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간( 簡) 17세조,
부(父)는민세구(閔世球),조부(祖父)는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민효손(閔孝孫)이다. ◎ 민균 (筠 )17世祖,주부공主簿公 파 경기 김포 마산 종친회 시조,
형조참판 민심언(審言;留守公파 중현조)의 5대 손. 13世祖, 호참공(戶參公) 민징원(澄源) --▶ 14世祖, 전적(典籍) 형(亨) --▶ 15世祖, 참의(參議) 효손(孝孫)--▶ 16世祖, 주부(主簿) 세록(世錄) --▶ 17世祖, 감찰(監察) 균(筠)마산 종친회 유수공 민심언이 통진에 자리를 잡은 이후 그 후손들이 여러 부락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민기(箕)17世祖,1501(연산군10)(~1568(선조1),
호는 관물제(觀物濟), 부(父)는 민세유(閔世瑠)이고, 조부(祖父) 는 민효손(閔孝孫) , 증조부(曾祖父)는 민형(閔亨)이다. 중종(中宗)34년 별시(別試)급제 병과(丙科) 우의정(右議政) 문집(文集) 석담야사(石潭野史)대학도(大學圖),선조조 (宣祖朝)우상(右相)상신(相臣), 김모제(金慕齊)의 제자, 옥당(玉堂)에 들어가 대사간, 대사헌, 병조, 이조참판을 지냈으며그때 윤원형(尹元衡)이 국고로서 권세를 남용하자 그를 제거 하고자 그론하였고, 회순세자(懷順世子)가 이미 죽고 명종의 병이 심하여 조정이 매우 어지러웠으므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에게 대핵연의(大學衍義)를 진강케 하여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그후 후에 軍器寺正(군기시정)을 거쳐 慶尙道 暗行御史(경상도암행어사)·弘文館 提學(홍문관제학)·同副承旨(동부승지)·左副承旨(좌부승지)·工曹 參議(공조참의)·兵曹 參議(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후 1551년(명종 6) 大司成(대사성)에 올랐다. 1552년 冬至使(동지사)로 明(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55년(명종10) 淸洪道 觀察使(청홍도관찰사)가 된 뒤 大司諫(대사간)·大司憲(대사헌)·大司成(대사성)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68년(선조 1) 右議政(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묘 김포시 월곶면 개곡리에 있다 문헌 ; 1. 290대 한성판윤 민 기(閔 箕) 명종20년(1565)10월19일 명종20년(1565)12월26일 2. 300대 한성판윤 민 기(閔 箕)명종22년(1567) 5월 3일 명종22년(1567) 5월 5일 3. 역대(歷代)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명종대(明宗代) 민 기(閔 箕) 민덕남(閔德男)17世祖, 1564 ~ ?,
지애공파(芝崖公派)시조, 자(字)는 윤부(潤夫)/호(號)는 지애(芝厓). 부(父)는 민복(閔福), 조부(祖父) 는 민예(閔禮) , 증조부(曾祖父)는 판의금부사 민효증(閔孝曾)이다. 선조(宣祖)33년(1600년), 별시(別試) 병과7(丙科7). 여러 벼슬을 거쳐 여주군(驪州君)에 봉군 되었으며 지돈령의금부사(知敦寧義禁府事)가 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政) 때 원주(原州)로 쫓겨 나면서 훈봉이 박탈 되었으나 이괄(李适)의 난 때부터 다시 나와 춘천부사를 거쳐 예조팜판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있었다. 36년(인조14) 청병(淸兵)이 서울에 침입하자 왕을 남한으로 피하게 하는 등 공로가 많아 보국 우찬성(輔國右贊成)까지 지냈다. 문헌 ; 顯宗實錄(현종실록), 顯宗改修實錄(현종개수실록) 민리(閔리) 17世祖,
자는 민유부(有孚)호조정랑(戶曹正郞), 손은 민성휘(聖徽), 민성징(聖徵)호조판서(戶曹判書), 증손은 민사량(思亮)주부(主簿) 민몽룡(夢龍)17世祖,1550(명종5)~1618(광해군10)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운와(雲窩), 현감(縣監) 민상(祥)공의 아드님이시다. 조부(祖父)는 민의(閔義)이고, 증조부(曾祖父)는 판의금부사 민효증(閔孝曾; 공목공파(恭穆公派)시조)이다. 84년 (선조(宣祖)17년)친시(親試)급제 병과(丙科), 검열(檢閱)에 등용,93년 장령(掌令)병조참지(兵曹參知), 예조참의(禮曹參議),호조참판,대사간등을 역임,06년(선조36)예조판서로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11년(광해군3)경기도 관찰사, 좌참찬(左參贊)등을 역임,뒤에 이조판서,우의정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광해군에폐모론(廢母論)에 적극 찬동하여 인조반정(仁祖反正,1623)후 관직을 추탈 당했다. 1611년(광해군3) 경기도관찰사, 좌참찬 등을 역임, 뒤에 이조판서·우의정 등에 오르셨다. 민사용(閔思容)17世祖, 1515(중종 10)∼1579(선조 12), 조선 전기의 문신
<남양주시지> 제2권 문화재와 인물 | 제2편 성씨와 인물 | 제2장 고려·조선조 인물* 자는 언묵(彦默)이고 본관은 여흥이다. 刑曹 判書(형조판서)민심언(閔審言) 유수(留守)공파 중현조,에 5대 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복현감 민구손(龜孫)이고, 아버지는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제인(齊仁; 입암공파(立岩公派)시조)이고, 어머니는 고성 이씨이다. 자는민여건(汝健)이조판서, 민여검(汝儉)운촌공파(雲村公派)시조,가선대부(嘉善大夫), 민여준(汝俊)창신교위(彰信校尉) , 손자는 민설, 증손자는 부사(府使)민광소,민광숙(光숙)남원부사(南原府使), 1546년(명종 1) 생원이 되었고, 관직은 문천군수에 이르렀다. 사후에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일패동 명우에 묘가 있다. 참고문헌 여흥민씨세계보 간행위원회, 『여흥민씨세계보』, 1974. 민종윤(宗胤) )17世祖, 1498(연산군 4)~1583(선조 16) ,
자는 술지, 첨정을 지낸 휘 세규의 아들이다. 장원서 주부를 지내고, 자헌대부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과 여흥군(驪興君)에 추증, 여흥군/자는 민사권(思權)우의정,여흥부원군, 손은 민인백(仁伯)평난공신, 증손은 민성(垶)충민공,순절인 민척(閔滌)17世祖. 1543 ~ ?.
자(字)는 사결(士潔), 민숙(閔淑)으로 개명(改名). 부(父)는 우승지 민기문(起文)(역암공파( 菴公派)시조)에 막내 동생 민기정(閔起貞)이고, 조부(祖父)는 참의(參議) 민원(閔원)이고, 증조부(曾祖父)는 여절교위(勵節校尉) 민사건(閔思騫 ; 감사공파(監司公派)시조)이다. 선조(宣祖)23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급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민총(叢) 17世祖,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자는 민치중(致中), 민시중(蓍重)여주목사, 손은 민호(頀)承旨(승지), 증손은 민응형(應亨)대사헌 ◎ 민형남(閔馨男) 17世祖,지애공파(芝崖公派)시조.1564(명종19)~1659(효종10).
조선의 문신, 시호는 莊貞(장정), 자는 윤부(潤夫), 호는 지애(芝崖), 閔純(민순)의 문인, 찬성사 유의(由誼;중현조)에 6대 손. 판의금부사 민효증(閔孝曾)에 증손으로 아버지는 豊儲倉守(풍저창수) 민복(福)이다. 1600(선조33) 문과에 급제. 承文院(승문원)에 등용된 후 注書(주서)·承旨(승지) 등을 역임, 1613년(광해군 5) 翼社(익사)·享難(형난) 공신이 되고 여주군(驪州君)에 봉군 되었으며, 이듬해 進春使(진향사), 1615년 지돈령의금부사(知敦寧義禁府事)가 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政) 때 원주(原州)로 쫓겨 나면서 훈봉이 박탈 되었으나 , 1624년(인조 2) 李适(이괄)의 난에 行在所(행재소)로 왕을 찾아가 春川 府使(춘천부사)로 복직, 그후 10여년간 각 고을의 지방관을 지낸 후 禮曹參判(예조참판) 겸 同知義禁府事(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14) 丙子胡亂(병자호란) 때 摠管(총관)으로 왕을 南漢山城(남한산성)에 扈從(호종), 漢城府 判尹(한성부판윤) 겸 知義禁府事(지의금부사)를 거쳐 1647년(인조25) 右?成(우찬성), 1653년(효종 4) 다시 1품직에 올랐고, 1658년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가 된 후 耆老所(기로소)에 들어갔다. 공로가 많아 보국 우찬성(輔國右贊成)까지 지냈다. 문헌 ; 顯宗實錄(현종실록), 顯宗改修實錄(현종개수실록) . 민호17世祖,
자(字)는 가화(可和). 호(號) 는 소고(嘯皐). 부(父)는 민세유(閔世瑠), 조부(祖父)는 민효손(閔孝孫)형조참의(刑曹參議)이고, 증조부(曾祖父)는 민형(閔亨)이조판서이다. 중종(中宗)35년 식년시(式年試)급제 병과(丙科)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지평(持平)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