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 지역으로부터 내륙 동남아시아로의 이주는 역사시대 이후로도 계속 진행되었다. 크메르 족은 말레이 족(Malays)의 흥기에 이어진 이동의 역사 초창기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왔다.(인용 각주 필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이 적어도 3천년 전에 이주해왔을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현재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c) 지역의 많은 영역에 거주하는 태국민족보다 훨씬 앞선 이동시기이다. 크메르 족이 이주해온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학자들은 중국어에서 발견되는 "오스트로-아시아" 계통 어휘들을 근거로 북쪽에서부터 "중국-티벳어족"(Sino-Tibetans)의 침입이 있어 "몬크메르어군"이 밀려내려 왔거나, 아니면 이들의 이주경로가 주요한 강들을 따라 이루어진 점을 근거로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온 것으로 보고 있다. 크메르 족은 보다 서쪽에 거주하는 몬족(Mon)과 친연관계가 있는 민족이다.
"동남아시아"라는 역내 구조가 성립한 이후, 크메르 민족의 역사는 캄보디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쀼족(Pyu)이나 몬족(Mon)과 같이 역사가 오래된 초기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크메르 민족 역시 인도의 상인이나 학자들의 왕래를 통해 인도로부터 종교, 과학, 관습 및 어휘들을 차용하거나 영향을 받았다. 또한 크메르 민족은 "신왕"(神王, Sivite Deva Raja [God-King])이란 개념을 성립시켰고, "성산"(聖山)을 상징화한 거대한 사원들을 건립하기도 했다. 비록 이 캄보디아 왕국이 패배하여 쇄약해지면서 결국 멸망하긴 했지만, 사원들을 건설한 이들의 열정은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유적들과 기념물을 남겨놓았다.
미술품과 자연을 결합한 전시공간으로 유명한 독일 "Museumsinsel Hombroich"에 소장된 크메르 공예품.
(사진: michael hoefner, 2005-2-26)
자야와르만 2세(Jayavarman II : 802–830 재위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의 국력을 부흥시켜 "앙코르 제국"(=크메르 제국)을 세운 뒤, 3곳의 수도를 건설했다. 그가 세운 수도들은 인드라뿌라(Indrapura),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 그리고 마헨드라빠르와따(Mahendraparvata)로, 이곳의 유적들은 그의 시대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수랴와르만 1세(Suryavarman I : 1002–1050 재위 [수리야바르만 1세])는 국력을 동쪽으로 확대했으며, 서쪽에 있던 몽족의 드와라와띠(Dvaravati, 드바라와티) 왕조도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치세에 말레이반도의 북쪽 절반은 물론, 오늘날의 태국과 라오스의 많은 영역 역시 지배권 하에 두었다. 앙코르와트(Angkor Wat)가 건립된 바로 이 시기가 크메르 문명의 절정기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의 크메르 왕조는 위대한 제국이었다. "앙코르"에 있는 거대한 사원들에는 여러 종류의 악기들을 비롯해 다양한 문화적 측면들을 보여주는 부조들이 장식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크메르 민족의 문화를 보여주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
수랴와르만 2세(Suryavarman II : 1113 – 1150 재위 [수리야바르만 2세])가 사망한 후,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 1181 – 1218 재위 [자야바르만 7세])가 등극할 때까지 캄보디아는 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를 정리한 자야와르만 7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대승불교도였던 그의 영향으로 캄보디아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 시대에도 전대의 "신왕" 개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전의 "시와 왕"(Shiva Raja)이나 "위쉬누 왕"(Vishnu Raja)과 같은 힌두교적 개념이 아니라,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n)이라는 불교적 정치이념에 기반한 것이었다.
태국의 수코타이(Sukhothai: 1238년) 왕조 및 아유타야(Ayuthaya: 1350년) 왕조가 흥기하면서 캄보디아는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고, 1431년 마침내 앙코르가 파괴된다. 당시 시암(태국)은 약 9만명의 크메르인들을 볼모로 잡아갔는데, 그 중에는 무용수와 악사들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1432년 이후 캄보디아인들은 보물과 서적, 그리고 문화를 보존하고 양성할 인적 자원을 수탈당함으로써 더욱 가파른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1434년 뽄히어 얏(Ponhea Yat) 국왕이 프놈펜을 수도로 삼으면서 앙코르는 정글 속에 버려지게 된다.
시암과 베트남의 연속적인 침략을 당하던 캄보디아는 1863년에 프랑스의 보호를 요청하고, 1864년에는 "프랑스보호령"(French protectorate)이 되었다. 1887년에 캄보디아는 베트남, 라오스와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Indochinese Union)에 편입된다. 프랑스는 거의 한 세기에 걸쳐 캄보디아를 경제적으로 착취했으며, 정치경제적 권력을 통제하고 사회적 삶을 지배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캄보디아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1949년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독립을 선포하고(하지만 완전한 독립은 1953년에 이루어짐), 론 놀(Lon Nol) 장군이 무혈 쿱테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1970년 3월 18일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1975년 4월 17일, "폴 포트"란 이름으로 유명한 살롯 사(Saloth Sar)의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시키고 정권을 차지했다. 이 학살정권은 사람과 문화를 비롯해 도덕성, 교육, 물리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사실 상 캄보디아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1978년 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1979년 1월 초에 크메르 루즈 정권을 붕괴시켰다. 베트남의 위성정권이었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은 그 후 10년 이상을 외부의 도움을 별로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재건의 길에 나서야했다. 1991년 10월 23일 마침내 UN이 주도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내전을 종식하고,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의 관리 하에 1993년 5월 총선거가 실시되어 현재와 같은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노로돔 시하누크 공을 다시금 국왕에 추대했다. 하지만 크메르 루즈는 이 선거를 보이콧하고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반군활동을 지속했으나, 1990년대 말에 사면 등의 조건으로 대부분 항복했고 잔류인원도 소탕되었다.
크메르족의 지리적 분포
세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크메르 족은 캄보디아에 거주한다. 캄보디아 인구의 약 90%가 크메르족이다. 또한 태국과 베트남에 살고 있는 크메르 족의 인구수도 상당하다. 태국의 경우엔 수린(Surin), 부리람(Buriram), 시사껫(Srisaket, 시사켓) 도를 중심으로 10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고, 베트남의 경우엔 정부 발표로는 11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소위 "크메르 끄롬"(Khmer Krom)으로 불리는 베트남 남부 거주 크메르족은 베트남 정부의 동화정책에 반대하여 해외파들을 중심으로 "크메르 끄롬 연방"(Khmer Krom Federation)이란 망명정부를 수립했는데, 여기서 주장하는 크메르 끄롬의 인구는 7백만명이다. 한편 오랜 내전으로 인해 수만 명의 크메르인들이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지에도 살고 있다.
크메르족의 문화
크메르 족의 문화는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분파들 사이에 일정 정도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민족의 언어인 크메르어의 경우, 지역적 방언(사투리)이 존재하지만 상호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는 아니다. 프놈펜 방언이 표준어로 되어 있는데, 도시라는 지역적 특성과 함께 최근의 프랑스어 및 베트남어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용인구수 면에서는 밧덤벙(바탐방) 지역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여타 방언들로는 태국의 크메르인들이 사용하며 캄보디아인들이 "수린 크메르어"(Khmer Surin)라 부르는 "북부 크메르어"(Northern Khmer), 그리고 캄보디아에 인접한 베트남의 메콩 삼각주에 거주하는 크메르 끄롬 인들이 사용하는 "끄롬 크메르어"(Khmer Krom)가 주요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한편 "서부 크메르어" 혹은 "카르다몸 크메르어"(Cardamom Khmer)로 불리는 방언의 경우, 캄보디아에서 태국에 걸쳐 이어진 끄러완 산맥(=카르다몸 산맥) 지역에 거주하는 크메르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인데, 아직 많이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편이다. 이 카르다몸 크메르어는 현대의 여타 크메르어 방언들에서는 사라져버린 성조변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 시장의 노점에서 일하는 크메르족 여인 확대사진보기
현대의 크메르 족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느냐 여부에 따라 강력한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하곤 한다. 이들의 종교는 상좌부 불교(Theravada Buddhism)에 기반을 두고, 토착적인 조상신 숭배 및 애니미즘(정령신앙)과 샤머니즘(무속신앙)이 결합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다수 크메르인들은 시골에서 거주하며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데, 마을은 주로 절(Wat, 와트 [왓])을 중심으로 성립해있고, 연중 다양한 불교적 명절들을 쇠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병이 들면, 크메르인들은 종종 "끄루 크마에"(kru khmae)로 불리는 무속인에게 가곤 하는데, 사람들은 이 무속인이 병을 일으킨 여러 영혼들("네약 따"[neak ta])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굿을 통해 화난 영혼을 달래어 병의 치료를 시도하곤 한다. 이러한 "끄루 크마에"들은 약초에 관한 지식도 습득하고 있으며, 다양한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마술적 힘을 가진다는 문신을 새길 재료들도 준비해둔다. 그들은 이러한 방편들이 특별한 용기를 갖게 만들어주며, 잡귀들과 액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또한 크메르인들은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아 점성술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 큰 일을 앞두고는 "하오 라"(hao-ra) 혹은 "끄루 띠어이"(kru tieay)라 불리는 점술인에게 상담을 받는 경우가 많다. 가령 결혼을 앞두고 궁합을 본다든지, 새로운 사업이나 여행을 시작할 때, 혹은 결혼식 날짜 등을 잡는다든지, 새 건물을 지을 때 택지 등을 의뢰한다.
크메르인들은 연중 많은 축제 및 명절을 쇠는데 대부분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자연을 기리는 것으로, 이 중 일부는 국경일로 정해져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명절은 캄보디아 설날인 "쪼울 츠남"(Chol Chnam [쫄츠남]과 추석이라고 할 수 있는 "프쭘 번"(Pchum Ben: 조상의 날)이다. 크메르 불교력은 12달로 되어 있는데, 전통적으로 "카에 짜잇"(khae chaet) 달 첫날이 신년으로, 이는 양력으로 4월의 초생달이 드는 날이 된다. 그러나 현대의 쪼울 츠남은 4월 13일로 정해져 있다. 이 설날은 3일간으로 첫날은 구년의 끝을 의미하고, 둘째날은 새로운 해의 신령님(tevida)을 환영하며, 마지막 날은 부모님이나 "생불"(生佛)인 "쁘레아 로"(preah ros)를 섬기는 날이다.
크메르인들의 문화는 태국과 라오스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크메르어의 여러 외래어들이 태국어나 라오어(라오스어)에도 나타나며, 특히 태국 문자의 경우 크메르 문자를 개량한 것이다. 크메르 문자도 원래는 남인도의 빨라와(Pallava) 문자의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다. 크메르 건축과 국왕의 상징물들, 그리고 관습들을 통해 태국과 라오스에도 인도의 영향이 전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