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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씨행단(孟氏杏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설화산(雪華山) 자락에 자리잡은 맹씨행단은 황희정승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고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 선생의 생가이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생가를 맹씨행단(孟氏杏檀)이라 부르는 것은 생가 안에 지금도 자라고 있는 수령 약 600여년된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은행나무는 맹사성 선생이 직접 심은 것으로 현재 35m의 높이에 둘레가 10m에 이르는데 충청남도 도목(道木)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계절의 왕이라고 부르는 5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갓 돋아난 연초록 신록을 비단처럼 물들이는 화창한 늦은 봄날에 맹씨행단을 찾았다. 계절에 비해 일찍 찾아온 더위로 인해 날씨는 한여름의 삼복만큼이나 더웠다. 고속철도를 타고 천안아산역에 내리니 타향의 낯선 설레임이 가슴을 긴장시킨다. 맹씨행단에 들어서자 이미 자료에서 몇 번을 보았던 터라 처음 대하는 자연의 모습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주산인 설화산의 정기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생가는 처음 들어서는 순간 명당임을 몸이 먼저 알아본다. 그리 넓지 않으면서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마당은 작은 고택과 함께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어 편안함을 전해준다.
고향의 할머니댁 같은 소박함을 간직한 이곳이 한껏 위엄을 간직한 조선시대 재상의 집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좌의정 벼슬까지 지냈던 명재상 맹사성 선생의 너그러움이 이렇게 편안함을 주는 생가의 기운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인걸은 지령을 타고 태어난다는 풍수언을 떠올리자 생가의 정기를 받은 선생의 인품이 마음으로 그려진다. 생가의 구조는 전면4칸, 측면3칸으로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을 배치한 소박하고 아담한 구조에 ‘공(工)’자형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집의 주위에는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고목이 둘러져 있고 어른 가슴높이 정도의 낮은 돌담장을 겹으로 둘러쌓아 놓았다. 마당 한켠에는 생가의 이름을 낳게 한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웅장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있다.
마당의 가장자리를 따라 꾸며진 정원에는 기묘한 형상의 돌들을 양쪽으로 배치한 작은 돌계단이 있는데 계단 끝에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세덕사(世德祠)가 있다. 선생의 조부 유와 부친 희도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데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집의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생가의 주산은 설화산이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백두의 정기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서북으로 한남금북정맥을 보내는데 이는 죽산의 칠현산에서 다시 한 번 분기하여 서쪽으로 금북정맥을 분맥한다. 안성의 서운산(547m)과 천안 성거산(579m)을 거쳐 태조산(421m), 흑성산(519m), 아산의 태화산, 망경산(600m)으로 이어지던 대간의 정기가 마침내 광덕산(699m)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수려하게 몸을 일으킨 산이 생가의 주산인 설화산이다.
주산에서 출맥한 내룡은 기복(起伏)과 속기(束氣)를 거듭하여 왕성한 지기를 품은 생룡으로 태식(胎息)현상이 뚜렷하고 입수룡은 생가의 바로 뒤에서 잉(孕)을 만든 다음 혈을 맺어 터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금낭경(錦囊經)에서는 현무수두(玄武垂頭), 청룡완연(靑龍蜿蜒), 백호준거(白虎蹲踞), 주작상무(朱雀翔舞)라고 하였다. 현무는 주산(主山)을 일컫는데 이것이 수두(垂頭)해야 한다는 말은 주산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진행하다가, 마치 거북이가 머리를 조용히 숙이고 정지해 있는 듯한 형세여야 하며, 만약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면 이것은 혈장을 내어주지 않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그곳에서 뻗어 내린 내룡(來龍)에는 생기가 없다고 본다는 말이다. 특히 주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주산의 형상은 수려하고 단정한 모양이라야 길격으로 친다. 이런 기준을 놓고 보면 설화산은 정상부근이 우뚝하게 솟아 단정한 모양을 갖추었고 혈장부근에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생가를 정겹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청룡(靑龍)이 완연(蜿蜒)해야 된다는 것은 청룡은 왕성하여 생기 있게 약동하여야 좋다는 뜻으로 마치 용이 승천하듯 기세 좋게 활발히 움직이는 형태를 띠어야 길격이고, 순한 양처럼 밋밋하게 뻗었다면 생기 없는 용이 되어 이는 집안의 장손이나 아들자식이 패기 없는 유약한 자식이 된다는 뜻으로 여긴다.
생가의 청룡은 주산에서 흘러내려 안산까지 길게 뻗어와 혈장을 잘 감싸고 있다. 또한 왕성한 기복을 이룬 모습이 승천하는 용처럼 힘차게 용트림하여 청룡완연현상을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골재채취로 인하여 청룡자락이 훼손되어 있다는 점이다.
백호준거(白虎蹲踞)라는 뜻은 백호는 사나운 짐승이므로 혈장에 대하여 다소곳이 엎드려 혈에 순종하며 혈장을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백호가 청룡처럼 날뛰는 형상이라면 이는 사람 잡아먹는 맹수가 된다. 생가의 백호는 내백호와 외백호로 이루어져 있는데 외백호 자락은 기복이 있으나 내백호는 순한 양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용히 뻗어 내렸다.
한편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을 일컫는 주작(朱雀)은 상무(翔舞)해야 한다. 즉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의 형태는 주산(主山)의 부름에 부응하여 춤을 추며 날아오르는 봉황의 형태를 갖춘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또한 안산의 높이는 눈썹높이에서 가슴높이 정도가 가장 적당하며, 너무 낮으면 품격이 떨어지고 너무 높으면 혈을 압도하여 흉하게 본다. 풍수에서는 사신사 중에서 안산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본다. 안산이 가까워서 손에 잡힐 듯이 보이면 발복이 빠르고 재물이 쌓이며, 안산이 멀리 있으면 발복이 늦게 일어난다고 한다. 또 외방의 수려한 봉우리 천 개가 안산 좋은 것 하나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생가에서 바라보는 안산은 태화산에서 뻗어내린 배방산이다. 모양은 비교적 단정하고 혈장에서 가까우며 주산을 향해 다소곳이 유정(有情)한 형상을 띠었는데, 현무의 부름에 응하여 상무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안산의 높이가 너무 높게 느껴지는 것이 혈을 압도하는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맹씨행단에는 조산(朝山)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 명당수는 마을 앞쪽으로 흐르는 금곡천인데 생가 바로 앞을 흐르는 물과 혈장과 내백호 사이로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져 금성수(金星水)가 되어 혈을 환포(環抱)한다. 수(水)의 형상은 길격이다.
우선수(右旋水)에 손파(巽破)로 수국(水局)을 이루고 생가의 좌향(坐向)은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정양향(正養向)을 놓았는데, 내룡(來龍)이 병오(丙午) 병룡(病龍)으로 길하지 못한데다 안산까지 압혈(壓穴)하여 좌향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기풍수의 향법을 무시하고 안대를 중시하여 좌측 나지막한 봉우리를 안산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나 지리에 능통한 풍수고수였던 맹사성 선생이 이를 모르고 좌향을 그리 놓았을리는 만무하고, 당시에는 조정동의 지리오결이 아직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므로 88향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최영장군이 살았던 집이라 하니 아마 선생 이전에 지어진 집이었는지, 그 후 다시 지은 집인지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혹여 선생이 다시 지었다 하더라도 아마도 호순신의 지리신법에 의한 홍범오행으로 좌향을 잡았거나 아니면 전통풍수 이론인 형기론에 의해 안대좌향(案對坐向)을 기준했으리라 여겨진다. 시대에 따라 학문의 이론도 바뀌기 마련인데 지금에야 알려진 지리오결에 의한 이기풍수의 잣대로 고명한 선생의 행적을 평한다는 것은 외람된 일일뿐더러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선생의 판단을 존중하고 턱없이 모자라는 후학으로서 감히 언급을 회피하고자 한다. 맹씨행단은 원래 고려말의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이후에 선생의 할아버지가 이어받아 살게 되었는데 선생의 출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온다. 맹사성의 어머니가 시집을 와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곧바로 한양에 과거 공부하러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맹사성의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백주 대낮에 하늘에 있던 태양이 갑자기 발 앞으로 떨어지는데 이것을 엉겹결에 그만 치마폭으로 받았다. 이렇게 기이한 꿈을 꾼 어머니는 맹사성의 할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하였고 이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절대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서는 아니된다고 당부한 다음 조용히 하인을 불러 한양에 공부하러 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가 위독하다며 급히 내려오도록 하였다. 이에 부랴부랴 집에 당도한 아들이 아버지께 문안을 여쭈니 아버지는 태평하게 "내 병은 그 동안 다 나았으니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거라"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안에 머무는 동안 하늘의 계시를 받은 길몽으로 맹사성 선생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맹사성의 호는 부처라는 뜻의 고불(古佛)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맹씨는 신창 맹씨 단본으로 원시조(元始祖)는 중국의 성현 맹자(孟子)라고 한다. 맹자의 39대손 되는 당나라 사람 맹승훈(孟承訓)이 신라 진성여왕 때 당의 한림원 오경박사(五經博士) 자격으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머물게 되면서 우리나라 맹씨의 연원이 되었다. 세종대왕 시대에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었던 조선조 최고의 명재상 맹사성은 황희정승에게 밀려 영의정은 못해보고 벼슬이 좌의정에 머물렀지만 온건함과 청렴으로 일생을 살다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이 죽고 난 뒤 남긴 것이라고는 옥피리 하나뿐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청렴한 선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에는 맹사성 선생의 묘소가 있는데 생전에 타고 다니던 검은 소가 선생이 죽자 사흘 동안이나 굶다 죽었기에 선생의 묘소 옆에 같이 묻었는데 이 무덤을 흑기총(黑騎塚)이라 하며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한다. 선생은 지리에도 능통하여 풍수의 고수였는데 전하는 일화에 의하면 한 때 안동 부사로 부임했을 때 그 곳에는 많은 양반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경주 김씨로 알려진 집안의 위세가 등등해서 고을 부사라도 그 집안에 잘못 보이면 공무를 제대로 집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신임부사는 그 집에 먼저 들려 부임 인사를 먼저 하는 것이 관례였다. 맹사성 역시 관례대로 관청보다 먼저 그 집에 들려 인사를 했다. 맹사성은 속으로 이 같은 악습은 반드시 철폐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집을 나오면서 집터를 둘러보니 누에 모양의 잠두봉(蠶頭峰)의 정기를 받고 있었다. 이 명당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집 앞 안산 쪽에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뽕나무 숲이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맹사성은 이 뽕나무 숲이 김씨네 위세를 꺾을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천을 정비한다는 구실을 삼아 뽕나무 숲 앞으로 제방을 쌓고 둑에는 누에의 상극인 옻나무를 빼곡하게 심었다. 그러자 자연히 김씨네 가운이 쇠퇴해져 위세가 꺾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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