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便品 第二
(방편품 제이)
오늘은 두 번째 품, 스물여덟 번 째 가운데 두 번째 품, 방편품(方便品)이 되겠습니다.
방편품이라고 하는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방편이라는 말에 대해서 좀 한번 생각해 보고 넘
어갈까 합니다.
불교에서 방편이라고 하는 말을 참 잘 쓰죠. 아주 쉽게 씁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방법’이라고 하는 뜻도 되겠는데 불교에서 무엇을 방편이라 하며 또 방편이란 실제적으
로 어떤 것인가? 이런 것도 우리가 정말 방편품(方便品)에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지,
안 그러면 잘 모르고 쓸 수 있는 그런 경향이 아주 많아요. 이게.
왜냐하면 쉬운 말 같으면서도 또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 그러면서 흔히 또 쓰고 그렇습니
다. 그래서 오늘 나눠드린 인쇄물 8번부터 한번 보면 ‘방편(方便)이란 무엇인가?’ 이것
은 법화경에서 소위 ‘방편품’이란 말을 설명하면서 하는 말인데,
방편(方便) - 바른 수단이다. 무엇을 하는데 바른 수단이냐?
중생을 교화(敎化)하는데 바른 수단이다. 그랬어요.
그리고 그 밑에 줄을 그어놓은 것을 보면 ‘그 상황, 그에 알맞은 교화의 수단’이라 그랬
습니다.
‘교화(敎化)’란 중생을 가르치고 제도한다는 것이죠. 가르치고 교화하는데 대한 수단인
데 그것이 사람마다 다 다르고, 또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요. 예를 들어서 20
살 먹었을 때, 또 21살 먹었을 때, 또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느냐? 또 지금은 그
사람의 생활 사정이 어떠하냐? 이런 것들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부 다를 수가 있어요.
시간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 그 상황, 거기에 잘 맞게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하고 하는 그런 수단이 있
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방편이란 말의 바른 뜻인데, 불교에는 방편이란
말이 잘 쓰이는 반면에, 방편도 많아요. 실제적인 방편도 많습니다. 법화경에서 그동안의
방편으로 이야기해 왔던 것을 최종적으로 최고의 가르침을 펴면서 여기서 다 드러내어 놓
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죠.
사실은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깨달으심이 아무리 멋진 것이라 하더
라도 그것이 우리 수준과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한꺼번에 다 이야기하려고 할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만 이야기하는 그것이 ‘방편’입니다.
우선 경전의 내용을 가지고 밑에 한번 살펴보면 ‘불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그런 방
편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최종 목적은 뭐냐?
그 밑에 보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일불승(一佛乘)이다, 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불교는 우선 방편을 이야기하자면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이렇게 말할 수
가 있어요. 그러나 성문, 연각, 보살 뿐만 아니라 그것은 수많은 우리가 지나온 불교적인
방편이 그 세 가지 말 속에 다 포함됩니다. 포함되는데 우리가 낱낱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
겠죠.
그러나 그 세 가지 방편 내지 서른 가지 방편, 300가지가 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3000가
지, 30,000가지나 될 수 있는 그런 방편이 결국은 무엇을 목표로 한 방편이냐 하면 여기서
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일불승(一佛乘)이다,’라고 했어요. ‘하나의 부처의 경지’다,
이런 말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지혜, 부처님의 깨달음, 거기에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은 어떤 특정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찾아내어 쓰는데 최종 목표가 있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오직 일불승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많은 속성 중에서
부처의 속성, 부처의 능력을 우리가 꺼내어서 쓰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불교의 최종 목적
입니다.
그 외에는 그 부처의 깨달음,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지혜에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에요.
방(方)자는 거기서 말을 했지만 바른 수단입니다, 바른 수단.
‘바를 방(方)자’입니다.
우리가 품행이 방정하다 그러죠. 아주 각이 딱 진 것을 방(方)이라 그래요. 그건 바르다는
뜻입니다. 아주 모가 착 날 정도로 바르다.
바른 시작의 방편입니다.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오려면 우선 들어올 문이 두 개가 있어요. 그것은 어느 문을 들어오든
지 이 방(房)을 들어오는 하나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문(門)은 방(房)은 아니에요.
꼭 생각해야할 것이 문(門)은 방(房)은 아닙니다. 문을 통해서 방에 들어오는 거예요. 현
관도 아직은 방(房)이 아닙니다. 현관을 통해서 방에 들어와야 그것이 목표에 도달한 거
죠. 그러니까 여러 가지 불교적인 방편을 우리가 행하고 있는데 그런 방편은 결국은 우리
가슴속에 있는 부처님의 지혜를 내 것으로 이끌어 내는 그런 하나의 수단이다.
그 수단에서 참선도 있겠고, 기도도 있겠고, 방생도 있겠고, 심지어 초파일에 등을 하나
켜는 것도 있겠고 여러 가지 불교적인 방법이 많습니다. 우리 신앙심을 표현하는 여러 가
지 방법이 많은데 그 모든 것들은 부처님이라는 큰 방에 들어가기 위한 ‘문’(門)에 불과
한 거예요. 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래서 흔한 말로 팔만 사천 방편이라 그러거든요. 팔만 사천 경지에 팔만 사천 방편문(八
萬四千方便門)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방편이란 말은 ‘문(門)’자가 붙어있으면 아주 이해
하기 쉽습니다.
왜 ‘문’(門)자를 썼느냐?
하나의 과정이고 또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방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부처님이 도달하신 그 자리, 그것은 또
다름 아닌 우리들 가슴 속에 있는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마음의 궁극적인 자리다, 이
렇게 알면 됩니다.
등을 하나 밝히는 것도 부처님 앞에 절을 한번 하는 것도, 불사에 동참하는 것도 전부 그
것은 어디에 가서 귀착 되는고 하면 우리들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
지, 거기에 이르고자 하는 것.
그것이 결국은 최종 목표라구요.
좋든 싫든 우리는 불교에 입문해서 이 방편문, 저 방편문 자기 취향대로 기도를 하든, 참
선을 하든, 방생을 하든, 불을 켜든, 아니면 불교적 봉사활동을 하든 무얼 하든 간에 결국
은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방속에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들어가는 문이 꼭 옳은 것은 아니에요.
이 방만 하더라도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야 옳다.’‘왼 쪽 문으로 들어가야 옳다.’그
건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방에만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불교는 그래서 방편문이 많습니다. 별의 별 방편문이 많아요.
여기서 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주욱 한번 살펴보면 그런 성문이나 연각이 보살행
을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참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다. 그러니까 방생을 하든, 등을 하나 밝히든, 가서 불공을 한번 하든, 제사를 지내든 그
건 전부 참된 부처님의 제자가 이미 된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결코 그 사람들을 타인 취급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무당들도 부처님 모셔놓고 부처님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것만 해도 부처님은 타인이라고 생각을 안 해요. 이미 그런 방편을 통해서 부처님의 깨
달음의 방이라고 하는 것에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과정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
습니다.
성문도 연각도 진정한 불지견(佛智見), 이게 부처님의 지혜요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고
끝내는 이 불교인의 가슴속에 있는 그런 궁극의 자리다. 불지견을 얻도록 위해 그래서 말
씀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로
사리불(舍利弗)이여!
여래는 오직 일불승(一佛乘)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일불승이란
말이 바로 우리들 가슴속에 있는 부처자리, 깨달으신 경지입니다.
실은 법에 이승(二乘)이라든지 삼승(三乘)은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이승은 무엇이냐 하면 성문(聲聞), 연각(緣覺).
삼승하면 보살승(菩薩乘)까지 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문은 지금 우리들이 성문(聲聞)
에 해당돼요. 왜 그런가 하면 성문은 학습하는 그런 제자들이라고 그래요. 학습중심으로
학습주의적인 그런 수행이에요. 이것은.
그럼 연각은 뭐냐? 어떤 인연의 도리를 깨닫는다, 그것은 내가 누누이 말씀드리자면 체험
주의다, 경험주의다, 경험주의의 어떤 수행이에요. 체험주의의 수행이다. 이건 또 부처님
이 차원이 좀 낫다고 그러는 거예요. 학습주의는 자꾸 책을 펴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
해서 이렇게 하고 그러니까 실컷 여기서 부처님 공부하고 집에 가서 집의 거사님들하고
이야기해 보면 소견이 거사님들이 훨씬 낫거든요.
내가 늘 그런 말 하는 이유가 그 사람들은 체험주의야. 경험주의라구요. 아주 정말 복잡하
고, 어려운 그런 어떤 생활전선에서 이리 부닥치고 저리 부닥치고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고 이런 과정에서 뭔가 인생의 진실을 조
금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상당히 소견이 넓어요. 깨달음이 많다구요.
그 사람들은 체험주의야. 체험주의 수행자. 나는 늘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연각이고 보살님들은 책 들고 - 물론 보살님들도 경험을 많이 하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절에 다니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이건 학습주의 수행이다.- 학
습 중심의 수행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리고 성문(聲聞), 소리 성(聲) 자, 들을 문(聞)
자.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듣고 뭔가 깨달아 가는 것.
그럼 보살은 뭐냐? 보살은 행동주의 수행자예요. 행동주의.
자기가 학습도 하겠죠, 체험도 하겠죠. 그러면서 한편 직접적인 실천을 중심으로 해요. 실
천주의 수행자예요. 또는 행동주의 수행자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
살행을 한다 그러잖습니까?
보살행을 하는 것을 아주 우리가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죠. 벌써 그 사람들
은 몸으로, 몸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또 몸으로 실천하면서, 경험하면서, 또 학습도 하
면서 대개 우리나라 불자들은 그렇습니다. 그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무엇이든
지 다 좋습니다. 여기 이야기를 보면.
그래서 결국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지위에 들어가는 것.
자꾸 부처님의 깨달음이라고 하면 자꾸 멀리 생각하고, 부처님의 것이다, 남의 것이다 라
고 하니까 자꾸 내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궁극의 자리, 우리가 이르러 갈 수 있는, 내 저
깊은 가슴속에 있는 그 자리에 가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로 그 자리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건 우리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삼승이란 것은 없습니다. 오직 일승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 일승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의
자리, 불승(佛乘), 일불승(一佛乘), - 부처 불(佛)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저런 과정은 있지마는 결국 깊이 들어가면 바로 우리 마음과 만나게
되고 그 마음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자리인 ‘ 깨달음의 자리’가 ‘부처의 자리’다, 그
것이 일승이다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일승 밖에 없다. 요 이야기가 경전에 자주 나옵니다.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개괄적으로
미리 이렇게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일승이라는 것은 결국 모두가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다, 그게 중요한 거죠.
‘부처님이 된다.’그 의미죠. ‘성불 하십시오.’또 ‘부처님 되십시오.’라고 하는 말의
뜻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상관없어요. 그 방편문을 통해서 부처님
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도 배제하거나 틀렸다 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방생한다, 누구라도 방생한다, 가다가 죽어도 좋다 이거야. 해라 이거야. 그게 네 취미가
있고, 네 불교에 맞으면 해라 이거예요. 부처님 앞에 계속 절하는 것, 그것이 근기에 맞으
면 해라 이거예요. 사경하는 것, 그게 근기에 맞으면 해라 이거예요. 다 옳은 것이다.
어느 문을 통해서라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결국은 어디에 가서 닿는가?
방 안에 가서 닿게 되어있어. 방에 닿게 되어 있는 거라구요.
그러나 문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죠.
정문이 있을 수 있겠고, 옆문도 있을 수 있겠고, 들창문도 있을 수 있겠고, 겨우 도둑만
빠져 나갈 수 있는 그런 들창문도, - 아 그 문으로도 들어가면 들어가져요. - 고생스럽긴
하지만 들어가면 들어가져. 요 말을 잘 새겨들어야 돼. 고생스럽긴 하지만 들어가면 들어
가져. (일동웃음)
그러니 문을 잘 선택할 필요도 있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나 ‘어떤 문으로든지 애써서, 노력만 열심히 하면 들어갈 수는 있다.’ 란 것입니다.
뒷문, 예를 들어서 못을 쳐 놓은 문도 못을 빼고라도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으니까. 참 불
교는 그런 점이 좋아요. 그래서 뭐 하나도 배제하거나 물리치거나, 우리 식구 아니다, 라
고 하거나 그래서 이런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는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이 불사를 하는 문중에는 한 가지도 버리지 않는다 이거예요. 한 가지도 버리지 않고 다
에워싸고 그게 부처님의 자비고, 또 근기에 따라서, 자기의 취미에 따라서 어떤 문도 그
방안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요, 또.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밑에 또 보면,
성문에 의한 깨달음도, 연각에 의한 깨달음도, 보살에 의한 깨달음도 모두 부처가 되기 위
한 깨달음이기에 그 근본은 모두 같은 것이다.
방생을 하든지, 등을 달든지, 가서 절을 하든지, 사경을 하든지 절에 물 한 모금 떠먹으러
가든지, 경치가 좋아서 가든지, 전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것은 전부 결국은 우리 한 마
음 깨닫는 어떤 방편문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그 부처님의 넓은 가슴, 지혜가, 자비가 어떤 경전보다도 돋보인다
이렇게 보는 거죠. 어떤 사람은 성문의 깨달음을 얻고, 어떤 사람은 연각의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 그것은 어느 쪽이라도 부처님의 지혜에 들어가는 문인 것이다, 그렇게 했잖습니
까?
그 문에 들어서는 사람은 보살행이라는 행(行)을 통해서 비로소 부처님의 지혜라는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이나 현관이 부처님 계시는 ‘부처님의 집안’이 아니란 것은 아닙니다.
모두 ‘부처님의 집안’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중요한 말이 있어요.
문 근처에 있어서나, 문 근처에 있으면 어떻게 돼요?
비가 내리면 비바람을 맞을 것이며, 눈이 오면 추위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방으
로 들어가야 합니다. 궁극에 가서 방에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문고리를 잡고 문 앞에서 방으로 못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쪽 문으로도 서쪽 문으로도 현관문으로도 전부 모든 사람들을 다
방으로 모시게 하기 위한 것이 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일불승만 있을 뿐, 이승이나 삼승의
구별은 없습니다. 있다고 하는 것은 방편입니다.
진정한 목적은 하나다 그런 말이죠. 진정한 목적은 하나예요. 이게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그리고 대개 우리는 문고리에 가 있고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어요. 내~ 문 앞에 서성대고
있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그냥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야 되는데 문 앞에 있으면 문 안에
들어 가려고 온 것 아닙니까?
내~ 문 앞에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방편, 그 일만 좋아서 하는 거예
요. 예를 들어서‘나는 절에 가서 공부하고 참선하고 기도하는 것은 싫다. 방생할 때에만
들어가라.’
이 사람은 평생 문고리만 잡고 서성대는 사람이여.
그 방생하는 일만 재미있는 거야. 그 외에는 생각도 없으면 그러면 안되죠.
그것을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문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디예요? 바로 방이지.
그건 괜찮다구요, 방생도 좋고 다 좋은데 거기서 한 걸음만 더 하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
의 방안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방편품이라고 하는 게 그런 의미죠. 그래서 여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방편이 다행히 있어가지고 그 방편을 통해
서 모두가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이야기까지 있는고 하니 어린 아이가
물가에 와서 장난으로 모래를 물로 이렇게 이겨서 ‘이것이 불상이다.’하고 이렇게 모셔
놓고 그 옆에다 돌이나 이런 사금파리나 이런 것들을 갖다놓고 ‘이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다.’ 하고 어른들이 불공에 올리는 흉내만 내어도 그것만으로도 부처님이 되는 좋
은 방법이다 이랬어요. 그 흉내 내면 부처되지 않고는 못 배긴다, 부처되게 되어 있다.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
다 이미 불도는 보증 받아놓았다.
불도는 예약 다 받아 놓았다, 끝났다 이거예요, 그걸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뭐 불상을 하나 세웠든지, 탑을 하나 세웠든지, 절에 와서 절을 하
든지, 절하기 싫으면 - 법화경에도 나옵니다마는 - 불상 앞에 와서 손을 한번 번쩍 들어도
좋다. 고개 숙이기 싫으니까 손 한번 번쩍 들어서 아이들 부처님께 장난하듯이 손 한번 번
쩍 드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부처님이 되는 것은 예약이 끝났다 이거예요.
개이성불도(皆已成佛道)라,
다 이미 불도를 이뤄놓았으니 마찬가지다.
사실 그래요, 또. 그 내용을 알고 보면.
그 하나의 방편문을 통해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부처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부처의 지
혜라고 하는 그 방에 이르게 되어있어요.
무엇이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이 좋다는 게 우리들이 하고 있는 하찮은 신행, 뭐 장난 삼아 하는 그런 신
행이라 하더라도, 손 한번 번쩍 들고, 아이들이 모래 이겨 놓은 불탑에 절을 하는, 그런
정도의 간단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 다 부처님의 방안에 들어가는 그런 인연이다, 라고
하는 그런 묘행이.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런 모양들이 여러 가지 우리들이 하고 있는 그런 일들이 거기에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걸 법화경의 주된 뜻, 그것을 대지(大旨)다, 큰 뜻이다 라고 하는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그래요. 삼승(三乘)을 모아서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법화경의 제일 큰 뜻이에요.
‘회삼귀일(會三歸一)’
모을 회(會)자, 석 삼(三)자, 돌아갈 귀(歸)자, 한 일(一)자.
삼승을 모아서, 삼승(三乘)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이죠. 그러나 그 3이
라고 하는 숫자는 우리가 하고 있는 연등하는 것, 불사에 동참하는 것, 등 하나 다는 것,
방생 한번 가는 것, 무슨
남의 제사하는 방편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그 3이란 숫자 속에 전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런 모든 방편을 전부 모아가지고 어디로 돌아가느냐?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는 거예
요. 부처가 되는데로 돌아간다. 불성(佛性)을 깨닫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 들어가는 문(門)이 다를 뿐이니까, 다른 것 아닙니다. 별 것 아니에요.
뭘 하든지 간에 방에 들어가면 문의 방위가 다르고, 문 크기가 약간씩 다를 뿐이지.
우리 그전에 선방에서 보면 방은 하나죠. 큰 방에 약 오십 명씩 사는 큰 방은 하나씩인데
드나드는 문도 꼭 뒷문으로만 드나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 참 묘하데... 왜 앞문으로 다니
지 뒷문으로 다니냐고 해도 뒷문이 편하대. 뒷문으로 가려면 한 바퀴 돌아가 가야 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걸음도 더 걸어야 되고 그런데 꼭 뒷문으로 드나들어.
편하다는데 어떻게 해요. 상관없어요. 앞문으로 들어가도 큰방으로 들어가지고, 옆문으로
들어가도 큰방으로 들어가고.
불교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참 여러 가지, 내가 모르는 방편도 많을 거예요. 그러나 그
모든 방편문은 결국 우리 한 마음 깨닫는데, ‘그 깨달음이 곧 부처가 된다.’ 라고 하는
데 거기로 나아간다고 하는 사실 이것은 참으로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방편이라고 하는 말은 이제 전부 이해하셨죠?
글자 뜻은 바른 수단이다. 또 바른 방법이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문수
보살은 부처님께서 지금부터 자신이 깨달은 최고의 깨달음, 그것을 최후의 가르침으로써
이야기한다.
왜 그런고 하니, 왜 최후의 가르침이냐?
법화경 설하고 어떻게했죠? 저 앞에 보면 열반에 들었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열반에 들었
다. 그럼 법화경 설하면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사실은. 그러니까 최후로 말씀하심과 동시
에 또 당신의 최고의 깨달음, 당신의 숱한 그런 희생 ...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그대로 남김없이 이야기해 주겠다고 하는, 그것도 또 최후로 내가
이야기해 주겠다. 하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문수보살의 경험으로 보아서, 여기 까지 한 마디도 없었어요. 그러나 문수보살의 과거 경
험으로 보아서는 틀림없다. 그 최고의 깨달음의 내용이란 바로 묘법연화경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겠지요.
묘법연화경은 이 자체가 묘법연화경인데 계속 묘법연화경이란 말이 경 안에 나옵니다.
그러면 얼른 들으면 이것은 묘법연화경의 해설서고 진짜 묘법연화경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져요. 따로 있는 것처럼.
어쩌면 따로 있을지 몰라. 이것은 문자이고, 묘법연화경은 정말 진리의 말씀이니까. 진리
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 그 자체겠죠. 진리 자체이고 이것은 어쩌면 진리를 해설하는 그
런 해설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묘법연화경이라는 것이 계속 묘법연화경, 묘법연화경이란 말이 안에서 나오고
있는가?
모두가 진리 아닌 게 없어요. 따지고 보면 또 모든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런
말이 도처에 있고 또 그 말 때문에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최후의 진리를 말할 것이다, 이렇게 해놓고는 여기 이렇게 보면
方便品 第二
迹門. 正宗分
一. 略開三顯一
1. 長行
⑴ 寄言歎二智
① 歎諸佛權實二智
1.歎二智
[1.歎實智 2.歎權智] 2.釋二智[1.釋實智 2.釋權智]3.結二智[1.結實智 2.結權智]
爾時世尊(이시세존)이 從三昧安詳而起(종삼매안상이기)하사 告舍利弗(고사리불)하사대 諸佛智慧(제불지혜)는 甚深無量(심심무량)이시고 其智慧門(기지혜문)은 難解難入(난해난입)이라 一切聲聞 支佛(일체성문벽지불)의 所不能知(소불능지)니라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佛曾親近百千萬億無數諸佛(불증친근백천만억무수제불)하사 盡行諸佛無量道法(진행제불무량도법)하야 勇猛精進(용맹정진)하야 名稱普聞(명칭보문)하며 成就甚深未曾有法(성취심심미증유법)하야 隨宜所說(수의소설)이 意趣難解(의취난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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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땀구멍 마다 문을 여시사 우주의 세포마다 대자유자재 그 하나를 위하여 일불승 문 밖의 그대들이 한 생각 돌이키길 간절히 기다리신 당신의 기꺼운 不動 ..... 법화경의 종지가 모셔진 방편품이 열렸습니다. 만인이 눈을 뜨는 일불승(一佛乘)의 아침을 소원하오며 ....._()()()_
안상이기(安詳而起) _()()()_
三乘을 모아서 一佛乘으로 돌아가는 것이 법화경의 제일 큰 뜻이다. '會三歸一' ... 明星華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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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연행 님.... 無影樹 님.... 진공 님.... 고귀하신 福行 구족하시고 서원(誓願)성취하소서 _()()()_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깊이 들어가면 바로 우리 마음과 만나게 되고 그 마음과 만나게 되는 바로 그 자리인 ‘ 깨달음의 자리’가 ‘부처의 자리’며 그 것이 一乘이다,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의 문에 들어서는 사람은 보살행이라는 行을 통해서 비로소 부처님의 지혜라는 방으로 들어 갈 수가 있다.... 明星華님! 수고하셨습니다..감사드립니다.._()()()_
오월의 단비가 내린 주말.....염화실 우리네 마음밭에도 매일 쑥쑥 갖은 생명들이 피어나는 듯 합니다. 보살님 감사드립니다._()()()_
여러 가지 불교적인 방편을 우리가 행하고 있는데 그런 방편은 결국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부처님의 지혜를 내 것으로 이끌어 내는 하나의 수단이다... 감사합니다, 명성화님.. 고맙습니다, 큰스님.. _()()()_
마니주 보살님 너무나 만남이 환희로웠습니다.... 음성도 은은하시고 사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일일이 귀하신 말씀을 내리시는 보살님들께 감사드립니다._()()()_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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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三歸一...고맙습니다._()()()_
명성화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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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數方便으로 令離諸着하노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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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_()_令離諸着............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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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會三歸一................
引導衆生(인도중생)하야 令離諸著(영리제착)하노니 ............
몸소 다녀가신 귀하신 분들께 합장합니다. 서원성취하시고 뜻하신 바 이루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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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