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1|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정성화
1957년 경북 칠곡군 왜관읍 출생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 2000년 『에세이문학』에 「밥」으로 등단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풍로초』 당선 2006년 제24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에세이부산문학회 회원 수필집 『소금쟁이 연가』(2005)
│대표 작품│
동생을 업고 외4편
정 성 화
박수근의 그림 ‘아이 보는 소녀’를 보고 있다. 이마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상고머리에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는 동생을 업은 채 해맑게 웃고 있다. 앞코가 둥그스름한 까만 고무신이 소녀가 입고 있는 무명치마와 어우러져 더욱 소박한 모습이다. 소녀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생을 연이어 낳아 주셨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의 동생은 넷으로 불어났다. 동생이 자꾸 생긴다는 것은 한창 놀고 싶어하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그리 신나는 일이 아니다. 나가 놀 수 있는 자유가 이분의 일에서 사분의 일로, 다시 팔분의 일로 줄어든다는 의미다.
우리 집은 아기를 길러내는 협동조합이었다. 언니는 어머니와 함께 기저귀 빨래를 했으며, 나는 아기가 목을 가눌 수 있을 때부터 아기를 업어 재우는 일을, 내 아래 동생은 기저귀를 개는 일이나 방 청소를 도왔다. 아기도 어른처럼 가만히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잠이 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꼭 등에 업혀서 바깥 나들이를 저하고 싶은 만큼 한 다음에야 동생은 잠이 들었다.
업힌 자세를 투시도로 그리면 거의 앉은 자세에 가깝다. 그런데도 방바닥에 눕기보다 굳이 등에 업히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어른이 되면 아무리 잠이 온다 해도 눕지 못하고 앉은 채로 선잠을 자야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아기가 미리 알고서 일찌감치 연습을 해 두려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등에는 방바닥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아기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다. 등 너머로 전해져 오는 숨결과 체온에서,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편안함을 다시 느껴 보려는 것은 아닐까.
동생을 업고 집을 나서면 갈 데가 별로 없었다. 동생의 잠을 탁발(托鉢)하러 나서는 그 일이 나에게는 꽤 힘들게 느껴졌다. 집 주위를 빙빙 돌다가 골목에 피어 있는 분꽃의 개수를 헤아려 보기도 하고, 옆집 옥상에 널린 빨래가 몇 개인지 세어 볼 때도 있었다. 이따금 들려 오는 엿장수의 가위 소리가 우리 집 골목의 정적을 더욱 깊게 하고 있었다.
좀 너른 공터로 나오면 친구들이 모여서 놀고 있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
노래를 부르며 나풀나풀 고무줄을 넘거나, 바닥에 석필로 하얀 금을 그어 놓고 사방치기(돌차기)를 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시원한 그늘에 모여 앉아 공기놀이나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동생을 재우는 것보다, 뛰어 놀고 싶은 내 마음을 재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내게 있어 ‘자유’란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은 홀가분함을 의미했고, 그때만큼 자유가 부럽고 빛나 보인 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등에 업힌 동생이 이내 포대기 속에서 몸을 뒤틀었다. 한자리에 오래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언젠가 고무줄놀이를 너무 하고 싶어서, 옆에 있던 빈 사과상자에다 어린 동생을 담아 놓고 아이들이랑 고무줄놀이를 했다가, 누군가 어머니에게 일러주는 바람에 단단히 혼이 난 적도 있다.
동생을 업어 재우는 것 못지않게 잠든 동생을 내려놓는 것도 힘들었다. 잠이 깊게 들었다 싶어서 집에 돌아와 동생을 방바닥에 살포시 내려놓는 순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팔팔하게 되살아나는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A/S(After Service)는 전자 제품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다시 동생을 업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그 때, 지나가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이고, 덩치도 작은 게 제 동생을 잘도 업어 주네”라고 했을 때, 공연히 서러움이 북받쳐 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도 있다.
먼데 산을 보면, 산이 산을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의 등뒤에 납작이 엎드린 산은 살풋 잠이 들었는지 아슴해 보인다. 산등성이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림 속 아기 보는 소녀의 어깨선 또한 부드러운 산의 능선을 닮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모든 생명체를 넉넉히 품어내는 산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동생을 업고 있으면 동생의 살 냄새, 새근거리는 숨소리, 동생의 꼼지락거림, 그리고 통통한 두 다리의 감촉 등, 그 모든 것이 나의 등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등에 느껴지는 체온이 여느 날 같지 않다거나 심하게 보챈다 싶으면, 대개 그 뒷날 병원에 데려갈 일이 생겼다. 바로 밑의 동생을 빼고는 다들 내 등뒤에서 옹알이를 연습했고, 내 등에 오줌을 싸기도 했으며, 잠투정을 하느라고 내 뒷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손아귀의 힘이 세어져 갔다. 막냇동생이 저 혼자 잘 걷게 되어 더 이상 업히지 않으려고 내 등을 밀쳐내었을 때, 나는 웬일인지 해방의 기쁨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동생을 업었을 때의 느낌은 나의 등에 그대로 내장(內藏)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아이를 낳아 처음으로 등에 업었을 때, 그 느낌은 한결 증폭되어서 내게 되돌아왔다. 아이의 숨과 나의 숨이 포개지면서 살과 살이 함께 호흡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딜 가든지 내 아이를 업고 다녔었다.
서양에는 우리와는 달리 업고 업히는 문화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외국의 전쟁영화를 보면, 부상자라 해도 업어 나르는 게 아니라 들것에 싣든가 아니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질질 끌고 가는 수가 많다. 업는다는 것은 한 생명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내가 감당하겠다는 의미이며, 한 사람의 걸음으로 둘이 나아가겠다는 뜻이다. 부모가 아이를 업어 주고, 형이 아우를 업어 주고, 다 큰 자식이 노모를 업는 풍습은 우리 문화에 있어 하나의 아름다운 결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그냥 업어 주는 게 아니라고 한다. 독수리는 새끼를 등에 업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간 뒤 사정없이 아래로 떨어뜨린다고 한다. 그러면 새끼는 살기 위해 날개를 너풀거리게 되고,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닿기 전 아래로 내려와서는 다시 업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어미의 등줄기에 엎드려 어미의 가쁜 숨결을 느낄 때, 새끼 독수리는 더 힘찬 날갯짓을 다짐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날개에 제법 힘이 올라 나의 등을 찾지 않게 되면서, 나는 자꾸만 등 언저리가 허전해져 왔다. 등이 먼저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문학을 공부해 보라고 권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감겨 오는 지금의 자유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느냐고 가슴이 속삭였을 때, 뒤쪽의 등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했다. 문학이란 등짐을 질 때는 스스로 그만한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등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글 한 편을 업고 대열에 끼여서 가고 있다. 지금 업고 있는 이 글을 푹 재울 수 있을지, 그리고 방바닥에 제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지 잔뜩 걱정을 하면서.
자존심에 대하여
끝은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일어나는 시민들의 약탈행위, 그것은 또 다른 아픈 전쟁이었다.
지난 2년간 뉴욕에서 이라크를 대표하여 일해 온 ‘알 두리’ 대사는 알 아라비아 방송과 인터뷰를 하며, 지금 바그다드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라크 국민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패전에 대한 슬픔보다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심 상실이 더 가슴 아프다며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존·심
방을 닦으며 설거지를 하며, 또 꽃에 물을 주면서 나는 내내 그 낱말에 붙들려 있었다.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슬며시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여름방학을 하기 전(前), 교육청 모의고사를 칠 예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공부방이 별도로 없는 아이들은 이럴 때 제일 난감하다. 휴지를 뭉쳐 양쪽 귀를 틀어막고 방 한구석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장난치던 동생들이 책 위로 쏟아져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집 가까이에 같은 반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나에게 자기 집에 와서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 아이네 집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집 뒤로 아주 넓은 농장이 딸려 있고, 집 안에 목욕탕 시설이 있었으며, 그 아이의 공부방은 우리 집 안방보다 훨씬 넓고 깨끗했다. 친구의 어머니가 살며시 들여놔 주는 과일은 상큼하고 달콤했다. 나는 친구에게 산수 문제를 설명해 주고, 암기과목의 중요한 부분에는 빨간 밑줄도 그어 주었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친구 어머니가 내게 플라스틱 양동이를 하나 내미셨다. 잘 익은 토마토가 가득 들어 있었다.
“니네 집은 아이들이 많아서 참… 이거 가져 가거라.” 하셨다. 부잣집 마나님 특유의 어조였다. 우리 농장에서 딴 것인데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했더라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것을 들고 왔을 것이다. “아이들이 많아서 참…”, 그 말은 우리 집을 없는 살림에 아이만 많이 낳은 흥부네로 보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 집에도 토마토가 많이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그냥 와버렸다. 왠지 마음이 뻐근해지면서 아파 오는 듯했다. 그 아픔이 내 자존심의 근원이었던 것 같다.
자존심이란 사람만의 장르는 아닌 듯하다. 굵은 빗방울이 막 떨어지기 시작할 때 확 피어 오르는 흙냄새는, 느닷없는 비의 공세에 놀란 흙바닥의 자존심 섞인 반격이다. 강가의 모래톱이 아무리 아늑해 보여도 강물은 거기에 기대어 쉬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면 강물이 아니라면서 모래톱을 손바닥으로 슬쩍 쓸어 보고는 그냥 흘러간다. 한눈을 팔지 않고 기대지 않는 것이 자존심이라고 강물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래층 집의 강아지도 그랬다. 데려온 날 밤 밤새 울더라고 했다. 그 뒷날 내가 보러 갔을 때 강아지는 두 눈이 퉁퉁 부어 겨우 앞을 볼 수 있는 정도였다. 저를 떠나 보낸 어미에 대한 원망과 낯선 곳 낯선 이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우유에다 생선살을 비벼 주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앞발을 제 가슴팍에 딱 붙이고는 꼼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마치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답디까’ 하는 자존심 있는 몸짓으로 보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나는 처음 만나는 아이에게 맨 먼저 “자존심 있는 사람이 되어라”고 한다. 자존심은 사람의 뼈대와 같은 것이어서 튼튼한 뼈대 위에 공부라는 살을 붙인다면 쉽게 허물어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자존심에는 신기한 ‘지렛대 효과’도 들어 있다. 학습 목표를 정해 놓은 뒤 아이의 의식(意識) 한 편에 자존심을 살짝 끼워 놓고 공부를 시키면, 아이는 공부 보따리가 아무리 무거워도 번쩍번쩍 잘 들어올리게 된다. 결과에 더 크게 놀라는 사람은 가르치는 나보다 정작 아이 본인이다. 그 때 아이에게 생겨나는 자부심과 자존심은 순수 자연산이라서인지 한결 더 단단한 것 같다.
자존심에는 자기 자신이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또 그런 상처들을 이겨낼 뒷감당이 버겁다는, 이를테면 지레 겁을 먹는 의미도 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자존심은 좋은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약점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차단한 채 오만 방자해진다든지, 독선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쉽고, 화려했던 지난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현재의 실패를 무조건 숨기려는 성향도 띠고 있다. 또 내적 성숙을 갖추지 못한 채 번지르르한 외적 조건만 내세우는 공갈빵 스타일의 자존심도 가끔 보인다.
산삼이 우리 몸에 좋은 이유는 오래된 것일수록 나쁜 기운이 사라지고 좋은 기운만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존심 속에 섞여 있는 나쁜 기운을 찾아내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가라앉혀야 될 것이다. 그리고 어깨와 목 부분에 쓸데없이 들어가 있는 힘을 빼는 일이 그 다음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과 고집이 센 사람을 이라크의 모래폭풍 속에 세워 놓을 때 누가 먼저 쓰러질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아마 고집이 센 사람이 먼저 쓰러질 것이다. 그는 투과성(透過性)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된 자존심이란 옹기를 닮아서 나쁜 기운을 밖으로 밀어내고 외부와 내부의 공기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데 비해, 옹고집은 소통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독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자존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비토(veto) 세력을 위한 의자도 미리 준비해 둔다.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 줄 때 자신의 자존심도 더불어 살아난다는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같은 일로 해서 두 번 꾸지람 듣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의 결이 상하기 때문이다. 결을 유지하려는 마음, 결을 잘 다듬으려는 마음이 바로 자존심이며 삶의 진정성(眞情性)이 아닌가 싶다.
지금껏 나는 상대방과의 기(氣)싸움에서 이기려면 나의 자존심을 더 뾰쪽하게 벼려 두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참된 자존심이란 창(槍)의 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바른 자존심은 결코 모나지 않으면서 어떤 탄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다른 이의 자존심을 먼저 헤아리고 상대방의 구겨진 자존심을 펴 줄 줄 아는 마음, 함부로 자존심을 들먹이지 않으면서도 자존심이 걸려 있는 승부에서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으며,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자존심을 깨끗이 접을 줄도 아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바로 ‘자존심을 갖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존심을 꽉 붙들고 살아도 하루가 가고,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도 하루는 간다. 어느것이 더 잘 사는 건지 애매모호해질 때도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자체가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무엇이냐고 나는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다. 자존심이란 허방을 디디지 않게 우리들 발 아래를 비춰 주는 불빛 같은 게 아닌지.
어느새 내 눈길은 나의 발 밑을 살피고 있다.
맏이
한해 신수를 보러 갔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사람의 운세까지 듣게 되는 철학관이었다. 당신은 올해 몸이 부서지지 않으면 큰돈을 잃을 운세이니 매사에 조심하라는 역술인의 말에 여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듯 모두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다음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에게는, 자식이 곧 취직할 것이며 올 한 해는 집에 돈이 자루째 들어올 운세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어이구, 좋겠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어떤 말을 듣게 될까. 올해 운이 좋다면 ‘그냥 열심히’ 살기로 하고, 운이 나쁘면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유난히 시선을 끄는 한 여인이 있었다. 서른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자기 가족의 신수 대신에 친정 동생들의 운세를 묻고 있었다. 큰동생은 올해 돈벌이는커녕 수중에서 돈 나가는 일밖에 없다고 하자, 그녀는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 둘째 동생의 운세를 뽑아 보며 역술인이 두어 번 고개를 가로 젓자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3인 막내 동생의 대학입시 운까지 챙겨 물었다.
몇 벌씩 겹쳐 입은 옷이라든지 얼어서 벌겋게 된 양쪽 볼, 그리고 파카잠바의 등 언저리에 붙어 있는 생선 비늘과 지느러미 조각이 그녀의 삶을 짐작케 했다. 그녀는 세 동생에게 나눠 줄 액막이 부적을 써 달라고 간청을 하면서, 윗옷 안쪽을 한참 헤집었다. 그러더니 뭔가 한 주먹 꺼내 놓았다. 트고 갈라진 그녀의 손등 아래서 쏟아져 나온 것은 만 원짜리 지폐로 접은 작은 딱지였다.
네 귀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사각형 모양의 딱지, 그것은 서로를 감싸 안은 그들 사 남매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딱지의 모서리가 삐뚤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접혀 있는 걸로 보아, 그녀는 그것을 하나 하나 접으면서 동생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다지고 또 다졌을 듯싶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그 딱지를 접었을까.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형제간을 한 가지에 난 나뭇잎으로 비유하고 있다. 같은 뿌리에 같은 줄기, 그리고 가지까지 같으니 얼마나 깊은 인연인가. 저희들끼리는 아침저녁으로 치고 받고 싸우면서도, 형제 중 어느 누가 이웃집 아이에게 한 대라도 맞고 오는 날이면 눈에 불꽃이 튄다. 당장에 달려가 사정없이 그 집 대문을 걷어차며 내 동생 때린 놈 나오라고 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형제간의 정(情)인 것이다.
그녀를 보며 나는 이십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시골 어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마음속에는 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반, 걱정이 반이었다. 엄지손가락이 베이면 혹시 어머니가 편찮으신가 싶기도 했고, 배구를 하다가 새끼손가락을 삐는 날에는 막내 동생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자리에 이내 가난이 제자리인 듯 들어서고 있었던 때라, 다른 집만큼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 앉아 웃을 수 있고 따뜻한 방에서 잠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싶었다.
그러나 삶은 그리 녹록한 게 아니었다. 고개 하나를 겨우 넘었다 싶으면 또다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우리 가족을 넘겨다보고 있는 듯했다. 팔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오기가 생겼다. ‘그래 덤벼 봐라, 나는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까’ 하며 고개를 더 빳빳이 세웠다. 연년생인 언니가 있었지만, 동생이 넷이나 되는 나는 호랑이도 쫓아 버릴 수 있는 그런 맏이 노릇을 해야만 했다.
기쁨보다는 슬픔 앞에서 더 큰 자력(磁力)을 지니는 게 가족이다. 여동생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겠노라고 스스로 말해 놓고도 이불을 들썩이며 울었을 때, 군에서 휴가 나온 남동생이 맨손으로 귀대할 수밖에 없어 고참에게 맞는 걸로 대신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 나는 내 동생들을 더 세차게 끌어안았다.
아직 덜 아물어 회상할 때마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는 상처이지만, 그 상처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더 아끼게 되었던 것 같다. 허물어지려는 순간에 다시 하나가 되는 게 가족이다. 해서 가족이란 말에 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희망’이 될 것이다.
잎새 하나 없이도 마른 가지 끝에 움을 틔우며 편안한 얼굴로 피어나는 목련을 보면 맏이의 인내심이 느껴진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고 있지만, 어쩌면 그 목련 또한 가지 끝마다 제 속울음을 여며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든 동생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챙겨 놓으며 이 신발들이 다시는 젖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던 날 밤, 나는 소리 죽여 울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생들 앞에서는 불안해 하지 말 것, 눈물을 보이지 말 것, 돈 걱정을 하지 말 것을 원칙으로 정해 두고 있었지만 나 역시 돌아서서는 얼마나 자주 막막해 했었는지 모른다.
명절이나 아버지 제삿날 한자리에 모이게 되면 우리 친정 식구들은 그 시절 얘기를 나누며 웃기도 하고 눈물을 찍어내기도 한다. 추억거리를 많게 해 주려고 신(神)은 우리 가족에게 그런 굽이진 길을 걸어오게 하셨을까. 이젠 제 삶의 터전에서 성실한 손발과 정직한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생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든 아니든 맏이에게는 정년퇴직도 명예퇴직도 없다. 부모에게는 한결같이 효를 다하고 동생들에게는 반(半) 부모가 되어 우애와 자애를 보이며 묵묵히 맏이의 길을 갈 뿐이다. 또 맏이는 스펀지와 같기도 하다.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다 받아들여 머금고 있는. 그러나 내놓을 때는 아낌없이 내놓는 이가 또 맏이다.
동생들과 힘없는 부모님을 위해 양팔 다 떼내어 주고 두 다리마저 내어 주고, 마침내 몸통 하나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맏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동생들을 위해 돈으로 딱지를 접어 모았던 여인, 그녀는 진정 아름다운 맏이였다.
강을 생각하다
승선하기 며칠 전, 남편은 내게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집을 한 채 마련하라고. 그 집은 ‘수필로 짓는 집’을 의미했다. 변변히 해외여행 한 번 못 가 본 아내를 위해 몇 년째 마음먹고 모아 온 승선 수당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그를 따라다녀서인지 봉투의 가장자리는 많이 닳아 있었다. 그리운 것들은 죄다 수평선 위에 한 줄로 늘어놓고 사는 사람, 그래서 한시도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 그는 어느새 자신의 수평선 위에다 아내의 수필집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모양이다. 갑판 위에다 낙지의 빨판 같은 다리를 붙인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내게 말할 때는 배를 타는 것이 마치 세발 자전거를 타는 것만큼이나 쉬운 것처럼 둘러대는 사람. 그런 그가 정말 ‘억지로 벌어 온 돈’을 나에게 내민 것이었다.
만만치 않은 출판 비용 때문에 수필집 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 문득 서머셋 몸의 「인간의 굴레」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돈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위선자이거나 바보다. 돈은 여섯 번째 감각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오감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적당한 양의 돈이 없다면, 어느 인생이든 그가 지닌 가능성의 절반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 돈이란 강아지의 목에 매달아 놓은 줄과도 같다. 그래서 줄의 길이만큼만 자유가 허락되며, 그 줄의 길이보다 더 멀리 가려 하면 어김없이 줄은 목을 조여 오게 된다. 줄이 묶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올 때의 쓸쓸함이란, 딱히 잃어버린 게 없다 하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상실감에 빠져들게 한다.
미련이란 미련한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 나는 수필집을 내고 싶었던 마음을 애써 정리했다. 그가 수필집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 즈음이었다.
내게 있어 수필집이란, ‘집 한 채’라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나만의 방 한 칸’을 의미했다. 단칸방에 살다가 방 두 칸에다 마루까지 딸려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방 한 칸이 더 생겼다는 게 실감나지 않아, 자다가도 몇 번 마루에 나와 어둠 속에서 방 두 칸을 번갈아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남편으로부터 수필집에 대한 권유를 들었던 그날도 잠이 쉬 오지 않았다. 새로 갖게 될 그 방에 무엇을 들여 놓아야 할지, 어떻게 그 방을 꾸며야 할지, 또 벽에는 어떤 액자를 거는 게 어울릴지 등을 생각하느라, 나는 내 마음속 전등을 밤새 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감격한 것은, 그가 내민 오천 달러의 액수가 아니라 어떻게 그가 내 속마음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궁금해 하는 내게 그는 말했다, 강바닥 들여다보듯 당신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노라고.
어쩌면 그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 모른다. 강바닥도 때로는 흐르는 강물이 부러워 제 바닥을 긁으며 흙물을 일으킬 때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품고 있던 수초와 돌멩이, 오래 전에 떠내려와 하루에도 몇 번씩 물 속에서 빈 바퀴를 돌리던 녹슨 자전거 등, 그런 것들을 껴안고 거침없이 흘러가 보고 싶었던 내 속마음을 그는 일찌감치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해풍에 눅눅해지고 생선 비린내가 푹 배인 그의 돈을 받아 들면서 나는 연상하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을 향해 수초(水草)의 줄기를 빌려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강바닥의 마음을.
부부라는 글자의 앞뒤를 바꾸어 봐도 여전히 부부이듯, 부부란 원래 자신의 배우자를 위해 스스로 그의 뒤에 서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어느 한 쪽이 강물로 흐르고자 할 때, 다른 한 쪽은 얼른 몸을 낮추어 강바닥이 되어 주는 게 아닐까. 강바닥만큼 강물을 아껴 주는 것도 없으며 강물만큼 강바닥을 선명히 들여다보는 것도 없다. 또 강바닥이 깊지 않으면 강물은 제대로 흘러갈 수가 없고, 강물이 흐르지 않는 강바닥이라면 그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게 된다. 그러고 보면 강물과 강바닥은 서로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배경인 것이다.
강물 속으로 휩싸여 들어온 돌멩이가 무거워 바닥에 내려놓고 싶어질 때, 강바닥은 다소곳이 그 돌멩이를 받아 품는다.
피라미 떼 햇살에 반짝이고 저녁이면 은어가 돌아오는 강물, 그리고 어린 다슬기와 조개를 품어 기르며 강모래 속으로 파고드는 모래무지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는 강바닥이라면, 무엇을 더 욕심내랴.
얼싸안고 흐르는 강,
강물은 늘 강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보 붙이는 밤
집나간 강아지를 찾는다는 벽보가 어느새 치워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다른 벽보가 붙어 있었다.
“칠 년 전 반여동 S아파트에 살았던 영어 선생님을 찾습니다.”
이번에는 강아지 대신 사람을 찾는구나 생각하며 무심코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한 순간 내 귀가 저절로 쫑긋 섰다. 그것은 분명 나를 찾는 벽보였다.
벽보에 적힌 연락처로 바로 전화를 했다. 짐작한 대로 내가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였다. 아이가 부산 시내의 중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옛 선생님께 꼭 전하고 싶었다면서, 정확한 주소를 몰라 선생님이 살고 있다는 아파트 게시판에다 벽보를 붙이게 되었다고 했다. 벽보를 만들어 여기까지 들고 와 붙인 그분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가 한 것에 비해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는구나 싶었다. 벽보는 어느덧 내 마음을 싣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양탄자가 되었다. 기분 좋게 속이 울렁거렸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는 벽보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벽보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방학을 기다리지 않는 아이였다. 방학이 되면 나는 늘 서울에 있는 외삼촌 댁으로 보내졌다. 많은 식구에 한 입이라도 덜어 보기 위해 내린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마치 배추를 솎아내듯 나를 ‘솎아내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 가겠다고 떼를 쓸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가끔 늦은 밤에 서울로 전화를 하셨다. 외숙모와 통화를 한 뒤에는 이어서 나를 바꾸게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외숙모가 들을까 봐 그러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무 소리 말고 잘 붙어 있어야 한데이, 엄마가 데리러 갈 때까지는. 알겠제.”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붙여 놓은 벽보였다. 하얀 쌀밥에다 쇠고기 장조림을 먹고 또 매일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면서도 나는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남루하고 좁아 터지고 고함소리가 가득한 우리 집이 그리워, 밤이면 아무도 몰래 눈물에 젖는 벽보였다.
벽을 등에 지고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벽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게 벽보다. 풀기를 잃으면 찢어지기 쉽고, 바람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허락하면 이내 벽에서 떨려 나가는 게 그것의 운명이다. 어머니가 나를 ‘떼러’ 올 때까지, 나는 그때 비교적 착실한 벽보 생활을 했다.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었다. 내 마음이 심하게 펄럭거리고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 딴생각을 하며 방황하고 있었을 때, 직장 생활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을 때, 남편과 크게 다툰 뒤 어디론가 휑하니 가고 싶었을 때 등. 어쩌면 어머니의 그 말에 배여 있는 간절한 모성이 이제껏 나를 지켜 온 게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이란 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 또한 한 장의 벽보인 셈이다. ‘나’라는 벽보로 인해 이 세상 벽의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벽의 한숨이 더 늘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도, 내게 드리운 모든 것이 헐값의 운명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서슴없이 벽에다 대고 내 머리를 쿵쿵 찧는 나는 그야말로 ‘못난 벽보’다.
내가 울고 화내고 애태우는 것은 나의 벽보가 남들의 것보다 더 번듯하길 바라서일 것이다. 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내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이 더 따뜻하고 아늑하길 바라서일 게다. 모든 게 벽보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 하겠다.
벽은 한때 햇살로 가득했다가 조금씩 그늘이 지고 때가 되면 어둠에 묻혀 버린다. 그것이 벽의 하루다. 이 세상에 온종일 햇살이 비쳐드는 벽이란 원래 없는 법. 그래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는 어떤 벽보든지 벽의 냉기를 묵묵히 견뎌내어야 한다. ‘견딘다는 것’은 쓸쓸한 일, 혼자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곧잘 운명이 가혹하고 비정하다며 수군댄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에게는 운명도 무심치 않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자신의 벽보 한 장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죽을 때까지 끌어안은 채 고치고 손질하다 가는 게 우리네 인생인 것 같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곧장 떨어지고 말 벽보인데도 말이다. 다들 자신의 벽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른 이의 벽보에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또 이 세상의 아름다운 벽을 제대로 둘러볼 새도 없이 허겁지겁 살다 가는 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 내가 진정 붙이고 싶은 벽보는 무엇인가. 나의 손때가 묻은 벽보 앞에서 나는 나를 보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너풀거리는 나의 귀퉁이에 다시 풀칠을 하고, 찢겨진 부분에는 종이를 덧대어 바르며, 지워진 글씨는 다시 선명하게 써넣는다. 그래서 벽보 붙이는 밤은 조금도 졸리지 않는다.
국제전화를 걸어 온 남편이 대뜸 말한다.
“어, 요즘은 집에 잘 붙어 있네.”
은근슬쩍 내게 풀칠을 하고 있다.
│정성화 작품론│
長女의 탄생
박 구 홍
1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김원일의 소설세계를 평하면서 ‘長子意識의 장엄함’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 당시에 나는 김원일의 「어둠의 혼」 「노을」 「가까운 골짜기」 등을 읽으면서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불만이 있었다. 이 인물들은 왜 이렇게 답답한가. 인생을 좀 근사하고 재미있게 살면 안 되는가, 하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윤식의 평론을 읽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래, 장자라면야 어쩔 도리가 없잖나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장자란 존재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막중한 인물이다. 우리 집안만 해도 큰형은 나 같은 셋째와는 격이 다른 책임감과 위엄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부터는 아버지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장자란 불운한 인물이다. 그들은 즐거움 대신에 기꺼이 희생을 택한다. 나는 정성화의 수필집 『소금쟁이 연가』와 책에 실리지 않은 6편의 작품을 읽고 長女를 발견했다. 그것은 장자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2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장자에게서는 마지막 황제와 같은 비장함이 풍긴다. 김원일의 서사가 풍기는 장엄함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녀에게는 비장함이 부여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가 모계사회를 끝낸 지 까마득하게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헌신과 견딤을 더 많이 요구받는다. 장엄함 따위의 영예는 찾아볼 수 없고 기다림과 뒤치다꺼리의 책임량만 잔뜩 쌓여 있다. 장자보다 훨씬 억울하고 보잘것없는 지위인 것이다. 분하기도 하련만 정성화는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작가 스스로 장녀의 길을 선택했으므로. 글을 쓰는 것으로 보상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런 장녀의식은 작가의 작품들 전편에 걸쳐 주제와 스토리, 에피소드를 지배하고 있다. 그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작품이 「동생을 업고」이다. 이 수필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박수근의 「아이 보는 소녀」처럼 아련하고 슬프다. 어딘지 희망과 설레임의 기운도 감돈다. 장차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인고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전혀 헤아리지도 못하면서 여릿하고 가상하게.
소녀는 다른 동네 아이들처럼 고무줄놀이를 하고 싶다. 하지만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기 아래로 거의 연년생으로 줄을 서 있는 동생들 때문에. 소녀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이지만 동생을 등에 업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동생을 업고 동네 아이들의 고무줄놀이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 수록 아름답고……를 부르면서 다리를 번쩍번쩍 올리고 싶지만 동생은 저승사자처럼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종아리를 조금만 움직여도 언니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우는 소리를 낸다. 정말 성가시고 화딱지 나는 일이다. 하지만 소녀는 불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동생을 업지 않으면 대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장녀의식은 이렇게 필요충분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면류관처럼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왔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장녀의식을 지니고 있다 한들 소녀는 기껏해야 코흘리개일 뿐이지 않은가. 소녀는 어쩌다 동생을 사과상자에 내려놓고 고무줄놀이를 즐기다가 어머니에게 들켜서 된통 혼쭐이 난다. 지나가는 어른들로부터 몸도 쬐그만 녀석이 동생을 잘도 보는구나, 하는 칭찬을 받으면 그만 서러워져서 울음을 터트려 버린다. 울고 난 후에 먼산바라기로 애늙은이처럼 산이 자기를 닮았다는 감상에 젖는다. 산이 산을 업고 있잖아. 앞산은 나고 뒷산은 내 동생이야. 아, 그래서 산등성이가 저렇게 부드럽고 이쁜가 봐. 나도 산을 닮고 싶어. 산새도 울고 산갈대도 흔들리고 얼마나 좋아. 이런 식으로 자기위안을 했으니 사실은 둘째인데도 장녀 행세를 했던 건 남의 탓이 아니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동생이 아장아장 걷게 되자 소녀의 등은 해방이 된다. 이제 맘껏 고무줄놀이를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신이 나는 대신에 허전함을 느낀다. 등에 업어 줄 동생이 없으니 결핍감이 먼저 달려온 것이다. 소녀는 그 결핍감을 보상받기 위해 아주 그럴듯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 그래. 이런 느낌을 글로 쓸 거야. 작가가 된다면 근사하고 멋지겠지, 흐응. 이건 내가 지금까지 들어 본 작가가 된 辯 가운데서 최고로 그럴싸한 것 중에 하나다. 이런 조숙하고 청승맞은 생각이 장녀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5년이 흘러 소녀는 동생을 업어 주는 대신에 자존심으로 무장해서 자기의 처지를 위안 받고자 한다.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친구 집에 가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양동이 가득 토마토를 선물 받는다. 그런데 하필 친구 어머니는 당신 딸의 친구가 얼마나 자의식이 강한 줄 모르고 이런 말을 하는 실수를 범한다. 니네 집은 아이들만 잔뜩 많아 가지구선 쯧쯔……. ‘가난한 집에서 애들은 왜 그렇게 많이 낳아 가지고 고생을 사서 할까’라는 말이 생략된 친구 어머니의 선물에, 5학년짜리 소녀는 상처를 받아서 이렇게 대꾸한다. 저희 집에도 토마토가 아주 많아요. 이 때의 상처는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새겨졌으므로 소녀는 훗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신다. 자존심을 가져라. 이것이 첫째다. 장녀란 무서운 것이다. 나 같은 셋째라면 고맙습니다, 하구선 토마토를 받아 와서 실컷 먹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을 텐데. 토마토는 건강식품이니까 많이 먹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알겠나? 이런 에피소드가 실린 「자존심에 대하여」는 제목만큼이나 앙큼하고 슬픈 작품이다. 훗날 작가는, 이라크의 패전을 분통해 하면서 유구한 페르시아의 문화적 전통이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슬픔을 느낀다는 이라크 외교관의 말에 동감을 표하고 울분을 느낀다. 장녀 정성화에게 좁은 집에서 우글우글하며 같이 자랐던 육 남매가 손상당해서는 안 되는 문화유산이 되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정성화의 장녀의식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서 자란 것일지도 모른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위험한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규정되어 있다. 설마하니 내가 殺父意識에 시달리면서 컸단 말인가, 하고 어이없긴 하지만 존경하는 프로이드가 그렇다니 넘어가기로 한다. 정성화의 아버지는 빛나는 영관장교님이었지만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버스 한 대로 운수 사업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버스는 고물이어서 시절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벗은 사람보다는 막걸리가 되었다. 아버지가 막걸리를 마시며 회한에 빠져 있을 동안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장녀 정성화다. 그녀는 만취한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집까지 가는 동안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역시 어린 딸에게 국화빵 봉지를 내밀면서, 너는 국화빵처럼 나를 닮지 말라고 주문을 하신다. 딸은 아버지가 사 오신 돼지고기 반 근을 보면서 어른이 되면 절대로 반 근 따위는 사지 않을 거야. 반드시 한 근 이상 사고 말걸 하고 결심한다. 이런 정경은 「막걸리집 앞에서」와 「국화빵」 「돼지고기 반 근」에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져 있다. 이런 기억이 쌓여 정성화는 아마도 절제력과 반듯함을 잃지 않은 장녀로 성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끝내 영화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장녀로 하여금 무덤에 막걸리를 따르는 회한에 빠지게 했지만.
그녀는 이제 운수사업을 하는 아버지로부터 외항선을 타는 선장인 남편에게 적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출가외인이 되었다 뿐이지 정성화의 기다림과 인고는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외버스와 외항선의 차이 만큼이나 업그레이드되어 그녀의 장녀의식을 완성시킨다. 그녀 역시 남들처럼 단란한 행복을 꿈꾼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면 많지도 않은 식구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녁식사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허용되지 않는 행복을 마냥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자기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으므로. 망망대해를 떠도는 남편과 점점 자기를 닮아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기다림과 외로움 속에서 낡아져 가는 자신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자화상은 「소금쟁이」와 「뒷모습」, 「기다린다는 것은」, 「집을 그리는 여자」, 「강을 생각하다」 등의 작품에 세밀하고 기품 있게 묘사되어 있다.
3
정성화의 장녀의식이 드러난 수필들은 문학사에서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박완서와 이혜경의 소설, 김수현의 드라마에 여성 심리가 탁월하게 드러나 있기는 하나 어른스럽고 책임감이 강한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들은 신경발작적인 증세를 노출시키곤 한다. 남성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도전적인 次女의 정신세계를 이상화시켜 그려낸다. 이에 비해 정성화의 화자는, 예를 들자면 「그녀는 맏이였다」와 같은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한없는 포용력을 보여 준다. 그녀의 장녀의식은 껍질을 벗고 어느덧 모성애로 비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라건대 정성화의 장녀의식이 펄벅의 「대지」처럼 울타리를 넓혀 혈육 밖으로 나와 타인에게도 더욱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기를.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원죄의식에 시달리던 서정주가 신라와 질마재라는 시공에 도달했던 것처럼 광막하고 깊어지기를. 왜냐하면 장녀란 위대하고 아름다운, 오염된 인간성을 구원할 운명을 타고났으므로.
│문학적 자전│
다시 수필이다
정 성 화
유리병에 물나무를 기르고 있다. 물만 먹고도 싱싱한 잎과 줄기를 내는 모습이 여간 기특하지 않다. 줄기 하나를 집어 들면 나머지 줄기들도 놀라며 따라 나선다. 서로의 뿌리 속에 뿌리를 내린 채 단단히 엉겨 있기 때문이다.
바닥에 엎드린 묵은 뿌리 위에서 하얀 어린뿌리들이 걸음마를 익히고 있고, 중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뿌리들은 어느쪽으로 줄기를 낼 것인지 긴 생각에 잠겨 있다. 나는 늘 어린뿌리부터 살핀다. 수필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다.
수필을 읽고 있으면 사람이 사람답다는 게 어떤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나이를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사람이 그리워 시골 오일장이 서듯, 수필 또한 사람이 그리워 생겨난 문학이 아닐까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일 한잔의 막걸리가 되기 위해, 냉방에 누워 봄이 오기만 기다리는 이에게 건넬 한 벌의 내복이 되기 위해 수필은 태어나지 않았을까.
수필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일은 좋은 수필과의 만남이었다. 읽고 있으면 어느새 마음 언저리가 뜨뜻해져 오는 수필, 아랫배로부터 둔중한 통증을 끄집어내는 수필, 어두운 극장에서 밖으로 나왔을 때처럼 세상이 환해 보이도록 만드는 수필 등. 나도 그 동안 우리 집 물나무들처럼 다른 이의 수필 위에서 걸음마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수필은 아직도 혼자 걷는 게 힘들다.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면서 가고 있다. 그런 도중에 생긴 상처 위로 서서히 딱지가 앉는 과정, 그것이 나의 수필이다.
나는 바란다, 가능한 한 나의 수필이 시골 버스를 닮아 가기를. 삶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모른 체한다거나, 우리를 외진 곳에 내팽개친 채 달아나기도 한다. 하지만 시골 버스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정류장이다. 앞을 보고 달리다가도 지나쳐 온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후진하는 차, 사람만 타는 게 아니라, 강아지와 돼지새끼, 그리고 곡식자루와 푸성귀도 한자리 차지한 채 오일장 구경에 나서는 차이다. “기사 양반 소피나 좀 보고 가세” 하며 풀숲으로 잠복한 할머니가 다시 허리춤을 올리며 느릿느릿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차,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늙어 가는 차이다.
둠벙 한가운데에 돌멩이를 던져서 물살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물을 보내어 물살을 일으키는 언어가 시어(詩語)라고 했다. 수필의 언어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천천히 흐르는 물결을 따라 자라는 논배미의 어린 모들. 그 어린 모들을 데리고 굽이굽이 길을 가는 논두렁처럼 수필도 그렇게 가야 하지 않을까. 그 때 생기는 한 줄기 곡선이 세상과 우리를 부드럽게 이어 줄 것이리니.
작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작가란 수도승이나 마찬가지라고. 영감(靈感)이란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돌아올 확률이 높다고. 나를 절망하게 하면서도 희망이 되는 말이다. 솥바닥을 기억하는 누룽지처럼, 얼었다 녹았다를 스무 차례나 반복한다는 황태처럼, 글의 깊은 맛이란 것도 그렇게 올 것만 같다.
인생이란 자동 점멸등과도 같은 것. 기다렸다는 듯 반짝 불이 들어왔다가도 몇 발자국 옮기는 사이에 이내 불빛이 사라지고 만다. 우리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시간도 그 자동 점멸등이 꺼지기 전까지다. 시골 버스처럼 천천히 가고 싶은 나의 수필과 자동 점멸등과도 같은 삶의 유한성, 그것이 내 삶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너무 우울해 하지 말자. 그 한정된 시간에 가장 인간적인 문학, 수필을 만났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의 냉기는 피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다시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