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의 두 차례 전쟁을 통해 알려진 체첸민족, 그들은 누구인가
(KIDA '99-2000 세계분쟁팀 심경욱, 2000.2.13)
체체니아는 카프카즈산맥 북단에 위치한 작은 공화국이다. 우리나라 경상북도 크기만한 영토(19,000㎢)에 겨우 1백2십만 명에 지나지 않는 인구를 가진 나라이다. 체첸인들 대부분은 민족 고유의 체첸어를 사용하는 회교도(수니파)로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인근 회교국들인 터키와 이란과도 氣脈이 통하는 민족이다.
체체니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열강들의 침략에 시달려 왔다. 그 결과 17세기 이래 페르시아제국, 오토만제국, 제정러시아, 소비에트러시아, 그리고 오늘날의 러시아연방에 이르기까지 이웃 강대국들의 통치 하에 살아왔다. 고작 1백5십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체첸민족이 오늘날 전세계 50여 국가들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도 이같은 고난의 역사에서 이해된다.
특히 체첸인들은 스탈린 정권하에서 이미 폭동을 일으킬 정도로 反러시아적인 성향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살았다.
1932년 스탈린이 강제로 언어·문화가 다른 잉구쉬인들과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으로 병합시키자 무력으로 항거하고 나섰다. 1943년 나찌 독일군이
그로즈니(*) 문턱까지 진격해왔을 때 이들에 협조함으로써 러시아인들에 대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이를 잊지 않은 스탈린은 1944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체첸인들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일제히 이주시켰다.
그후 1956년 귀환이 허용되자 많은 체첸인들은 고향을 되찾아왔고, 지금의 위치에서 체첸·잉구쉬 자치공화국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 후에도 체첸인들의 가슴에 깃든 러시아인들에 대한 반감은 한결같았다. 이는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고르바쵸프에 의해 뻬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소련군 공군 소장 출신인 죠하르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민족 주권운동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1991년 8월 보수세력에 의한 불발 쿠데타로 인해 모스크바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두다예프는 11월 모국의 실질적인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정규군을 조직하는 것은 물론, 1992년초 체결되었던 러시아연방 구성조약에도 불참하였으며, 이듬 해 12월의 연방 상·하원 선거에 대해서도 참여를 거부해 연방으로부터의 분리독립 의사를 더욱 더 공고히 밝혔다.
1917년 볼셰비키들에 의해 '赤化'될 당시 전통적 봉건체제를 여전히 보전하고 있던 체체니아에는 험준한 산악 지세 속에 십수개의 족벌들이 병존해 있었다. '91년 독립을 선포하면서 체첸공화국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던 두다예프는 처음부터 반대 족벌세력의 도전을 받아야 했다. 더욱이 족벌들은 각기 족장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무장병력을 보유하고 있어 체첸군이 창설될 시점부터 내전 발발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족벌들간의 세력 다툼, 일면 석유 채굴권을 둘러싼 족벌간의 利權 다툼의 성격을 띠기도 한 권력투쟁은 체첸 1차 전쟁에 이어 이번 2차전에서도 체첸인들의 결속을 흐트리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1994년 7월말 두다예프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은 反두다예프 사력은 잠정평의회를 구성하여 모스크바 연방정부에 대해 체첸공화국의 유일한 합법적 권력기관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8월에 들어서면서 잠정평의회 세력은 두다예프 축출을 위한 무장투쟁을 개시하였고, 그해 말에는 무력개입을 요청받은 러시아 정부도 이를 계기로 삼아 병력 투입을 전격 감행하였다. 그러나 창군 이래 과도기 혼란에 빠져있던 러시아군은 2년여에 걸친 체첸군과의 게릴라전에 패배하였고 '96년 6월 체첸과 휴전협정을 체결, 전면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를 현실로 받아들인 연방정부가 체첸의 지위 논의를 2001년까지 유보하기로 합의, 사실상의 독립을 묵인함으로써 러시아-체첸간의 1차 전쟁은 막을 내렸던 것이다.
1차 전쟁의 종식 후 체체니아는 1997년 1월 對러 협상론자인 마스하도프를 대통령으로 선출, 전후 복구와 회교 통치에 주력함으로써 러시아와 비교적 안정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샤밀 바샤예프 등 체첸 강경파들이 산악지대에서 독자세력을 형성, 마스하도프의 온건 정책에 반발하며, 인질 테러 등에 의한 對러시아 투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1998년 4월 바샤예프 체첸반군 사령관은 체첸 의회와 다게스탄 분리주의 세력으로 구성된 군단을 결성하여 다게스탄 영내를 침입, 신생독립국 '체첸-다게스탄 공화국'의 건설을 공포하였다. 이는 '99년 12월의 총선, '00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안해질 러시아 정국을 좋은 기회로 삼아 다게스탄공화국까지 끌여들어 회교 신생국을 세움으로써 이 지역에 있어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9년 여름 체첸반군의 군사행동에 대한 러시아의 강경한 대처는 러시아-체첸 2차 전쟁으로 비화하였다. 모스크바 정부는 1999년 여름 동안 다섯 차례나 연쇄적으로 일어난 모스크바와 쌍트 뻬쩨르부르크 시내의 아파트 폭탄테러를 체첸 회교반군에 의한 것으로 보고 9월 5일 이후 체첸 국경지역의 반군 거점에 대해 공중폭격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1차 전쟁이 러시아 병력의 개입에 맞서 두다예프를 중심으로 체첸 국민이 단합하여 항쟁했던 민족독립운동이었다면 이번 2차 전쟁은 그 성격이 조금 달리한다. 1차전 당시에는 체첸인들이 민족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부 러시아인들까지 공감하였다. 주변국들도 체첸을 간접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번 2차 전쟁에 임해서는 주변국들도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에 대한 공포로 침묵하고 있으며, 특히 체첸반군의 침공을 받은 다게스탄의 여론도 반발하고 있다. 또한 2차 전쟁은 서방이 러시아의 對체첸 군사행동을 비방하고 나서고, 러시아는 미국과 서방국들의 카스피해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겨냥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가운데 1차 전쟁과는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2차 체첸전쟁의 전개를 통해 국제사회는 카프카즈지역과 카스피해 유역이 21세기의 새로운 분쟁 중심지가 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러시아군은 이번 전쟁에 임해 1차전에서의 치욕을 씻을 각오로 초기부터 체첸군이 대항하기 어려운 무차별 공습을 감행하였다. 항공기, 미사일, 포병을 이용하여 정유시설 및 군수공장에 대해 원거리 공격을 집중시켰으며, 신속기동부대를 투입하여 주요 거점을 점령한 다음에 지상군 병력을 투입, 잔류하는 반군들을 소탕하는 전술을 운용하였다. 반면, 체첸반군은 러시아군을 시가전으로 유도하여 지하 벙커나 참호, 하수도 등의 지하시설을 활용하여 배후를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였다. 소규모 기습을 감행한 다음 발바른 후퇴를 함으로써 러시아군에게 적쟎은 피해를 입혔다.
2000년 2월 6일, 푸친 러시아 대통령 서리는 러시아군의 그로즈니 점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체첸 對테러작전의 기본단계가 완료되었으므로 단계적 철군이 시작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러시아군이 일단 그로즈니의 점령에 성공한 것은 러시아가 체첸 2차전에서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체첸 영내에서 폭음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그로즈니의 점령을 조기에 공식 선포한 것은 對체첸 강경책을 주도해온 푸친의 대선 승리를 위한 여론 조성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체첸반군이 그로즈니 탈출 과정에서 전력상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특히 바샤예프 사령관이 퇴각 중 오른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체첸군을 궤멸시키고 체첸전쟁에서 승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차 체첸전에서와 같이 수천명 체첸반군이 남부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러시아에 대해 도시 테러를 지속하고 산악 게릴라전을 전개할 것이므로 앞으로 이와 같이 간헐적인 전쟁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러시아인들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가 끓는 체첸인들이 살아 남아있는 동안, 그리고 험준한 산세 속에서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 아들 손에 총칼을 들려 聖戰의 전사로 키워내는 동안에는 체첸 분쟁의 불씨가 언제까지라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 그로즈니市는 1차 전쟁 전까지만 해도 40만 명이 거주했던 체체니아의 수도이다. 본래 1818년 카프카즈전쟁에서 이긴 제정러시아의 알렉세이 에르몰로프 장군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도시는 당시 에르몰로프 장군이 체첸인들을 비롯한 남부 산악지역 원주민들을 정벌하러 나갈 때 요새이자 기지로서 사용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더욱이 러시아어로 '무시무시하다'(terrible)는 의미를 지닌 '그로즈니(Grozny)'란 도시 이름도 이 지역 臣民들을 겁주기 위한 의도에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본 자료는 [지구촌] 2000년 1월호에도 동시에 게재된 논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