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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2월 13일 두 번 째 월요일 법문 임제록 강의
[如天 無比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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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 임제록 강의 13-9 13-10 13-11
13-9
道流야 도류 이막인착 개몽환반자 지만중간 편귀무상
覓取一口飯喫하고
광음 가석 염념무상 추즉 피지수화풍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이니라
차요식취 사종무상경 면 피경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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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 2월 13일 두 번 째 월요일인데 오늘 마침 친불회
법회일입니다. 매월 첫 째 월요일 하다가 이제 두 번 째 월요일
로 날짜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리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도 함께
곁들여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법화경 강의 때 동참하셨던 분들은 이렇게 합동으로 하
는 것에 아마 익숙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교재는 친불회 중심으로 임제록을 가지고 그전에
하던 다음에서 부터 하게 되겠습니다.
임제록 교재는 보통 우리가 쓰는 교재 임제록 35쪽 13-9 부터
할 차례입니다.
여기 내용이 물론 중국 총림에서 천 여명이상 수행자들이 모여
서 아주 열렬히 수행에 열중하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하는 내용이지마는 또 그 당시 분위기라고 하는 것이 일반 신도
들도 상당히 수행에 관심이 깊었던 그런 사람들은 스님들 이상
으로 그렇게 수행에 열중했었습니다.
처음에 임제스님이 왕상시(王常侍)라고 하는 관료의 청에 의해
서 법석을 마련했고 그래서 출발은 사실은 거사님으로 부터 출
발을 했지요.
그래서 크게 僧俗(승속)을 나누어서 이야기하거나
그런 것은 아닌데 그래도 대개 출가한 사람들 중심으로 전문적
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맞춰서 그렇게 이야기한 내용이 아무
래도 다분하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해당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제 여기 임제록 13-9 는 '무상함을 알아라.' 하는 그런
내용이 주된 내용인데 우리가 '인생 무상', '인생 무상' 입으로는
수 없이 말을 하고 또 간혹 주변에 불의에 돌아가신 분이라든지
그저께 같이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변고가 있으면 그때사 한
번씩 깜짝 깜짝 인생무상을 느끼게 되고 그렇죠.
道流야 儞莫認著箇夢幻伴子하라
(도류)야 (이막인착 개몽환반자)하라
도류들이여! -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그대들은 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은 몸뚱이를 오인하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이 꿈과 같고 幻影(환영)과 같은 몸뚱이 - 거기에
사실은 이 무상하기 이를 데 없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임에
불구하고 우리는 천 년 만년 살 것 같이 집착을 하고, 또 믿고,
건강할 때 마음 턱 놓고, 믿고 그렇게 삽니다.
그것 오인하지 말라 라는 거죠.
遲晩中間에 便歸無常
(지만중간)에 (편귀무상)하나니
遲晩中間(지만중간)에 - 머뭇 머뭇하는 하는 사이에
이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금방 無常(무상)한 곳으로 돌아간다.
여기 無常(무상)으로 돌아간다. - 는 말은 '죽음으로 돌아간
다'는 그런 말입니다.
참, 빠른 것은 세월 뿐 이죠.
그래서 이 無常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먼
저 선결조건으로 마음에 깊이 새겨야 비로소 이제 공부가 시작
되는 거죠. 사실 인생 무상을 느끼지 못하고는 공부 한다고 하는
것이 전부 엉터리입니다.
뭐 흉내만 내는거죠. 정말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그런 공부가
될 수가 없죠.
옛날 스님들도 보면 철저히 인생무상을 깨달은 사람들은 수행도
아주 철저히 잘 하고 그렇지 못하면 일단 신심을 내어 하긴 하지
만 그것이 흐지부지되고 중도폐되기가 일쑤이죠.
그래서 임제스님께서도 여기서 우리가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이
믿을 수 없는 몸뚱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幻影(환영)과 같
아서 금방 무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儞向此世界中하야
(이향차세계중)하야
覓箇什麽物作解脫고
(멱십마물작해탈)고
儞向此世界中하야 -그대들은 이 세계중을 향해서
우리의 이 현실 , 이 육신의 이 현실을, 그렇다고 무시할 건
아니지만 바로 그것을 근거로 해서
什麽物 (십마물)
무슨 물건을 찾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삶과 죽음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고 대개 방장입장이 되어서 대중들에게 1000여 명
되는 대중들에게 일러 주는 말씀의 대부분은 警策(경책)하고
꾸중하고 또 경각심을 일으키고 무상을 일깨우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무상함을 제대로 느끼게 되면 그 다음 공부는 저절로
각자가 하는 거지요. 정작 깨닫게 해 주는 어떤 그런 이야기는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습니다.
많다고 해서 꼭 깨닫는 것도 아니지요.
그저 선지식의 한 두 마디 말씀에 그게 자기 공부가 무르익기만
하면 그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지는 것이 이 공부인데,
공부에 대한 실질적인 그런 어떤 견해를 열어준다 하는 그런 이
야기는 사실은 썩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 대신 경책하는 말은 많아요.
그래서 스님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초발심자경문 (初發心自
警文)이 온통 그저 경책하는 이야기이고 또 치문(緇門)이라고 하
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1년간 공부하는데 치문(緇門)이라고 하
는 것은 치(緇)는 먹물 옷을 입고 수행하는 사람이란 뜻이고
바로 그러한 문중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정신을 일깨워
주는데 전부 쉬운 표현으로 치문, 저것은 순전히 잔소리만 담겨
있다고 이런 표현을 곧잘 스님들 끼리는 하는데
그 잔소리라는 게 바로 인생무상을 깨닫게 해주고,
수행생활 잘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해야 수행자로서의 몸 태도,
마음 태도를 제대로 잘 갖출 수 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잔뜩 갖다 놨어요.
과거 스님들이 상좌에게 일러준 것,
멀리 만행(卍行)을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러준 것,
제자들에게 일러준 것 이런 것들을 모아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임제스님의 이치에 대한 말씀도 있지만
이런 것을 일깨워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해요.
覓取一口飯喫하고
補毳過時하야
且要訪尋知識이요
莫因循逐樂
(차요방심지식)이요 (막인순축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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覓取一口飯喫하고
(멱취일구반긱)하고
한 입으로 밥을 먹는 그 일을 취하고
무슨 말인고 하니 한 입 살려고 밥이나 찾아 먹고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그래요.
그리고 또 누더기나 기워입으면서 세월을 보낸다.
補毳過時라
(보취과시)라
누더기나 기워입으면서 세월을 보내는도다.
그러니 얼마나 참 무서운 그런 경책의 말씀입니까!
그저 한 입 살려고 그저 밥이나 찾아 먹고 그저 이 몸 따뜻하게
할려고 누더기나 기워 입으면서 세월을 보낸다.
뭐가 중요하냐?
이렇게 수행한다고 모여서 과연 무엇이 다급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냐? 선지식을 訪尋(방심)해야된다.
且要訪尋知識이요
(차요방심지식)이요
且要 (차요)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訪尋知識 (방심지식) - 선지식을 방문해 찾아서 열심히 묻고
공부해야한다. 그리고
莫因循逐樂 (막인순축낙)하라 그랬어요.
그럭 저럭 그 편안함을 좇아서 그렇게 살지를 말아라.
光陰可惜이니 (광음가석)이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가히 아껴야 되는 것이다.
지금처럼 시간이라 이렇게 표현 않고 光陰(광음)이라 했어요.
빛 光자 그늘 陰자를 쓰는데 그러니까 해그늘이, 해 빛과 그늘의
변화 그것은 말하자면 곧 시간이죠, 옛날에는.
그게 달라지는 그것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
죠. 그래서 시간을 곧 광음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光陰(광음)을 가히 아껴야 된다, 그러니까 시간을 아껴야된다.
念念無常하야
(염념무상)
순간 순간 무상은 다가오고 있다.
순간 순간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가고 있다.
크게 보면 地水火風 (지·수·화·풍)을 입고
麤則被地水火風이요
(추즉 피지수화풍)
地水火風 (지·수·화·풍) 그러니까 흙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
소, 바람의 요소 이 네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몸뚱이,
그 영향이라고 하지만 또 세밀하게 보면
그러니까 地水火風 (지·수·화·풍)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 죽음이
라고 하지만, 그 이전에 사실은 우리 몸은 1년이 다르게
변해가지요.
아니 1년이 아니라 1달이 다르게 변해가고 1달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하루가 아니라 1시간이 다르게 변해가고,
1분이 다르게 변해가고 매초마다 변해가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능엄경에 있어요.
細則被生住異滅四相所逼이니라
(세즉피생주이멸사상소핍)이니라
그런 이야기로서 아주 미세하게 우리가 관찰할 것 같으면
생·주·이·멸(生住異滅) 사상(四相)의 핍박함이 있다.
이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막 쫓아 오고 있다 이거여.
생·주·이·멸(生住異滅) - 우리가 태어나고, 머물고 있고,
달라져 가고,
그래서 결국은 없어져 가는 것.
그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계절에는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있고,
또 모든 사물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 탄생하는 순간 , 멈춰있는 순간, 그 다음 그것이 자꾸 달라져
가는 순간, 그래서 결국에는 소멸해 버리는 것.
이것이 끊임없이 흘러져 가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道流야 今時에 且要識取四種無相境하야
(도류) (금시) (차요식취사종무상경)
그러니 도류들이여!
今時 (금시)에 且要識取 (차요식취)
지금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四種無相境 (사종무상경) - 네 가지 형상없는 그 경계를 잘
알아야된다, 그랬어요.
여기서 四種(사종)하면 地水火風 (지·수·화·풍)을 일단 말하는데
임제스님은 地水火風이 갖고 있는 그 의미를 좀 새롭게,
좀 색다르게 그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地水火風은 형상이 있는 것인데
여기는 형상이 없는 경계라고
하면서 결국은 그 地水火風의 그 변화가 우리 몸이 무상한데로
가버리는, 죽음으로 이르게 되는데 반해서 사실은
우리 마음의 그 어떤 죽음이라고 하는 결국은 뭔고하니
임제스님이 배대하기를
의심하는 것 , 애착하는 것 , 분노하는 것 , 기뻐하는 것 ,
이 네 가지를 地水火風에 배대를 했어요.
밑에 단락에 바로 그게 나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흔들고 있고 의심하고 애착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것 , 이것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우리 마음을 흔들고 흔들고 ,
이런 그 흔들림의 세월이 경과하다보면 결국은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하는 그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免被境擺撲이어다
(면피 경 파박)이어다
경계에 끌려다니는 것을 말하자면 잊지말라.
地水火風 (지·수·화·풍)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이 몸뚱이가
성하고 또 우리 마음은 의심하고 애착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그런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이 마음이
성하다, 마음이 안정된 어떤 그런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그 다음에
13-10
問, 如何是四種無相境고 師云, 儞一念心疑가 被地來礙하며
문, 여하시 사종무상경 사운, 이 일념심의 피지래애
儞一念心愛가 被水來溺하며 儞一念心瞋이 被火來燒하며
이 일념심애 피수래익 이 일념심진 피화내소
儞一念心喜가 被風來飄하나니 若能如是辨得하면 이 일념심희 피 풍래표 약능 여시변득
不被境轉하고 處處用境이라 東涌西沒하며 南涌北沒하고
불피경전 처처용경 동용서몰 남용북몰
中涌邊沒하며 邊涌中沒하야 履水如地하며 履地如水하나니 중용변몰 변용중몰 이수여지 이지여수
緣何如此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니라 연하여차 위달 사대여몽여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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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如何是四種無相境고
(문, 여하시사종무상경)고
묻기를 어떤 것이 사종무상경이냐?
이건 다른 사람이 四種無相境(사종무상경)에 대해서 처음 듣는
일이니까 질문하는 형식을 하고 있죠.
師云, 儞一念心疑가
(사운), (이일념심의)
임제스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대들 한 마음, 마음속에서 의심하는 게 있다 이거야.
의심하는 것. 이건 의심할 상황이 있을 때, 의심할 일이 있을 때
의심하지만 본래 우리들 망상이라고 하는 것 속에
탐·진·치·만·의(貪·嗔·痴·慢·疑)라고 해서 疑, 의심이 상당히
큰 번뇌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의심하는 그것이
被地來礙하며
(피지래애) 라
그 어떤 地水火風 으로 봤을 때 땅의 어떤 그 장애를 입는 것과
같이, 우리 몸뚱이는 지대(地大)의 장애를 입는 것과 같이
우리 마음에는 의심이라고 하는 이 장애를 입게 된다,
그렇게 서로 배속을 시켜 놓았어요.
儞一念心愛가
(이일념심애)
그리고 또 그대들 한 생각 마음에 애착하는 이것은
被水來溺하며
(피수래익)
이라 했어요. 물이 와서 우리를 빠뜨림에 있게 된다,
빠뜨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말입니다.
애착은 대개 수대(水大), 물로 상징하죠.
분노는 당연히 불로 이야기됩니다.
儞一念心瞋이
(이일념심진)
그래서 그대들 한 생각 마음에 분노하는 것, 진심내는 것
被火來燒하며
(피화내소)하며
이것은 불이 와서 태우는 것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화내고 애착하고 의심하고 기뻐하는 것 이런
것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희로애락(喜怒哀樂),
이것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디 가 버리고 없습니다.
우리 주인공은 이제 그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끌려 다니다 보면
어디 가 버리고 없죠.
'나'라고 하는 것이 이리저리 흩어져 버리고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면
儞一念心喜가
(이일념심희)
그대들 일념의 마음에 기뻐하는 그것은
被風來飄하나니
(피풍래표)
곧 바람의 나부낌을 입게 되는 것이다 이랬어요.
그것 아주 좋은 표현이죠.
사람이 기뻐서 들뜨다 보면 정신없이 그냥 웃고 기뻐서
완전히 정신 잃죠.
그야말로 바람에 나부끼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이다,
아주 표현을 잘 했어요.
임제스님이 아주 배대를 아주 재미있게 했는데 그와 같이 우리
마음이 흔들려 버리고 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가 버리
고 없는 것과 같이 그렇게 되나니
若能如是辨得하면
(약능여시변득)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분별해서 우리가 안다면
不被境轉하고
(불피경전)
그걸 우리가 잘 파악해서 꿰뚫고 있으면 경계에 끌려 다니는 것
을 입지 아니하고 즉 네가지 경계이죠.
희·로·애·락(喜怒哀樂), 여기서는 의·애·진·희(疑愛瞋喜).
의심하고 애착하고 분노하고 기뻐하는 이 네가지 경계에
끄달림을 입지 아니하고
處處用境이라
(처처용경)
어디에 있든지 간에 경계를 쓴다 그랬어요.
임제스님 법문 중에 수처작주 (隨處作主) 그런 말이 있지요.
어느 곳에 가든지 주인이 되라.
자기의 주제를 잃지 말아라 그런 말인데 어디 가서든지
자기가 거기 있어요. 자기가 거기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거기에 있지 못하고'
사실은 다른 어떤 경계에 내가 팔려 다니죠.
내가 팔려 다녀서 내가 거기에 있지 못합니다.
사실은 내가 거기에 있어야 되고
거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경계에 끌려다니다 보면
이미 나는 거기에 없어요.
그래서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되라. '내'가 거기에 있으니까
'내'가 되라 하는 '내'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되지 못하니까
그래서 임제스님의 수처작주(隨處作主)라 하는 그 법문이
아주 유명하죠.
그 아주 참 묘한 말이고 얼른 들으면 누구든지 다,
어디에 있든지 자기가 거기에 있지,
어째 '내'가 거기에 있으면서 없다고 하느냐?
이런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내'가 거기에 있지
못하고 어디에 돌아다닙니다.
뭐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고 , 법문소리를 듣고 강의를 듣는다
고 하지만 제대로 10분이면 10분, 20분이면 20분,
제대로 내가 여기에 있으면서 강의 듣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 사이에 별별 망상이 다 알게도 지나가고
모르게도 지나가요.
'내'가 여기 있지 못하는거죠.
강의하는 이 자리에 있지 못하는 거라.
부처님께서도 금강경에 자기 자신을 비우는 데 제일 근사한
표현으로써
'乞食(걸식)' - 걸식은 말하자면 자기를 비워야 걸식이 가능하
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그 다음에 '세족(洗足)' - 발을 씻어라.
마음의 때를 씻어라는 뜻이지요.
그 다음에 제일 멋진 표현이 부좌이좌 (敷座而坐) - '자리 펴고
앉아보아라.'
사람은 몸이 앉아있지 마음까지 앉아 있나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앉아라'하는 부처님의 그런 그 일상에
늘 하는 행위이지만 앉는 이야기를 금강경에서 처음에 소개한
이유가 바로 그런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처작주(隨處作主) 못하는 것이고 늘 나부끼는
것이지요.
기쁨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것이고 분노는 불에 타는 것이고
애착은 물에 빠지는 것이고 의심은 어떤 장애에 걸리는 것이고 .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처처용경(處處用境)하면 어디에 있든지 작주(作主),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경계를 내가 쓴다 이거예요.
경계에 주인이 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자유자재가 된다.
그래서 그것을
東涌西沒하며
(동용서몰)
동쪽에 솟아서 서쪽으로 빠지고
南涌北沒하고
(남용북몰)
남쪽에 솟아서 북쪽으로 빠지고
中涌邊沒하며
(중용변몰)
중간에 솟아서 가에서 빠지고
邊涌中沒하야
(변용중몰)
가에서 솟아서 중간에서 빠지고
이게 자유자재하는 어떤 마음의 그런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履水如地하며
(이수여지)
물을 밟기를 , 물위를 걸어가는 것을 땅 위를 걸어다니 듯이 하고
履地如水하면
(이지여수)
땅위에 걸어가는 것을 물 속을 다니 듯이 한다.
이게 글은 아주 괴상망측한 그런 초인적인, 아니면 초능력적인
그런 신통변화를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쪽에 솟고 서쪽에 빠지고 남쪽에 솟고 북쪽에 빠지고
물위를 가는 것을 땅 위를 가듯이 하고 땅을 가는 것이 물 속을
가 듯이 하는 이런 식은 말하자면 마음이 어디에도 끄달리지 아
니하고 - 끄달리지 아니해야 자유롭거든요.
경계에 끄달리면 벌써 부자유스럽거든요.
끄달리지 아니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되는 것을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아주 멋있는 표현이지요.
그야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대 자유의 어떤 삶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은 사실은 본래 그와 같이
자유로운 존재인데 태어나면서 하나하나 익히고 보고 뭐 이렇게
해서 그것이 또 누적이 되고 그 누적된 어떤 경험과 지식들이
하나의 기준이 되고 틀이 되고 관습이 되고 해서
전부 또 거기 맞추어요.
본래 그렇게 사람이 틀에 짜인 것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런 틀에 맞추는 훈련에 의해서 그만 생활
이 굳어졌어요.
거기서 갈등이 되고 그러다 보니 부자유하고 자유롭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가 되겠죠.
특히 의심하고 애착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또 그렇게 할 수 밖
에 없는 경계들을 만났을 때 내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다니면 이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緣何如此오
(연하여차) - 어째서 그러냐?
어째서 이와같이 자유로울 수 있느냐?
東涌西沒(동용서몰)하며 南涌北沒(남용북몰)하고 물 밟기를 땅
위를 걸어가 듯이 하고 땅을 밟기를 물 속을 가 듯이 하고
이렇게 어떻게 될 수 있느냐?
爲達四大如夢如幻故니라
(위달)(사대여몽여환고)
지수화풍 사대가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줄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제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수화풍이 아니고
어떤 의심해야할 일, 애착해야할 일,
진심(瞋心) 즉 분노해야할 일, 또 기뻐해야할 일
이런 것에 대해서 꿈과 같이 보고
환영(幻影)과 같이 볼 수 있게까지 되면
그렇게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로
자유로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13-11
道流야 儞祇今聽法者가 不是儞四大로대 能用儞四大하나니 도류 이지 금청법자 불시 이사대 능용 이사대
若能如是見得하면 便乃去住自由니라 約山僧見處하면 약능 여시견득 편내 거주자유 약 산승견처
勿嫌底法이라 儞若愛聖하면 聖者는 聖之名이니라
물혐저법 이약애성 성자 성지명
有一般學人이 向五臺山裏求文殊하나니 早錯了也라 五臺山에 유일반 학인 향 오대산리 구문수 조착요야 오대산
無文殊니라 儞欲識文殊麽아 祇儞目前用處가 始終不異 하며
무문수 이욕식 문수마 지이 목전용처 시종불이
處處不疑는 此箇是活文殊요 儞一念心無差別光이 처처불의 차개시 활문수 이 일염심 무차별광
處處總是眞普賢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하야 隨處解脫은
처처 총시 진보현 이 일념심 자능해박 수처해탈
此是觀音三昩法이니라 互爲主伴하야 出則一時出하나니
차시 관음삼매법 호위주반 출즉 일시출
一 卽三三卽一이라 如是解得하면 始好看敎니라
일즉삼 삼즉일 여시해득 시호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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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流야 -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도류)
儞祇今聽法者가 不是儞四大로대
(이지금청법자) (불시이사대)
그대들이 다만 지금 법문을 듣는 그대들, 이것은 그대들
사대(四大)가 아니지마는
지·수·화·풍 (地水火風) 사대(四大) 몸뚱이가 아니야.
能用儞四大하나니
(능용이사대)
그런데 능히 지·수·화·풍 (地水火風) 사대(四大)를 빌려서
사용한다 이거야.
분명히 말하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분별하고, 춥고,
더운 것을 알고, 그러다 잠 들면 잠 속에서 꿈 꾸고 뭔가
그게 있어. 그건 절대 사대(四大)가 아니라구요.
몸은 가만히 있는데 - 손가락 하나 안 움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꿈 속에서
활동을 다 하는 그런 존재가 하나있어. 신기하죠 참.
그것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생각해봐도
지·수·화·풍 (地水火風) 사대(四大), 이 육신이 아니야.
그런데 이 육신을 빌어서 그것이 또 작용을 하는거죠.
若能如是見得하면
(약능여시견득)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본다면 - 사대(四大)가 아닌데 四大를 빌어
서 작용한다는 이 사실.
거기에 대한 어떤 확신만 갖게 된다 하더라도
便乃去住自由니라
(변내거주자유)
혹 이에 가고 머무는 것이 자유롭다.
約山僧見處하면
(약산승견처)
만약에 산승의 견처(見處)에 의지한다면,
산승의 견처(見處) - 임제스님 자신의 견해에 비춰 본다면
勿嫌底法이라
(물혐저법)
싫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꺼릴 것, 대적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聖者(성자) 聖之名(성지명)이니라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의 경지나 아니면 성인을 사랑한다면
성인이라는 이름에 불과하다.
성인이란 이름 뿐이죠. 그게 정해진 것이 어디있습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없지요 정해진건.
그냥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편의상 붙여서 부르죠.
일체 역사상의 성인이라 하는 것도 우리가
그렇게 이름을 붙여서 부르죠.
有一般學人이(유일반학인)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早錯了也(조착요야)라
五臺山(오대산)에 無文殊(무문수)니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예컨데 어떤 일반 학인이 오대산을 향해서 문수보살을 구한다
이거예요.
오대산(五臺山)은 대개 문수도량이라 그러죠.
구화산(九華山)은 지장도량, 보타산(普陀山)은 관음도량,
또 아미산(峨眉山)은 보현도량, 이렇게 사대 보살들의 사대도량
(四大道場)이 있어요.
특히 우리나라는 관음도량이 많지요.
우리나라 강원도 오대산도 역시 문수 도량이구요.
지리산도 역시 문수도량이고 이렇게 도량이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여기는 무착선사를 두고 하는 소린데 무착선사가
오대산의 문수보살이 계신다고 해서,
물론 문수보살은 역사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전부 역사적 인물은
아니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된 성자들이라
고 밖에 할 수가 없는데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일보일배(一步一拜)
하면서 장안에서 부터 오대산까지
문수보살 친견하려고 몇년이나 걸려서 가고 있죠.
그래서
向五臺山裏求文殊 (향오대산리구문수)라 - 오대산을 향해서 문
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早錯了也 (조착요야)라 - 벌써 틀렸다.
五臺山 (오대산)에 無文殊 (무문수)니라 - 이런 소리는 아무나
못해요. 임제스님이나 할 수 있지.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느니라.
우리가 그런 경지도 되지 않으면서 덮어놓고 말만 배워 가지고
건방스럽게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임제스님의 입장에서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거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儞欲識文殊麽 (이욕식문수마)아
그대들은 정말 문수보살에 대해서 알고 싶으냐?
祇儞目前用處 (지이목전용처)가
다만 그대들 지금 목전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
始終不異 (시종불이) 하며 - 始終 다르지 않으며,
목전에 지금 작용하고 있는 그것, 지금 작용하고 있는 그것.
말하는 사람은 말하고 듣는 사람은 듣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하고 꼬집어 아플 줄 아는,
잠을 자도 역력히 뭔가 작용하고 있는 바로 그 주인공이죠.
그것이 始終不異(시종불이), 시종 말하자면 변함없는 그것이며
處處不疑 (처처불의) - 곳곳이 어디에서든지 의심할 바 없이
너무 분명한 그것.
始終不異(시종불이)나, 處處不疑 (처처불의)나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 始終不異(시종불이)는 시간적으로 늘 그렇게
여여히 있고, 處處不疑 (처처불의)는 공간적으로 의심할 것 없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늘 그렇게 있는 것.
此箇是活文殊 (차개시활문수)요 - 이것이야 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
아주 대단한 법문이예요.
이런 것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무착문희(無着文喜)선사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갔는데
마침 날이 좀 저물었어요.
소를 몰고 가는 할아버지를 만났어요.
그 할아버지가 안내하는 대로 어느 절에 들어갔는데 가니까
어떤 동자가 있어서 소를 동자에게 넘겨주고 그 할아버지가
무착문희(無着文喜)선사를 객실에 안내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 할아버지가 사실은 문수보살의 화현인데 무착선사는
그것을 몰랐어요. 나중에 그 동자를 통해서 문수보살이란
사실을 알고 문수보살에게는 제대로 법문도 못 듣고 시자인
균재동자에게 근사한 법문을 듣죠.
우리가 잘 아는
面上無瞋供養具(면상무진공양구)
口裏無瞋吐妙香(구리무진토묘향)
心裏無瞋是眞寶(심리무진시진보)
無染無著是眞如(무염무착시진여)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변함없는
부처님 마음일세.
아주 불교계에 알려져 있는, 노래로도 되어 있고 하는 그 법문을
균재동자에게 듣게 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은 그 길로 구름이 싸아 나타났는데 그 구름 사이로
사자를 타고 사라지고 또 돌아보니까
절도 없고 그 균재동자도 없더라 하는 아주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요.
그런 이야기에 의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갔던 무착스님의
이야기는 아주 많이 등장합니다.
나중에 무착선사도 그 인연으로 오대산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정말 공부가 깊어져서 눈이 열려 오대산에서 소임을
보면서 대중들이 먹을 죽을 큰 가마솥에 끓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죽이 부글 부글 끓을 때 마다 그 방울에 문수보살이
화현으로 이렇게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때는 이미 무착선사가 공부가 워낙 깊어 문수보살
같은 이도 안중에 없어.
그래서 주걱을 가지고 문수보살을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문수는
당신 혼자 문수고 무착은 내 혼자 무착이다 내 죽 끓이는데
방해 되게 왜 왔느냐고 하면서 문수보살을 후려칠 정도로
공부가 깊어졌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이 그때사 인가를 하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를 하죠. 쓴 노인은 뿌리까지 쓰고 단 무슨 무엇은 아주 철저히
줄기까지 달다는 그런 표현까지 하면서 무착선사를 칭찬을
아주 기가 막히게 합니다.
'저렇게 소견이 트이지 않아도 성실하게 아주 철저한 수행의
일보일배(一步一拜)하면서 정진을 했는데
소견이 막혀 문수를 보아도 알지 못하더니 이제는 공부가 깊어
지니 나 같은 사람을 주걱으로 사정없이 칠 정도로 공부가 깊어
지고 안목이 높아졌다.' 이런 칭찬을 아주 멋지게 한 그런 역사
가 있어요.
그런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임제스님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리고 오대산 문수보살 친견하러 가는 건 일반 불자들
이 보통 많이 하는 일이구요.
그러면서 임제스님의 이 말씀이 참 무섭죠.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없다. 지금 보고 듣고 하는, 눈 앞에서
작용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다.
이거 외에 달리 문수보살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하는 그런 뜻입
니다.
儞一念心無差別光이 處處總是眞普賢이요
(이일염심무차별광) (처처총시진보현)
그대들 한 마음 곳곳에서 어디서든지 차별 없이 빛나는 것.
이것이야 말로 곳곳에 어디가서든지 모두가 다 보현보살이고
어디에나 두루 비치는 것이 진짜 보현보살이고,
儞一念心自能解縛 隨處解脫은
(이일념심자능해박) (수처해탈)
此是觀音三昩法이니라
(차시 관음삼매법)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스스로 능히 속박을 풀어서 어딜 가나
자유로운 해탈을 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관세음보살의 경지이다.
관세음보살의 삼매라고 하는 것은 능엄경에서 이야기하는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근거를 하고 있죠.
互爲主伴하야
(호위주반)
서로 서로 주인도 되고 벗도 되고.
예를 들어 내가 주인이 되면 여러분들은 벗이 되고
내가 또 여러분들의 집에 갔을 때는 여러분들이 주인이 되고
내가 또 (벗)객이 되고 그래서 서로 입장에 따라서 주인이
되었다가 객이 되었다가 이렇게 서로 번갈아 가면서 연출을
하는 거죠.
出則一時出하나니
(출즉일시출일)
나온 즉은 일시에 나온다 그러니 사실은 주(主)가 있어야 반(伴)
이 있고 반(伴)이 있어야 주(主)가 있죠.
주와 객이 사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 속에 있다.
주(主)가 없는 반(伴)은 없고 반(伴)이 없는 주인(主)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一時出 이란 건.
一卽三三卽一 이라
일즉삼 삼즉일이라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
문수 보현 관음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문수 보현 관음이라 하는 것도 곧 내 한 사람이고,
내 한 사람이 곧 문수 보현 관음이다.
始終不異(시종불이)하고
處處不疑(처처불의) 이 살아 있는 문수, 活 문수보살이고
또 우리들 한 마음에 무차별 광으로써 처처가 모두 보현이고
自能解縛 (자능해박) 스스로 해박을 해서 속박을 풀어서 어디서
든지 해탈할 수 있는 이것은 觀音三昩 (관음삼매)라 했지만
그것은 곧 나 한 사람에게서 펼쳐질 수 있는 그런 경계이다.
그래서 一卽三三卽一이라 그랬어요.
(일즉삼 삼즉일)
如是解得하면 始好看敎니라
(여시해득)하면 (시호간교)니라
이와 같이 이해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정말 비로소 그때
부처님의 가르침, 경전의 문수보살이 어떻고 보현보살이 어떻고
관세음보살이 어떻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경전에 얼마나
많습니까?
순전히 경전을 설하신 마음에서 나온 성현들이거든요.
그것을 비로소 잘 이해할 수 있다.
始好看敎(시호간교)라
그리고 아주 잘 교학을 볼 수가 있다 그랬어요.
一卽三三卽一 (일즉삼 삼즉일)의 이 원리를 제대로 이해했을 때
(如是解得) 비로소 경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오스님도 그런 말을 했어요.
心不返照(심불반조)이면 看經無益(간경무익)이라.
마음에 반조하지 아니하고 부처님 말씀과 경전을 아무리
보아 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그랬어요. 왜냐?
전부 마음이 설하는 것이고 마음을 설하는 것이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
마음을 알도록 하는 것 그것이 경전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마음에다 반조해보지 아니하고 경을 객관으로 띄워놓고
경을 보면 도대체 경을 아무리 봐야 이익이 없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도 일(一)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포함한 바로 '나' 이죠.
그것을 달리 '다른 나'는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친불회 법회하고 아울러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무비스님 임제록 강설 - 불광출판부 - 원문 참조
※본문이 많이 길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하나로 기록했습니다.
용량초과로 스크랩이 안되오니 필요하신 분은 복사하시면
되시겠습니다.
(법문정리:明星華)
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큰 스님 강령 하십시요 감사 드립니다 ~ 미륵골님! 명성화님 감사 합니다. 부처님 되십시요.~
귀로만 눈으로만 스쳐지나가던 임제록을 ....오늘 낮에 무심코 난자 프린트를 하였는데 이렇게 강의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더구나 마지막 말씀, 마음에 비춰보지 않으면 모든 경전을 다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도무지 모를 뿐이오나 隨處作主 !!!
엄살이 프로급이십니다. 한자에 까막눈이 아니고. 하얀눈이시네요뭐...
覓取一口飯喫 補毳過時 且要訪尋知識 -한 입 살려고 밥이나 찾아먹고 누더기나 기어 입으면서 세월을 보내는 구나! 선지식을 방문해 찾아서 열심히 물어야 한다.크게 보면 지수화풍이 흩어지는 것이고 미세하게는 生住異滅 네가지 변화에 쫓기고 있다.희로애락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隨處作主하라) 땅을 밟듯 물을
밟고 물을 밟듯 땅을 밟는다.사사무애를 쓰는것은 사대육신이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였기때문이다.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 싶은가? 다만 그대들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것,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가든지 의심할것이 없는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문수다.무착선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균제 동자에게 面上無嗔供養具라는 유명한 법문을 듣는다.우리들의 한 마음과 문수보살,보현보살,관세음보살은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셋이다.한 마음을 떠나서 무엇이 있겠는가? 心不返照 看經無益(청매조사)- 마음에 비춰보지 않으면 경전을 읽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_()()()_
處處用境 어디에 있던지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그 경계를 내가 쓰고 주인이 되면, 東涌西沒하며 南涌北沒하고 中涌邊沒하며 邊涌中沒하야 履水如地하며 履地如水하니라 ... 무애자재한 대 자유의 삶이 된다. ....감사드립니다..._()()()_
미륵골님 감사드립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
법예에 감명하옵니다. ()()()
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미륵골님 그리고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_()()()_
心不返照(심불반조)이면 看經無益(간경무익)이라....음에 반조하지 아니하고 부처님 말씀과 경전을 아무리 보아 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다....미륵골님 고맙습니다._()_
Daum 정기 업그레이드시에 글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합니다. 또 작아졌군요. 얼마 후 또 복귀될 것입니다. _()()()_
큰스님 감사합니다._()()()_
_()()()_
^^ _()()()_
신심명에 나오는 말씀도 경전 말씀처럼 한 구절 한 구절 다각인 시켜야할 내용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자유로운 삶 處處用境 隨處作主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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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 () 성불하십시요!
且要 (차요) 訪尋知識 (방심지식)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서 열심히 묻고 공부해야한다. 고맙습니다._()()()_
祇儞目前用處 (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 (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 (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 (차개시활문수)이니라...바로 이 순간 눈앞에서 작용하는 그 당체가 시간과 공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니라. _()()()_
_()()()_
_()()()_
_()()()_
감사 감사합니다.
진실로 감사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