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자전과 공전에 대한 미학적 보고서
- 진은영
1. 셔틀버스를 타고서
너의 근심이 사라지는 나라 잠 깬 고양이가 부드러운 무릎 사이를 빠져나가듯 죽은 햇살이 거리를 따라가고
어떤 목소리가 어둡게 들어와 피아노의 페달처럼 단조로운 풍경으로 창을 울리고
유리에 기대어 졸다 봄의 내부로 떨어진 네가 향기롭고 푸른 창자에 목이 감겨 죽었으면
시간이 검은 개미처럼 달콤한 틈을 통해 절망의 꿀통 속으로 줄지어 빠져나갔으면
사람들이 손잡이를 따라 흔들리다 빠진 송곳니를 삼킨다 아침 산책로를 지나다 앵두 몇 알을 훔쳐 입으로 넣는 아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네가 앓기만 한다면 은빛 별들이 가득한 검은 죽을 쑤어 줄 텐데
너의 시에 등장하는 버스는 파란색 282번이다. 오전에 버스는 남가좌동에서 출발해서 이대 후문까지 간다. 오후에 너는 이대 후문에서 명지대를 돌아 집 근처로 데려다 주는 이 버스를 탄다. 너는 매일매일 오고간다. 가끔 셔틀버스의 노선이 연장되기도 한다. 두 달에 한 번씩 버스는 서울대병원 후문까지 운행한다. 너는 병원에 들러 간단한 진료와 검사를 받고 다시 그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물론 사람들은 272번을 서울시 간선버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너는 지난 몇 년간 이 버스를 타고서 그 구간 밖으로는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 버스가 다른 곳을 지나간다는 사실은 종착역의 기차들이 자정 무렵 흰 눈이 설탕처럼 쌓인 아름다운 집들의 지붕 위로 날아간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너에게는 환상적이다. 10년 동안 너의 문학적 삶도 마찬가지였다. 등단을 하고서 점점 더 많은 계간지들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을 제외하고 너는 규칙적인 왕래를 반복해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간지 발행 일정에 맞춰 시를 쓰다 보면 한 해가 간다. 망설이다 연말 모임에 참석하고 귀 옆으로 떨어지는 흰 나뭇잎 같은 음악 소리들 속에 다른 문인들의 출간 소식이나 수상 소식을 듣게 되면 때늦은 축하를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네가 다시 n번째 시집을 낼 무렵 부지런한 동료들은 n+1번째 l집을 내겠지만 그게 특별히 초조한 일은 아니다. 너나 그들은 결국 같은 종점에서 내릴 것이고, 내린 후에는 비슷한 절망과 잡담 속에서 서로의 근처를 서성거리게 될 테니까. 너는 문학적 세인의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김현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꼈던 단어는 ‘도저到底한’이었다. 너는 그 단어를 여러 명사들 앞에 붙여보곤 했다. 도저한 슬픔, 도저한 고독, 도저한 빈곤, 도저한 권태······. 그런데 이제는 너의 실망도, 염증도, 심지어 분노조차도 도저하지 않다. 그 사실이 너를 도저한 절망에 빠뜨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 데서나 내려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너는 생각한다. 이런 생각으로 자주 흔들리면서 또 너는 집으로 실려 간다.
2. sorrow
그날 네 몸에서 풀려나온 푸른 뱀이 검은 별을 온통 둘러쌌다
세상에서 가장 길고 부드러운 문자
폭소 터뜨리며 상처처럼 흔들리는 자줏빛 라일락 꽃송이 사이
파묻힌 푸른 핏줄기처럼
스타로뱅스키는 몽테뉴에 대해 언급하면서 멜랑콜리를 불일치의 감각으로 정의했다. 몽테뉴는 내적인 삶과 외적인 삶을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몽테뉴가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은 시간적 리듬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모종의 슬픔이 그의 내적 삶을 천천히 흘러가도록 만들었으며 이런 내적 리듬의 지연으로 그는 세계와의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스타로뱅스키는 동일한 우울을 보들레르에게서도 찾아냈다. 가령 보들레르의 시 「우울(spleen)」에 있는 “절뚝거리며 가는 나날들”이라는 시행이 그러하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외부 세계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근대 도시 파리에서 우울에 빠져 꼼짝하지 않고 멈춰만 있는 자신의 모습을 시인은 “절뚝거리며” 가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파리의 속도와 시인의 내적 속도의 불일치를 표현한 이미지 속에서 스타로뱅스키는 멜랑콜리를 보는 것이다. 16세기 철학자였던 몽테뉴가 근대 도시의 속도 때문에 불일치의 감각을 느꼈을 리는 없다. 스타로뱅스키가 말하듯 그를 멜랑콜리로 빠뜨린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몽테뉴는 친구 라 보에티를 사랑했다. “그만이 나의 진정한 초상을 들여다볼 특권을 누렸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였고, 동시에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래서 친구가 죽은 후 몽테뉴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를 잃어버린 뒤로 나는 맥을 놓고 삶을 질질 끌고 왔을 뿐이다.”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후 2년 동안 아름다운 연인들과 연애 사건을 계속 벌였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결국 그는 서재로 칩거하여 라 보에티가 쓴 책, 또는 그와 함께 읽었던 책들에 둘러싸인 채 삶과 죽음에 관한 위대한 책 『에세』를 썼다.
너는 16세기의 멜랑콜리커가 쓴 책을 뒤적이면서 지금 네 현존의 암술을 검은 꽃잎처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슬픔들에 대해 생각한다. 올해는 많은 이들이 죽었다. 연이어 펼쳐진 그 죽음들 속에서 사람들은 이제는 굳건히 소유하게 되었다고 믿었던 것들의 상실을 체험했다.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에 대한 내적인 시간 감각과 외적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공적인 시간 감각 사이의 극단적 불일치 속에서 너는 이제 절뚝거리지 않고서는 걸을 수가 없다. 슬픔은 때로 창처럼 날카롭다. 살아 있는 동안 친구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던 몽테뉴처럼 상실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의 근처에서 똬리를 틀며 죄어드는 이 감각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상처에서 흐르는 피들은 다 어디로 갈까.
그들이 죽던 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슬픔이여,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가길!
3. 시인에게“
너는 너무 완만한 아름다움이다 쉴 곳이 없다 아름다움이 파란 투계처럼 심장을 찢으며 살해당하는 푸드덕거리는 새벽을 향해 나는 나아갔다
”시가 말했다
그날 너는 비평가 H의 전화를 받았고 두 명의 시인 S에게 전화를 했고 S는 다시 두 명의 시인 K에게 전화했고······ 이런 식으로 서성이던 예술가들이 대학로에 모였다. 그리고 서로가 생각하는 가장 ‘문학적인’ 선언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몇 번을 더 만나서 문학적 순정성에 대해, 삶에 문학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즈음 너와 나는 삶에 저항하는 예술과 삶이 되려는 예술에 대해 말했다. 여름 내내 우리는 랑시에르를 읽기도 했지-삶의 낡은 감각적 분배, 관습으로서의 에토스를 넘어서는 예술을 어떻게 가능할까? 아도르노와 리오타르의 미학이 주장하듯이 상투적인 박동을 중지시키며 일상의 심장을 찢어버리는 숭고한 예술이란 어떤 식으로? 동료 시인들의 미학적 실험은 삶에 저항하는 예술일까, 아닐까? 우리는 서로 질문들을 던지며 ‘네 생각을 말해줘’라는 표정을 하고선 각자 아무 데나 바라보았다. 낡은 삶에 저항하는 예술을 꿈꿨다면, 너는 좀더 극단적인 방식의 ‘미학적’ 실험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너는 불쑥 미학적 실험 대신에 시국선언을 위한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나는 흔쾌히 응했고 너는 무척 기뻐했다. 정치적 아나크로니즘의 시기에는 예술가로서의 숭고한 미학적 욕망은 잠시 접어두고 공동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예술을 지향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일까? 너와 내가 모임으로 달려갔을 때 우리는 삶에 저항하는 예술을 중지하고 오직 삶이 되는 예술, 다시 말해 삶의 예술가들로 전환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문학적 선언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의 정치적 사안에 다가감으로써 문학의 삶-되기를 꿈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꿈은 오롯이 문학의 삶-되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 꿈속에는 문학적 삶을 파열시킴으로써 저항하려는 문학에 대한 욕망이 있다. 문학 하는 우리에게 상투적인 일상이 되어버린 제도적이고 안전한 문학적 삶을 파열시키고 싶은 욕망 말이다. 언젠가 그 여름의 일들을 돌이켜보게 된다면 우리는 문학의 자율성과 타율성 테제에 관한 오래된 논쟁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4. 47분처럼
너는 언제나 멋지게 말하지 “우주 비행사들이 달의 뒷면으로 들어가 47분간 지구와 연락이 단절됐대. 매혹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47분처럼!”
길게 늘어선 빵집들, 부스럼투성이 발들 짐꾼들, 빨래방, 제분소와 낙타의 끔벅거리는 눈동자가 일제히 켜지는 23시간 13분의 거리, 거길 말없이 지나가는데
얼마나 많은 타로점집 얼마나 많은 월요일의 술집 파란 술잔 속에 빠진 나비와 입 속의 운석들, 다 쓴 치약, 흩어진 잿빛 달의 가루들이 필요할까 얼마나 많은 그믐밤, 발뒤꿈치까지 밀려오는 절망들이
46억 년 23시간 13분의 별의별 시간의 뒷면으로 들어가 너는 오래도록 말이 없다 매혹과 두려움의 얼룩으로 터졌다 부푼 녹색 반죽처럼, 언제나 47분처럼
사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의 뇌리에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구절을 역설했다. “시란 패이승敗以勝하는 것, 시에 있어서는 패자가 곧 승자이다.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마침내 승리하기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를 선택한다.” 너는 말한다. “멋진 구절이에요. 그는 영리하고 명쾌한 사람이죠.”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사르트르는 문학의 자율성과 타율성 문제를 해결하는 참으로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 건 장르 간의 역할 분담을 통한 줄충주의다. 문학은 시로서는 자율적이고 산문으로서는 타율적이다. 쉽게 말해 우리 같은 시인은 달의 뒷면으로 들어가 연락이 단절된, 침묵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이다. 지구와의 연락이 단절된 그 매혹적인 47분, 그게 시의 아름다움, 아니 숭고함이다. 그와 다른 아름다움, 제분소와 빵집과 지친 발로 이루어진 공동 세계의 아름다움은 산문의 몫일 뿐이다. 오직 산문가로서의 작가만이 낱말을 소통 도구로 사용하고 의미 작용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문학은 공동세계 구축의 작업에 참여하며 정치적이며 타율적인 언어로 존재하게 된다. 너는 사르트르를 좋아하지만 이 간편한 역할 분담으로 이루어진 사르트르식의 문학적 절충주의는 좀 불만스럽다고 말한다. 너는 47분의 시인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예술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아니면 46억 년 23시간 13분 동안은 소설을 써볼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함께 웃는다. 그러다 우리들은 산문적 언어의 투명성을 우회함으로써 사르트르식의 절충주의를 혼란에 빠뜨린 플로베르처럼 의미 작용을 피해 달아나는 동료 소설가들의 작품을 떠올리기도 한다. 시든 산문이든 공동의 언어를 벗어난 달의 뒷면의 언어는 어떻게 생겨날까? 너는 말한다. 지구에서는 결코 달의 뒷면을 볼 수가 없어. 달이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똑같기 때문이지. 지구를 떠나서 가가린 같은 우주인이 되어야 달의 뒷면을 볼 수 있는 거야. 너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소박한 비유를 말하려는 건가? 나는 질문하다 말고, 네가 달의 자전주기와 달의 공전주기가 똑같은 이유를 모른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달은 지구가 세게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살짝 길어져 있다. 지구가 그 긴 부분을 지구의 중심을 향해 계속 끌어당기기 때문에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스스로 한 바퀴 돌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달이 ‘스스로 도는 것’은 달이 공전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자면 47분은 예술의 자율성이 실현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자율성’이 실현되는 시간이다. 달은 공전하지 않고서는 자전하지 못한다. 달의 뒷면의 예술은 그 자체로 삶과 다른 예술이 아니라 삶에 저항하는 또 다른 삶이라고 말해야 한다. 삶은 이중의 고유한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삶은 삶을 밀쳐내면서 동시에 삶을 끌어당긴다. 우리가 예술의 자율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낡은 삶을 밀쳐내는 새로운 삶이 예술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면 너와 나는 셔틀버스에서 내린 적이 없다. ‘삶 속으로 들어가는 예술’과 ‘삶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는 두 종점의 길고 긴 사이를 오고 가며 예술가들은 항상 흔들린다. 그 흔들림들, 진동들 속에서 우리는 랑시에르가 말한 미학적 불안(malaise)을 느낀다. 만일 이 미학적 차량이 운행을 멈추고 차고-거기가 어느 종점의 차고이든-에 서 있게 되는 순간, 우리는 삶의 화석화나 예술의 화석화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예술이 진정으로 정치적인 예술이냐고 묻지 말자. 너는 물음의 방식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지? 이러저러한 예술들로 새로운 감각적 분배를 가져오도록 만드는 매 순간의 메타 정치적 매뉴얼(정치가 불편하면 미학적 매뉴얼쯤으로 해두자)은 무엇인가? 물론 그렇게 질문할 때는 어떤 예술이 진정으로 정치적인 예술인지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초라한 욕망이 아니라 발명의 욕망이, 하나의 미학적 사건에 동참하려는 욕망이 질문의 기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입 속에 가지런히 박아둔 굳건한 치아는 달의 조각이다. 우리는 그 운석들의 단단함으로 일상적인 것들을 씹고 발음하고 소화한다. 그리고 이 운석들이 너와 나의 일용할 음식과 뜨거운 침 속에서 마모되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새로운 치아를 가지러 다시 침묵 속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 미학적 모험이 시자되는 것은 랭보의 말대로 “삶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다른 곳에서 찾아내는 건 예술이 아니다. 적어도 예술일 뿐이기만 한 예술은 아니다. 그러니 너와 함께 무엇을 해볼까? 시를 쓰고 죽은 이들에 대한 책을 내고······ 또 그 밖의 무엇을?
5. 멜랑콜리 알고리즘
1 네 심장은 아무것도 씹지 못하는 이빨을 가졌다 우울한 시간을 빨아대며 굴리는 붉은 혓바닥으로 너는 맛보았지 영원한 사탕들 이 밤에 말과 꿈의 사탕발림 너머로 공허여, 공회전하는 어둠이여 푸른 이마에 스무 개의 커다란 눈동자를 달고 다가오는 하루
너는 오늘도 완곡한 슬픔에 빠진다 해질 무렵 빵집 앞 배고픈 아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수치심이 힘없이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노을을 응시하던 가로수는 병든 개의 귀처럼 주홍빛 그림자를 늘어뜨리겠지 텅 빈 곳에서 텅 빈 곳으로 그리도 지루하게 이어지는 진실 거리의 돌들을 바라보며 너는 슬프겠는가
2 높고 하얀 건물에서 누군가 기쁨의 부재에 대해 번민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부어버린다 창밖으로 내버린 오물처럼 환희가 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날이 온다면? 아니, 슬픔이 너를 소유할 거야 너의 몸이 너에게 속한 동안
너는 오로지 슬픔을 찾아다닌다 슬픔이 네 영혼을 감춘 채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슬픔은 너의 그림자, 너의 운명 네가 당도하는 까마득히 먼 곳까지 늘어나리라
그러니 앨리스, 여기서 흐느껴라 이상한 나라가 잠기도록. 깊어진 수심 속에서
더러운 행위가 떠오를 것이다. 설령 지구 전체가 그것을 찍어 누를지라도. 사람들 눈앞에 떠오를 거야
3 창백한 얼굴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은 너의 친구, 밤안개 속에서는 누구의 어색한 표정도 외로워지지
않는다. 더럽고 흩어진 머리카락으로 다가온 여자가 흘러가는 것에 머리를 감는다 새의 젖은 음악, 가슴들, 녹색 물방울로 된 딱정벌레들 잘 마른 구석에서 홀로 고독을 떠올릴 겨를이 우리에겐 없구나 이곳에선 거짓과의 이별이 그토록 가엽기 그지없다
망설이는 몸짓으로 흰 달들의 분수가 솟아오를 때 이 추락의 말을 믿으렴 습지의 부드러운 침대에 영원히 너를 눕힐 것이다 어디에서 떨어지든 슬픔의 품
여름이 끝나갈 무렵 너는 단어 43개를 건네받았다. “가슴, 가여운, 감는다, 감춘, 거짓말, 고독, 그리도, 그지없다, 깊어진, 까마득한, 눈동자, 달, 떠나고, 떠올리면, 망설이는, 밤안개, 번민, 병든, 부재, 비극, 수치심, 슬프겠는가, 습지, 심장, 어둠, 어색, 얼굴, 오로지, 완곡한, 외로워, 우울한, 운명, 웅크리고, 응시하며, 이별, 진실, 창밖, 창백, 침대, 품, 환희, 흐느껴, 흩어지고.” 너는 그 단어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쏟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단어들을 모두 사용해 시를 한 편 써주면 좋겠어요.” “음, 어려운 일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깔깔깔, 함께 웃는다. 그리고 너는 이 단어들이 너의 리듬이나 감각들과 섞이며 어디로 쏟아지는지 보여준다. 자, 조금 뒷면 너는 알게 될 거야. 이 단어들이 어디로부터 쏟아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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