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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릉유씨 비금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劉영문
비금도(飛禽島)에 살어리랏다 비금에 최초 입도(入島)한 강릉유씨(姜陵劉氏) '유가(劉家)선조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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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江陵劉氏) 비금세보(飛禽世譜)에 기록된 비금 입도시조(入島始祖) 유가(劉家)'선조의 계보는, 본관시조(本貫始祖) 강릉유씨 승비(承備)선조의 11세손(世孫) 천방공 호인(好仁)⇒ 호의(好義)[중종 1522~선조 1584=62세 졸]⇒ 호례(好禮)선조로 이어지는 호의(好義)선조의 막내 아들이다. 본관시조(本貫始祖) 강릉유씨(江陵劉氏) 승비선조(承備先祖)의 11세손 호의(好義)선조는 슬하(膝下)에 4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장남, 응구(應求):큰 아버지인 천방공(天放公) 호인선조(好仁先祖)의 양자로 출계, 둘째, 응수(應須):[명종 1559 ,11,5 ~ 광해군 1620,12,28] - 61세 졸(卒) 셋째, 국(國):[생졸연대 미상]-(벼슬)壬辰宣武原從功臣 守門將軍載錄券 넷째, 가(家):[명종 1567,9,18 ~ 광해군 1618,10,8]-51세卒 - 飛禽入島祖
산재공(山齋公) 호의(好義)선조는 선조(宣祖)임금 때 벼슬이 통정대부행의금부도사 문학탁이극승선업(通政大夫行義禁府都事 文學卓異克承先業) 라고 강릉유씨 비금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통정대부행의금부도사' 라고 하는 품계는 당시 종5품의 관직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부군수의 직책이다. 자(字)는 극신(克信), 호(號)는 산재(山齋).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 행이란, 자신의 품계보다 실제관직이 낮은 경우 즉, 종1품계인 숭록대부가 정2품 관직인 이조판서직을 맡으면 관직앞에 행자를 붙여 숭록대부 행이조판서라 한다
산재공(山齋公) 호의(好義)선조의 배우자인 할머니는 장흥 마씨이다. 조선중기 효종 때의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사대부가는 고루구간(固陋苟簡)하여 사위가 처가에 유한다. 그러므로 처를 취하지 않고 장가 든다‘라고 표현하였다. 데릴사위와 연관되는 조선시대의 혼인의 유형이다. 즉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혼인해서 남자가 여자집에 오래 거주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외가댁인 어머니의 친정 강릉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조선시대에도 일부 고구려의 데릴사위와 비슷한 남자가 장가를 들면 일정한 기간동안 신부가 있는 처가에서 지내는, 데릴사위 비슷한 형태의 혼인을 유지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우리의 선조이신 호의(好義)선조 슬하의 4형제 또한 장성할 때까지 외가가 있는 장흥에서 나고 자랐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의(好義)선조의 슬하 4형제,응구(應求),응수(應須),국(國),가(家)'선조께서 활동했던 때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나라가 어지럽고 종사의 멸문이 우려되는 조선 선조(宣祖)임금 때의 혼란한 시기로, 강릉 유씨(江陵劉氏) 비금세보(飛禽世譜)에 기록된 가(家)'선조의 내력을 보면 ‘宣祖壬辰欲存宗祀遯跡于 羅州飛禽堂頭里仍居焉(선조임진욕존종사둔적우 나주비금당두리잉거언)‘라고 기록 되어 있다. 묘:당두리계두산(鷄頭山)북록임좌(北麓壬左)합봉(合封) 조선조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종사(가문)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금 당두리에 들어와 (다시 장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정착하여 살았다.‘라는 기록이다.
※ 신안군 비금도 행정체계: ♧철기시대-용소리 성치산아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사람이 살았던 유물 발견,~ ♧백제시대 아노현(阿老縣)으로,~ ♧통일신라시대 무주 압해군 갈도현(碣島縣)으로,~ ♧고려시대전기 해양도 영광군 육창현 비이도로, 후기 전라도 영광군 육창현 비이도로 ~ ♧공도시대(1270년~),~ ♧조선시대 전기, 전라도 영광군 육창현(六昌縣)에 소속되어 비이도(比爾島)=피금도(被錦島)=비금도(飛禽島)로(자료1) 불리어지다가 ~ ♧조선중기 1530년 이후에는 나주목에(자료2,3),~ ♧조선후기에는 지도군(1896년)에 ~ ♧일제시대에는 무안군(1914년)에 속하였다가~ ♧1969년에 신안군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료1), 고려사 지리지(1451년 발간),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발간)에는 신안도서들의 명칭과 군현명이 기록되어 있다. (자료2)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32개,현재의 신안군 섬들이 거의 전부 나주목에 소속됨. (자료3) '호남읍지(湖南邑誌)'(1871년) 중 제1책 「나주」「도서」에는 신안군 섬들의 이름이 52개로 기록 되어 있다.(비금도 포함) ※ 비금도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수저처럼 생긴 섬, 입도조 유가(劉家)'선조는 신안군' 글자의 신'아래쪽 지점에 입도하였음.
호의(好義)선조 슬하의 4형제 중 장남인 응구(應求)선조는 천방공 호인(好仁)선조의 양자로 출계 하였고, 응구(應求)선조의 차남 사산공 덕소(德紹)선조가 인조2년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권왕토란(勸王討亂)하니 사적(事蹟)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호의(好義)선조의 차남이며 맏이로 되어 있는 둘째 아들 응수(應須)선조는 난을 피해 다른 곳으로 피난가기엔 당시의 나이와 5명의 많은 자식들이 있어 여의치가 않아 고향 장흥에 머물렀다.[묘=장흥] 셋째 국(國)선조는 왜란 중 전남 고흥 녹동부근에서 수문장 벼슬로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조정으로부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란 녹권(錄券)을 받았고, 전쟁이 끝난 후 고흥 녹동에 거주하여 세(世)를 이었으며 현재는 그의 후손들 중 부산 여수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긴 후손들을 제외한 단지 3가구만이 선조가 벼슬을 하던 고흥 녹동에 세거하고 있다고 한다.[묘=고흥점암] 호의(好義)선조의 막내, 비금(飛禽) 입도조(入島祖)인 넷째 아들인 가(家)'선조의 임진년(1592) 당시 나이는 25세, 강릉유씨 비금세보에 기록된 것처럼 당두리에 들어와 그대로 살았다(仍居)‘라고 하는 내용은 조상을 섬기는 일을 제일로 여기던 당시의 사회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대 끊김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집안에서 막내인 가(家)'선조를 택해 멀리 피난을 보냈고 임란이 끝난 후에도 고향인 장흥에 다시 돌아가지 않고 당두리에 거주하며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라는 강릉유씨 비금세보(1957년 발간)의 기록이다.
배우자인 여흥 민씨 또한, 가'선조를 따라 비금에 함께 들어 왔을 것이고, 입도(入島) 한 비금도(飛禽島)에서 아들 계효(繼孝)를 두었다. 아들인 계효(繼孝)(선조1599,2,19~광해1673,2,14)선조는 생졸연대의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해인 1599년 2,19일 출생 하였고 구림리에 터전을 삼고 살았으며, 4명의 아들(삼소,육소,구소,계소)을 두었는데 그 분들의 후손들이 현재 비금, 경향각지에서 비금강릉유씨의 후손들로 살아가고 있다.
※ 배우자 여흥민씨(驪興閔氏)-선조원년 1568년 무진(戊辰) 10월27일 출생하시고 인조12년 1634년 갑술(甲戌) 3월17일에 졸(卒)하시다 수(壽) 67세라.
전란(戰亂)의 와중에, 비금도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가(家)'선조의 행적(行跡)에 관한 정확한 궤적(軌跡)을 그릴 순 없지만, 비금도 입도(入島)배경에 관한 문헌기록과 당시의 시대상으로 추정해 보면,
[문헌자료], 강릉유씨(江陵劉氏) 비금세보(飛禽世譜)에 기록된 유가(劉家)'선조의 내력을 보면 ‘宣祖壬辰欲存宗祀遯跡于 羅州飛禽堂頭里仍居焉(선조임진욕존종사둔적우 나주비금당두리잉거언)'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선조(宣祖) 임진년(1592)에 종사(가문)를 보존하기 위하여 비금 당두리에 들어와 (다시 장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정착하여 살았다.라는 해석이다'. 조선시대에는 순국(殉國)=종사(宗祀)보존의 등식이 성립될 만큼 가문의 보존이 중요한 일로 여겨지던 시대상이라 집안에서 4남중 막내인 가'선조를 택해 종사를 보존 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진왜란(1592)이 발발하자 고향 장흥을 떠나 왜구의 침략이 미치지 않는 서남해의 섬(자료1), 비금도에 입도(入島)했다' 라고 하는 기록이다.
(자료1) ※ 조선 숙종때의 사람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신라에서 당으로 조공갈 때 떠났던 항구로 영암 군서면 구림리(영암 월출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를 들고, 여기에서'영암구림리'⇒'비금도'⇒'흑산도'⇒홍의도'(홍도)'⇒가거도'(소흑산도)'⇒중국 '영파'의 항로를 주로 이용했음을 소개하였다. 월출산 서쪽 기슭의 구림리는 영산강의 최대 지류인 영암천 변에 위치하고 있어 항구의 입지조건으로서 적합한 편이다. 이곳은 일제시대의 간척으로 평야로 화해 있어 현재는 항구로서의 면모를 찾기 어렵지만, 5세기 초에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상대포(上臺浦)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질 정도로 고대 항구로서 면모를 과시해 왔다.
※ 해남 화원반도 끄트머리에 당포(唐浦)라는 지명이 전하는데, 신라시대 장보고의 무역선단이 당으로 출항한 국제항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당포(당나라로 가는 포구) 인접한 곳에 최치원이 건립했다고 전하는 서동사(瑞東寺)가 있고, 비금도, 우이도 일대에도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흑산도 가는 중간 길목인 신안군 비금도 선착장이 있는 수대리 마을 뒷산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목마른 부하들을 위해 판 고운정(孤雲井)이 청아한 물빛을 자랑하며 마을 당샘으로 남아있다)이 전하는 것을 보면, 최치원이 당으로 건너갈 때, 해남 화원반도 끄트머리 당포(唐浦)에서 비금 ⇒ 우이도 ⇒ 흑산 ⇒ 홍도를 거쳐 중국의 강남(江南) 밍저우(지금의 닝보)로 통하는 항로를 이용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고, 영산강 유역 즉 영산만(榮山灣)에서 시작된 이 항로가 현재는 영산강 하구언의 다리 건설로 목포항에서 시작되어 장보고의 신라시대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조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해상 통로로 이용되어지던 남방항로는 개성에서 예성강을 타고 바다로 나와 해협을 거쳐 대해로 들어가 흑산도를 경유한 다음 망망(茫茫)한 황해를 건너 명주에 이르는 길이었다.이 길은 먼 길이었으나 순풍을 만나면 불과 5-6일 밖에 안걸렸다. 조선조에도 이 항로는 군사,조운,교역로로 이용되었다.남부지방의 세미가 해협을 거쳐 한양으로 운반되었으며 바다의 풍요로움이 이곳을 통해 북으로 올라가 전국을 살찌게 했다.임진왜란기에는 전라도의 양곡과 의병이 이곳을 통하여 북의 관군들에게 운반되어 전세 역전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정유재란시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한 조선 수군이 바로 이 해역에서 재건되었다. 조정에서는 해협의 해로상의 가치에 관심을 가졌다.해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시대 수많은 수군진영이 설치되어 이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자료2)
비금도는 예로부터 중국으로 통하는 해로(海路)의 중간 기착지에 있어 오고가는 선박들의 항구로 이용되어지곤 했다. 고려말 조선초 '비금도는 영광군 육창현 소속으로 행정의 바닷길로 이용되어지던 영광군(육창현)⇒'자은도⇒'암태도⇒'비금도의 바닷길이 있었고, 서남해의 해안가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통하는 남방항로를 이용하면 비금도'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자료2) ※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1597년 10월 11일 맑음. 정오에 발음도(장산도 추정)에 도착했다. 바람이 자고 날씨가 온화하다. 배에서 내려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가 전선(戰船)을 숨겨 둘만한 곳을 살폈다. 동쪽으로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 볼 수 없고, 북쪽을 보니 나주(羅州)와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비금도(飛禽島)까지 통하여 눈앞이 시원하다.
또한, 정유년 이순신의 명량해전(1597,9,16) 승리 후 13척의 조선 수군이 왜군의 수백 선단을 대적할 수 없어 추격을 피해 서남해의 '진도 울돌목(명량)에서 전라도 해안을 따라 ⇒ 암태 당사도 ⇒ 임자 어의도 ⇒ 전북 위도 ⇒ 전북군산 고군산군도'까지, 수로 대장정 (水路大長征)에 나설 때, 피난선(避亂船)의 대열이었던 가'선조 또한, 통제사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라 남하(南下)하다 일시 피난처를 찾아 당도한 곳이..." 전장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비금도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볼 수 있지만 문헌기록의 임진년(1592년)과는 차이가 있어, 이 부분은 타 성씨들이 비금도에 들어오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자료3)
(자료3) ※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1597년 9월17일(을사) 맑음.~ 19일(정미) 맑음.
17일(을사) 맑음 : 어외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무려 3백여 척이나 먼저 와 있었다. 나주 진사, 임 선, 임 환, 임 업 등이 와서 보았다. 우리 수군이 크게 이긴 것을 알고 서로 다투어 치하 하며, 또 양식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에게 주었다. 18일(병오) 맑음 : 그대로 어외도에 머물렀다. 내 배에 탔던 순천 감목관 김 탁과 영노 계생이 탄환에 맞아 전사했고, 박 영남, 봉학과 강진 현감 이 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19일(정미) 맑음 : 일찌기 떠나 행선 했다. 바람이 부드럽고 물결도 순하여 무사히 칠산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들어와 인가 곳곳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대고 잤다. 20일(무신) 맑음 : 새벽에 떠나 바로 위도에 이르니 피란선이 많이 닿아 있다. 이 광축, 광보가 보러 왔다.
임진왜란이 발발(1592.4.14)한 임진년에 안전지대를 찾아 비금도(飛禽島)에 입도(入島)한 유가(劉家)'선조는 고려 삼별초의 진압과정에서 역적추토사 김방경이 내린 공도령(섬에서 육지로 이주,1270년) 이후 무인도(1270~1415)가 되어버린 비금도에 입도(入島)한 최초의 성씨(姓氏)가 되었으며, 강릉유씨 창성(創姓)유래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어 혈족적(血族的) 기반을 이루었다.
신안의 섬들은 고려시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김방경에 의해 공도령(1270년,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육지로 강제 이주시킴)이 내려져 모든 섬이 무인도가 되었고, 이후 조선시대 섬지역에 목장이 설치되면서 주민 이주가 허용되었다. 1414년 진도군으로부터 1415년 임자도를 비롯한 신안군의 주변섬들이 점차 말을 사육하는 목장으로 무인도에서 해제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영광군 육창현(자료1) 소속이었던 비금도 역시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어떠한 형태로든지 사람이 들어와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시기를 지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장흥에서 이주해온 강릉유씨 가'선조를 시작으로 비금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공식적인 유인도가 되었으며, 정유재란(1597년)을 깃점으로 많은 타 성씨들이 비금도에 들어왔을 것이다.(자료2)
(자료1), 육창현: 당시 서남연해 도서군현(진도군,임치현,흑산현,압해현,장산현,갈도현=육창현(비금,암태,자은) 모든 섬은 고려 삼별초 진압과정에서 김방경의 공도령(空島令,1270년)에 의해 조정에서 그곳(6개섬)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륙으로 이주(천읍)시켰다(동국여지승람,세종실록지리지).
육창현에 소속된 주민들의 천읍 이전 살던 섬(島)은 분명치는 않다. 다만, 오늘의 비금도(比爾島),자은도,암태도등이 육창현에 속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와 시기는 잘 모르나 조선초 이들 섬의 주민들이 모두 육지로 천읍(집단이주)해 있었다. 지금의 영광군 군남면 남창리 육창마을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기록은 '육창현은 영광 남쪽 25리에 있다. 라고 되어 있다.(동국여지승람)
(자료2), 17C중엽 密陽李(尙書) 이암(李巖 ,?),18C말 全州李 이부선(李富善,1739~1811), 18C말 晉州姜(司評公) 강연환(姜連煥, ?~1814), 출처, 신안군도서문화연구논문-목포대학교
이처럼 주민들이 입도(入島)한 까닭은 도서지방의 경제적 요인에서 찾아진다. 즉 섬은 이주민들에게 어염(魚鹽) 및 해산물(海産物)을 채취할 수 있는 바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제공해주었다. 또 섬은 중앙정부로부터 부과되는 세금과 부역부담이 적은 곳이었다. 따라서 도서 이주민들은 섬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면 흩어졌다가, 도서정책이 완화되면 다시 섬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자료), 김경옥,『조선후기 서남해 도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도서정책 연구』, 전남대 박사학위논문, 2000, p.19.
현재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섬의 역사는 조선후기 입도조와 입도 이후 이들이 분파하면서 섬의 여기저기에 자리잡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입도조란 원래 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이란 뜻이지만, 이들이 결코 섬을 개척한 최초의 정착민은 아니었다. 이들은 다만 17․18세기 사회변화와 도서지방의 안정을 계기로 새롭게 이주․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혈맥이 바로 지금 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직접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섬 주민들에게는 입도 先祖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입도조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왜 17세기 이후에야 이주․정착한 주민들이 시조(始祖)라는 뜻을 지니는 ‘입도조’라 불리게 되었을까? 그 까닭은 아무래도 선초까지 이어졌던 공도정책과 이후 계속되던 왜구의 침략, 그리고 임진왜란 등으로 인하여 섬 생활이 불안정했고 따라서 대를 이어 섬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며 살기가 어려웠던 사정 때문이었다. 주민의 교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현 주민들로 직결될 수 없었다. 그러니 후손을 갖는 시조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섬에 평화가 찾아온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주민 교대가 그쳤다. 따라서 그때 섬을 찾은 사람들은 후손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입도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지금 섬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역사의 상한은 입도조부터라는 뜻이 된다. 17세기 이후 도서지방에 정착한 이들 입도조 집단들은 결국 오늘에 이르기까지 섬의 생활과 역사의 주역이었고 문화주체자였던 셈이다.
비금도에는 철기시대 이후에 주민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용소리는 비금도의 동쪽에 있는 곳으로 저평한 구릉지대로 광대리와 성치산, 서쪽과 남쪽은 넓은 들판, 북쪽은 바다가 있어 농경과 어로 생활을 모두 할 수 있는 입지가 아주 좋은 환경으로 형성되어 있어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주요 점거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철기시대의 파수, 백제시대의 격자문 경질토기편, 통일신라시대의 호형토기의 구연부편, 고려시대의 녹청자편, 상감청자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편과 백자편이 발굴되어지는 걸로 볼 때, 고려 공민왕 이후 조선 전기까지 계속된 공도정치라는 공식적인 '무인도 정책' 이전까진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이후에도 섬에 주민이 거주했다는 대응 과정은 꼭 정해진 원칙대로 행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자료,신안군도서문화연구논문)
역사는 자료를 근거해서 추론해야 하지만 입도조인 가(家)'선조의 비금 입도 유래에 대한 당시 역사 기록이 미비하여 그 행적(行跡)에 대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가문의 족보와 선조들의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말들로 대략적이나마 이러이러 했을 것이다‘라고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 보니 지금의 비금 강릉 유씨 후손들에게 입도시조 둔재공 가(家)'선조의 행적에 대한 바른 역사적 정립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입도시조인 둔재공 가(家)'선조의 고향인 전남 장흥엔 임란 중에도 세 분의 형제(응구,응수,국) 모두 살아남아 현재 그분들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둔재공 가(家)'선조의 아버지 되시는 호의(好義)선조의 형님 천방공(天放公) 호인(好仁)선조의 후손들 또한 장흥 승주 순천 해남 강진 곡성 나주에 세거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비금 입도시조 가(家)'선조의 아버지 되시는 호의(好義)선조의 장남인 응구(應求)선조가 호인(好仁)선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대를 이은 후손들이고 보면 둔재공 가(家)' 비금 강릉 유씨 후손들과 천방공 호인(好仁)선조의 응구(應求)선조 후손들과는 형제의 혈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집안의 어르신들로부터 우리의 파가 천공파‘라고 들었던 이야기들은 아마 이런 연유로 인하여 유명한 천방공(天放公) 호인선조(好仁先祖)의 호(號)를 우리의 선조가 장흥에서 왔다고 하여 천방공(天放公)의 후손일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으로 천공파라고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남 장흥에서 난을 피해 한반도의 서남단(西南端)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 비금도까지 찾을 수밖에 없었던 비금(飛禽) 입도조(入島祖) 가(家)'선조의 비금 입도(入島) 유래(由來)에 얽힌 지금(2007)으로부터 415여년 전 임진년의 일들을 오로지 족보와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선조의 빈약한 자료에 근거해 이렇다 저렇다'라고 말하기엔 부담이 있지만 둔재공 가(家)'선조로부터 후손으로 이어지는 세대간의 단절을 막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육지책으로 오래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료를 제시해 보았다.
※ 천방공 유호인(劉好仁) 자(字)는 극기(克己),호(號)는 산당(山堂),천방(天放).조선 때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나시었고, 진사(進士)를 지낸 후로 학문(學問)에 열중하여 후진(後進)양성에 힘쓰시었다. 서기 1574년 (선조 7년) 여름에 나라에 큰 가뭄이 들자 그는 상소(上疏)하여 제단(祭壇)을 쌓고 살신기우(殺身祈雨)할 것을 결심하고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 정좌(正坐)하고 기원(祈願)하면서 나무에 불을 지르니 갑자기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일로 왕(王)이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천방(天放)이라는 호(號)를 내렸다고 하며 현재 전남 장흥(長興)의 예양서원(汭陽書院)에 제향(祭享)되어 있다.
※ 참고자료 및 참고인 1. 참고자료 : 가. 강릉유씨(江陵劉氏) 비금세보(飛禽世譜) 권(券) 1,6,23, 1957 나.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소,『신안군의 고고학 조사 연구』,2002 다. 木浦大博物館,『新安郡의 文化遺蹟』,1987, 라. 김영회,『섬으로 흐르는 역사 -신안군』, 동문선, 1999, 마. 이순신,『난중일기』 2. 참 고 인 : 가. 전남 장흥군 장평면 내동리 유영호 『천방공 호인선조의 첫째 응구(應求)선조의 후손』 나. 전남 장흥군 용산면 차동리 유영휘 『호의 선조의 둘째 응수(應須)선조의 후손』 다. 기타 관계된 종친으로의 전화 설문 방법 3. 글 쓴 이 : 강릉유씨(姜陵劉氏) 승비선조(承備先祖)의 25세손 유영문[相]
※ 후기.. 전라남도 신안군에 바둑돌처럼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 중 비금도라는 작은 섬에 대한 통사적 역사탐구를 통해 크게는 우리시대가 맞고 있는 변화의 본질을 규명해보고 작게는 글쓴이의 직계 선조인 강릉유씨 "유가"(본관시조의 12세손)입도조의 입도유래를 규명해봄으로써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온 그동안의 비금도의 역사를 생각해보려 하였다. 그리고 또 사람이 태어나 활동하는 시간과 장소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반추해보려 하였으며, 나아가 그동안 비금도에 흐르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현재를 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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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자세한 입도내력을 올려주신 내용 잘 보았습니다. 저도 얼마 전에 비금면 가산리에 다녀왔습니다. 참 평온한 곳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에서 양성이씨 집안의 이성출(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육군 대장), 이성식(해군군수사령관 해군 소장)을 배출한 곳으로 - 현재 국내 유일한 형제 장군 집안 - 지난번 부친상을 당하여 방문했음. 나주에서 입도하신 선조님이 계시고 아직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참 살기 좋은 곳으로 사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