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초에 큰형님이 이란으로 근무를 떠나고 셋째를 가진 형수는
새로운 일을 한다며 문방구점을 시작했다.
말이 문방구이지 벌이는 신통치를 않았다.
대개 학교 앞이나 사람들이 번화한 곳에 문방구가 위치해야
많은 벌이는 아니더라도 손해는 안볼텐데
형수가 차린 문방구는 주변에는 학교에서 500M이상 떨어진 곳이고
주변에 재래시장과 식당과 술집이 즐비한 곳이어서
그야말로 형수네 문방구는 외로운 섬하나 새들의 고향이었다.
그나마 담배라도 팔면 벌이가 쏠쏠할텐데
바로 옆집이 수족관이었고 담배를 같이 팔았다.
게다가 형수는 문방구에서 담배를 팔면
청소년들이 담배사러올테고 양심상 그런 짓은 못하니
돈은 얼마남지 않아도 문구류만 팔겠다고 했다.
큰형님이 이란으로 떠난 후, 거의 매일 형수댁에 들러
조카들도 보아주고 문구류도 팔아주고 조카들 먹을 것도 사다주고
아무래도 혼자몸이니 돈 쓸 일이 그리 없다보니 조카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줄 여유는 있었다.
그때 형수님이 임신한 몸으로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고
장사하는 일이 힘들었고 혹시나 남편없이 지내다보면
주변에 껄렁대는 건달들도 있고 하니
(맞다. 술집에 여관에 시장바닥이다보니 건들들이 많았다.)
종종 큰형님 친구와 부인이 형수네에 들러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곤 하였다.
이분은 큰형님에겐 있는 단 한명의 친구이다.
같은 초등학교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회사에 근무하는 형님을 찾아와 다짜고짜로 일자리
구해달라던 이분은 슬픈사연이 있다.
과거의 일은 잘 모르지만,
월남전 참전용사이고 청룡부대출신인데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내장을 안으로 쑤셔놓으며
죽기살기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당시에 홀어머니와 아래 중학교 다니는 여동생 하나와
초등학생인 남동생 둘을 두고 월남에 온 그분은
총상을 입는 순간,
내가 죽으면 불쌍한 어머니와 동생을 누가 돌보냐는 생각에
죽기살기로 도망쳤다나~~~
월남에서 제대후, 곧바로 큰형님과 같은 회사에 취직하였고
그러면서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놈의 지긋지긋한 술을 매일 마시는데
술을 안마시면 마음이 괴로와서 못견딘다고 한다.
뭐라더라~
밤마다 악몽을 꾼다나?
월남전에서의 악몽.
베트콩과 전투 중에 총상을 입고 죽는구나 생각하며
도망을 치는데 그러면서
"이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는 순간
꿈에서 깬다나....
형님이 계시지 않을 때 내가 형 친구의 술주정을
내가 들어주었는데 술을 못하는 나는 힘들긴 했어도
형친구의 힘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때 조성모의 "아시나요"라는 뮤직비디오가 출시되었을 때
비디오 중에 한국군이 월남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때문에
국방부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판매가처분을 낸 적도 있는데
글쎄~ 월남전을 미화시키는 것도 지겨운 일이지만
민간인 학살 장면을 굳이 왜 만들었는 지....어쩌자는 건지....
게다가 한국군이 베트콩들에게 몰살당하는 장면도 있다던데
그런 적이 있긴 했던가?
언제 날을 잡아서 상세하게 올릴테지만,
월남에 참전하게 된 동기도 그렇고 월남전 참전용사들의 심정도 그렇고
약 5000명의 전사자를 낸 한국군들의 슬픈 파병역사를 그런식으로
말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입만살아서 까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지만원부류~)이야
무엇이든지 시빗거리이지만, 당사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당시 월남전 파병가족들은 아들이 형이 오빠가
그저 살아만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랬고
그심정은 무어라 말도 못했는데 정작에 월남에서 전사한
가족들의 심정은??? 그것도 장남들이 많았다.
지금은 부모친척들에게 군대간다면 군대간다고 인사라도 하고
잘 다녀오라고 환영도 받고 그러지만 형님의 시대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외지에서 직장다닐 때 징집영장나와서 부모님 얼굴도 못뵙고
곧바로 입대해서 곧바로 월남에 투입되었고 그러고나서 형님편지를 받아보았다.
그건 그렇고 다시 형수네로 이야기를 돌리자.
본래 1970년 초에 지어진 건물이라 화장실이 풍덩식이었고
그 풍덩식을 자그만치 그건물에 세든 3가구가 사용하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86년 아시안 게임을 치루고
88년도에 거국적인 서울올림픽을 치룬 나라에서
아무리 촌동네라도 그렇지 버젓하게 생겨먹은 건물에
그것도 3가구가 밥을 끓여먹고 사는 집에
딸랑 풍덩식 뒷간이 하나라니~~
하긴 당시 그 주변에 대부분의 주택들은 1960~70년 대에 지어진 것이어서
화장실은 당연히 풍덩식이었다.
당시만(1989년) 해도 형수네 집앞엔 조그만 개울이 흘렀는데
개울이라기 보다는 각 가정에서 내보내는 오물배출구여서
평소에도 그렇지만, 비가오는 날이면 동네에 울려퍼지는 화장실냄새와 더불어
장관이었다.
2000년이 지나면서 집앞 순복음교회에서 그 일대주택을 몽땅사들여
집이고 똥간이고 깡그리 밀어붙여서 콘크리이트로 발르고 주차장으로 만들어
역시 새마을 운동의 효력은 2000년대에도 발휘되는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런 환경이 한국에 있었고 지금의 한쪽 귀퉁이에 가면 여전히
오물배출구가 버젓히 드러나있고 풍덩식 화장실이 존재하는 데
중국에 사는 한국인들이 중국인들의 생활문제를 거론하면서
더럽다 지저분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살아왔던 과거의 모습일 찐대
남들 삶에 대해 그렇게 가볍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활하던 그때 나는 형수네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한달 월 3만원짜리 셋방에서 잠만 자며 지내고 있었다.
별로 하는 일 없이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잠이나 자고
돈이 필요하면 영어학원에 근무하고 주말엔 과외도 하며
조카들 데리고 시내놀러가거나 맛있는 거 사주며 지내던
그때,
내게 서광이 비치는 일이 갑자기 발생하였다.
첫댓글 아..궁금..ㅎ
나도 궁금..ㅎ
남의 개인사가 이렇게 궁금해보긴 처음이네...ㅋㅋ
저도 궁금해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