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에 여행연수를 다녀왔다. 3뤌 초 지역 선택을 할 때 나는 경상권을 선택했다. 내 나름대로 통밥을 굴렸다. 부산과 경주, 안동, 영주 등 경북지역일 거라고 여정을 예상했는데 막상 연수 시작하고 나온 일정을 보니 지난 1월에 다녀온 경상남도 통영과 남해였다. 전라도 지역를 선택할 걸, 잠깐 후회를 했다. 담양, 강진, 목포, 신안, 환상적인 여정이다. 더구나 한번도 못 가본 신안이 포함되었고 '엘도라도'에서 숙박을 한단다.
10시 교원대에 도착해서 강원권과 함께 속리산으로 향했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다. 전날 떠난 전라도와 서울경기팀들은 빗길 여행이지 싶다. 속리산 주변 상가는 쇠락한 듯 활기가 없었는데도 점심은 참 맛있다. 습한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직 청소도 덜 끝낸 낡은 호텔은 금세라도 곰팡이가 필 것 같다.
3시간에 걸친 특강을 들었다. '교장의 비전 창출을 위한 선진 비전 연수', 이름도 거창하다. 강의 수준은 평범했다. 지난 4월 지역 단위 연수에서 워낙 쟁쟁한 강사들의 강의를 들어서인지 교원대에서의 강의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
어느 절집인들 그러하지 않으랴. 양쪽으로 도열한 아름드리 나무들 사잇길을 천천히 걷노라면 마음이 정갈해진다. 요동치던 산문 밖 걱정이 슬그머니 계곡물에 씻겨나간다. 어제 내린 장맛비로 알맞게 부풀어오른 계곡물소리는 더없이 맑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다가 일행을 빠져나와 강원권을 선택한 우리 분임 남자 동료 두 명과 같이 경내를 산책했다. 금동미륵대불상은 개금불사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대불상 지하에 법당이 있을 줄이야. 지하 법당을 맨발로 걸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찬기운이 가슴까지 서늘하게 한다. 저절로 합장하고 고개 숙이게 된다. 물동이를 이고 있는 '희연보살상'과 돌로 연꽃무늬 새겨 만들었다는 '석연지'는 새롭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당간지주는 언제 보아도 법주사의 최고 명물이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들었지만 빗줄기가 너무 세서 오도가도 못하고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문장대까지 가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걱정된다.
저녁은 경상도팀과 강원도팀이 나뉘어서 먹었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굳이 맥주 한 잔 따르겠단다. 사양하다가 한 잔 받으며 말을 나눴다. 호텔로 돌아오니 8시 조금 넘었다. 호텔 내 찻집은 이미 문을 닫았다. 여행의 첫날 밤,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린다. 살짝 들뜬 사람들은 로비에서 서성거렸다. 나도 그랬다. 일찍 들어가 책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 법주사를 같이 산책했던 두 남자들은 아니 보인다. 오늘 밤문화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 땅땅치더니 술꾼들끼리 어디론가 사라졌나 보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아까 저녁상에서 술 한 잔 권한 동료가 자기 친구들이 나를 기다린다면 굳이 함께 가기를 권한다. 노래방 갈 게 뻔하다. 노래를 안 해도 된다는 다짐을 받고 따라나섰다. 모두 00에서 온 분들로 대학동문에 본청에서 오랫동안 같이 근무한 사이였다. 이미 노래방 여주인과 맥주를 나눠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맥주를 한 잔을 더 마시며 쉼없이 부르는, 귀에 익은 옛 유행가를 들었다. 가끔 일어나 살랑살랑 막춤을 추며 놀기도 했다. 나 때문에 더 찌~인하게 여주인과 놀지 못한 것 같아 세 남자에게 미안했다. 남자들은 여자 없이는 노래도 못 부른다. 사업이나 업무 관련 내용이 아니면 사적인 수다도 잘 못 떤다. 여자들 입장에서 볼 땐 참 이해가 안 된다.
아침 식사 후 법주사까지 산책했다. 어젯밤 세찬 비에 계곡물은 무서운 기세로 흐른다.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몸을 털 때마다 후두둑, 비를 맞는 것 같다. 이별 인사를 못했다며 강원도로 떠나는 동료들이 문자로 인사를 보내왔다. 이 문자질은 여행 내내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안개의 속이불에 숨은 덕유산 속살이 궁금하여 곁눈질하는 사이에 산청이다. 한의학박물관의 조망은 멋지다. 멀리 황매산이 솟아 있다. 이곳이 숙박시설까지 갖춘 종합휴양단지가 될 거라고 한다. 각 지자체들이 이런저런 박물관과 체험관을 지어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느라 열을 올리는데 그곳들이 모두 제 기능을 다하며 지자체의 수입 증대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이곳의 마스터플랜대로 대규모 종합한의학단지가 조성된다면 차별화된 명소가 될 듯하다. 매장엔 한의약이 없고 천연염색 상품들이 많다. 숯을 넣은 양말 두 세트와 행주 12개를 샀다. 나 없는 사이 1학기 업무 마무리를 해준 부장들에게 줄 마음의 선물이다.
비가 올 듯 말 듯 불안하다. 제승당은 벌써 세번째 방문이다. 문화해설사의 설영을 들은 이번 기행은 특별하다. ‘통영’이라는 도시명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 오랫동안 존재했던 이곳에 대한 시민들의 자긍심이 느껴졌다. 이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한산대첩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다. 단지 3대 대첩의 하나로 보는 것은 이 싸움이 지닌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이순신은 남자로서 가장 멋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이순신을 가장 스마트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그의 간결한 일기는 읽을수록 행간에서 이순신다운 멋과 맛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억울한 옥살이를 끝낸 후 옥문을 나선 날의 일기는 단 한 줄이란다. '오늘 옥문을 나섰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내린다. 저녁엔 통영오광대놀이 중 3과장과 5과장을 구경했다. 공연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별 감흥을 못 느꼈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 아쉬웠는데 밖으로 나오라는 인터폰 연락이 왔다. 맥주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같은 경기도에서 왔어도 서먹서먹했는데 이참에 가까워졌다.
아침부터 장대비다.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아름다운 한려수도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서 안타깝지만 여행은 늘 이런 변수마저도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제안으로 통영을 대표하는 화백 전혁림 미술관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와보겠는가. 고향을 지키며 고향의 바다와 산과 새와 물고기를 즐겨 그리는 화백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고령의 나이에도 붓을 놓지 않는 열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세찬 빗줄기 속에 알록달록 타일로 마감한 미술관 외관이 사뭇 감각적이다. 지방 소도시에도 이런 공간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문화강국이 되는 것이지 서울에 몇몇 대형 문화광간 짓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빗속에 들른 통영수산과학관의 내부 전시물은 식상하다. 아무래도 예산낭비의 표본일 것 같다. 비슷한 것들을 여기저기서 이미 너무 많이 보았다. 그러나 빗속에도 고요하기만 한 다도해를 조망하는 일과 건물 외벽에서 통영을 대표하는 김춘수,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 김상옥의 커다란 사진을 만나는 일도 값지다.
남해를 향하는 길에 빗줄기는 가늘어지더니 그쳤다. 남해 해안도로는 어디에 눈길 두어도 사랑스럽다. 해오름예술촌, 방치된 폐교를 활용하여 전시실과 작업공간으로 만든 한 사람의 집념은 빛났으나 전시 내용들은 좀 산만하였다. 안개비에 젖어 보리암에 올랐다. 안개비에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금산의 아름다움과 푸른 바다의 신비를 마음의 눈으로 상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제1, 제2주차장을 보면서 무엇이 진정 자연을 보존하는 길인지 묻게 된다. 시멘트 도로보다 케이블카가 훨씬 좋을 것 같다. 과학기술을 적극 활용하면 훨씬 자연생태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리암 초입에서 이성복의 시 ‘남해 금산’을 읽었다. 기쁘다. 그러나 남해 금산을 제대로 즐기려면 상주해수욕장 방향에서 걸어 올라야 한다. 그 길은 몇 안 되는 내 마음의 명소다. 며칠 과식했고 술 안 마시던 사람이 맥주를 연거퍼 마신 탓이었을까. 살짝 체한 것 같은데 머리가 지근거리고 속이 미식거린다. 저녁을 굶고 약을 먹었다. '남해힐튼리조트'에서 묵었다. 내부는 단정했다. 간결해서 더 고급스럽다. 단잠을 잤다. 숙박비 비싸서 엄두도 못내던 이곳에서의 숙박 경험이 내게도 찾아오다니, 야호! 호텔식 아침 뷔페는 기분마저 들뜨게 한다. 남해를 떠나기 전, 충렬사에서 이순신 사당에 참배하고 거북선에 올랐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다. 이순신을 도운 사람들의 총체적 결실이 바로 거북선이다. 이순신을 통해 지도자의 리더십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전문성과 자기희생과 따뜻한 부하 사랑이다.
비로소 해가 나기 시작한다. 논개의 혼이 서린 진주성을 둘러 본 후 변영로의 시 한 수를 읽는다. 지난 밤 폭우에 황톳물이 흐르는 남강은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이 아니지만 ‘양귀비꽃보다 붉은 그 마음’을 촉석루에서 가늠해 본다. 의암에 서린 논개의 애국심은 시대를 초월하여 높이 기릴 덕목이다. 강 위에 띄워놓은 나룻배 한 척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토요일 허리인대주사 6대를 맞고 오후 내내 널브러져 있었다. 일요일 빨래와 청소를 했다. 주사 기운인가 보다. 몸살기가 예사롭지 않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원격강의 2과목을 들었다. 무엇이든지 적당히 하는 나쁜 습성 때문에 지난 주엔 연수 안내자료집을 살피지 않고 강의를 들었더니, 시간표와 맞지 않았다. 원격연수 과제물 제출하라는 메세지와 여행연수 보고서 내라는 메세지가 들어왔다. 우선 당장 월요일에 제출해야 하는 여행보고서를 썼다. 특강 내용과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버무려 2쪽으로 작성했다. 과제물 작성하려면 교재를 다운받아야 수월한데 다운받기가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다운 받아 내용을 꾸려서 첨부파일로 제출하니 이미 밤 11시다. 원격연수를 마저 들었다. 주어진 자료를 기준으로 급식 예산 편성 문제를 해결하고 형성평가와 총괄평가까지 마쳤다. 금세 들은 내용인데도 자꾸 틀린다. 강사가 강의를 못해서가 아니라 연수생인 나의 집중력 부족 때문이다. 나는 원격연수가 영 마뜩찮다. 다니기 힘들더라도 대면연수가 더 좋아서 직무연수도 한번도 원격연수로 받지를 않았다. 아직도 들어야 할 강의가 4시간이나 남았다.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하겠다. 다음 주에 몰아서 한꺼번에 하자. 내일로 미루는 나쁜 버릇이 또 튀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