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3월 30일 삼 랑시 의원이 이끌던 "크메르 민족당"(KNP)의 집회장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최소 16명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했다. 이 사건에는 훈 센 총리의 경호부대 소속원들의 관련 정황들이 포착됨으로써, 캄보디아 최근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폭력 사건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현재 캄보디아 역사에 이어 정치와 권력관계를 살펴보고 있는 중인 "크메르의 세계"는, 이 사건이 의외로 많은 부문에 걸쳐 캄보디아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우선 국제적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가장 최근 보도문부터 번역하여 차근차근 정리해나가기로 한다. |
(출전)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 게시 보도문 (번역) 크메르의 세계
(http://www.hrw.org/en/news/2008/03/29/cambodia-infamous-grenade-attack-still-unpunished)
FBI는 훈 센이 교사한 명백한 범죄에 대해 수사를 재개하라
FBI Should Revive Probe of Alleged Perpetrators Promoted by Hun Sen
(뉴욕, 2008-3-30) 미국연방수사대(FBI)는 11년 전 프놈펜에서 벌어진 끔찍한 수류탄 투척범죄에 대해, 이미 오랜 기간 진행해왔던 수사를 재개해야만 한다고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오늘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최소 16명 이상이 사망하고 150명 이상이 부상했다. FBI는 당시 이 사건의 수사에 착수해 상당한 성과를 올렸으나, 현재는 사실 상 중단된 상태다.
(좌측사진) 1997년 3월 30일, 수류탄 투척사건이 일어난 직후 망연자실해 앉아 있는 부상자와 사상자들.
1997년 3월 30일, 캄보디아의 야당 "크메르 민족당"(Khmer Nation Party: KNP: 현 삼랑시당의 전신) 지지자 200여명이 전 재정경제부 장관 삼 랑시(Sam Rainsy) 씨의 주도 하에 국회 건너편에 있는 공원으로 몰려들던 중이었다. 이들은 사법부의 부패와 그 독립성 부족을 알리기 위한 집회를 열려던 참이었다.
이 때 군중 속으로 수류탄 4발이 매우 계획적으로 투척됐고, 시위자 및 구경꾼들이 사망했다. 이들 가운데는 어린이도 있었고, 사지가 절단된 노점상들도 있었다. 이 수류탄 공격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뉴스의 머릿기사를 장식했고, 세계인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1997년 6월 29일자 <원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한 극비문서를 보면, FBI가 이 폭발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길 주저하는 것 같다. 이 사건을 다루는 4건의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2명의 캄보디아 총리 중 한 사람인 훈 센의 개인적 경호부대와 관련해 방해공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보고서는 2달 동안 진행된 FBI의 조사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FBI는 미국 시민이 테러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조사해야만 한다는 연방 법률에 의거해 조사에 착수했었다. FBI 당국자는 말하기를, 조사가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현지 상황이 [관련자들이] 너무 겁을 먹어 조사가 진전되기 어렵다는 파견 요원들의 불평을 전해주었다." |
(우측사진) 수류탄 투척 직후의 삼 랑시 의원 모습.
"휴먼라이츠워치" 아시아 책임자 브래드 아담스(Brad Adams)는, "케네스 쿠인(Kenneth Quinn) 주캄 미국대사가 FBI 요원들에게 갑작스런 철수를 명령하기 전까지, FBI는 사건의 해결에 상당히 근접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FBI는 훈 센 총리가 이 공격을 명령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었지만, 의회조사단과의 완전한 공조 혹은 최초 조사결과에 짜맞추기 위해, 그러한 결론을 폐기한 것 같다. 하지만 FBI는 미국-캄보디아 사이의 외교관계를 의식하지 말고, 자신들이 최초에 시도했던 일을 끝마쳐야만 할 것"이라 덧붙였다.
FBI는 이 폭발사건에서 미국인 론 아브니(Ron Abney)가 중상을 입자 조사에 착수했는데,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테러행위"로 간주했다. 당시 아브니는 둔부에 박힌 파편 제거를 위해 싱가포르로 이송됐다.
한편 훈 센 총리는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는 커녕, 도리어 이 시위를 조직한 사람들을 구속하고, 경찰로 하여금 그들이 해외로 도피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사건 당일, 훈 센 총리의 개인적 경호부대인 70 여단(Brigade-70: B-70)이 시위진압에 최초로 배치되었다. 이들이 폭동진압용 장비로 완전무장한 모습을 포착한 사진들은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평소 야당의 시위에 나타나 군중들이 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던 경찰(국립 경찰)은 이 날은 현장에 별로 보이질 않았다. 경찰관들은 공원에서 떨어져서 머물 것을 지시받고, 모퉁이마다 무리를 지어 서 있곤 했다. 또한 "크메르 민족당"(KNP) 역시 내무부와 프놈펜 광역자치시로부터 집회 허가를 받아냈는데, 이 부분도 수류탄 공격이 조직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짙게 만들어준다.
(사진) 삼 랑시 의원(우)과 당시 부상당한 캄보디아 자유노조(FTUWKC) 위원장 찌어 위찌어(Chea Vichea: 좌) 씨.
현장을 목격했던 수많은 증인들은 수류탄을 투척한 범인이 훈 센 총리 경호부대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고 전했다. 당시 이 부대는 공원 서쪽 끝에 일렬횡대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지역은 여당인 "캄보디아 인민당"(CPP) 소속의 여러 지도급 인사들이 거주하는 "상시 경비 주택촌"(guarded residential compound)이 위치해 있는 지역이다. 목격자들은 UN과 FBI 조사관들에게 증언하기를, 범인이 그 주택촌 안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경호부대의 저지선이 일부 열려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범인을 잡기 위해 쫒아갔던 군중들을 경비부대가 총부리를 겨누며 저지했고, 물러나지 않을 경우 발포한다는 위협까지 받았다고 한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이 뻔뻔한 만행은 최근의 캄보디아 역사에서 발생한 어느 단일 사건보다도 더 철저한 양심의 무감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브래드 아담스는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아마도 야당 지지자들에게 정의의 날이 오기 전에 살해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측사진: 크메르의 세계 추가) 현재 훈 센 총리 경호부대 사령관(=경호실장)이자 군총사령부 부사령관을 겸직 중인 힝 분 히엉 중장. (사진: 글로발 위트니스)
훈 센 총리 경호부대의 부사령관이자, 동시에 1997년 3월 30일 수류탄 투척 사건 당일 투입된 경호부대의 작전 책임자인 힝 분 히엉(Hing Bun Heang)은, 1997년 6월 영자 신문 <프놈펜포스트>(The Phnom Penh Post)와 인터뷰하는 가운데, 만일 훈 센 총리의 경호부대가 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하는 언론인이 있다면 죽여버릴 것이라 협박했다. 힝 분 히엉은 이미 훈 센 내각의 사무부총장(deputy director)으로 승진해 있었는데, 2006년 9월에는 "캄보디아 고승회의"(Cambodia’s Senior Monk Assembly: 종회)의 선임자문위원(supreme consultant) 및 뗍 웡(Tep Vong, 텝봉) 대종사(Supreme Patriach: 大宗師)와 보우 끄리(Bour Kry) 대종사의 개인 보좌역으로 위촉되기까지 했다.
경호부대인 70 여단(B-70)은 캄보디아에서 폭력과 부패, 그리고 사실상의 훈 센 총리 개인의 군대라는 상황을 즐기기까지 하는 무양심성 면에서 현재도 악명을 떨치고 있다. 국제 NGO 단체인 "글로발 위트니스"(Global Witness)의 2007년 발표 보고서에 따르면, "캄보디아 군총사령부 산하 70여단이 불법 벌목과 상품 밀수를 통해, 해마다 벌어들이는 돈이 미화 200만~25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은 총리 경호부대 사령관인 힝 분 히엉 중장에게 들어간다"고 한다.
1997년 3월 30일의 수류탄 투척사건으로 사망한 희생자의 가족 한 사람이, 프놈펜에서 거행된 4주기 추모제에서 분향을 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 2001년) |
2006년에 발생한 한 사건에서는, 프놈펜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70여단 소속 부대원 2명이, 자신들에게 얼음을 너무 늦게 갖다 줬다는 이유로 "맥주 프로모션 걸"의 발치에 총기를 발사했다. 이들은 즉시 "왕립 헌병"(군사경찰)에 체포됐지만, 그들의 지휘관이 이들을 사면하고 방면했다. 사령부 관계자는 70여단에서 피해자에게 500달러를 보상금으로 지급할 것이라 발표했지만, 더 이상의 범죄수사나 기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브래드 아담스(휴먼라이츠워치)는 "1997년 수류탄 투척사건에 연류된 경호부대 선임지휘관이자, 언론인들을 살해한다고 협박한 힝 분 히엉을 조사하기는 커녕, 도리어 훈 센 총리는 그를 승진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훈 센 총리가 보기엔 그러한 자질의 인물이 분명 국가적 차원의 불교조직 안에서 최고위직을 맡을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라 꼬집는다.
(좌측사진: 크메르의 세계 추가) 혹 룬디 전 경찰청장이 한국인들이 희생됐던 껌뽀웃의 PMT 여객기 추락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프놈펜으로 귀환하고 있다. 2008-6-26. 훈 센 총리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그는 2008년 11월 헬기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사진출처] 크메르어 언론 Ka-set.
"휴먼라이츠워치"는 1997년의 수류탄 투척사건에 캄보디아 군부가 연루되어 있다는 중요하고도 신뢰할만한 주장들을 제기하면서, 1997년의 공격에 대한 조사가 완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캄보디아 군대의 훈련과 원조 제공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것에 우려를 표시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전현직 70여단 부대원 및 인권범죄 전력이 있는 여타 특수부대에 대해, 미국이 훈련과 지원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브래드 아담스는 "1997년 3월 30일의 훈 센 총리 경호부대 배치 및 그 행동들에 대한 어떠한 신뢰할만한 설명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아마도 이들의 행동이 캄보다 정부의 최고위층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FBI는 그 부분을 빠뜨렸다. 미국이 수류탄 투척사건을 조사하기보다는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것은, 이 끔직한 사건의 휘생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희망을 상실케 함으로써, 캄보디아 정부와 사실 상 공모하는 셈"이라고 말을 맺었다.
[당시 사건현장 화보집] 출처 - 삼랑시 총재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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