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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조정래
고리뗑 바지
해마다 구정 설을 지나면 산골 아이들은 신이 났다.
왜야하면 물 날린 헌 무명 바지를 일년에 한번쯤 새 옷으로 바꿔 입는데,
그때가 바로 구정 설이였다.
그 당시 산골 아이들이 추운 겨울에 입었던 옷은
천수답이라도 제법 땅 떼기가 있는 부자 집 아이는 옥양목 천에 안으로 막천를 되어서 누벼 입었고
쪼매 사는 집은 누런 광목천을 검정 물을 들여서 입었고
그나마 더 못 사는 아이들은 무명 바지를 입었다.
무명은 직접 집에서 쐐기에 목화를 타서 일일이 손으로 만든 천이고
광목은 그 후에 기계로 짜서 나온 것인데 색갈이 누우랬다.
그 광목을 다시 냇가에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몇 번이고 삶아서,
은빛 모래밭에 몇날 며칠 햇빛에 말리면 하얗게 탈색되었는데 그것이 소위 옥양목이다.
무명이 티고라면
광목은 소나타이고
옥양목은 그랜져 급이다.
대체로 형제가 조롱박처럼 많은 집은 제일 큰 형만 새 옷으로, 나머지는 바로 위의 형제들것을 다시 손질해서 설날 아침에 설빔으로 받았지만 비록 형이 입던 헌 옷이지만 새로 바느질로 잘 누비고 덤으로 양말 한 걸레 새것으로 주면 다들 즐거워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설 며칠 전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 홀 닥 옷을 벗고 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종일 문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왜야하면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옷을 삶아 씻을 때는 모두 옷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헌옷을 새로 갈아입은 아이들은 아침을 먹기 바쁘게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동구 밖으로 모여 들어서 옷 자랑도 하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하려고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신나서 몰려다니기도 했다.
그런대 그해는 설이 지나도 신이 나기는커녕, 애들의 입이 당나발처럼 튀어 나온 아이들이 있었다.
왜야하면 그해 구정 설날... 마을 부자 집 아이 구희가 고리뗑(골덴) 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산골 아이들은 말로만 들었던 고리뗑 바지를 처음 보고
“우와와... 고리땡 바지 봐라!
“저게 무슨 바지인데?”
“빙싱아 저게 미제 신식 바지다! 이름도 코재이 말로 ”고리뗑“ 이라 카는기다.‘
“나이롱 옷보다 찔기나?”
“질기고 엄청 따스다 임마야”
산골 아이들이 입던 무명 바지는 조금만 입으면 무릎이 헤지므로 헌 겁을 다시 되고, 바느질을 더덕더덕 하여 입었는데 구희가 그런 무명 바지를 벗어 던지고 보들 야들한 고리뗑 바지를 입고 나타나자 아이들은 헉! 하고 숨을 멈추어 버린 것이다.
그만큼 고리뗑 바지는 꿈같은 옷 이였다.
자연 이집 저집 아이들이
“어메, 나도 고리뗑 바지 사주라 씨!”
“고리땡 바지 살 돈이 어디 있노?”
“우이-씨 나는 맨 날 형 입던 찌그래기 옷만 입고... 씨이!”
하면서 투정을 부렸고, 어떤 아이들은 아예 심술이 넘쳐 울고불고 부모님에게 해악을 하다가 급기야 화가 난 어메들이 부엌 부짓갱이를 들고
“니 어마이 속 다 태울네? 고함을 치면
징징 울던 아이는 후다닥 삽작걸로 도망을 가고
도망은 치지만 어메는 만만하므로 속을 태울 심사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징징거리다가.... 따라오면 도망가고
또 우이-씨 고리뗑 바지 사도고 씨! 징징거리다가 또 따라오면..... 도망가고,
어메들이 집으로 돌아서면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 따라오면서 징징 거렸다.
자우지간 .
부자 집 구희란 놈 고리뗑 바지 때문에 설 이후 온통 산골 아이들이 시끄러웠다.
그 고리뗑 바지를 공책에 몽당연필로 적어본다면 이랬다.
짙은 초콜렛 색,
고리뗑 바지는
밀밭 이랑처럼
보드라운 솜털 고랑이 송송 나 있지요.
손으로 만져보면
토끼 배털인들 그렇게 매끌매끌할까요?
동무하고 장난치다가 맨 땅에 넘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서면
다시 새 옷처럼 보이는 신기한 옷.
오! 모양새도 멋진
보들 야들한 고리뗑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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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구네 할배는 겨울이면 가끔 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읍내에 갖다가 팔았다.
아들은 육이오 때 사라졌고, 봉구가 유일한 씨 손자다.
좀 많이 띨띨하지만 천하에 둘도 없는 착한 손자다.
살림이 궁하고 돈이 없으니 손자 봉구에게 고리뗑 바지는 그저 꿈이다.
꿈이라면 오는 보름 장날, 읍네 장터에 장작이라도 한 짐 내다 팔았으면...했다.
그때 마실 젊은이들도 한겨울이면 할 일이 없어 먼 산에 나무를 해서 읍내 장날, 장작 나무나 혹은 솔 갈비를 지고 가서 팔았다.
장날, 읍내로 넘어가는 돌 고개 마루에는 서미골,오치골,잘패골, 산산 골골이 힌 옷 입은 나무꾼들이 줄줄이 겨울바람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줄 개미떼처럼 읍내로 넘어 갔다.
그런대 그런 나무꾼들은 대체로 힘이 펄펄 넘치는 한창 젊은 장정 이였지만 봉구네 할배는 늙어가는 중노인이다.
그래서 장작 짐도 자연 많이 질수 없어서 나무를 해다 팔아도 큰 돈이 되지를 않았다.
그러나 이번 보름 전에는 우째 우째 해서라도
어미,애비 없이 사는 손자, 봉구에게 꼭 고리뗑 바지를 사주고 싶었다.
설 지나고 며칠 후인가?
당체 무엇 하나 사달라고 하지도 않던 손자 넘이
‘할매, 고리뗑 바지 되게 비싸나?...구희는 억시기 좋은,고리뗑 바지 입었데이...“
밥상머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지난 설 때 손자에게 나이롱 양발 한 걸레로 때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지금 입고 있는 바지는 벌써 3년 넘게 입은... 빛바랜 무명 바지였고 설상가상
엉덩이는 호박판처럼 꿔메 입힌 옷이다.
이제 곧 알미 峯에 둥근 달이 솟는 보름이 온다.
마을 아이들이 망월이 불을 높이 피우러 또 알미 峯에 새카마케 오를 것이다.
그때 손자도 바람 숭숭 들어오는 헐렁한 무명바지보다는 보들보들하고 따스한 고리뗑 바지를 입고 달맞이하러 알미 봉에 오르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고리뗑 바지를 입고 좋아서
“달바래이! 어이 달바래이!
소리치는 손자를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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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구네 할배는 그래서 보름 전 장날은 좀 실한 장작을 힘에 부치게 지고 장터로 갔다
그때 P읍 나무 장터는 소전 옆에서 이루어졌다.
장작, 삭 다리, 솔 갈비, 혹은 다래기에 담아온 솔 방구리 같은 아궁이 연료들이 지게에 실어와 읍내 장터 나무전에 각기 나래 비로 세워놓고 기다리면, 읍내 사람들이 몰려 와서 다음 장날까지 밥 할 때 사용할 나무를 흥정을 하곤 했다.
몇몇 사람들이 나무를 흥정 했지만 거래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나무전 옆 소전거리에는 먼 길 걸어온 젊은 황소가 꼬뚜레 코 구멍 사이로 허연 김을 씩씩 품어 내었지만 아무래도 보름 장은 지난 설 대목장보다 못했다.
지난 설 대목 장날은, 하루 종일 뻥! 뻥! 하던 뻥튀기 장사꾼도 보름 대목장은 아직 기계에 관솔불도 못 부치고 있었다.
지금은 가스로 뻥튀기 기계를 달구었지만 그때는 관솔불로 달구었다.
샛별 사진관,
가고파 미장원,
못잊어 찐방 집.
새마을 기름 집....그런 가게 앞 쪽으로 자리 잡은 난전의 고무신 장사꾼들이 손님 부르는 육자배기 타령도 아직은 구성지게 터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배불때기 장터 들기름집 아지매가 봉구네 할배 장작을 기웃거리면서 말했다.
“할배요 이 장작 얼마잇껴?”
참깨나 들깨를 큰 가마솥에 뽁아서 내었으므로 늘 장작 나무는 국밥 집이나 기름집 아지매들이 많이 샀다.
“200환 주소” 지게 앞에서 무료하게 않아 있던 봉구네 할배가 벌떡 일어나시면서 말했다.
“비싸이더어, 180환 하시더어”
“쪼매 더처주면 안될씨이껴? 나 오늘 손자 고리땡 바지 살라카니이더어”
“어런요 나무 짐이 쪼매한데 뭘 그카니이껴? 180환에 나무 파시소”
'쪼매만 더 처주소'
나무를 팔아서 손자에게 고리뗑 바지 사 입히려고 조금 힘에 부치게 가득 지고 왔지만 봉구네 할배 나무 짐은 아무리 봐도 다른 장정들 나무 짐 보다 작았다.
그러니 사려고 하는 사람들은 금을 자꾸 덜 주려고 했다.
“이 장작을 쌀 두되 박도 안 처 줄라카면 우에니이껴? 190환만 주소”
“180환 그 이상은 못 주니이더어”
그랬다.
못 먹고 살던 시절에는 장터에 모든 것은 쌀금에 기준을 두고 말했다.
그 당시 겉보리 한대에 참외를 두개를 주었고 장작 한 지게 값은 쌀 두되 값 정도로 거래되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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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에서 왱-에엥 하면서 오종 소리가 울었다.
그런대도 봉구 할배는 아직 장작을 못 팔았다
고리뗑 바지가 자꾸 떠올랐다.
설상가상 봉구란 넘은
“할배가 니 고리뗑 바지 사러 읍내 장에 가셨다”
할매 이야기를 듣고 입이 바소가리처럼 희죽이 벌어져서
“할매 나 돌 고개까지만 할배 바래로(마중) 간데이! 소리치고
아직 할배가 장에서 돌아오려면 한참 있어야 하는데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고리뗑 바지 사들고 오실 할아버지 장 마중을 위해서 돌 고개로 향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르신들이 장에 가면 주막거리나 돌 고개까지 마중을 나가서 장거리 짐을 들고 오기도하였는데, 실은 혹 엿가락이라도 하나 사오나하여 시키지도 않아도 장 마중을 잘 나갔다.
명희도 며칠 해악을 해서 오늘 장날 고리뗑 바지를 사준다하였고 칠구 아부지도 사러 간 모양이다.
돌 고개에서 머-얼리 읍내 장터가 아른아른 하게 보이는데, 겁도 나기도하고 하였지만 그넘의 고리뗑 바지 때문에 아이들은 계속 읍내를 향하여 걸어갔다.
내심 걱정 되는지 명희가
“저래뵈도 읍내 장터는 억시기 멀다!”
이미 일찍이 장을 본 서미 골 사람들은 한 둘 씩 장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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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이제 서산에 걸릴 때 쯤, 제법 사람들로 법석되는 보름 장은 하나 둘 사람들이 사라지고 장은 서서히 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봉구네 할배는 아직 나무를 못 팔고 그대로 나무 장터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젊은 장정들도 나무를 팔지 못하고 다시 지게를 지고 아는 읍내 친척 집에 맡기려고 나무전을 떠났지만 봉구네 할배는 끝까지 기다렸다.
간혹 값을 더 깍아서 싸게 사려고 파장 무렵에 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혹 누가 장작 나무를 사려한다면 180환이라도 받고 넘기려고 마음먹었다.
아침에 180환 줄려고 하는 들기름 집 아주머니에게 팔아 버릴것을...하고 후회를 하시였다.
아이들이 장터로 내려오는 도중에 이미 명희와 칠구는 저거 아부지를 도중에 만나서 마을로 되돌아가고 봉구 혼자만 엉거주춤 길에서 할배를 기다리다가 할배가 오지 아니하자 결국 읍내 장터까지 걸어갔는데 장터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할배를 찾았지만 못 찾고 날이 어두워지자 덜컥 겁도 났다.
장바닥을 거의 울상으로 한참을 헤맨 후, 그때서야 나무전 지게 옆에 우두커니 않아 있는 할배를 발견한 후에 봉구는 너무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할배요”
“이게 누고? 아이구 봉구 아이라! 장에까지는 왜 왔노?”
“할배 마중 왔잖니이껴!”
봉구는 멎 적게 웃고는 할배 못 만나면 어쩌나 걱정 했는데 안심되고 너무 기뻤는지 할매 뒤로 몸을 꼬면서 씨-익 웃었다.
“안 춥더나?”
“괜 잖니이더어”
봉구는 할배 옆에서 한참을 쪼그리고 있었지만 나무 살 사람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봉구는 괜히 할배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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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결국 봉구 할배는 나무도 못 팔고, 손자 고리뗑 바지도 못 샀다.
“봉구야 니 배고프제?”
“안 고프니이더어”
팔지 못한 장작을 아는 포목점에 맡겨놓고 시장 한 쪽에 기중 헐하게 국밥을 판다고 소문이 난 아지매 집으로 손자를 데리고 갔다.
장터에 가끔 나오지만 점심은 일체 사먹지 않았으므로 국밥집도 실로 오랜 만이다.
물론 봉구 할배는 종일 굶고 있었다.
이미 읍내 장터에는 땅거미가 떨어지고
국밥 집 옆에 있는 “장미집“ 이라는 객주집에서는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아가 이-이있다아!
괘 여러 명이 어울려,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큰 가마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국밥 집에는 파장이지만 제법 사람이 있었다..
늦게 마친 장사꾼들이 언 손도 녹이고 막사발에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시레기 국밥을 겨울 무우 김치를 어그적 어그적 씹어가면서 먹고 있었다.
나무의자에 봉구를 않으라하고는 봉구 할배는 주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지무이 여기 국밥 한 그릇 주쇼”
“한 그릇 만요?”
“국밥 한 그릇이면 되니이더어”
국밥이 나오자 봉구 할배는 봉구에게
“어서 먹어라 어서 먹고 집에 가야한다 날이 이미 어두 워 진다.”
“할배는 안 잡숫니이껴?” 봉구가 말했다.
“할배는 배 안고프다, 어서 묵어라”
“할배도 같이 묵시더어!”
“나는 괜잖다 어서 묵어라”
봉구가 처음 보는 국밥집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맛있게 먹고, 국밥의 국물을 쪼매 남겼다.
늘 봉구는 밥을 쪼매 남긴다,
언젠가 할배가
“양반은 밥그릇을 다비우면 안 된다”
하셨기 때문에 봉구는 비록 밥을 다 먹고 싶었지만 늘 조금씩 남기는 버릇이 있었다.
손자가 국밥을 잘 먹는 모습을 보던 봉구 할배는 봉구가 국밥 국물을 조금 남기자
국밥 집 아즈무이 눈치를 살피시더니
“아지무이 여기 밥 쪼매만 더 주소!”하셨다.
국밥집 아지매는 간혹 시골 사람들이 밥을 조금 더 달라, 국물을 조금 더 달라.. 요구하던 풍습이라서 밥을 쪼매 더 들이자 봉구 할배는 손자가 먹고 조금 남긴 국밥 국물에 밥을 말아서 후르륵 드시면서
“거참 국밥 맛 있니이더어!” 하시었다.
손자가 남긴 국물에 밥을 조금 얻어서 속을 조금 채운 봉구 할배는 봉구를 앞세우고 읍내 장터를 빠져나와
어란 주막거리를 지나고
밤 골을 지나고
머-얼리 돌 고개를 바라보고 집으로 향했다.
돌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이미 양 섶의 야산 솔밭은 어둠을 덮어쓰고 있었고
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총총한데 은하수가 서미골 중대바위 북쪽으로 목을 길게 느려뜨리고 쇄기에 목화를 타놓은 듯 뿌연 별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봉구는 앞에 서서 가고, 봉구 할배는 뒤 따라서 돌 고개를 넘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손가락이 추위에 애리고 따가웠다.
돌 고개를 넘어서면서 봉구가 이렇게 말했다.
“할배요 고리뗑 바지 나는 싫니이더어”
“왜?,,, 다음 장날에는 꼭 고리뗑 바지 꼭 사 주마”
“구희가 그카는데 고리뗑 바지는 담배 불만 갖다되이도
훌러당 탄다카디이더어..
나는 고리뗑 보다 할매가 만들어주는 무명바지가 더 좋니더어!“
봉구 할배는 그저 대답없이 헛기침을 또 하셨다.
머-언데 보이는 이웃 산골 마을에 옹기종기한 초가집에선 호롱 불빛도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이제 종일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모여서 호롱불 아래서 행복한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다.
“쫌 빨리가자 봉구야, 너거 할매 애 탄다”
그들이 서둘러 원 뜰 마을로 들어서자
어느덧 동편 알미 봉우리에 보름달을 꿈꾸는 열이레 제법 커진 달이,
덩그렇게 솟아올라서
두둥실
구둥실
후둥실... 옥토끼를 태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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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지난달 전북 임실 오수리에 내려갔다가
버스 터미널에 무료하게 버스 기다리는 노인들에게 .
“지금도 장에 오면 점심 굶고 집으로 가는 노인들이 많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고 현실이다.
1960년대 오일장에서 비록 자신은 점심을 굶어도 손자에게 줄 엿가락이라도 사들고
장에서 집으로 돌아 오셨던 이 땅에 할아버지들......
이제 그때보다 잘산다고 하나, 깨물어도 시원치 않을 귀여운 손자/손녀 녀석들은 하나같이
객지에서 살고 있는 시대인지라 지금의 시골 할매, 할배들은
1960년대 보다 못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지식의 씨앗을 심는다면
할배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씨앗을 심는 사람으로 본다.
그런대 요즈음은 핵가족이다. 컴프터다...
할배는 시골서
손자는 도회지서 사는 가정이 많다.
그저 마음 씨앗의 고리가 끓어지는 느낌이다.
가능하다면 나 같은 젊은 아빠가 손자와 할배 사이가 이어지도록 시골사시는 할배, 할매에게 자주 안부 전화라도 아이들에게 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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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름아 구름아 하는 넘이. 2004년 보름 며칠 전에
1960년대 초, 산골 아이들 고리뗑 바지 추억을 적어 본 글.
첫댓글 내가국민학교 3학년때에 호랑이 아부지가 둘째삼촌 [고인되신 작은아버지]한태가셨다.무슨볼일인지는모르고 단양이란곳에 가실때에 내가큰맘먹고 골땐바지 사달라고졸랐다.돌아오시때빨간골땐옷한벌사오셨지나는설만되면 그생각이계속나지..
언니의 빨간색 골덴우아기, 그거 국민학교 졸업할때까지 입었제?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도 같고, 사진에서 봐서인 것도 같고...... 무냉기재 바위 위에 걸터 앉아서 "어~~~매~~~ 빨리 온나!~" 하던 생각이 난다. 어떤때는 팔선대까지도 마중갔었는데. "고무신 닳그로 마할라꼬 여까지 왔노?" 하고 야단도 맞았지만..........
내 중학교 댕길때, 어매가 많이 아팟지. 그래서 장날만 데면 자전거 뒤에 보리쌀 두되식 실꼬사서 팔고 왔따. 사웠떡 아지매 다 파라 조때이......... 참 우리어매 마이 아팠지........... 아~들이 내보고 장똘배이자 켔짜나........ 한번은 에매는 2되를 죳는데 나는 3되라고 해서 우리 보리쌀 사간사람이 ?
그날 거둔거 전부 새로 뎄따 아리가..........~~~~~ 결과는 잘 모르 겠군,,,,,,,,,,,
아~~~주 잘 했음^^ 하하하 역시 그때부터 사업가 본성이 보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