井戶의 맛과 미의식
민영기 (산청요)
좋은 도자기와 요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에 만드는 사람의 노력과 안목, 솜씨가 필요하다.
요리에도 궁합이 있듯 도자기에도 궁합이 있다. 어떤 흙으로 어떤 도자기를 빚느냐가 그것인데, 백자 흙으로 청자를 만들려고 해도 좋은 청자를 만들 수 없듯이 선인들께서는 그 흙에 맞는 기물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것 중 하나로 정호(井戶)가 있다.
우선 井戶라는 명칭의 유래를 보면, 이것이 지명이라고 하는 설(說)이 있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기물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일본의 차인(茶人)들이 井戶의 내면 세계가 우물처럼 깊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여겨진다.
필자는 현재 이 기물이 발견되고 남아 있는 古요지 중 경남 진해 웅천이 井戶의 요지(窯址)라고 본다. 웅천의 도요지에서 나오는 도편(陶片)들을 보면 굽이 매우 다양하다. 이를 보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인들께서 이 기물을 어떻게 만들면 조형적으로 아름다울까 하는 것을 많이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도편들을 보면 전해지는 井戶와 도편의 맛이나 미의식에서 동일한 것이 많다.
일본의 야나기무네요시 선생께서는 한국의 공예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고, 또 근원을 보려고 깊이 들어가 감명 깊은 글을 남겼다. 하지만 정작 井戶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바로 잡고자 한다.
야나기 선생님 글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이것은 조선의 밥공기이다. 그것도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하는 찻잔이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이다. 전형적인 잡기이다. 가장 값싼 보통의 물건이다. 만드는 자는 비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개성 따위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못 되는 것이다. 사용하는 자는 대수롭지 않게 사용했던 것이다. 자랑거리로 산 물건이 아니다.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으며, 누구나 살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이 찻잔이 갖고 있는 그대로의 성질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했던 것이다. 흙은 뒷산에서 파냈고 유약은 화로에서 꺼낸 재이다. 모양에 아무런 손도 댈 필요가 없다. 많이 만들어 온 물건이다. 빨리 만들어진다.
이것을 만든 장인은 문맹이다. 가마는 너무도 초라하다. 굽는 방법이 거칠다. 값싼 것이다. 도자기는 비천한 사람이 하는 일로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소비물이다. 부엌에서 사용된 것이다. 상대는 농사꾼이다. 사용한 뒤에 제대로 씻지도 않는다. 이 정도로 흔해 빠진 물건은 없다. 이것이 대명물의 정체이다. 가난뱅이가 매일 사용하는 평범한 밥그릇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논하여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명문을 넣을 정도의 물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식이 스며들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밥공기로, 조선인들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대명물은 다인들의 작품이다. 못 배운 조선의 도공들에게 지적 의식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井戶는 생겨난 그릇이지 만들어진 그릇이 아니다. 井戶는 잡기이다.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조잡한 물건이다. 직관력을 가지면 이도와 같은 아름다움을 갖는 무수한 잡기가 우리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야나기 선생님은 井戶에 대해 이 같이 설명했는데 여기에는 맞는 것이 전혀 없다.
① 조선시대(15세기)에는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백 배 어려운 생활을 했겠지만 그래도 멋과 여유를 가지고 생활했다는 것을 많은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② 井戶는 조선의 밥공기가 아니며, 가난뱅이가 예사로 사용했던 그릇도 아니다.
이 그릇은 만들 때 내면의 세계를 안에 넣고 외형은 칼로 깎아서 조형 감각을 표현했다(오른쪽 사진 참조). 이렇게 깎는 시간 동안 도자기를 만들면 몇 개를 만들 수 있는데, 이처럼 시간을 들여 깎아서 조형미를 낸다는 것은 특수한 용도의 사용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찻잔으로 쓰기 위함이었는지, 무엇에 쓰기 위함이었는지는 앞으로 연구 대상이다). 서민이 사용하는 잡기라면 이렇게 제작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③ 야나기 선생은 井戶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이며 전형적인 잡기라 했는데, 이 말대로라면 한국에 남는 것이 무수히 많아야 하는데 별로 없다. 그리고 井戶는 굽쪽에 유약을 시유할 때 손으로 잡는 손자국이 남아 있지 않으며, 매화피 현상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 굽쪽에는 유약을 두 번 시유한 것이 많다. 이것은 그만큼 매화피 유약의 말림 현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 본다. 이런데도 井戶를 조선 시대의 불량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④ 井戶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또한 흙은 뒷산에서 파냈고 유약은 화로에서 꺼낸 재라 했는데, 이것 역시 잘못됐다. 전통을 면면히 이어서 수백 년 그릇을 만들어 온 그 안목으로 꽃 핀 그릇이 井戶이다. 井戶의 태토는 거칠면서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너무 거칠기만 하면 야성미가 강하고, 또 너무 부드러우면 힘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카오린 계통과 다른 흙을 적당히 배합했다. 카오린 계통의 흙은 딱딱함이 적고 점력이 없으므로 이것 한 가지로는 성형할 수 없어 다른 흙과 배합했다. 이렇게 하면 소성 후 가벼워진다.
⑤ 장인은 문맹이며, 도자기는 비천한 사람이 하는 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 또한 잘못됐다. 장인의 자식은 서당에 가서 공부는 안 했지만, 도자기(모든 공예) 만드는 데 조기 입문해서 오직 한 길을 걸었다. 도자기 만드는 일에 깊이 몰입해서 긴 세월 동안 갈고 닦으면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조선 공예의 본질이다.
⑥ 밥공기는 조선인들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대명물은 다인들의 작품이라 했는데, 이것은 『차의 세계』 4월호에서 밝혔듯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높은 안목을 지니고 그릇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릇이 말해 주고 있다. 굽을 깎은 것이나 구연부 처리를 한 것, 또 그릇을 가마 안에 포개서 구울 때 눈의 자국 같은 것까지도 그 그릇과 조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보았다.
웬만한 크기의 그릇은 포개서 굽는 눈을 4개 정도로 하면 그 기능을 할 수 있는데, 4개에서 12개까지 놓은 것도 있다. 井戶는 대체로 눈이 5개가 있는데, 눈 자국을 힘 있게(그릇과 조화되게)하기 위해서 크게 5개가 있으며, 안쪽의 면이 넓은 경우는 12개까지 놓은 것도 있다. 눈을 12개 정도 놓으려고 하면 작업 시간은 많이 소요된다. 井戶에서는 눈을 크게 놓음으로 인해서 나중에 자국이 크게 남아 일반인이 쓰기에는 불편한 점도 있다(즉 시각적으로는 좋지만 사용하는 데는 거친 돌출 부분으로 인해서 불편하다).
또한 井戶는 강도가 약하므로 쉬이 망가질 수 있어 생활용기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깨지기 쉬운 기물이다.
⑦ 喜左衛門 井戶(사진 2번)과 筒井筒 井戶(사진 3번)는 하나는 국보이고 하나는 중요 문화재이다.
형태만 볼 때에는 筒井筒 井戶가 준수하게 잘 생긴 그릇인데 굽쪽에서 喜左衛門 井戶보다 볼거리가 적어서 중요 문화재로 밀려나고 喜左衛門 井戶가 국보가 되었다. 이 두 그릇의 굽을 바꾸어 놓으면 둘 다 좋지 않은 그릇이 된다. 선인들은 동체에 맞는 굽을 만들었으므로 좋은 그릇이 될 수 있었다. 굽을 깎는 것은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 굽은 만드는 이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지므로 그릇에서 굽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喜左衛門 井戶의 굽쪽에 유약이 없는 쪽이 있는데, 이것을 자세히 보면 유약을 시유한 다음에 칼이나 어떤 도구로 유약을 벗겨 낸 뒤에 소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냥 사용하는 그릇이라면 이런 행위는 있을 수 없다(사진 4번 참조). 모든 행위는 높낮이가 있는 것이다. 사진 6번 喜左衛門 井戶를 보면 역시 동체에 걸맞는 대범한 굽을 만들었다.
⑧ 사진 5번 찻잔은 검은 태토에 대범한 형태인데, 여기에 여인네 속살같이 부드러운 촉감의 우유색 유약을 시유하고 난 뒤, 칼이나 어떤 도구를 써서 유약을 군데군데 벗겨 낸 후 소성했다. 높은 안목의 경지에서 이렇게 했으므로, 작위적인 것은 찾아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것은 井戶 찻잔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좋은 그릇이다.
동경에 가면 가급적 들리려는 유명한 차 도구상이 있다. 그곳에 가면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명완을 직접 만져 보고, 또 좋은 그릇(명완)에 차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가고 싶은 곳인데, 2년 전 이 곳에서 조선 시대의 명단을 기회가 있었다. 15세기경 전라도 쪽에서 만든 덤벙 찻잔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하야시야 선생께서 이 찻잔은 아마 閔군은 60세가 넘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라 하셨다. 필자는 지금 이 정도는 못 만들겠다고 주저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 당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으며 또 한 번 선인들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