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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14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넷째 주일)
우리 삶에 변화가 없을 때
시119:33~40/눅13:6~9
지난 한 주간 동안 뉴스에 메인으로 등장했던 두 개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산 여중생 살해범으로 지목된 김 아무개가 체포되고 경찰에서 조사받고 있는 소식이었고, 또 하나는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일이 한 주간에 거의 동시에 일어나면서 엄청난 뉴스거리를 쏟아냈습니다.
부산 여중생 살해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 아무개에 관한 소식들은 황량하고 무섭고 우리 몸이 오그라지는 것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만나서 마치 매스콤은 실황 중계를 하듯이 선정적으로 뉴스거리를 쏟아낸 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어린시절부터 자라온 배경, 그리고 최근의 행적까지 그의 삶이 그대로 드러났고 이것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한 이전의 행적만 보아도 그가 끔찍한 짓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우리 사회는 그 한 사람에게 우리 자신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 투사할 자격이 있을까요? 이 사건이 정말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런 사건이 생길 때마다 범죄자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끝내야 하는가요? 정말 우리는 “사람답게”, 짐승처럼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람답게 산다는 의미가 뭘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법정 스님이 해주시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은 다시 한번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서 옷깃을 여미게 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친근한 글들을 많이 남겨서 우리에게 친숙한 면도 있겠지만, 그러나 자신의 글처럼, 맑고 향기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한 구도자의 죽음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이렇게 달려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 주는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누룩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하나님의 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 발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어떤 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로또 복권 당첨되듯 달라지는 것을 바라는 신앙이 아니고, 갑자기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웅장하고 화려하게 세워지는 것을 바라는 신앙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텃밭에 겨자씨가 자라 푸성귀가 되듯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존재합니다. 누룩이 가루 서 말 속에 들어가 엄청난 부패 덩어리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속에 하나님 나라가 존재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오늘 비유는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13장1절 이하에 나오는 두 가지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건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사건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한 가지 사건을 더 예로 듭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죄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아마도 이때 백성의 감정을 자극하는 사건이 두 개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나는 갈릴리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의 희생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총독 빌라도가 그들 중에 얼마를 학살한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던 성벽 망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깔려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바리새파의 인과응보적인 사상에 따르면, 그 희생은 어떤 특별한 죄로 인한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고, 이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예시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이 사건을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와 연결시킵니다. 한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3년째 열매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땅만 버리는 이 무화과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는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버리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앞의 사건이 회개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도 회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이 비유의 의미를 회개를 기다리기 위해 심판을 일정기간 지연하신다는 의미로 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특별히 누가가 이 말씀을 기록하던 시대에 묵시적 신앙은 일반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곧 세상이 끝날 것이고 그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곳곳에서 이런 분위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이런 구절을 볼 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곧 세상이 끝난다는 그런 분위기에서 살지 않습니다. 물론 일각에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리는 늘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소리에 순간 섬찟함을 느낄지 몰라도 이런 것에 우리 일상이 지배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만일 누군가가 세상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늘 갖고 있다면 정신과에 가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종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또 우리가 진정한 종말 신앙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이 더 깊이 자라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성경의 종말신앙은 세상이 곧 끝나니까 더 이상 세상 일 생각하지 말고,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일상 안에서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가 내가 이 세상에서 맞는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말 신앙은 우리의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밀접히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비유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비유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당신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각별한 사랑을 표상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처음 듣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 불쌍한 나무, 삼년 동안이나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이 무화과나무를 무화가가 주렁주렁 달리는 울창한 나무로 만들어 주시리라 기대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병든 나무 주위에다가 넉넉히 거름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름이라는 한결 부드러운 낱말을 쓰고 있지만, 이 거름은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똥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무화과나무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다음 해에 주렁주렁 무화가가 열릴까요?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기대를 우리에게 갖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나무 둘레에다 거름을 듬뿍 주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기색은 전혀 없습니다. 이 나무와 이 나무가 처한 곤경은 일상생활을, 특히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실패로 끝나거나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성장하겠다고 노력했지만, 기도는 마른 먼지처럼 건조할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성장하기는커녕 더 옹졸해진 것 같은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잘못들은 계속 이어지고 사람들은 우리를 터무니없이 비난하고 절망은 갈수록 깊어만 가게 되면 일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 생활은 거의 죽은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비유는 그저 꾸준히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비유는 인간 본성과 사람들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당혹스런 질문을 통과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온갖 종류의 시련을 참아 견디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걱정 근심에 시달리고, 발이나 다리가 부러지고,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통스런 이혼을 체험하고, 경제적인 파산에 직면해야 하는가?”
이 말을 다시 말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내 인생의 역경들은 하나님께서 내 도덕적인 과오들을 벌하시는 징벌의 표시인가, 아니면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하는 시련인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높은 완성의 상태로 내게 보답하시거나 어떤 기적적인 도움을 통해 나를 괴로움에서 건져내 주시리라 믿어도 되는걸까?”
오늘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쪽에도 기대를 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인 엄청난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이런 것은 거의 오지 않습니다) 꾸준히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우리의 열망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주님의 법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시편 중에서 가장 긴 시편이기도 합니다. 시편119편을 여러분 가만히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법을 등불 삼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깊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법은 주님의 율례, 주님의 계명, 주님의 증거, 주님의 길, 주님의 규례 등으로 바꾸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같은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들이 가리키는 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기쁨을 누릴 길은 이 길 뿐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증거에만 몰두하게 하시고, 내 마음이 탐욕으로 치닫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 눈이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주님의 길을 활기차게 걷게 해주십시오.”
여기서 시인은 주님의 법을 따라 걷는 삶을 살겠다는 소원을 아룁니다. 이 시인은 주님의 법이 자신의 삶에 어떤 뜻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좁은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법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살 수 있게 되고, 가장 인간답게 살게 되며, 가장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음을 시인은 수없이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똥은 꾸준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겸허한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신뢰하는 겸허한 신앙은 주님의 법은 그저 일상 안에서 꾸준히 받아들이고 깊이 묵상함으로써 점점 자라납니다.
여러분,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에 스며들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끊임없는 노력과 참을성 있는 인내심을 보시고, 우리를 어루만져 피어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노력과 인내로써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주님의 지극히 온유하신 사랑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법정스님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산에는 꽃 피네)
우리 기독교인들도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첫댓글 하나님을 향해 나가려는 우리의 열망.....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라는 말에 아멘 합니다!!!
우리의 노력과 인내로써가 아니라 주님의 온유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어 피어나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