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웅 독립신문 논설위원 주한유엔군이 경비를 맡고 있는 JSA를 한국군이 경비임무를맡게 하려던 당초 계획이 적어도 2년 이상 늦춰질 것으로 보여 우리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뉴스의 초점이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어떤 곳인지 살펴본다.
21세기 최후의 분단현장이자 남북관계는 물론 국제정세와도 첨예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 판문점이다. 또 6. 25. 전쟁중 정전협정이 체결된 곳이어서 오랜 세월동안 남북분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판문점이라는 명칭은 한국전쟁 휴전회담 장소가 개성에서 지금 위치인 널문리로 옮겨지면서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를 한자로 적어 板門店으로 표기한데서 유래된 것이다.
판문점은 이 지역의 이름이고 공동경비구역은 이곳의 공식명칭이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50km, 개성동쪽 약 8.5km, 북위38도선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지름 800m의 원모양인 판문점은 공식적으로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동으로 경비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공동경비구역(JOINT SECURITY AREA)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쌍방간의 행정관할권 밖에 있는 특수 지역이다.
판문점은 체제선전의 장, 때로는 심한 욕설이 오가기도 했던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은 1992년 459차 회의가 무산된 이후 지금까지 텅 비어있는 상태다. 무력충돌의 뇌관이 될 수도 있는 판문점, 그러나 정전협정 위반, 뜻하지 않은 무력충돌이 있을 때마다 대화와 타협의 창구로서 더 큰 무력충돌을 막아왔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JSA는 지난 1976년까지만 해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지지 않아 양측 경비병과 출입민간인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959년 1월 옛소련 공산당기관지 프라우다의 평양주재 기자였던 이동준씨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상황을 취재하다 남쪽으로 망명했으며 1967년에는 위장간첩 이수근이 판문점을 통해 탈출극을 벌이기도 했다.
1976년 8월18일 북측의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양측군인들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판문점지역내에 군사분계선을 표시하고 9월16일부터 이를 경계로 양측이 분할 경비를 맡게 됐다.
그러나 회담이 있을 경우 이를 취재하는 남북의 기자들은 서로 오고갈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또 경비요원은 각각 장교 5명과 30인 이내의 병사로 정해졌고 경비인원을 포함한 모든 군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대측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공동경비구역에는 한국군 카투사와 주한미군이 동수로 공동근무했으나 주한미군이 지난 1994년부터 남방으로 철수해 경계임무는 한국군이 거의 전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을 시작으로 대화의 장이 되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넘나들던 밀사들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1998년 고정주영 현대회장의 소떼방북을 계기로 남북의 교류와 화해의 시발점으로 그 가능성이 새롭게 부각되었지만 현재는 답답한 상황만이 흐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