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국내 10대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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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원-전국 도의원 선거
제3대 대통령선거가 끝난지 약 석달 뒤인 1956년 8월 13일 전국 437개 선거구에서 제2대 서울시의원-전국 도의원선거를 실시했다. 선거결과 정당별 당선자수는 자유당이 의원총수 437명의 57%인 249명으로 과반수를 넘었으며 민주당은 98명, 무소속 83명, 기타 7명이었다. 시·읍·면장과 시·읍·면의회 의원선거는 도의원선거보다 5일 앞선 8월 8일 실시되어 자유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제2대 도의원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3선당선 여세를 악용한 자유당의 방종과 관권개입으로 부정불법이 전국적으로 판을 쳤다. 곳곳에서 관권의 협박 때문에 야당후보들의 사퇴가 잇따르자 야당 국회의원들이 이에 항의,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자유당은 무더기 대리투표, 표바꿔치기 등의 불법 행위를 곳곳에서 저질렀다. 전북 정읍군 서성면에서는 투표함의 봉인을 뜯어내고 자유당후보표를 무더기로 집어넣는 광경을 투표함 호송경찰관 박재표 순경이 목격하고 8월 27일 동아일보 본사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폭로했으며 민주당 김의택 국회의원도 전남 함평군 선거에서 경찰이 투표함을 개표장으로 호송하는 도중 무더기 표바꿔치기를 했다고 폭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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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국군의 날
1956년 9월 14일 국무회의에서 1950년 10월 1일 3사단 23연대 병사들이 강원 양양 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것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했다. 종전의 육군기념일은 10월 2일, 해군기념일은 10월 11일, 공군기념일은 10월 1일 등 3군이 기념일을 각기 달리했다. 이날 오전 10시 제1회 국군의 날을 맞이한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요인과 다우링 주한미국대사, 외국외교관등 내외귀빈다수가 참석한가운데 기념식이 거행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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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TV방송국(HLKZ) 개국
1956년 5월 12일 한국최초의 TV방송 HLKZ-TV가 개국했다. 호출부호는 HLKZ-TV이지만 미국 RCA사와 RCA한국 배급사가 합작으로 방송국을 설립했기 때문에 정식명칭은 KORCAD-TV이다.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선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였다. 방송 당시에는 출력이 겨우 0.1KW에 불과해 수신지역이 좁고 텔레비전 수상기값도 엄청나 전국을 통틀어 수상기 보급이 겨우 3백대에 불과했다. 첫 프로그램은 '만파정식지곡'과 '수제천'의 아악연주, 이어서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 현인 장세정 등 인기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무대를 2시간동안 내보냈다.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역 등에 설치된 40여대의 대형수상기를 통해 TV를 처음 접한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시험방송을 거친 후 6월 1일부터 격일로 밤8시부터 2시간씩 방송하다가 11월부터 금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2시간씩 방송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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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창당
제1공화국 민주당 창당에서 배척된 조봉암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이 1956년 11월 10일 서울시 공관에서 진보당 결당식을 가졌다. 이날 결당식에서는 책임있는 혁신정치, 수탈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정강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조봉암, 간사장에 윤길중 등 임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정강정책 중 특히 '평화통일론'과 그 구체적 방안으로서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은 북한이 주장하는 '중립국 감시위원단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과 같다는 혐의로 1958년 2월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그 후 조봉암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날조된 간첩혐의로 사형에 처해졌고 당은 해체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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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신호 화재로 65명 사망
1956년 1월 12일 새벽3시30분경 부산-여수간을 운항하는 정기여객선 태신호가 부산을 떠나 여수로 가다가 삼천포항에 잠시 기항하고 있던 중 3등 객실에서 불이나 객실 안에 있던 승객 65명이 사망했다. 출입계단이 하나밖에 없는 여객선의 3등 객실에서 불이 나자 선장이 불이 더 번지지 않도록 하기위해 출입구를 폐쇄하는 바람에 이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화재는 선박의 발전기가 고장나 전깃불이 꺼지자 여객선 사환이 캄캄한 3등 객실안에서 램프에 기름을 붓다가 선실 돗자리에 기름을 많이 흘려 놓았는데 옆에 있던 승객이 끄지 않은 성냥불을 이곳에 잘못 던져 발생했다. 당시의 인명경시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검찰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선장과 사환 등 3명을 구속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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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 급서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1956년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해공 신익희는 김구 등 임시정부세력의 '남북협상론'보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 불가피론'을 수용해 대한민국 건국에 일조한 정치인이다. 그러나 해공은 1948년의 5·10총선을 거부한 임시정부세력과 한독당 인사의 기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과 멀어졌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한강백사장 연설에는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신익희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해공의 유해가 경무대 근처 효자동 자택으로 운구되던 중 흥분한 시민들이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진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7백여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결과 이승만이 재집권했지만 해공의 추모표가 전국적으로 185만표(전체 투표자수900만명),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지지표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나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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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1956년 9월 28일 오후2시38분경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원 김상붕이 쏜 총탄에 맞아 왼손을 다쳤다. 경찰은 사건의 배후인물로 민주당 서울 성동지구당 간부 최훈을 체포했으나 그 이상의 배후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후 1957년 1월 1일 최훈의 부인이 前성동경찰서 사찰주임 이덕신을 배후인물로 지목하자 검찰은 이덕신도 구속했다. 최훈은 법정에서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로 생각한다"고 폭로했으나 김종원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국회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 등 경찰간부가 배후조종한 사실을 탐지해냈으나 이 또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년 뒤 4·19혁명이 성공하자 김종원은 법정에 불려나왔고 그는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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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육군특무대장 피살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돼 온 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부하에게 살해됐다. 김창룡은 1940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해 일본 관동군 헌병대 오장(하사급 분대장)에 오른 후 해방 2년 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공산당 타도'를 앞세워 여간첩 김수임 사건, 남로당간부 검거 등 굵직한 수사를 담당했으며, 6·25때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용공분자 색출'을 이유로 당시 5만명이던 군 병력 중 5천명을 잘라내는 순국작업에도 참여했다. 백범이 저격당한 1949년 6월 26일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했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안두희도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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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계밀수사건 적발
1956년 11월 11일 오전11시40분 홍콩발 노스웨스트 여객기가 서울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다. 승객 중 23세 된 페드로 케슬러라는 미국인 청년이 고급 손목시계 2,694개를 가방 속에 숨겨 들여오다 들켰는데 그 가방 속에는 후란시스코 대시스 장이라는 중국인이 서울 후암동에 거주하는 동생 마카리오 장에게 보내는 수상한 편지도 들어있었다. "황성수 국회부의장 앞으로 캐비넷 2개를 선편으로 보내니 부산에서 찾으라"는 편지내용이었다. 수사결과 놀랍게도 문제의 캐비넷은 이중벽으로 되어있었고 그 속에서는 고급 손목시계 2,480개가 들어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5·15 정·부통령선거 당시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후보의 선거사무장이었으며 당시 국회 외무분과위원장이던 박영출이 마카리오 장과 함께 홍콩에서 트렁크 8개를 가지고 여의도공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박영출은 자유중국 쌍십절(雙十節) 행사에 참석한 후 특별한 이유없이 홍콩으로 갔었고, 마카리오 장은 상습 밀수꾼으로 한때 외무부가 여권발급을 거부했으나 박영출의 압력으로 교부받은 사실도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자유당은 박영출을 제명했으며 황성수는 국회부의장직을 사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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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통령선거
이승만의 3차 집권을 겨냥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목표로 한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부통령에는 이기붕, 장면, 박기출, 이윤영, 백성욱, 이종태 등 8명이 출마했다. 선거 10일전에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의 득표수는 전체 유효표 720만표의 70%에 달하는 504만여표였고, 신익희 지지표를 일부 흡수한 조봉암도 선전해 유효표의 30%인 216만여표를 얻었다. 선거 전에 사망했음에도 유권자들이 신익희에게 던진 185만표는 무효처리됐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결과는 장면이 유효표의 46%인 401만여표를 얻은데 비해 이기붕은 44%인 380만표를 얻어 패배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급서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회는 놓쳤지만 자유당이 당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추구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당의 독주를 막아낼수 있게 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