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오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막1:3)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할까?
교회?
얼핏 생각하기에 그래야 활 것 같다. 언제나 말이다.
그런데 성경엔 그게 아니라고 할 때가 있다.
광야로 가야 한다고. 그곳부터 찾으라고.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이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마땅히 성전으로 오라고 했어야 한다.
그들의 자부심이요 자랑인 터가 높고 아름다운 시온성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제쳐 두고.
그들을 광야로 부르셨다.
외치는 자는 세례 요한이었고.
그런데 그곳은 삐끗하면 뱀과 전갈에 물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
먹고 마실 떡과 물도 없어 기근의 공포가 기다리고 있는 곳.
코로나 펜데믹처럼 가게 문을 닫아야하고 실직의 두려움이 깔린 그곳.
그곳 광야교회로.
이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 제사와 예배의 거부를 의미.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는 바로 그 성전 제사.
영적 나르시즘(自己愛, self-love)에 빠져 있었던 그들이었기에.
영적 자기도취에 빠지고 익숙해 있어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신앙에 안주하고 있었기에.
한 때
그 옛날 세겜에서의 야곱이 그랬다.
혈혈단신으로 광야로 도망쳤던 그,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되어 20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그는 밷엘로 가지 않았다.
벧엘은 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돌짝밭.
대신 벧엘에 가까운 세겜에 눌러 앉았다.
세겜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서울.
그것도 강남 한 복판.
그리고 그곳에다 제단을 쌓았다. 곧 교회.
교회 이름은 “엘엘로헤이스라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
원래 그의 이름은 야곱이었지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목숨을 건 씨름 후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얻은 이름이 이스라엘.
그래서 교회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모양.
신앙양심상.
그리고 그렇게 그곳에 머물며 한 10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지금 그의 그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여기면서.
그러다 그의 고명딸 디나가 그곳 세겜 왕자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이에 살육이 일어났고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때의 장면(창3:15):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은 엘엘로헤이스라엘이 아닌
벧엘이었던 것. 그곳으로 가라는 것. 원래 자리로 가라는 것.
예수님 이후 세워진 교회들은 어떨까?
특히 현대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계3:14-19),
그곳 교인들의 입에 발린 신앙고백은 이것이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
은혜의 나르시즘이다.
부요함이 믿음의 증거요 결과라는 자랑이다.
예수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부자들이 모이는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그래서 좋고 자랑스럽고 만족스럽다는 것.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더 귀하신 예수는 없고
부요함을 주시는 예수만이 있는 그게 은혜란다.
그리고도 바늘구멍 같이 좁은 하나님 나라의 문을 통과 할줄로 믿는다.
속빈 강정 같은 그들을 향하신 주님의 책망.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광야의 경험이다.
모든 것을 벌거벗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불 수 있는 그곳
코로나에 비춰진 자신의 민낯을 충격적으로 볼 수 있는 그곳.
오늘 성경은 광야를 언급하면서 그 지명은 언급하지 않는다.
광야는 지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인 것이라는 뜻.
곧 회개의 자리를 의미.
주님이 내게 오실 길을 준비하는 그 자리.
그런데 회개에도 위험성은 있다.
두 가지의 회개가 있기 때문에.
하나는 “죄에 대한 회개”
또 하나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돌이키는 대신 회개만 반복하는 경우가 더 많기에.
회개의 니르시즘 또한 주의해야 한다는 뜻.
이 모든 영적나르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광야로 가야하고
그 부르시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만났던 광야의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그걸로 부터 다시 시작해야.
모세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다.
한 사람은 호렙산 기슭에서,
또 한사람은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그들이 삶의 사명과 의미를 부여 받고 되찾은 게 그때로 부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영원하신 주님 예수와 함께 있다.
변화산에서 보여 준대로.
때문에
광야교회로의 부르심과 응답,
그건 개인적인 것이 먼저다.
그래야 참된 은혜로의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
야곱의 응답이 그랬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35:3)
벧엘로, 회개로의 부름심에 응답한 야곱처럼
이 환난의 때
우리도 우리의 광야로 올라가자.
거기서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우물쭈물 말자.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환난이 우릴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럴 때 우물쭈물하는 거, 그거 습관된다.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라는 제목의 찬양을 동영상으로 올린다..
옛날 입당 전 지하 본당에서 예배 드리던 우리 교회 청년들이 부른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