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牡丹)
모란(Paeonia suffruticosa Andrews)의 다른 이름은
목단, 목작약, 모란꽃이라고 한다. 뿌리껍질을 목단피라고 부른다.
모란은 아득한 옛날부터 오랜 세월 동안 화중왕(花中王: 꽃가운데 임금이란 뜻)으로 군림해 왔다.
활짝 핀 꽃 모양이 어느 꽃보다도 크고 복스러워 보이며 호화로우리 만치 아름다우면서도 야하지 않아
마치 군자의 상(相)을 대한 듯하다 해서 화중왕이라 했다 한다.
그래서 모란은 대개 부귀(富貴)를 나타내는 꽃으로 일컫는다.
모란이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에 끼친 영향은 단적으로 표현해서,
병풍의 그림에는 반드시 부귀(富貴)를 기원하는 뜻으로 그려졌고
한옥의 벽장문에는 어김없이 모란 그림이 그려진 벽장지를 붙였던 것으로 미루어
얼마만큼 모란을 좋아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안뜰이나 후원에는 반드시 모란을 심었고 도자기의 도안이나 나전칠기의 도안 등으로서,
장롱, 문갑뿐 아니라 어느 집에나 한두 개씩 있는 백항아리의 모란 그림은
모두가 부귀를 기원하는 순박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있었던 것이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옛날 수나라의 양제 때부터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당나라 때는 궁중 뿐 아니라 민가에서도 재배가 성행했다고 한다.
모란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는 다른 꽃과는 달리 뚜렷한 기록과 함께 흥미있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진평왕 때 당태종으로부터 홍(紅), 자(紫), 백(白)의 3색 모란을 그린 그림과 함께
그 씨 3되를 보내왔는데 그때 아직 어린 공주였던 선덕여왕은
『꽃은 아름다우나 벌,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으리라』고 하였다.
과연 그 씨를 심어 꽃이 핀 후에 보니 향기가 없었으므로 공주의 명민한 선견을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또 화왕계(花王戒)에 얽힌 일화도 있다.
신라 신문왕때 설총(薛聰)은 임금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명을 받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모란이 백화의 왕일 때 많은 꽃 중에서 장미라는 요염한 가인(佳人)이 아양으로 아첨하니
길가의 할미꽃이 허리를 구부리고 화왕에게 충언직간을 했는데
요염한 장미에 홀린 화왕은 할미꽃의 충언이 옳은줄 알면서도 장미에게 끌려 갔습니다.
그것을 본 할미꽃은 「왕의 총민(聰敏)이 의리를 명찰하시리라 믿었는데 정작 가까이 와서 보니 그렇지 못하외다.
예로 인군이 요염을 가까이하면 충직을 소원하게 되는 것이니 필경 패망을 부르지 않을 리 없습니다.
서시 같은 요희가 나라를 뒤집고, 맹자 같은 현인이 뜻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즉 신(臣)인들 어찌하리까」하고
사의를 표하므로 화왕이 그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자
신문왕은 의중유의(意中有意: 뜻 속에 뜻이 있다)의 풍유(諷諭: 풍자와 비유)가 왕자의 계(戒)가 될 만하니 글로 만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화왕계"이며 이로써 설총은 비유하여 풍간(諷諫)했다는 것은 신라역사에 모란이 남긴 아름다운 고사다.
모란, 즉 모란(牡丹)은 당나라 때 일명 목작약(木芍藥)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꽃은 작약과 흡사하며 줄기는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작약이 약초였던 것처럼 모란도 관상용과 약용의 비중이 백중했던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모란의 근피는 민간약으로 요통, 월경불순, 냉증, 진통, 해열 등에 쓰였으며 잎은 화상에 쓰기도 했다.
신라 때 들어온 모란의 기록 외에도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본국으로 돌아올 때
원나라 천자가 진귀한 화초를 많이 주었는데 그중에 모란의 황, 백, 적, 홍 등도 있었다고 하니
모란은 이미 그때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란의 다양한 색깔에 얽힌 일화로는 중국의 시인이며 경세가인 한퇴지(韓退之)와
학문하기 싫어하는 조카 사이에 얽힌 것이 있다.
하루는 한퇴지가 조카를 꾸짖으며 『사람은 한 가지 재주는 있는데 너는 무슨 재주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모란만은 뜻대로 가꿀 수 있다』고 대답하며 『마침 모란이 피고 있으니 한번 색다른 꽃을 피워 보이겠다』하고
1주일만 여유를 달라고 했다. 장막을 둘러치고 그 속에서 1주일을 지낸 후 장막을 거두면서
『이중에서 한 포기의 꽃이 피거든 잘 살펴보시라』고 말하고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1개월 후 꽃이 피어 살펴보니 꽃 속에 글씨가 한자씩 나타났는데
14송이에 자기가 어려서 고향을 떠나올 때 지은 시구였더라는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중국 사람은 모란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모란꽃 밑에서 죽는 것은 풍류롭다고 하여
「모란화하사주귀세풍류(牡丹花下死做鬼世風流)」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그것을 잘 나타낸 것이 명나라의 탕임천(湯臨川)이 지은 희곡 「모란정환혼기」이다.
내용인즉 두보(杜寶)의 자손인 남안부 태수 두보(杜寶)의 딸 여랑(麗娘)이
후원에 있는 모란정에서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본 청년을 사모하다 병이 되어 죽고 말았다.
유종원(柳宗元)의 28대손 유춘경이 광동에 가 있을 때 꿈에 매화나무 밑에 서 있는 미인을 보고
그녀를 사모하여 이름을 몽매(夢梅)라고 고쳤는데
그가 과거보러 가는 길에 매화암(梅花菴) 속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있다가
그 암자 뜰에 있는 돌 틈에서 여랑의 화상을 발견하고는 그 여자가 꿈속에서 본 여인과 똑같은 데 놀랐다.
이로부터 몽매는 여랑을 더 사모하게 되었으며
여랑은 죽은 지 3년 만에 저승에서 판정에 의해 다시 인간으로 살아나 몽매와 함께 임안으로 가서 산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라 했다는 것이다.
첫댓글 첫번째꺼요^^
어머.. 이뻐요. 저는 현수막에 '첫돌'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는게 아주 맘에 들더라구요.
우~와 넘 이쁘네여~~ 저도 첫번째꺼여~^*^
저두 첫번째가 이뿌네요.ㅎ
첫번째가 이쁜데 테두리가 좀더 찐해도이쁘겠어요
첫번째가 풍성한것이 더 좋네요.. 근데, 그러면 돌상이 심플하게 가야겠어요^^
1번 킹.왕.짱...!!! 역시 녹슬지 않은 쥔장의 쎈스...계속 대박행진하세요
^^ 얘네 전통돌상으로 나올꺼애여... 현수막은 두가지다~ 출력했는데~ 소품으로 쓸 방짜유기가 너무 비싸서... ㅠㅠ 전통소품 왜이리 비쌀까용... 그거 또 사면 얼마나 버틸지... 흑~
저도 첫번째꺼에 한표요!
저역시 첫번째가 더 나아 보여요.. 목단은 화려해 보이는게 이쁜거 같아요.. 엄마표 전통돌상으로 할려니 병풍이 문제 였는데..여기에 있었네요..^^*
실사 언제쯤 볼수 있을까요? 실사 보고 결정 하고 싶어요~ ^^;; (9월20일인데.. 가능할까요? )
이거 실사나 후기 사진 볼 수 있을까요?
사용후기요~~ 정말 화사하고 좋았어요^^ 집중하기 좋은 분위기를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