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식관호흡과 백회혈의 개혈
초심자가 수행을 시작할 때 집중의 방편이 있기는 있어야 하겠는데 화두나 위빠사나는 어떨까? 아니면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 식은 어떨지? 그것도 아니면 중국기공의 의념수련은 어떠할까? 갖가지 호기심이 발동을 한다.
불전(佛典)에서는 무심(無心)을 강조하지만 어떻게 해야 무심이 되는지 도대체가 오리무중이다. 무심(無心)이 없는 사도(邪道)의 수행법은 빙의(憑依)가 될 수 있다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망설이다 세월을 보낸다.
[안반수의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호흡법으로 그 핵심은 수식관호흡이다. 자칫 선가(仙家)의 수행법으로만 잘못 알려져 있어 불교인들이 소홀하게 여기며 어이없게도 수준 낮은 수행법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깊이와 수행의 효과로는 타 수행법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잡념(雜念)은 집중의 방해꾼으로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최대의 관건이다. 수식관 호흡은 여름 한낮 고추잠자리의 어지러운 날개 짓처럼, 떠오르는 생각 그 자체를 쫓아내거나 지우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들어 살살 바람을 일으키듯 숫자와 호흡을 그냥 따라가는 것이다. 숫자와 호흡을 지키다보면 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른 상념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다시 의식을 돌려서 ‘하나-하면서 숨을 마시고, 하나-하면서 숨을 뱉는다’. 편안하게 기대거나 누워서 하는 와공(臥功)으로 아랫배의 불룩과 홀쭉을 숫자와 함께 반복한다. 숫자를 관(觀)하지 않으면 집중이 떨어져 불룩과 홀쭉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해도 생각이 시시각각 방해를 하지만 어느 듯 단전호흡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누운 자세의 복식호흡은 하복근의 근육을 발달시킨다. 잠들기 전의 30-40분의 수식관만으로 단전(丹田)을 개발하여 기(氣)를 모을 수 있다. 아랫배 호흡은 복부의 기분 좋은 팽만감과 함께 따뜻함이 나타난다. 집중의 대상은 수식관과 함께 몸에 나타나는 현상을 동시에 같이 관(觀)할 수 있다. 수행의 초기에는 의식으로 하는 수식관호흡이 필요하지만 관(觀)이 잡히면 자연의 흐름은 우주의 속삭임이 되어 그 신호가 몸의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듯 느껴진다.
그 첫 번째가 기감(氣感)으로 손바닥의 노궁혈이 뜨거워지면서 단전의 온기가 인체의 뒷면부(배꼽반대쪽) 명문혈과 함께 가끔씩 반응을 나타낸다. 이 글을 읽는 수행자라면 벌써 명문혈이 움직이고 있음을 감지할 것이다.
이윽고 소주천의 기미가 생기면서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단전호흡을 오랫동안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는 엉터리 소견이 있는데 이것은 심신이 맑아져서 나타나는 자연의 신호임을 모르고 하는 우스운 소리다. 이 답답함은 오래 전부터 본인의 가슴혈을 막고 있었던 빙의령의 모습으로 나타난 카르마의 첫 장(章)이다.
자연의 흐름은 기(氣)의 확장으로 생기는 따뜻함과, 경혈이 막혀서 나타나는 답답함으로 빙의령의 존재를 동시에 감지하는 묘한 촉감으로 나타나는바 이것이 묘촉이다. 집중의 대상은 묘촉으로 바뀌면서 관(觀)의 밀도를 더욱 증폭시킨다.
하늘의 기운은 자가 치료능력을 배양하여 답답하게 느껴지는 막힌 부위의 경혈을 관법만으로도 스스로 개혈한다. 경혈을 막고 있는 역에너지는 본인의 업장으로서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는 관(觀)은 드디어 경혈을 막고 있던 역에너지를 소멸시킨다. 역에너지는 소멸되면서 전생의 업장인 영(靈)의 그림으로 모습을 나타내며 사라진다.
마침내 경혈이 열리면서 시원함을 가져오는데, 바로 이것이 업장소멸의 과정으로 법희(法喜)선열(禪悅)의 희열(喜悅)이다.
집중의 대상이 수식관에서 묘촉으로 바뀔 때 인체의 임,독맥 주천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어 드디어 두정(頭頂)의 백회혈이 개혈된다. 백회(百會)는 백맥이 집결되는 경혈로 천기(天氣)가 내려오는 신비스러운 하늘의 문(天門)이다.
[관음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