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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충공(文忠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yugy1000&logNo=60130148270
가평 상면 태봉리에 있는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의 묘소다. 부친은 현령을 지낸 이계, 조부는 이순장, 증조부는 이혼이며 이정구는 문강공 저헌 이석형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현감 김표의 딸이며 부인은 안동권씨로 예조판서를 지낸 충숙공 권극지의 딸이다. 아들과 손자가 그와 함께 3代 대제학 가문을 만든 문정공 백주 이명한과 문숙공 청호 이일상이며 딸은 풍산홍씨로 대사헌을 지낸 문경공 홍이상의 아들인 공조참판 추만 홍영의 부인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부장인 이무를 시조로 하는 연안이씨 가문은 조선에 와서 최고 명문 가문 중 하나로 완전히 자리 잡는다. 이정구의 고조부 저헌 이석형은 연안이씨의 중흥을 이끈 인물로 신숙주, 성상문, 최항, 박팽년, 유성원, 정창손, 이극감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학자들과 함께 치른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할 만큼 시와 문장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관료와 목민관으로서도 두루 이름을 남기고 크게 세상에 맞서며 모나지 않게 살았는데 월사 이정구 역시 고조부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된다. 사림을 박해했던 을묘사화와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조부와 부친은 한훤당 김굉필 등의 사림과 가까운 관계로 늘 선비들의 편에 섰었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기울기도 했을 법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선비의 가풍이 연안이씨를 명문으로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연안이씨의 인구가 14만명 정도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월사 이정구와 후손들은 대대로 학자의 풍모를 지니면서 동시에 관료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정구의 직계 후손으로 아들 대제학 이명한, 형조참판 이소한, 손자 대제학 이일상, 그리고 영의정 이천보, 대제학 이정보, 좌의정 이존수, 좌의정 이성원, 영의정 이시수, 대제학 이만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유림에서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시호(諡號)인 文()公의 시호를 받은 이만해도 18명이고 문과에 급제한 이만해도 72명이나 되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이정구의 후손들이 얼마나 현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정구는 청음 김상헌과 함께 당대의 학자인 문정공 월정 윤근수(1537-1616)의 문인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었던 그는 1590년 과거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중에도 능통한 중국어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순탄한 벼슬살이를 하였다. 행정 관료로써 뿐아니라 외교적인 능력도 겸비했던 그는 벼슬이 날로 높아졌지만 광해조 선조의 적통인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는 계축옥사를 보며 벼슬길을 잠시 떠났다. 인조반정 이후 왕의 신임을 얻어 우의정, 좌의정을 거치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생애 동안 임진왜란, 병자호란, 계축옥사, 인조반정 등의 큰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는 어디에도 크게 관여되지 않으면서 관료와 학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인생은 치군택민(致君澤民, 임금에게 충성하고, 백성게게 혜택을 베품)을 위해 살았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드라마틱 한 반전이나 큰 부침이 없었다. 너무나 순탄해서 사극의 소재는 될 수 없겠지만 필자의 생각엔 그렇게 순탄하게 살기위해 그는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런 복을 타고 난 것이라면 한편으론 부럽게 느껴진다. 이정구는 장유, 신흠, 이식과 더불어 한문 4대문장가로 불릴 만큼 글씨와 문장에 매우 뛰어났고 또한 많은 문장을 남겨 놓아 답사를 다니면서 곳곳에서 문장이나 글씨를 볼 수 있다.
이정구의 묘소는 3代가 대제학을 지낸 아들, 손자와 함께 나지막한 구릉에 있다. 묘소는 아들 이명한의 묘소와 손자 이일상의 묘소 아래쪽에 있는데 일반적으로 아들, 손자의 묘가 아래쪽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정구와 아들, 손자 묘의 위치가 바뀐 것은 풍수학상으로 순서대로 묘를 쓰면 집안에 역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지금처럼 묘를 썼다고 한다. 봉분은 둘레석을 놓고 둥근 형태로 쌓았으며 부인인 안동권씨와 합장으로 되어있다. 문인석, 동자석, 망주석이 각각 한 쌍 있으며 상석, 혼유석, 향로석, 묘표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묘소는 조선 중기 사대부 묘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묘표 전면에는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贈諡文忠李公廷龜之墓 라고 굉장히 깔끔한 행서체로 적혀 있다. 고조부 이석형의 묘소가 엄청난 명당이라고들 이야기 하는데 이정구와 아들, 손자의 묘소도 필자의 눈엔 그 못지 않아 보였다.
신도비는 묘 아래쪽에 延安李氏三世碑閣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비각 안에 아들, 손자의 것과 함께 놓여 있다. 崇禎甲申後十三年丙申(1656년)에 세워진 신도비의 비문은 이정구와 함께 윤근수의 문인이었던 문정공 청음 김상헌(1570-1652)이 지었고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백헌 이경석(1595-1672)이 썼으며 전액은 청음 김상헌의 형이자 전서에 능했던 우의정 문충공 선원 김상용(1561-1637)이 한 것이다.
* 최근엔 인생 역전, 인생은 한방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성찰을 통해 묵묵히 맡은 소임을 다하면서 순탄하게 한발한발 나갔던 월사 이정구의 삶 또한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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