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병호 녀석의 영어 발음은 미국과 영국의 중간쯤인 태평양식인데다
갱상도 사투리까지 섞여있다.
그 다음 차례인 내 영어 발음이 돋보이는 건
순전히 병호 녀석의 엉터리 영어회화 실력때문이다.
"다음!"
닭과장의 소리에 맞춰 벌떡 일어섰다.
"훼얼 두유 립?"
"아이 리빈 뉴우욕..."
".........."
아차! 다음 문장이 뭐더라...
"............"
이거 큰 일 났다.
3초 이내에 생각이 나지 않으면 꼼짝없이 벌을 서야 한다.
"하우 롱 햅유빈 데어?"
"어바웃 투엘브 이얼스..."
꼬부렸던 손가락을 펴지도 못한 채
한줄 또 한 줄 외워 내려갔다.
"다음!"
"휴우~"
닭과장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훼얼 두유리브?"
"아일 리브 인 뉴욕..."
정해가 나인헌드레드 회화책의 48페이지를 외워 내려 가는 중이다.
영어회화에는 엄청 열성적이었던 정해는
나인헌드레드 4권의 48페이지를 술술 외웠다.
암송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진다.
허공에 맴돌던 파리 한마리
포르륵 내 책상 머리에 앉았다.
잰 걸음으로 책상 한 가운데로 나서더니
뭔가를 열심히 핥는다.
좀 전에 내가 흘린 땀방울이다.
한 참을 그러더니
눈알을 까딱까닥 하며 앞발을 비벼 댄다.
"햐, 요 녀석 봐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동기생들이 숨소리 조차 크게 못 내는
닭과장의 영어회화 시간인데...
"어쭈구리, 이젠 뒷 다리까지 비벼대네."
강의실 분위기야 자기가 알바 아니라는 듯
파리는 내 책상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빨고 비비고 더듬고 야단법썩을 떤다.
"고이얀 놈, 거기는 네 녀석의 지상낙원이 아닐쎄."
공책 위에 내려 앉은 파리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내, 기어이 너를 잡아 너의 날개를 떼어버릴 테다."
손가락을 활짝 편 채
손바닥을 공책위로 슬그머니 가져다 댄다.
파리 녀석 앞 다리를 비벼대며 나를 쏘아 본다.
언제라도 날아오를 태세다.
"휘익~"
내 손이 노트위를 가로지르며 파리를 움켜 쥔다.
"휘리릭~"
하지만 파리녀석 유유히 내 손아귀를 벗어나 유리창에 앉는다.
"다음!"
기홍이 차례다.
"훼얼 두유 리브?"
.........
그런데 이게 웬일?
잠시 유리창으로 피신했던 파리 녀석이
내 노트위에서 또 얼쩡대는게 아닌가?
"햐, 요 놈 봐라. 아주 간뎅이가 부었는 걸..."
이번엔 기필코 잡겠다는 일념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파리에게로 손바닥을 접근시켰다.
파리녀석 노트위에서 뭔가를 맛있게 핥아 먹는다.
"맞아, 엊저녁에 48페이지를 옮겨 쓰다 졸았었지."
파리는 그 때 흘렸던 나의 침 찌꺼기를 핥아먹고 있는 것 같다.
"그 놈 참, 맛있게도 먹네."
내 손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먹는 데만 열중한다.
강의실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마침 도포 이기홍이가
마지막 한 줄을 기억하지 못해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휙~"
"앗싸, 잡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가 입으로 새어 나왔다.
"와 하하하하...."
순식간에 강의실은 웃음 바다로 변했다.
"조용히 해, 여기가 무슨 노무자 합숙손줄 아냐?"
닭과장이 앙칼지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강의실은 삽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좋게 말할 때 일어서라. 누구야, 아싸 잡았다 한 놈!"
얼굴이 화끈거리고 사지가 후둘거렸다.
"뭘 잡았다는 거야?
예쁜 여학생 손이라도 잡은 거냐?"
엉거주춤 일어서는 내게로 다가서며
닭과장은 어이없다는 듯 묻는다.
"저어~, 파아리... 새낀데요."
"와 하하하하."
또 한바탕 웃음이 온 강의실에 번졌다.
"뭐, 파리새끼?"
닭과장이 소리내어 웃는 건 처음 본다.
"어디 진짜 잡았나, 한번 보자."
슬며시 오른 주먹을 펴 보였다.
땀에 절은 파리 한마리.
기절했는지 질식사 했는지...
생명줄 손금위에서 꼼짝않고 누워 있다.
첫댓글 그래.... 그땐 그랬었지... ^^ 그게 삼십년도 더 지난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지만.... ^*^...
병호의 발음 때문에 우리는 긴장속에서도 웃음을 만끽할수 있었지.... ㅋㅋㅋ 아이리브인뉴뇩... 뉴욕을 뉴뇩으로 발음하는 바람에 한참동안 닭과장에게 시달리던 병호의 영어... 그때가 아직도 우리 추억에 남아있어서 그시절이 그리운게 아닌가 한다.....
정말 재미있다!!!! 일하다 혼자 웃으니 주위에서 뭔일인가??? 잘 읽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