망한 분별을 버려야, 불가에서 강조하는 중도(中道)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능가사의 내력을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원년(416년) 아도화상이 보현암을 창건하였다고 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구례 화엄사의 경우에도 인도 승려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창건 연대에 많은 의문이 따르듯이, 고찰들이 절의 연륜을 강조하기 위해 건립 시기를 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때 보현암은 보현사라는 대찰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왜구의 노략질과 방화로 폐허가 되었는데, 인조 22년(1644년) 벽천 정현대사(正玄大師)가 절을 일부 복원하면서 절의 이름을 능가사(楞伽寺)로 바꾼 듯하다. 보현보살을 모신 보현사라는 명칭보다는,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가 제자인 2대 혜가(慧可)조사에게 전수한 <능가경>과 관련지어 '능가사'라 함으로써 이 절을 대승불교의 맥을 잇는 대가람으로 만들고자 한 의도를 담았던 것 같다. 또한 내 판단으로는 이 때 산의 이름도 팔영산(八影山)으로 함께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다행히도 팔영산 여덟 봉우리들을 약간 비껴 등지고 여여하게 있는 능가사 대웅전(보물 제1307호)이 반긴다. 팔작지붕의 곡선미가 아름다운 조선 후기의 건물로, 최근 해체 보수를 한 상태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배흘림 기둥, 반야용선을 뜻하는 용머리와 법당 안의 꼬리, 천상 세계를 수호하는 비룡, 그리고 수많은 선학이 법당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부연 끝 풍경에 달려 있어야 할 물고기가 보이지 않는다. 팔영산 여덟 봉우리 그 너머 하늘, 구름, 아니 어쩌면 남도의 강물과 푸른 바다, 어느 윤회의 물살을 차오르고 있을까 상상해 본다. 우리네 만남과 헤어짐, 그 어긋남 또한 이와 같으리라.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거리에서 그대 마음을 뎅그렁 뎅그렁 흔드는. 정호승 시인의 시 ‘풍경 달다’를 떠올린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 돌아오는 길에 /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 먼데서 바람 불어와 / 풍경 소리 들리면 / 보고 싶은 내 마음이 / 찾아간 줄 알아라”
응진당(應眞堂)에 들른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아난존자와 가섭존자, 16나한을 차례로 모시고 있다. 조각승 색난(色難)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뾰쪽머리, 네모진 얼굴, 매부리코, 평발, 표범 등과 어울리는 천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58구를 제작했으나 구례 천은사, 영광 불갑사 등에 일부가 있으며, 색난의 제자들에 의해 해남 미황사, 나주 불회사, 강진 백련사 나한상도 제작되었다 한다.
응진당 옆에 있는 사적비에 들른다. 숙종 16년(1690년)에 세워진 것으로서 능가사의 역사를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수의 용틀임이 화려하고, 귀부 또한 웅장하고 섬세하게 조각이 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능가사 동종과 마찬가지로 귀부 주변에 주역의 8괘(掛)가 새겨져 있는 점이다. 또 첨성각(瞻星閣)이란 요사채도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칠성신앙과 관련이 있는 명칭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화순 운주사의 칠성바위와 와불이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의미하듯이, 북극성과 북두칠성 8별(星)은 늘 여여(如如)한 마음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팔영산 능가사에는 우연이라 할 수 없는 8의 상징적 코드가 도처에 깔려 있다.
삶의 유한성과 온생명의 무한성
"한적한 오후다 / 불타는 오후다 /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 오규원, '날(生) 이미지' 전문)
능가사 절마당에서, 오규원 시인이 숨을 거두면서 제자 시인의 손바닥에 남긴 마지막 시구를 떠올려 본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수목장으로 강화도 전등사 소나무가 된 시인.
하산 예정 시간을 이미 넘긴 상황이라서, 산문(山門)을 향해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하지만 무엇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듯, 자꾸만 고개를 돌려 대웅전 너머 팔영산을 보며 지체한다. 누군가가 내 생을 지켜보고, 나 또한 누군가의 생을 지켜볼 것만 같은 오후이다.
사천왕문 앞에서 스님과 눈길이 마주쳐, 합장 인사를 올린다. 속세의 나이로 보아 50대 중후반 중년으로 보인다. 보수 공사 현장에서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적요한 경내에 관광객이라곤 나 혼자 뿐이니 자연 눈길이 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인사의 말을 간단히 나눈 끝에 궁금증을 풀기 위해 스님께 물었다.
“스님, 능가사 범종이나 사적비 등에 주역 8괘가 새겨져 있는 까닭이 무엇이죠?” “어디서 오셨어요?”
“팔영산이란 지명은 유불선(儒佛仙) 3교의 사상이 종합된 것으로 보이네요. 불가 <능가경> 유식론에서 말하는 8식(識), 혹은 부처님의 일생을 요약한 8상(相), 8정도(正道)의 실천, 유가 <주역>의 8괘, 그리고 8선녀와 같이 도가에서 천상을 상징하는 숫자 8과 연관되어 보이거든요.” “뭐 하시는 분이세요?”
“능가사(楞伽寺)란 명칭이, 랑카에서 부처님이 설법한 내용을 담은 <능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리랑카의 랑카를 한자 능가(楞伽)로 음역한 것으로 보아야 할텐데. 전북에도 내소사 개암사를 품고 있는 능가산(楞伽山)이 있잖아요. 랑카산(楞伽山) 남쪽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하니 남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팔영산이야말로 능가산이네요. ‘팔영산 능가사’란 이름 속에, 팔영산의 품에 안겨 있는 능가사에서 마음의 실상(實相)을 보고, <능가경>의 법을 따라 삶과 세계의 본질을 깨우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게 아닐까요?” “능가사가 예전에는 큰 절이었어요. ~~”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산우회 회원들이 떠올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기로 했다. 문득, '조주백수(趙州柏樹)' 화두를 생각하게 된다.
한 승려가 당(唐)의 고승 조주에게 묻는다. “달마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조주는 앞마당에 우뚝 서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며, ‘앞마당의 잣나무(庭前柏樹子)’라고 대답한다. 승려가 다시 조주에게 묻자 또 ‘앞뜰의 잣나무’라 대답할 뿐이다.
중국 선종의 1대 조사인 달마가 서쪽(인도)에서 가져온 가르침(法)의 참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주는 앞마당의 잣나무라고 대답하여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임을 가르친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려면 논리로 따지는 상대적인 지혜나 분별심을 버리고 일상생활을 이끄는 근원적인 마음, 곧 평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봄에 새 잎이 나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우주의 섭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듯(如如), 일상생활이 곧 진정한 불법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승려는 알아듣지 못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한 것이다.
밀짚모자를 쓴 스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 번 뒤돌아보더니 이내 지체없이 법당을 향해 걸어가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 또한 산문(山門)을 등진다. 성속이 다른 두 사내의 행로를 생각하다, 성속이 따로 없다는 가르침이 뇌리를 스쳐 위로를 받는다.
경내를 벗어나니 또 다른 시선이 나를 끈다. 할머니 한 분이 길 한켠에서 나물이며 토종 민들레, 잡곡, 매실 효소 등을 조금씩 늘어놓고 등산객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절 안에 일행이 더 있는지 내게 묻는다. 배낭에서 돈을 꺼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이상하리만치 무척 낯익은 듯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노란 비닐봉지에 산나물을 담는 손길이며, 내게 감사하는 온화한 표정이 귀로에서도 계속 눈에 밟힌다. 마태복음 25 : 31~46 말씀처럼,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오늘 주님으로 계시는 것일까? 하산주를 마시는 데, 할머니가 예수님이요, 부처님이며, 돌아가신 어머님이란 생각이 든다. 아니 다리를 절며 산벚꽃 날리는 절문을 나섰던 여인, 어쩌면 대웅전 풍경의 물고기가 먼 길을 돌아 산문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고 지고, 만나고 헤어지며, 태어나고 죽는 현상계는 무상하고 유한하다. 하지만 그 순환론적이며 연기론적인 관점, 동양 우주론적 관점에서 보면 무한하다. 동양인들은 우주, 즉 천지를 온생명으로 인식하고 인간의 삶을 통해 이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부처는 랑카(능가산)에서 이를 가르쳤고, 동양인들은 <주역>을 통해 신의 의지를 물었다.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의 순환구조를 밝히기 위한 심볼이 <주역>의 64괘이며, 이와 같은 주역적 세계관은 다시 8괘로 압축된다. 서양인들이 합리성, 논리성, 인과성, 언어의 고리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면, 앞에서 말한 조주(趙州)는 침묵으로 대답한다. 불교적 사유로 말하면, 생과 사, 나와 너, 이승과 저승, 중생과 부처, 인간과 하늘은 둘이면서 하나가 된다. 동양인들이 하늘과 땅과 인간(天地人)을 일원적 관점에서 섬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팔영산을 오르내리고 능가사를 보면서 하늘과 땅과 중생, 그 천지 온생명이 내가 섬겨야 할 대상임을 깨닫는다. 첨성(瞻星),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인간 본연의 마음을 회복했던 선인들을 닮으리라. 시냇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속에서 새롭게 변화를 받아, 물들지 않는무염(無染)의 마음을 지녀 하늘을 닮은 삶을 살리라. 팔영산 능가사 계곡에서 욕(欲)의 옷을 벗어 버리고 마음을 씻었듯이, 집착을 버리고 번뇌를 떨치리라. 하산길 편백숲에서 보았던 공자의 말씀, 8개의 마음밭(八田)에 새기리라.
“군자는 도(道)를 근심하고 가난을 근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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