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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신야2004 원문보기 글쓴이: 도마
프로테스탄트, 루터파·개혁파·영국교회로 |
■ 동방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비교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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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원장 / 한국기독교학술원
1. 루터의 개혁운동과 루터교회 그 때부터 인간의 협력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되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역에 의한다. 아무리 심도 높은 경건주의라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인의 중요성을 능가할 수 없다. 17세기에 이와 같은 루터의 가르침을 스콜라주의적 정통주의라는 이름 아래 많은 루터교회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학문화하려고 하는 데 대하여 경건주의의 이름으로 반대했다. Sola fide(믿음만으로)를 강조하기보다 개인의 성화생활을 더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주의가 루터교회 안에서 환영받아 초자연적 요소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Zinzendorf와 Herrnhuter들은 다시 성서적인 견지에서 반대하였다. 19세기 초에 루터교회와 개혁교회가 합동할 것을 William III 왕이 명령했을 때 루터교회 안에는 많은 동요가 일어났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서 안에 있는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했을 때에도 교회에 큰 동요가 일어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바르트가 칼빈주의적이었으나 성서의 권위를 재건한 일과 국가가 교회를 박해했을 때 교회는 오히려 생기를 다시 찾았다. 제 2차 대전 후 독일의 루터교회는 대동단결하여 독일 통일루터복음교회(VELKD)를 조직하였다. 독일 밖에서의 루터교회는 주로 스칸디나비안 국가 안에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17세기 이후에는 미국으로 많은 루터교회 교인들이 이주하여 현재까지 5대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발전했다. 교회론적으로 루터교회는 국가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목사 장립을 국가가 관장하며 생활비는 국가가 담당한다. 노회는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구성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교회와 유사하다. 교회교육에 중점을 두며 신학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성서에 대한 비판적 연구(Textual Criticism, Higher Criticism, Form Criticism)가 독일교회에서 성행했다. 현재 한국 루터교회는 약 30교회와 1만 명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2.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루터는 공재설을 말했고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했다. 이 때 분열한 것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럽대륙에 확산된 개혁교회는 가는 곳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공로를 세웠다. 프랑스에서는 유게노들이 개혁신앙을 지켰으며 화란의 개혁교회는 알미뉴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Belgic Confession을 산출하여 화란의 개혁신학의 기초를 만들었다. 독일 남부에 있던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을 근거지로 활발한 신앙운동을 전개했으며 유명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요리문답을 작성했다. 미국으로는 두 가지 그룹이 이주해 갔다. 하나는 화란의 개혁교회요(소수의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교회도 포함됨)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장로교회다. 전자는 현재까지 미국 중서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후자는 미국 전국토로 확산되어 크게 발전했다. 교육과 선교사업을 크게 전개했으며 미국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개혁교회의 선교를 받은 것이 아니라 미국의 장로교회로부터 받은 것이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소수이기는 하나 장로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들로부터도 선교를 받았다. 이렇게 볼 때 한국장로교회는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로부터 선교를 받은 교회임이 분명하다. 화란의 개혁교회의 영향도 받았으나 그것은 간접적인 영향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개혁교회-장로교회는 WARC(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를 조직하여 친밀한 협조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총 교인 수는 약 8천만 명이라고 한다. 3. 영국교회 · 감리교회 이와 함께 교회는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주로 성직자들의 타락문제였다. 위클리프(Wycliffe)와 틴데일(Tyndale)같은 사람들이 독일에서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아 성서번역을 단행하여 보다 성서적인 신앙생활을 시도했다. 때마침 헨리8세의 결혼문제로 로마교황청이 그의 재혼을 허락하지 않은 일을 구실로 영국교회의 독립을 1529년에 선포했다. 이것이 영국교회가 로마천주교회를 떠나 독자적으로 영국교회를 세운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맏딸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국교회는 다시 로마천주교회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들이 다시 영국교회를 독립교회로 만들었다. 갈등이 계속되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하여 영국교회는 로마천주교회로부터 완전 독립을 얻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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