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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슴속 뜨끈하고 묽숙한 그 무엇을 쓰고파
윤남석
충북 영동 출생
2008 동양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분 당선
0시 40분, 부산발 무궁화호가 치렁치렁한 밤의 치마폭을 슬며시 들추며 열사흘 달빛이 여리게 비추는 김천 역사 안으로 다가온다. 20여 년 만에 해 보는 야간열차 여행이어서인지 둥그스름한 달덩이처럼 부푼 마음은 벌써 강릉으로 달려가고, 다시 비린내 질퍽한 주문진항으로 내달림 치고 있다. 김이 뿌옇게 서린 창을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니 칠흑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열차 안의 흐트러진 정경이 반사되어 열차의 진동에 미세한 반응을 일으킨다. 그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날갯짓을 치는 내 자신의 못난 그림자가 고정된 차창의 앵글 속에 갇혀 끊임없이 쫓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상념에 잡힌 미미한 존재를 거울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던 유리창은 졸음에 겨워 꾸벅꾸벅 이따금 덜컹거리기 일쑤이다.
여행은 완행이라는 말에서 더 실감이 나는 것 같다. 밤새도록 숨 가쁘게 달려온 기차는 여명이 깃드는 강릉역에서 기어코 기진맥진 축 늘어져 버리고, 이내 김빠진 사이다처럼 밍밍하게 사람들을 플랫폼에 쏟아 놓는다. 해장국으로 허한 뱃속을 다스리고 곧바로 주문진행 버스에 올랐다. 갓 잡은 생선의 힘찬 팔딱거림보다도 더 팔팔해 보이는 땀 냄새가 주문진항에 찐득찐득 배어 있다. 이른 아침이라 썰렁하지만 후줄근한 땀 냄새는 낯익은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진짜 사람 사는 냄새이구나 싶다.
굵은 뿔테 안경 너머로 역동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연방 셔터를 누르는 서울에서 온 중년 사내를 보았다. 교통방송 진행자인데 이렇게 사람 사는 맛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기를 좋아한단다. 그러기에 그는 사람 사는 멋을 어지간히도 꿰뚫고 있을 거라 생각되어졌다. 치열하게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을 카메라 앵글 속에 담으며, 그들의 삶에서 은은하게 묻어 나오는 생기를 산들바람처럼 흠뻑 들이켜고 있었다. 수필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거겠지. 진솔한 삶의 자락을 카메라앵글 속에 반영시키듯 각색 없이 저렇게 투명하게 비추는 거겠지. 그래서 소금기 절절히 밴 바닷바람마저도 솔 향기 머금은 산바람처럼 상큼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거겠지.
제대로 된 멋진 수필 한 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누구나 할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 또한 치열한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운이 남는 글을 쓰려면 수많은 단련이 필요하겠지요. 나름대로 물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유추적 사고를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혜안이 그리 넓지 못하다는 걸 많이 실감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부분입니다.
글 한 편 쓰기가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수필이 어렵게 여겨지곤 합니다. 갈수록 그 체감도가 더 깊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각고면려의 자세로 한 문장 한 문장 후벼 파지마는 다시 읽어 보면 미흡한 면이 많아 보입니다. 낭송도 고려하는 편이라 매끄럽게 문장을 가다듬어 보지마는 성에 차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수필이 어려워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수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수필만큼 자기의 생각을 고스란히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필의 발전 방향과 수필 이론을 펴시지마는, 무엇보다 수필은 가슴속에서 배어 나오는 뜨겁고 진한 그 무엇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습니다. 그 뜨끈뜨끈하고 묽숙한 그것이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생생한 글을 쓰려 아등바등대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어설프지마는 감흥을 자아내기 위한 연마에 게으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 진한 향훈이 감도는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당│선│작│품
삼강주막 외 4편
윤 남 석
흙바닥으로 된 주막집 대뜰 위에 구두가 마구 헝클어져 있다. 구두 바닥엔 하나같이 질척한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아침나절까지 얼어붙었던 마당이 녹으면서 구두 굽에 진흙을 더버기로 덧붙여 놓은 것이다. 잔칫집처럼 왁자한 웃음소리가 지게문 틈새로 삐죽이 새어 나온다. 방 안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터라, 마당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구석에 피운 모닥불의 매캐한 연기가 아스스한 기운을 애써 밀어내려 허공에서 발버둥질한다.
주막은 내성천과 금천이 곡류를 타고 진행하다가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강변에 터를 잡고 있다. 그래서 삼강(三江)주막이라 불린다. 쓰러져 가던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헐어내고 말끔히 정비하여 다시 옛 정취에 흠뻑 빠지도록 복원해 놓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구경 온 사람들로 주막 마당이 온통 수선스럽게 들끓는다. 얕은 겨울 햇살이 드리운 툇마루에 옹기종기 앉아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 좁다란 봉당 위에 올라서서 단체사진을 찍는 몸놀림들로 북적인다.
빛깔 고운 막걸리와 뭉텅뭉텅 썰어 놓은 두부 안주가 따끈한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평상 한가운데 놓인다. 막걸리를 안다미로 따른 대폿잔을 들이켠다. 걸쭉한 맛이 달곰삼삼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고향에 가면 막걸리를 말 통으로 파는 도갓집이 있다. 물이 좋아서인지 술맛에도 그 기막힘이 진하게 배어 있다. 도가에서 받아 온 바로 그 막걸리 맛이다. 두어 잔 더 들이켜니 허전했던 뱃속이 알짝지근해지고 후련해지는 기분마저 든다.
가지런한 용마름이 새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암탉이 알을 품듯 으늑하게 감싸고 있다. 가칠한 시멘트벽도 걷어내고, 토담으로 본디의 모습을 찾아 놓으니 한결 안화한 맛이 풍긴다. 주막은 조그마한 방 두 개와 다락, 툇마루, 그리고 ㄱ자형으로 구부러진 부뚜막이 있는 정지로 되어 있다. 나란히 걸어 놓은 검은 무쇠 솥이 아련함을 더한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면 두 갈래진 방고래로 불길이 들어가게 만들어졌다. 불길은 구들을 데우다가 토방 양쪽에 놓인 연통 없는 굴뚝으로 슬금슬금 빠져나와 봉당을 시커멓게 그을려 놓는다.
정지로 들어가는 판장문 옆의 흙벽에는 예전에 글을 모르던 주모가 그어 놓은 금들이 족족 그어져 있다. 주모가 외상값을 도표처럼 그어 놓은 금이었다. 주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빗금들은 꼬챙이로 그어 놓은 것이 아니라, 애환이 깊게 서려 저절로 갈라지거나 곪아 터진 것 같아 안쓰럽기만 하다. 차츰 길이 뚫리고 나루를 찾는 나그네가 줄어들어 주막이 서서히 쇠퇴하자 주막쟁이의 한숨은 날로 음울해졌고, 게다가 콘크리트 다리가 우뚝하게 놓이자 절로 깊어진 느꺼움은 벽에 그어 놓은 빗금마냥 도도록하게 골이 패었다. 정지를 드나들 때마다 쳐다보게 되는 성냥개비만한 크기로 표시된 촘촘한 빗금의 흔적은, 번창했던 지난날을 이따금씩 되새기게 하며 더욱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약적으로 발달된 교통수단은 기존의 원시적인 교류 질서를 퇴색시켰다. 시원하게 쭉쭉 뻗은 도로들은 산업화의 상징처럼 곳곳을 뚫어놓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보니 주막은 옆으로 비켜 앉을 수밖에 없었고 점차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이름난 대처나 고개 아래, 나루터에 있던 주막거리는 갖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되는 장소였다. 걸어가든, 가마를 타고 가든, 말을 타고 가든 허기를 느낄 때쯤이면 어김없이 주막은 자리 잡고 있었다. 주막은 막걸리와 장국밥으로 허기도 메워 주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길손에게 잠자리까지 제공되었다는 일이다. 주막에서 술이나 밥을 사 먹으면 으레 봉놋방에서 여로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도 하였다. 대개 도착순으로 뜨듯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되고, 별별 사람들이 속속 자리를 잡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자연스레 많은 정보들이 교환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여타 숫막과 같이 삼강주막도 영무했었으나, 지금은 흑백사진처럼 오련한 기억의 뒤안길로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높다랗게 구릉처럼 솟은 59번 지방도는 마을과 주막을 두 동강 내었고, 소금배가 드나들었다던 나루터는 아예 흔적조차 없다. 그 위엔 우람한 교각이 시린 강물에 발목을 담그고 끄떡도 않을 태세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강물은 묵묵히 흐른다. 잔설이 아록다록 묻어 있는 산이 흘러가는 강물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너무나 얕게 흘러가는 물결은 나루터 자리에 모래톱만 널찍하게 구축해 놓고는 바쁘게 흘러간다. 낙동강을 따라 올라오던 소금배가 접안(接岸)하던 나루터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다. 쉬지 않고 흘렀을 강물은 예전의 그 강물이 아니다. 번화했던 나루터와 주막, 그리고 인심 후했던 주모의 가슴속까지 오래 전에 저 강물이 껴안고 한없이 흘러가 버린 것일까.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파르께한 나루터의 잔재를 야금야금 갉아먹어 버린 강물이 그 느즈러진 강턱에 하얀 모래만 지천으로 쌓아 놓은 것일까.
스산하게 부는 찬바람이 방죽의 마른 풀들을 일렁이게 한다. 툇마루에 앉아 나루터가 있는 강 쪽을 바라보며 시름겨운 일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기도 했겠지만, 지금은 범람을 막기 위해 강둑을 높이는 바람에 툇마루에 올라서서 뒤꿈치를 들고도 강이 보이지 않는다. 59번 지방도가 놓인 언덕바지가 삼강마을과 주막을 단절시켜 놓았듯,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다란 둔덕은 주막과 나루터와의 사이를 더 벌려 놓았다. 모난 데 없이 원만하던 소통(疏通)이 이렇게 단절(斷絶)되면 그 절단(切斷)된 면은 괴로움과 아픔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간극은 점차 커져 가고, 강 위에 놓인 교각이 차츰 높아질 때마다 주모의 억장은 하염없이 무너졌을 게다. 그 맺힌 응어리를 뽑아내지 못하고 떠났지만, 이제나마 다시 길손이 찾아드는 추억 속의 주막으로 부활하고 있음을 지켜보실 게다. 생전에 사무쳤던 시름겨움을 훨훨 풀어헤쳤으면 좋겠다.
나루터에서 배를 얻어 타고 쉬엄쉬엄 소통되던 모든 것이 슬금슬금 단절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그 단절된 자리에 높다란 교각과 구릉이 여지없이 한 번 더 절단시켜 놓고야 말았다. 그 절단된 상처 부위에 다시 사람들의 소통이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의 단절을 만들었던 그 절단의 상징물인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서 몰려온다. 절단시켰던 그것이 소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상처가 치유됐으면 싶다.
봉놋방에서 술판을 벌이던 손님이 외짝 장지를 열어젖히며 나온다. 방구들이 너무 뜨겁다며 슬쩍 엄살도 떨기도 한다. 진흙 잔뜩 묻은 구두를 챙겨 신고 화장실로 향한다. 한쪽에 만들어 놓은 재래식 화장실은 뜸을 엮어 세워 놓은 통가리 모양으로 생겼다. 올곧은 싸리나무로 얼금얼금 엮어 놓아 안에서 볼일 보는 행위가 어른어른 비치는 게 재미있기까지 하다. 앞으로 옛 뱃사공 및 보부상숙소를 복원하고 주차장과 전통 화장실을 설치한다고 하니 그때쯤이면 더욱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뒤뜰에는 200년이 넘었다는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앙상궂은 가지를 힘겹게 펴 들고 있다. 수간(樹幹)마다 부패된 수피를 걷어내고 인공 수피를 접합하는 외과 수술을 받은 모양인지 군데군데 수술 자국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동안 삼강주막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굽어보며 호읍(號泣)할 일도 잦았지만 속으로 삼키느라 병이 날 만도 했을 것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영험한 힘을 지닌 신령한 나무로 숭상받기도 했다.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한다. 다시 주막이 복원되었으니 길상목(吉祥木)으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갖고 꿋꿋하게 자랐으면 싶다. 그래서 삼강나루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의 가슴에 좋은 기운을 담뿍 심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간절히 가져 본다.
화농(化膿)
어제 아침나절에 목뒤에 난 종기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다. 대엿새 깐작거리던 골칫덩이를 제거하니 후련하다는 느낌이 곱실거려지기까지 한다. 목덜미를 왼손으로 움켜쥐고 병원 문을 나서니, 매서운 바람이 화드득 달라붙는다. 방금 전에 외과 수술을 해서인지 으슬으슬 한기가 전신을 훑어 내린다. 이렇게 두어 시간을 손으로 꽉 누르고 있어야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문다고 한다. 며칠 전부터 목덜미에 염증이 생겨서 농(膿)이 가득 들어차 빨갛게 달아오르고 아파 왔던 것이다. 설 연휴인지라 월요일쯤에 병원에 가 봐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 유상(油狀) 물질로 가득 찬 굳기름샘이 점차 단단해지기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화농 덩어리가 작으면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무르익어 터지기도 하지만, 곪을 대로 곪아서 두꺼운 지방 혼합물 따위가 자꾸만 뭉쳐지는 것 같아서 배액(排液)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꺼 놓았던 휴대폰을 켜니, 새로운 방송 메시지가 왔다는 진동음이 울린다. 한파나 대설주의보 등 기후 상황을 미리 알려 주는 메시지 정도로만 여기고 무심코 들여다보니, 다름 아닌 실종 어린이를 찾는다는 앰버경보(Amber Alert)였다. 울산에서 실종된 6세 어린이를 찾는다는 방송 메시지였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일어난 어린이 살해 사건을 계기로 도입된 앰버경보는, 실종 아동이 발생할 때 고속도로나 지하철 등의 전광판과 방송, 휴대전화 등으로 신속하게 실종 상황을 전파하는 경보로 전국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조기에 실종 아동을 되찾기 위해 도입된 시스템이다.
가끔씩 휴대폰을 통해 실종 아동이나 미아, 치매 노인, 가출 청소년과 정신지체아 등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받는 편이다. 어린이나 노약자들이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 그래서 앰버경보가 필요 없는 세상은 우리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어쩌면 사라져야 할 병폐 같은 전갈이 여전히 끈질기게 전파되고 있다. 그런 문자 메시지가 없는 사회는 진정 요원한 것일까.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골고루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색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메시지는 반유동성 유상 물질 마냥 끊임없이 분비되는 형편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얼버무릴 수도 있으나, 자꾸만 분비되어 파괴된 세포찌꺼기 같은 물질에 더 이상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화농된 상처 부위는 물렁물렁해지면서 고름으로 가득 들어차기 때문이다. 그 누르무레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고름을 밖으로 배액(排液)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단단해지고 비곗덩어리처럼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체통에서 우편물을 챙겨 오다 보면, 전기 요금 고지서나 건강보험료 영수증에서도 실종자를 찾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납부고지서를 받았을 때 우연찮게 훑어보든지, 공과금 수납창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무료함에 잠시나마 눈여겨본다면 좀 더 많은 이들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만큼 관심 어린 시선을 절절히 요구한다. 월말마다 요금 고지서를 찬찬히 훑어보고, 이렇게 발송되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만이라도 주의 깊게 본다면 을씨년스런 날씨만큼이나 각박한 우리 사회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 넣는 입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한다.
오늘도 오후 늦게 병원에 들러 어제 수술한 부위를 소독하고 항생제 주사를 팔뚝에 맞았다. 이렇게 며칠 더 치료하면 지긋지긋한 화농 덩어리가 사그라진다니 갈급령나던 마음이 좀 씻가시는 듯하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이 귀밑 살쩍을 자리자리하게 만든다. 살쩍을 손끝으로 쥐고 세게 당기는 느낌이다. 순간 짧은 살쩍 몇 가닥이 뽑혀 버린 것만 같다. 급히 타전된 울산에서 발생한 실종 어린이의 뉴스였다. 6살 난 어린이는 안타깝게도 이미 숨져 있었다. 그 어린 꽃을 무참히도 꺾어 버린 사람은 바로 계모였다. 평소 고집이 세다는 이유로 수시로 구박을 하더니, 끝내 주검을 종이상자에 담아 논두렁에 놓인 폐드럼통에 넣고 불을 지르는 엽기적인 범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런 후에 아이가 집 근처 오락실에 놀러 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며 태연하게 실종 신고를 한 것이다. TV에 나와서는 제발 아프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라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심하게 자극시켰던 그녀의 뻔뻔스러운 행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멍한 표정으로 전단지를 돌리는 처연한 모습에서 대다수 국민들은 남의 일 같지 않은 심정으로 걱정을 했었는데 그게 허위 실종 신고였다니, 인면수심이 바로 이런 것이던가. 전국적으로 발령된 앰버경보에 눈동자 둥글번번히 굴리며 초조함에 마른침을 삼켰던 우리들의 맥 빠짐은 또 무엇인가.
아낌없는 사랑을 마구 퍼 주지는 못하더라도 콩쥐팥쥐와 장화홍련에서 보던 그러한 계모 상은 절대 보이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래도 친모보다는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 덜할 수도 있지만, 이번 범행을 저지른 계모로 인해 혹여 재혼해서 아이들을 잘 키워 보려는 다른 선량한 계모들의 가슴을 짓이겨 놓는 일이 혹여 있을까 심히 우려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성장한다. 그렇게 자란 신선한 사랑은 커서도 쉬이 변질되지 않는다. 그만큼 부모의 역할이 중차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질 만능으로 치달으면서 껍데기로서의 집이 조각되었고, 가정의 붕괴 현상이 눈에 맞갖잖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겉허울 좋아 보이는 집이 아니라 사랑이 담겨 있는 집이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느끼고 배움이 있게 하며, 희망을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자라나는 하루가 되게 하고, 하루하루가 더욱 슬기로워지는 하루가 되게 해 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안양에서도 두 명의 여자 초등생이 실종되는 일이 있었는데, 자꾸 이러한 사건이 터지고 괴기스런 범행이 여지없이 저질러지고 있으니 애잡짤한 감정과 분함을 금할 길이 없다. 어린이가 더 이상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을 가꿔 줄 의무가 어른들에게 쥐어져 있는데도, 세상이 무력감에 빠져 있으니 참으로 가통할 일이다.
우리 속담에 “고름이 살 되랴”라는 말이 있다. 이미 그릇된 것이 잘될 리가 없다는 뜻이다. 곪아서 생기는 누르스름한 액체가 건강한 혈액과 맞닥뜨리면 흰피톨이 침투되고 모세관이 확장되면서 심한 통증을 수반하기에 적시에 뽑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염증이 생기면 고름을 배액(排液)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 화농(化膿) 부위에 새살이 돋고 항체가 형성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다시 예민하게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뎌지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염증들이 쉬지 않고 생겨난다. 서서히 벌그스름하게 발적(發赤) 되어 가는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고름으로 가득 들어찰지 모른다. 고름 덩어리가 생성되기 전에 조속한 치료가 필요하리라 본다. 염증을 다스리더라도 덧나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의 다감다정한 온정이 얹혀야 한다. 동맥혈이 한쪽으로 비정상적으로 모이지 않도록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썰렁한 날씨에 주위에 진자리가 없나 다시 한 번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져 보자. 우리 사회에 불만스럽고 소외되어 응어리지는 일이 없도록 간잔지런히 보듬어 주는 온기를 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찜찜한 기분이 쉬이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아 밖으로 눈길을 돌려 보니, 오늘따라 별도 없다. 창밖엔 칠흑 같은 어둠만이 건장하게 버티고 있다. 하얗게 질린 머릿속과 확연히 비교된다. 사람을 흐리멍덩하게 만든 뉴스의 여파는, 당분간 목덜미의 수술 자국을 꿰맨 실밥처럼 악물스레 물고 늘어질 것 같다. 고개를 젖힐 때마다 간간이 따끔거려 오는 통증은 그런대로 참을 만하나 움츠러든 가슴은 스산한 밖의 기온만큼 여전히 춥다.
속긋
모레가 이십사절기의 스무째 소설(小雪)이니 그야말로 김장철인 셈이다. 예전에는 입동(立冬) 전후에 김장을 하였으나 요즘은 조금씩 늦추잡는 편이다. 도시에서는 보통 이보다 더 늦게 김장 날짜를 잡기도 한다. 물이 얼어 손이 시린 것도 아니고, 또 맵짠 바람에 덜덜 떠는 일도 없이 뜨듯한 실내에서 하기 때문에 그리 서둘지를 않는다. 하지만 마당에 펼쳐 놓고 후딱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시골 사람들은 날 춥기 전에 하려고 아무래도 서두르게 된다. 그래서 가을걷이가 끝나면 김장할 일부터 챙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이 바로 김장하는 날이다.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니 것과 우리 식구가 먹을 김장을 같이 하기 위해서 오후 나절에 서둘러 오게 된 것이다. 몇 년째 이렇게 김장을 같이 해서 나눠 먹고 있다. 도시에서 김장 재료를 구입하여 따로 담는 것보다 김장 비용이 저렴할 뿐더러 시골에서 홀로 하시게 될 어머니의 일손도 거들어 주게 되니 겸사겸사 괜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찬 기운이 어슬렁이는 마당에 나가 무심코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북두칠성이 정수리 위에서 예닐곱 별들을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다. 아래채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파리 다 떨어뜨린 호두나무 가지 사이를 비집으며 앙살을 부린다. 두 손 두 발 시커먼 장막 속에서 쿨렁쿨렁 흔들리던 차가운 바람이 그 앙살에 못 이겨 간질 밥을 잘도 먹더니만 그만 심한 재채기를 하고야 만다. 그 바람에 고개를 깍듯이 구부리고 빛을 아름드리 쏟아내는 나트륨 등이 흩뿌려지는 연기를 털어내려 급하게 사래질을 한다.
해질 녘까지 달이던 젓국 냄새가 밤공기에 잔뜩 배어들어 아직도 간간짭짤한 맛이 가시지 않은 상태이다. 체에 밭쳐져 진한 국물을 여태껏 고로롱고로롱 짜내고 있는 액젓의 처지가, 대소쿠리에 담겨 물기를 열심히 빼내고 있는 절인 배추와 아주 딱한 동병상련의 앓음을 하는 듯하다. 이파리가 펄펄 산 녀석들을 소금물로 푹 절였다가 뒷덜미를 휘잡고 다시 끌어내는 지드럭거리는 고문에 겨웠는지 바싹 야윈 몸을 하고 쉼없이 시척지근한 신물을 짜내고 있는 걸 보면, 어머니가 녀석들에게 오전 나절에 염장(鹽醬)을 확실히 질렀는가 보다.
혹여나 바람이 들까 봐 입동(立冬) 전에 발부리째 뽑은 무를 마당 한 변에 매몰차게 생매장시켰었다. 그것을 해거름 때에 캐내어 무청과 꼬랑지를 떼어내고 수세미로 살갗을 한 꺼풀 벗긴 다음, 다시 여지없이 서너 동강 내는 도마 위에서의 투덕거림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서 몸이 곱고 여린 무는 난도질은 일단 피했으나, 지독한 소금 버무림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이다. 녀석들은 동치미에 쓰이려고 선발된 출중한(?) 것들이었다. 그들의 파릇파릇하고 나긋나긋한 잎사귀는 보기 좋게 엮인 채로 서까래 아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녀석들의 애달픔을 그만 생생히 목격해 버려 번민에 싸인 답답한 속내를 아무래도 막걸리 한 대포로 무디게 덧씌워야만 할 것 같아진다.
밤새 할퀴고 간 두꺼운 서릿발이 쌀쌀맞은 햇살에 야금야금 그 발자국들을 지워내고 있다. 엊저녁 애달픈 눈물을 흠씬 짜내던 녀석들이 아리삼삼하게 옷을 입는 날이다. 곱게 이긴 마늘과 생강, 그리고 고춧가루에 채 썬 파와 무, 갓을 버무리고 젓국과 물엿으로 간을 슴슴하게 맞춘다. 젓갈의 비린내를 가시게 하고 김치의 숙성을 촉진시키는 고춧가루가 없던 옛날에는 맨드라미꽃으로 볼그스름한 빛깔을 냈다고 한다. 요즘은 검붉은 빛이 감도는 중국산 고춧가루가 우리네 입맛에 맛들임을 하려고 어지간히도 설치고 있는 편이다. 이미 대다수 음식점을 점령한 지도 오래되었고, 더 나아가 가정용 식탁을 힐끔거리고 있기도 하다.
벌겋게 버무려진 소(素)를 배추포기에 골고루 끼워 넣고 호동그랗게 감싸서 독에 한 켜씩 차곡차곡 집어넣는다. 아내가 돌돌 만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준다. 이것저것 허드레 치다꺼리를 잘해 주어서일까? 얼얼한 매운맛이 입속을 한바탕 오드드 감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담겨진 김칫독을 끙끙대며 광으로 옮겼다.
우리 집엔 김치 냉장고가 없다. 어머니도 그런 것을 싫어하신다. 이웃에서 도와주러 오신 아주머니는 도회지에서 사는 아들네가 장만해 주었다고 연방 자랑을 한다. 요즘 시골에도 거의 김치 냉장고 한 대는 들여놓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처럼 나 또한 김치 냉장고를 달갑게 생각지 않는다. 시골처럼 김장독을 땅에 파묻을 수 없는 도회지의 아파트 문화에 어울리게끔 생겨난 물건이 아니던가. 김치는 발효로 인해서 생기는, 넉넉하고 소담하고 구수한 맛을 갖가지 재료 속에 삼투시켜 속속들이 자연스레 흡수하게 한 선인들의 슬기에서 빚어진 음식이라고 본다. 발효의 속도는 기온의 고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항아리에서 알금삼삼 그 풍미가 뜸 들여진 음식임이 분명하다. 그 익혀지면서 뜸씨가 골고루 삭혀져 입맛 다심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겨울철은 기후적으로 김장김치를 익히고 저장하는 데 기막히도록 알맞다고 한다. 김치가 시어지면 시어진 대로 조리법이 있고, 철마다 오이소박이, 열무김치, 깻잎김치, 고들빼기김치, 얼갈이배추겉절이 등이 그 계절의 궁합에 맞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을 사시사철 먹기 위한 억지를 부린다는 것은 자연성을 외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어지게 한다.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할 과학의 발전이 그 인간의 정복욕을 서슴없이 채워 준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겨울에 온실에서 기른 참외와 수박을 먹는다는 것은 영양학적으로도 무의미하다고 하며, 엄동설한에도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만족감 외에는 아무런 그 무엇도 없다고 한다. 기계가 아무리 잘 숙성시켜 준다고 하나 인공적인 수단을 가하지 않고 대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순리가 먼저 아닐까?
인위(人爲)로 인하여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가 깨져 버리면 무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인간의 몸속에 있는 생체 리듬 속에서 쌓여져 가는 자연 치유력이라는 것은, 꾸밈이 없고 무리가 없는 조화 속에서만 생겨난다고 한다. 소박한 자연의 섭리 개념을 오늘날의 과학 시대에 그대로 전부 적용시킬 수는 없으나, 자연(自然) 순응(順應)의 무리 없는 생활이 자연 건강법의 기본이며, 그래서 하나의 균형 잡힌 소우주적(小宇宙的) 존재인 인체도 신토불이(身土不二)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내가 태어난 고향의 흙 성분에 맞게 길들여져 있다고들 한다.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여 주는 음식은 결국은 내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흙의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치 냉장고 안의 플라스틱 김칫독이 아무리 온도를 잘 받아들인다고는 하나 자연의 기운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흙으로 만든 김장독에 비할까?
순환하는 대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으려는 모든 자연스러움은, 순수한 자연의 법칙을 성실히 따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명제마저 어떤 문명스러움에 푹 빠져들고, 나른한 나머지 배부른 욕심은 자연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꿰맞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억지에 자연스러움은 아주 부자연스러움으로 바뀌게 되고, 그걸 자연스러움으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착각도 부지기수로 하지 않았을까 되새기게 한다.
방금 담은 김치가 점심 상에 놓인다. 예부터 ‘손맛 들인다’고 하여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일수록 그 맛이 뛰어나다고 했는데, 김치만큼 손이 많이 가는 찬이 드물 것이다. 우리 어머니들은 눈이나 코, 입보다도 마음으로 음식을 먹이기 위해 정성과 품을 들였다. 그 애틋한 손맛이 혀끝에 짜르르 감기기를 바라셨다. 어머니가 손으로 맞춘 음식의 간은 사랑의 전도이다. 그 따뜻한 체온이 스르르 녹아든 김치를 김치 냉장고는 고스란히 저장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 어머니들의 요리 철학은 결과보다도 그 과정에 들인 정성에 보다 높은 의미를 부여했다. 오랫동안의 눈짐작, 손짐작으로 가늠하던 그네들의 고결한 맛이 기계가 아닌 순리를 따르는 자연 속에서 어우러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맛이 자연스레 기억되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령
마당에 듬성듬성 돋은 그령을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얼마나 억세고 질긴지 잘 뽑히지가 않는다. 따가운 볕에 소곳해진 잔디 마당에 짙디짙은 날카로운 선형(線形)의 잎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게 어지간히도 눈에 거슬렸다. 몇 번이고 뽑아냈지만, 자그마한 싹의 기운이라도 남아 있으면 어김없이 되살아나 바소처럼 가늘고 긴 잎사귀를 치켜세우고 작달막한 잔디에 성가시게 치근대곤 한다. 이른 초봄, 잔디에 서서히 파르스름한 물감이 스며들 무렵부터 드문드문 고개를 빼죽 내미는 그령을 뽑아내고, 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들은 호미로 캐냈지만 끈질기도록 약약하게 군다.
잔디 마당에는 그령뿐 아니라 질경이, 토끼풀, 새포아풀, 방동사니, 피막이풀, 비노리, 바랭이, 마디풀 등이 여간 짜드락거리는 게 아니다. 정말 잡초와의 기나긴 싸움에서 이겨내야만 잔디밭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끔히 제거했는가 싶다가도 비가 촉촉이 내리면 땅속에 웅크리고 있던 싹이 간질간질 반응을 시작한다. 잡풀들의 질긴 근성은 마치 쇠심떠깨같이 불겅거리며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화사하거나 우아하지도 못해 시선도 끌지 못하고 눈 밖에 난 찬밥 신세지만, 대수롭잖게 마당에 돋은 잡풀들이 눈자위에 아니꼬울 정도로 거슬리게 하는 걸 보면 은근히 시선을 잡아끌려고 갖은 수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귀찮을 정도로 꾸역꾸역 줄기를 키워내는 왕성함에 그만 눈길이 잡풀들한테만 온통 쏠려지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땅에 달라붙어 무수히 밟히면서도 끄떡 않을 강한 맷집을 지닌 질경이와 토끼풀 그리고 그령의 참을성과 번식력은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하다.
줄 모양의 잎이 오밀조밀 뭉쳐서 발길 잦은 농로에 흔히 돋아나는 풀이 그령이고, 사나운 이리의 꼬리를 닮은 꼬투리와 아주 날카로운 잎을 세우고 거친 버덩에 우거진 것을 수컷에 빗대어 수크령이라고 한다. 농로 중앙에 핀 그령은 발길에 채고 리어카와 경운기의 바퀴에 밟혀서 볏짚으로 묶지 않은 얼갈이배추처럼 포기를 좍 펼치고 있지만,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그령은 다행히 수난을 피한 탓인지 나름대로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실 모양의 작은 꼭지 끝에 자색의 이삭을 주렁주렁 매달고 선들선들 나팔거린다. 편평한 잎깍지가 가랑이 모양으로 포기를 둘러싸고 움죽움죽 돋아나지만, 지독하게 밟혀서 납작해진 줄기는 억세어 소도 잘 먹지 않을 만큼 질긴 편이기도 하다.
그령은 죽어 혼령이 되어서도 풀을 묶어 은혜를 갚았다는 고사 성어 ‘결초보은(結草報恩)’의 바로 그 풀이다. ‘그령’이라는 이름도 줄기끼리 서로 묶거나 다른 포기의 줄기를 서로 싸잡아 매어 지나가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게 했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그러매다’가 원형이며 ‘그렁’이 ‘그령’으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때의 추억을 더듬으면, 그령은 보은(報恩)과는 거리가 먼 짓궂은 장난질에 이용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누군가 그령의 줄기를 매어 놓는 험상궂은 짓에 그만 벌러덩 엎어지기가 일쑤였다. 새참을 들고 그령이 빼곡히 들어찬 농로를 조심조심 가다가 묶어 놓은 줄기에 발이 걸려 넘어진 적도 있었다. 주전자 뚜껑은 댕그랑 튕겨지고, 미숫가루 타 놓은 시원한 물을 그령이 홀라당 뒤집어쓰고 벌름벌름 핥으며 멋쩍어 하던 표정이 떠올려진다.
농로를 걷다 보면 발아래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지천으로 널려 있는 그령은 강인하고 질긴 생명력을 특징으로 한다. 적당한 수분과 양분을 갖춘 양질의 토지에 자라는 한 포기의 풀이나, 흙먼지 풀풀거리는 척박한 길가에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돋아난 풀 한 포기도 삶의 의지는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조건상 애로점이 없이 자라는 풀보다는, 거칠고 메마른 땅에 돋아난 풀의 강인함이 훨씬 돋보이고 대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령은 환경 적응성이 커서 투박한 땅에도 뿌리를 곧잘 내린다. 뿌리의 흡착력이 강해서 땅속에 수염뿌리를 두둑이 내리고 줄기를 오달지게 키워낸다. 그래서 허술한 논둑이 터지거나 하면 농로에 있는 그령을 삽으로 조심스레 떠서 군데군데 옮겨심기도 한다. 그령이 땅을 여무지게 포박하여 든든한 토대를 구축해 주기 때문이다.
차가 지나다니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에만 자라는 식물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령, 질경이, 토끼풀 등이다. 차나 사람의 발길이 드문 곳에서는 잘 크지 않는다. 아마 무성한 키 큰 잡초들에게 밀려서 성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선택한 곳이 사람의 왕래가 잦은 길가이다. 길가에서 버텨내려면 차바퀴의 육중한 무게와 사람들의 발길에 자근자근 밟혀야 하는 설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질경이는 수레바퀴에 밟혀도 살아남는 풀이라 하여 차전초(車前草)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오죽했으면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리저리 채고 바퀴에 짓눌러져도 강하게 견디고 살아가려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라면 너무 모진 것은 아닐까.
예전에 보리 싹이 움트면 보리밟기를 했었다. 보리를 밟음으로써 웃자람을 막고 내한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잘금잘금 밟아 주었던 것이다. 밟아 준 보리는 건생적 생육과 세포액의 농도 상승으로 뿌리의 수 및 양을 증가시키고 뿌리를 길게 뻗게 하기에 보리밭을 고루 밟아 만만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다분히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농로 변에서 사시장철 엄청난 답압(踏壓) 스트레스를 견뎌야만 한다. 아무래도 밟히면서 살아가야 하는 기구한 삶을 타고났기에 끈덕지게 참아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밟혀야 자라는 가탈 많은 운명이지만 결코 생(生)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는 끈질긴 의지가 이들을 다독거리기에 또다시 줄기를 꿋꿋이 키워내는 것 같다.
그령을 한방에서는 지풍초(知風草)라 하여 뿌리 윗부분을 동통(疼痛) 등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무수히 밟히고 채었던 뿌리 윗부분을 쑤시고 아픈 통증을 완화하는 데 쓰였다고 하니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신경 자극으로 인한 아픔을 덜어 주는 비책은, 그령이 남몰래 겪었을 수없이 많은 고통이 속으로 삭여지면서 알금알금 트이게 된 억세고 질긴 집념이 무르녹아 있어서는 아닐까. 아무래도 밟히면서 깨닫게 된 그령만의 훤한 노하우가 진하게 묻어 나오니 약재로서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는가 보다. 밟혀 본 사람만이 그 심정을 안다고, 밟히면서 크는 그령의 굳센 의지가 그 아픈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마당에 돋은 그령의 줄기를 힘껏 쥐어뜯었다. 뽑히지 않으려고 뻗정다리를 하고 안간힘을 쓰며 버틴다. 이제껏 지독하게 밟히면서 쌓인 오기에 이골이 났을 법도 하다. 그렇게 쉽사리 뽑힐 것 같으면 답압(踏壓)에 진작 몸서리쳤을지도 모른다. 잔디 마당에 돋은 그령을 뽑아내는 이유는 잡풀이기 때문이다. 일삼아 굳이 심지도 않았을 뿐더러 잔디의 생장에 방해가 되므로 어쩔 수 없이 제초해야만 한다. 원치 않는 장소에 스스로 발을 디뎠으니 적당히 제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작물이든 뭐든 상황에 따라 잡풀이 되기도 하고 작물로 남을 수도 있게 된다. 그 원하고 안 하고는 오직 인간이 결정할 뿐이다. 인간의 마음에 원치 않음이 나타나면 곧바로 잡풀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령이 강둑이나 농로에서 자라고 있다면 잡풀이 아닐 수도 있다. 저절로 나서 자라지만 인간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령은 요란하지도 않다. 물론 누가 보아 주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주어진 땅에서 누구의 눈치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피고 지고 싶어 할 뿐이지만 인간의 소견 좁은 기준에 어느 정도 가합하여야 할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고상한 인간의 심기에는 더 많은 잡풀들이 자라고 있다. 이기심, 시기, 질투, 이간, 험담, 탐심, 교만 등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어떤 것은 그령만큼이나 억세고 질겨서 쉽게 뽑아내기가 힘들 것이다. 인간의 속내에 가득 찬 잡풀은 아마 완전 제초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그들먹한 잡풀도 제대로 못 뽑으면서 마당에 돋은 풀 한 포기에 집착하는 꼴답잖음에 왠지 겸연쩍어진다. 눈에 좀 거슬린다고 잡풀이라 규정짓고 곧바로 응징을 가하는 조급함에 쑥스러워질 뿐이다.
고추와 고양이
고춧가루 매운맛이 코끝을 얼얼하게 하는 콩나물국의 얼큰함을 에멜무지로 두어 숟가락 되작거리다가, 아이들과 주섬주섬 시골에 갈 채비를 서둘렀다. 고추도 따야 하고 농약도 쳐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엉겨 붙어 싸울 듯 줄기를 치켜세우고 있는 고추 고랑 사이를 조심스레 헤치며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고추밭은 농염한 교태를 부려 보려고 덕지덕지 새빨갛게 바른 립스틱을 차츰차츰 지워내고 있다. 바람날까 싶어 득달같이 달려온 발걸음에 그만 단단히 멱살을 잡히고 만 것이다. 막 고갯마루 올라선 말이 내뿜는 콧김처럼 씩씩거림에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고분고분 화장을 지워낸다.
드디어 홍역 앓듯 울긋불긋한 낯꽃을 띠던 하늘도 서서히 깨어나고, 팔뚝에 낀 토시에는 쓱 훔친 땀방울이 제법 흥건하게 들러붙어 축축해진다. 정부미포대에 가득 차면 리어카에 옮겨 실었다. 몇 번을 날라다 실으니 리어카 바퀴가 곱송그리며 실쭉한 표정을 짓는다. 붉은 고추가 가득 찬 포대가 실린 리어카 핸들을 잡아끌었다. 만선의 뿌듯함이 느껴진다. 득의한 마음으로 입항하여 마당에 늘어놓은 골함석에 쏟아 부었다. 아직 숨이 덜 죽은 그것들은 골함석의 노릇노릇한 기운에 할딱거리다가 서서히 전신 마취의 나른함에 빠져든다.
헛간에서 분무기와 농약 등을 챙겼다. 이렇게 고추를 따내게 되면 어김없이 농약을 쳐야만 한다. 녀석들이 따사한 볕살도 받아먹고 달콤한 빗물도 받아먹지만, 농약도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보름에 한 번 정도 고추를 따내면 농약을 먹고 싶다는 눈짓을 보이곤 한다. 그 지독한 농약을 안 주기라도 하면 된서리 친 늙은 호박처럼 폭삭 사그라진 꼴을 하고서 고약한 소가지를 부리게 된다. 재작년엔 제때 농약을 안 치는 바람에 탄저병에 걸린 고추들이 잔뜩 곪아 오도깝스런 꼬락서니를 보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고추를 따자마자 농약을 친 덕분에 시퍼런 고춧잎과 어린애 주먹만한 고추를 된서리 올 때까지 딸 수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강하게 콧속을 움씰 후벼대는 살충제와 살균제를 분무기에 두어 번 병뚜껑으로 따라 넣고 기다란 막대기로 고루 섞었다. 통 속에서 출렁출렁 버무려지는 분무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세차게 펌프질을 했다. 마스크 틈새로 농약의 구역질 나는 기운이 스멀거리며 기어오른다. 농약을 머금은 고추와 고춧잎에선 시허연 액체가 줄줄 흘러내린다. 얼마나 고팠던지 마구 들이켜느라 입가에 흘러넘쳐 목 줄기를 주르르 타고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꿀꺽꿀꺽 먹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는 듯하다.
농약과 화학비료가 땅에 뿌려지면서 생태계의 원활한 순환 고리가 끊어지게 되었다. 천적이 없어진 세상에서 병 해충은 농약의 독성을 이겨내고 무차별적으로 저항력을 키우며 증식하기에 이르렀다. 그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지력이 약해진 토양에서 병 해충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갈수록 더 강력하고 많은 양의 농약으로만 농작물과 그 수확물들은 보호를 받는다. 안 그러면 내항성을 가진 병 해충들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날뛰는 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침투된 수확물에는 농약 성분 자체가 검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성분이 화학변화를 일으켜 생성된 물질도 잔류한다고 한다.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태양초라는 말린 고추이다. 고추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벌크라는 건조기에 집어넣고 억지 말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에 가지런히 널려져 내리쬐는 태양을 흠뻑 맞고 스쳐 가는 바람도 쉬엄쉬엄 들이마시며 알금솜솜 말려지는 고추가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말린 태양초 꼭지는 본래의 색깔이 남아 있지만, 벌크에서 삶겨진 고추 꼭지는 까맣게 변해 확연히 판별되고 있다. 말 그대로 태양의 덕을 톡톡히 본 고추가 별로 없는 편이다.
어머니도 마당에서 말리시다가 요즘같이 얄궂은 비가 오락가락하게 되면 하는 수 없이 아래채에서 말리기도 한다. 고향집 아래채에는 아직도 불을 때는 아궁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예전에 쇠죽을 쑤던 가마솥이 걸려 있고, 그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면 아랫방 구들이 누릇누릇해진다. 아랫방에 널린 고추들은 불목에 누워 알금알금 말라 간다.
어제 새벽에 어머니가 아래채 아궁이에 불을 지피려고 가마부엌에 가니까,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는 솥전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후다닥 도망치더란다. 시골에는 예전처럼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는 고양이들이 가끔 눈에 띈다. 보름 전쯤에 가마부엌 시렁 위에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는지 아옹거리더란다. 그러나 이레 전에 어머니가 빨랫감을 들고 냇가에 가려고 신작로에 나가셨다가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를 보았단다. 가마시렁 위에 새끼를 낳았던 고양이의 어미는 설마 아니겠거니 했는데, 며칠간 어미 고양이가 보이지 않더란다. 먹잇감을 찾으러 들랑날랑할 터인데 그림자도 비치지 않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들이 앙칼지게 울기에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가 바로 어미 고양이일 것이라고 여겨지더란다. 끝내 그 어미는 돌아오지 않고, 그렇게 앙잘거리던 새끼들이 며칠간 기척도 없이 조용하기에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거나 아니면 어미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어제 새벽엔 다시 돌아와서 가마솥의 온기를 제 어미마냥 껴안고 쌔근거리다가 도망치더란다. 그 새끼들이 너무 애처로워 솥전에 찬밥 한 덩이 놓아두면 어느새 왔다가 먹고 갔는지 말끔하더란다.
어릴 적, 우리 집에 고양이를 길렀었다. 이름은 살진이라고 지었다. 기다란 마루 한쪽에 나락을 보관하던 곳집이 있었고, 그 곳집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 곳간문짝은 규격에 맞게 재단된 송판을 여러 겹 끼워 맞추게끔 되어 있었고, 그 널빤지에는 한문으로 숫자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번호를 틀리게 꽂으면 조그만 틈새가 생기기 때문에 널빤지를 순서대로 맞춰야 했다. 맨 아래 판자가 1번이었고, 차례대로 22번까지인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붓으로 큼지막하게 써 놓은 한문 숫자를 마루에 걸터앉아 보면서, 문자를 하나하나 애써 머리에 또박또박 새겨 넣기도 했다.
쥐들이 곳간의 나락을 탐내지 못하도록 철저한 경비를 서는 게 살진이의 임무였다. 마루 끝에 놓아둔 그릇에 고등어 가시나 밥 두어 숟갈 담아 놓으면 잽싸게 내려와 먹고는 마루 끝에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다시 올라가곤 했다. 살진이가 그 곳집 위에 오를 때면 12번인가 13번 정도의 판자를 한 번 짚고 껑충 뛰어올랐다. 그 날렵하게 뛰어오르는 고양이를 경이로운 느낌으로 쳐다보며 14번이나 15번을 딛고 뛰어오르기를 바라기도 했다. 조금 더 크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곳집 위에 올라설 때마다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이맘때쯤이었다. 그날도 더위가 온 세상을 삶을 듯 엉겨 붙어 치근덕대었다. 살진이가 목쉰 울음으로 왝왝대며 곳간의 널빤지 15번인가 16번을 딛는 것을 우연찮게 목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곳집 위로 곧장 튀어 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발라당 떨어지는 게 아닌가. 다시 몸을 곧추세우고 힘차게 솟아오르는가 싶다가도 떨어지고, 그러기를 거듭하더니 그만 마룻바닥에 떨어져 다리를 바릊거리기 시작했다. 급히 달려오신 아버지가 살진이의 뒷다리를 묶어 감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양잿물을 억지로 먹였다. 그러나 살진이는 기어이 토해 내지 못하고 눈꺼풀의 힘을 스르륵 놓고 말았다. 당시 쥐들이 한창 설치던 때라 여기저기 길목에 놓아두었던 농약을 버무려 놓은 음식물을 먹은 모양이었다. 형과 삽을 들고 뒷산에 올라 양지바른 둔덕에 묻어 주고 내려오는데, 살진이의 웅절거림이 귓속에 담겨져 왱댕그랑 끊임없이 들려오는 바람에 왈칵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꿈틀거리며 되살아난다.
조용히 밤이 타고 있다. 이 밤에도 새끼 고양이들은 고향 집 가마부엌 솥전에 웅크리고 앉아 뜬눈으로 지새우며 제 어미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희망을 조그만 가슴에 품고 올망졸망한 눈을 끔뻑이며 부스럭 소리에도 예민한 귀를 쫑긋 기울이겠지. 아궁이에 장작불이 지펴져 노글노글한 아랫방에는 농약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고추가 뜨듯한 불목에 다리 쭉 펴고 누워 한잠이 들었겠지. 그 고추는 고양이들의 애틋한 사연을 전혀 알 리가 없겠지. 먹고 사는 게 완전히 다르니까 알려고도 하지 않겠지.
농약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고추와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들의 안쓰러운 기다림, 거기에 쥐약 먹고 죽어 가던 살진이의 애간장 녹는 듯한 왝왝거림이 오버랩 되어 머릿속에서 심통 사납게 풀썩거린다. 꼬깃꼬깃 구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지 못한 그 애꿎은 필름이 되살아나 여전히 움찔대게 하는, 비감 한 조각이 이 밤에 암울하게 씹히며 불걱거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