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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주영 KFA 의무팀장-2
■ 대표팀 승리 뒤에 숨은 또 한 명의 주역
⇒ 한국 선수들은 종합병동이라 할 정도로 유달리 만성적인 부상에 시달리는 것 같다.
(탄식) 아,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맞이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성인인데 그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학교에 강의를 나가서도 우리 선수들 정말 안됐다는 얘길 항상 한다.
아마추어 시절에, 어렸을 때 너무 혹사당한 탓이다. 부상을 당해도, 발목을 다쳐도 대학 진학을 위해, 혹은 팀의 우승을 위해 어떤 때는 주사를 맞고 뛰는 아이들이 있고, 제대로 되지도 않은 붕대를 칭칭 매고 뛰는 아이들이 있다.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에서 뛰면 어떻게 되겠는가? 관절이 닳을 대로 닳는다.
가끔씩 대표팀 선수들이 아프다고 해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 보면 모두 다 4,50대의 관절들을 갖고 있다. 그런 선수들이 격한 훈련을 하거나 경기를 마친 다음 저녁에 “선생님, 저 여기 아파요“ 해서 살펴보면 분명 부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밤새 통증을 느낀다. 이미 관절이 상할 대로 상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지켜본 선수 중에 저 선수는 운동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싶을 정도의 몸 상태를 갖고 있었던 선수가 있는가?
선수의 이름은 말할 수 없다. 선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해치는 얘기인데다 의료인은 의료 일지에 적힌 환자의 몸 상태를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 철저한 원칙이다. 다만 예를 들기 위해 이야기를 해 보면 이런 선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 그 선수를 만났을 때 그는 45분밖에 뛰지 못하는 반쪽 짜리 선수였다. 전반만 끝나면 다리에 쥐가 나고, 감독이 몸 상태를 물어볼 정도로 전혀 뛰지 못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 선수는 시즌이 끝나면 소속팀에서 독일에 보내 치료를 받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시즌 중에 대표팀에 발탁되어 왔는데, 그 선수가 나를 보고 “선생님, 다리가 다 안 펴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정밀 검사를 해 봤더니 문제점이 발견됐다. 그 선수가 고등학교 시절에 무릎 연골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 재활치료가 전혀 안 됐던 것이다. 정확히는 허벅지 뒤쪽 근육이 완전히 위축되어서 무릎을 완전히 폈다 구부렸다 하지 못하고, 킥을 할 때 힘이 들어가야 할 부분이 모두 약해져 있었다.
그때부터 치료에 들어갔고, 재활훈련을 시작했다. 그 선수가 당시 대표팀에 1개월 정도 있었는데, 그 기간 사이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그후 자기 소속팀에 복귀해서는 풀타임을 뛰어 팀 관계자가 모두 놀랐다고 한다. 지금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대표팀에 오거나 하면 내가 따로 관심을 가지고 관리한다.
⇒ 그러면 반대로 몸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선수는 누구인가?
그것도 선수 이름을 밝히긴 곤란한데, 그런 선수들은 대부분 아마추어 시절 때 운이 좋게 부상 경력이 없다 든가, 프로에 와서 뒤늦게 빛을 본 선수들이다. 우리 나라는 프로에 오기 전에 체계적인 관리를 받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일찍부터 소질이 빛난 선수 중 제대로 된 몸 상태를 가진 선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재라 불리는 선수들이 단명 하는 이유 중에는 그런 원인도 있다.
⇒ 대표팀 선수들을 관리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아무래도 큰 경기를 앞두고 짧은 시간 안에 선수의 부상을 완전히 회복시켜 시합에서 선수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때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1999년 시드니 올림픽 최종 예선을 앞두고 이영표의 무릎 부상을 치료했던 과정이다.
당시 이영표를 데리고 정말 눈물나는 재활 훈련을 했었다. 정상훈련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 오전 오후로 둘이서 계속 재활훈련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혹독하게 시켰던지 영표는 지금도 날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한다.
그래도 최종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 진출이 결정되자 나에게 와서 선생님 덕분이라며 고마워했다.
⇒ 2004년 9월 8일 있었던 베트남과의 경기 결과를 두고 팬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 스태프의 입장에서 볼 때 고전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우리 선수들이 지고 싶은 생각을 가졌거나, 안이하게 경기를 치른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전에도 쓰라린 경험이 있었는데, 그 경기에서 비기거나 지면 어떻게 되는지 선수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월드컵도 월드컵이지만 정말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명예가 훼손되리라는 것을...
다만 우리 선수들이 많이 지쳐있었다는 것이 큰 문제였던 것 같다. 대표 선수면 각 팀의 주전들인데 여름의 컵 대회, 후반기에 들어서도 계속 경기를 치러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메디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박)지성이를 제외하면 경기를 뛰는 것이 힘들 정도의 부상을 겪고 있는 선수는 없었다. (송)종국이가 허리에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 얼마 전 아테네 올림픽 얘기도 빼 놓을 수 없다.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몇몇 주요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렸었는데?
올림픽 팀이 유럽전지훈련에서 돌아와 국내에서 평가전을 치를 때는 내가 아시안컵에 참가하느라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당시에 (김)영광이가 손가락을 삔 상황이었고, (김)동진이가 예전에 다친 부상 부위를 치료 중이었다. 그리고 (조)병국이가 발목을 다쳤었다. 아시안컵을 마치고 프랑스로 합류해 선수들의 부상을 살펴보니 연습을 하면서 치료를 병행하는 데는 크게 지장은 없어 보였다.
⇒ 김남일의 부상은 팀에게 매우 큰 손실이었다.
나로서도 굉장히 아쉬웠다. 아시안컵에서 상대 선수에게 발이 밟혀 5번 중족골을 다쳤었는데, 그것이 1차적인 부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부상은 통증은 있었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휴식을 취하면서 많이 좋아져 다시 운동에 들어갔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서 와일드카드 합류 연락이 왔을 때 김남일 본인에게 최종적인 컨디션과 의견을 물어보니 본인도 괜찮다고 대답해 나와 함께 프랑스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훈련을 시작하고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김남일이 필드에서 혼자 연습하던 중에 1차로 다쳤던 부분을 또 다친 것이었다. 본인이 뚝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였다.
⇒ 항간에선 피로 골절이라는 얘기가 있어 선수를 혹사시킨 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었다.
그것은 아니다. 선수의 몸 상태는 선수가 가장 잘 안다. 부상 전날만 해도 남일이에게 계속 컨디션을 물어봤는데 그런 증상은 없었다. 당시 병원에서도 검사결과를 통보 받았지만, 처음 내가 확인했던 대로 비골이라는 부위가 부러진 부상이었다.
예전 1996년에 애틀랜타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가진 유럽원정에서 유상철이 김남일과 비슷한 부상을 당해 올림픽 출전을 못했는데, 운동을 하다보면 충돌과 같은 외압이 아닌 자기 움직임 중에도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잔디가 얽힌 틈새에 축구화의 스터드가 맞물린 상황에서 무리하게 역동작을 취하다 부상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1차적인 부상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큰 원인은 아니었다. 아마 그 중족골이라는 부위가 피로 골절과 연관된 부위라서 그런 얘기가 있었나 보다.
⇒ 아테네 올림픽 그리스 전에서 김치곤의 부상과 뒤이은 퇴장은 팬들에게 논란의 여지를 남겼었다. 당시 김치곤이 부상으로 라인 밖으로 나갔을 때 崔 닥터가 벤치에 어떤 신호를 보냈었는데, 그것이 뛸 수 있다는 의미였나, 없다는 의미였나?
부상 정도를 1, 2, 3으로 나눈다면 2 정도의 부상으로 판단됐기 때문에 일단 안 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전반 초반이고 갑작스런 상황이라 선수 교체를 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우선은 부상 부위에 급한 처치를 하고는 들여보냈다. 그런데 들어간 상황에서의 움직임을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아 보였다.
김호곤 감독 역시 많은 고민을 했었다. 특히 치곤이는 코치진에서 상당히 신뢰하고 있던 선수라 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일이 벌어진 거다.
⇒ 올림픽 당시에 최원권과 헤어스타일이 비슷해 큰 화제가 됐었다.(웃음)
나도 그게 참 신기하다.(웃음) 올 상반기에 국가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을 오가며 바쁘다 보니 따로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계속 길렀다가 아시안 컵 출국에 앞서서야 겨우 시간이 있어 살짝 파마를 했었다. 그리고 아시안컵을 마치고 올림픽 대표팀이 있던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나랑 뒷모습이 똑같은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바로 원권이였다.(웃음)
내가 아시안컵에 참가하느라 올림픽 대표팀이 국내에서 평가전을 할 때 빠져 있었는데, 그 사이에 그 녀석도 파마를 했던 것이다. 그걸 보고 어떤 기자 분께서 "두 사람이 똑같다. 부자지간이다."라고 말한 게 계기가 돼서 사진이 실리며 기사화 된 것이다. 그 이후엔 선수들까지도 날 보고는 뒤에서 "야, 원권아~"라고 부르고 원권이한테는 "어, 崔 선생님~"하며 장난쳤다.(웃음)
⇒ 코치, 선수들 못지 않게 올림픽에 대한 미련이 남았을 것 같은데.
월드컵은 2002년에 좋은 성적을 남겨 이제 미련이 남지 않지만, 올림픽의 경우에는 애틀랜타, 시드니까지 매번 8강 진출의 문턱에서 좌절해 아쉬움이 컸었다. 본선 3경기를 잘 치르기 위해 1년 반 이상을 준비하는데 그 3경기에서 실패하고 돌아올 때의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다행히 이번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8강에 진출해 그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털어 낼 수 있었지만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미련은 여전히 남는다. 올림픽 대표팀 아이들도 좋은 성적과 병역 해결에 대한 스트레스로 너무 힘들어했다. 그런 것을 생각해서도 메달을 땄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 2002 월드컵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본선 7경기를 치르면서 많은 부상 선수들이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아무래도 김태영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16강전 이탈리아(전) 때다. 전반을 얼마 안 남겨두고 김태영이 코를 다쳤는데 코뼈가 살짝 들어간 상태였다. 부러진 것 같았다. 다만 호흡이나 어지러움, 구토 증세 같은 기본적인 부분을 체크해 보니 본인이 괜찮다고 하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들여보내 뛰게 했다.
하프타임에 라커룸에서 태영이를 정확하게 살펴봤다. 예상대로 코뼈가 확실히 부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전반 끝나기까지 무리 없이 뛰었고 꽤 시간이 지난 상황에서도 별다른 휴유증이 없어 경기를 계속 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선 코가 붓지 않도록 아이싱을 했다. 태영이가 누운 상태로 나에게 “선생님 부러졌죠?“라고 묻기에 나는 ”부러지진 않았고 붓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싱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 히딩크 감독에게 가서는 ”부러졌습니다. 하지만 다 정상적이라 경기는 뛸 수 있습니다.“라고 얘길 해 후반에도 출전을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사이 김태영이 화장실에 가서 거울로 자기 코를 보고 온 것이었다. 그러더니 날 보고 ”분명 부러진 것 같은데, 이상하네요?“하며 반신반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끝까지 잡아뗐다. 만일 내가 그 상황에서 사실대로 얘기했더라면 김태영은 정신적인 면에서 위축되어 특유의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병원에 데려가 부러진 뼈를 조정하며 사실대로 얘길 했다.
⇒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김태영이 쓰고 나온 타이거 마스크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
일단 16강 경기가 끝나고 코뼈가 잘 조정됐지만, 골절된 상태 그대로 경기에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일본의 미야모토가 쓰고 나왔던 하얀 마스크였다. 한국 쪽에 수소문 해보니 그것을 제작하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즉시 일본에서 뛰던 (유)상철이에게 일본 현지에서 그 마스크를 제작할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라고 했다. 결국 마스크를 제작했던 두 명의 일본인을 찾아내 급히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 두 사람을 호텔 방에 가둬두고는(?) 다섯 시간에 걸쳐 마스크를 제작했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는데, 마지막 문제는 마스크의 색을 정하는 것이었다. 미야모토가 하얀 색을 썼으니 이제 붉은 색과 검은 색이 있는데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우리가 붉은 악마인데 당연히 붉은 색이었다. 이것이 타이거 마스크의 탄생 비화다.
⇒ 박지성은 어땠나? 미국 전에서 부상을 당해 포르투갈 전 출장이 어렵다고 했는데, 득점까지 기록하며 16강 진출에 결정적 기여를 했는데.
지성이처럼 드라마틱한 경우가 앞으로 또 있을까 싶다. 얘기한 것처럼 지성이는 미국(전)에서 발목이 나갔었다. 붓는 것만 막는다면 발목이 완쾌되는 시간은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는데, 응급처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붓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박지성은 팀의 가장 중요한 선수 중 한 명인데 경기는 3일 뒤였다. 어떻게든 이 선수를 낫게 해서 경기 하루 전날 합류해 팀훈련을 소화하게 해야 했다. 실질적인 남은 시간은 이틀이었고, 우선 붓기를 빼는 데 최선을 다했다. 부상을 당한 다음날 붓기가 거의 빠져나갔다.
다음은 재활이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지성이 하나에게 매달렸는데, 이름대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이 도왔는지 이튿날 아침에 살펴보니 상태가 너무 좋아졌다. 지성이 본인도 “훈련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다.”고 얘기했다.
⇒ 당시 박지성을 데리고 소위 007 작전이라 불리는 비밀작전을 펼쳤다고 하는데?
그 날 오전에 히딩크 감독에게 지성이의 상태를 얘기했더니 핌 베어벡 코치, 네덜란드에서 온 물리치료사와 함께 지성이를 데리고 나가 모든 움직임을 확인 해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4명이 호텔 로비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 몰래 차를 타고 경기장에 가서 지성이의 상태를 살펴봤다.
나는 공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의 모든 움직임을, 핌 코치는 공을 가진 상황에서의 드리블, 패스, 슛 같은 움직임을 시켜봤다. 결론은 모두 정상이었다. 히딩크 감독에게 연락했더니 오후 훈련에 지성이를 참가시키라고 했다.
경기 당일 아침에 히딩크 감독이 다시 나에게 “박지성은 어떤가, 스타팅으로 내세워도 괜찮겠나?”히고 물었다. 나는 “부상은 다 나았습니다. 다만 심리적인 부분은 책임 질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히딩크 감독이 아무 말 없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몇 초의 짧은 시간이었는데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성이의 방으로 올라가 지성이에게 경기를 뛸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지성이의 대답은 “이제 한가지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뛰겠습니다”였다.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갖게 되었고 히딩크 감독에게 마지막 확답을 보냈다. 히딩크 감독도 지성이를 따로 불러 물어본 상태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성이는 포르투갈(전)에 출전하게 됐고, 놀랍게도 다친 왼발로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때 내 기분이 어땠겠는가? 아마 그 기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 황선홍의 붕대 투혼도 기억에 남는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억울한 감이 있어 항변 아닌 항변을 하고 싶다. (웃음) 당시에 이탈리아 대표팀의 한 선수(프란체스코 코코)가 우리와의 16강 전에서 눈두덩에 부상을 당해 머리에 스타킹 넷이란 것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미국 전에서 황선홍이 비슷한 부상을 당했을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한 면에는 끈끈한 검이 붙어있는 붕대를 감겼다.
그것을 보고 많은 팬들이 왜 우리는 아직도 미개한 방법을 쓰느냐고 했다는 얘길 들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하는 축구 중계를 보라. 지금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나 역시 98년 월드컵을 통해 당시에도 사용되던 스타킹 넷의 존재를 알았고, 월드컵 당시에 내가 챙겨 들어가는 구급상자에 구비가 되어 있던 상태였다.
시간이 급박했다면 스타킹 넷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선홍이가 아웃되어 있던 동안 미국이 공격을 주도하고 있어 선홍이가 바로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왕 그럴 바엔 확실하게 처치해서 들어간다는 생각에 붕대를 쓴 것이다.
그리고 98년 월드컵 벨기에(전)에서도 확인했지만, 우리 대표팀은 팀원 중 한 명이 부상 투혼을 발휘하면 팀 전체의 사기가 올라가는 성향이 있다. 더욱이 그 선수가 팀의 최고참인 황선홍이라면 효과가 오죽하겠는가.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는데, 경기가 끝나고 “미개하다, 후진적이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섭섭했던 것이 사실이다.
⇒-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서 물리치료사를 추가해서 데려왔는데 그들과 갈등은 없었나?
처음에 한 사람이 왔고, 월드컵 직전에 한사람이 더 추가돼서 모두 두 사람이 왔다. 처음에 네덜란드에서 물리치료사를 불렀을 때, 히딩크 감독이 나를 불러서 “인디언(히딩크 감독이 최주영 닥터를 부른 애칭), 당신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의료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소집되는 시기에 맞춰 네덜란드의 물리치료사를 한국에 부르고 싶다”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물론 그 얘기를 했던 당시에는 이미 그들을 부르는 것이 결정 나 있던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내게 상당히 불쾌한 일일 수도 있지만 히딩크 감독은 취임한 이후에 나를 인정했고 존중해줬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나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내 의견은 모두 다 받아줬다. 그렇게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인 상황이다 보니 절차상의 문제는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히딩크 감독이 “그들이 합류한다 해도 의무 팀의 보스는 당신이다. 그들이 트러블을 만든다면 즉시 내게 말하라”며 자신의 진심을 보였다. 합류한 물리치료사들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큰 갈등은 없었다. 지금도 가끔씩 서로 연락을 취한다.
⇒ 스태프와 선수들은 대표팀 물리치료실을 가리켜 ‘사랑방’이라고 부른다는데?
우선 선수들이 나를 형처럼 편안하게 생각한다. 말을 낮추고 호칭을 쉽게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나 관심사를 나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개인사에 대해 훤히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서로 간의 친밀감이나 동질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물리치료실에서는 유니폼을 벗고 벌러덩 누워서, 평상시 하는 가벼운 욕도 섞어가며 농담을 한다. 자기들 방에서 하는 얘기들을 여과 없이 할 수 있게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런 공간에서는 권위를 내세운다 든가 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물리치료실은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선수들이 팀이나 코칭 스태프에 대한 불만도 얘기할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 의무 팀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선수와 코칭 스태프 사이의 완충 작용을 하는 것이다. 선수들이 스스럼없이 하는 얘기를 코치들에게 그대로 이른다거나,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에 대해 한 말을 그대로 선수들에게 한다면 팀이 어떻게 되겠는가?
대신 그런 말들을 분별 있게 판단해 적절히 한다면 선수에게는 의욕을 높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코치(진)에게는 선수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바꿔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얘길 얼마나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 지금까지 물리치료실에서 많은 선수들과 대화를 나눴을 텐데 가장 매력 있게 느낀 선수는 누구인가?
이천수다. 나는 천수를 아주 매력 있는 선수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천수가 장점만 갖춘 선수는 아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천수를 좋지 않게 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천수를 보고 있으면 진정한 프로 선수란 저래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방송에 나오면 방송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끼를 다 보여주고, 운동을 할 때는 운동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끼를 다 보여준다. 사소하든, 사소하지 않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선수다.
그밖에는 황선홍 선수가 고참이면서도 모두와 화합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나를 비롯한 스태프 한 명 한 명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 좋았다.
⇒ 이천수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을 것 같은데?
알다시피 월드컵 당시에 이천수는 최태욱과 함께 팀에서 가장 막내였다. 월드컵 때는 큰 부상, 잔 부상 할 것 없이 물리치료실에 언제나 환자가 꽉 찼다. 천수도 발목이나 어깨에 만성적인 부상이 있어 경기를 마치면 꼭 물리치료실에 오는데, 월드컵 때 경기를 마치고 오면 형들이 줄줄이 서 있으니 자기 차례가 언제 오겠나.
피곤한데 잠은 자야하고, 치료는 받아야겠고. 이천수가 눈치를 보면서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는데, 도저히 밤중에 자기는 치료를 못 받을 것 같으니까 몰래 들어와서 치료 도구들을 집어 자기 방으로 가더라.
다음 날 아침에 “천수 임마, 너 왜 치료받으러 안 왔어?” 하니까 천수가 “선생님, 제가 다 했어요” 하고 말하는 것이다. 살펴보니까 그 날 밤 방에서 자기가 치료를 한 상태였다.
워낙 많이 다치고, 치료도 자주 받다 보니 내가 하는 것을 유심히 보고는 발목 테이핑 정도는 자기가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던 것이다. 전문가인 내가 봐도 크게 흠 잡을 것 없는 상태였다. 일반 선수였으면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그냥 잤을 것이다. 천수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 아무래도 대한민국 축구선수 중 부상의 대명사라고 하면 황선홍을 꼽을 수 있는데?
황선홍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대표팀 선수들 중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선수다. 98년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선홍이도 괴로웠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도 측은한 마음에 선홍이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 감독님도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어떻게든 황선홍을 회복시키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었는데 도저히 안 되더라.
⇒ 이건 가정을 전제로 하는 얘긴데, 만일 당시 부상을 입은 황선홍을 지금 다시 맡게 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회복시킬 자신이 있는지?
지금 다시 맡는다면 선홍이를 뛸 수 있게 할 자신이 있다. 그 당시도 마지막 경기는 뛰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지만, 당시엔 내가 황선홍의 치료를 전적으로 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그라운드 위의 최주영 닥터
2004아테네 올림픽 후 귀국 길에 체코 프라하에서 올림픽 선수들과 함께 최주영 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