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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녹색글 은 1997년 일기장을 컴퓨터로 옮길 때 기억을 더듬어 쓴 나(어른)의 설명 글입니다.
1978년 9월 1일 금요일
새벽에 아버지께서 큰집에 다녀오셨다.
"큰할아버지께서 우리 송아지를 기르려고 한 게 아니라, 오늘 장에 가면 뭐 좀 사오라고 부탁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하셨다."
나는 어제 잘 때만 해도 우리 송아지가 다른 동네로 팔리지 않을 거라고 좋아했는데, 이제는 팔리게 생겼다. 아침밥도 먹기 싫어 그냥 학교에 가 버렸다. 마지막으로 송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공부를 마치고 오후 늦게 학교에서 돌아왔다. 송아지를 팔러 간 아버지께서 벌써 돌아와 계셨다.
"음매―."
와! 그 놈 말썽꾸러기 송아지 울음소리가 외양간 쪽에서 뚜렷하게 들렸다. 송아지가 팔리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다.
반갑다! 오늘 영영 헤어지는 줄 알았는데. 모처럼 만나는 것처럼 기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초지정을 얘기해 주셨다.
"막상 팔려고 가보니, 송아지 값이 별로 좋지 않더라. 그래서 요즘 돈이 그렇게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냥 중간 소가 될 때까지 키우기로 했다."
또 사과도 많이 사 오셨다. 난 배가 터지도록 실컷 먹었다.
잠시 후 밥상이 들어 왔는데, 맛있는 반찬이 많아서 또 실컷 먹었다. 송아지가 돌아와서인지 밥맛이 좋았다.
배가 부르다. 아니 배가 아프다. 일어서려고 했는데, 배가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 가 없었다.
"아이고 배야! 할매야 배 좀 만져 줘!"
"먹는 폼이 꼭 얹힐 것 같더라."
할머니는 내 배를 만져주셨다. 과연 할머니 손은 약손인가 보다. 조금 지나니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송아지가 돌아오는 바람에 내가 죽을 뻔했네!
[주] 1978년 그 해 시월에 전교생의 일기장 중에서 100여 편을 골라 "발자국"이라는 조그만 문집을 만들었는데, 나의 일기장에서는 8월 31일과 9월 1일 일기, 뒤에 나오는 9월 5일 일기가 수록되었다. 시골 촌 학교에서 만든 그 문집은 도교육청까지도 배포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행히도 지금 내 수중에는 그 책이 없다.
1978년 9월 2일 토요일
내일은 일요일이고 해서 저녁에는 강가에 밤낚시를 하러 갔다.
부푼 마음으로 아이들과 강으로 갔다.
일찍 갔는데도 벌써 몇몇 아이들이 와 있었다.
우리도 빨리 장비를 꺼내 낚시를 시작했다.
조금 있으니까 큰 아이들이 메기를 한 마리씩 건져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소식이 전혀 없다.
나는 따분해서 뒤로 물러 서 모래사장으로 가서 장난을 쳤다. 그랬더니 저 멀리 어느 곳에서 조용 하라고 하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또 저 멀리서 낚시하러 오는 아이들의 불빛이 보였다. 온통 강가에는 등불로 가득하였다. 등불의 수만 해도 무려 30개가 넘었다.
'이렇게 저녁으로 석유를 쓰면 하루에 얼마나 쓸까?'
낚시는 왜 이렇게 저녁에 하면 잘되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낚시는 우리 시골 아이들의 즐거운 취미 중 한가지다. 실력을 잘 다듬어 간다면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78년 9월 3일 일요일
나는 요즘 내 이름 때문에 고민에 싸여 있다.
'장세억'
내 이름이다. 부르기도 나쁘지는 않다. 남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난 내 이름이 좋다.
그런데 내 이름을 뒤집어서 읽는다던지, 혹은 하나는 빼고 부르는 아이들이 많다. 즉 내 이름을 '억세'라 든가, '억!'이라 든가 말이다.
오늘도 아이들이 자꾸 '억세'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억새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식물이란 말인가?
결심한다.
이젠 아이들이 억세, 억!, 억군 하면 대답 자체를 거부하겠다.
사실은 나도 남의 이름을 더럽힌 적이 있다.
용구를 '돼지', 병구를 '헬로기', 태기를 '택끼', 진달이를 '해골', 진홍이를 '홍시'…….
이젠 다시는 아이들의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지 않겠다. 별명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해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도 남이 들어서 싫어하는 별명은 앞으로 쓰지 않겠으며, 만약 지금부터 내 이름을 억세, 억!, 억군 등으로 부르는 아이는 용서하지 않겠다.
[주] '억'자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남의 놀림감이 된 적이 많아, 대학교까지도 나는 내 이름에 항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세억'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우리 나라에 또 있으면 조금의 위안을 받을 것 같아 어디 여행가면 항상 공중전화에 들어가서 전화번호부를 확인하곤 했다. 몇 년 전까지 이렇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서울, 경기, 대구, 경북, 부산, 경남, 대전, 충남, 강원, 제주에서는 발견하지 못했고 나머지 시, 도에서는 확인해 보지 못했다. 좌우간, 이제는 독창성을 스스로 인정하여 그런 고민은 하지 않는다. 내 이름이 너무 강렬해서 자라면서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아들 녀석이 생기면 이름을 부드러운 것으로 짓겠다고 옛날부터 다짐했었고, 진짜 아들이 생겨서 부드럽게 '민진(旻鎭)'이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옆집에 이사 온 댁의 딸 이름이 '민진'이라서, 내가 남자 이름을 이번에는 '너무 부드럽게 지었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1978년 9월 4일 월요일
우리 집에는 메기 한 마리가 있다. 그 메기는 지난 토요일 저녁에 잡은 것이다.
학교에 갔다오니 어머니께서
"이 메기 분순네 집에 갖다 드려라."
"왜?"
"우리 집에 두면 결국 죽어서 그냥 버려야 하잖아."
"물 자꾸 갈아주면 되지."
"아까 보니까 분순네 집에 물고기가 조금 있는데, 양이 적어 안 해먹고 그냥 있더라. 분순네 아버지는 물고기를 좋아하시니까 그것과 합쳐서 매운탕 끓여 드시게 갖다 드려라."
그래도 나는 어쩐지 메기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메기를 분순네 갖다 주면 분명히 저 메기는 오늘 안으로 죽을 거다. 불쌍하기도 하지.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자.'
이렇게 생각하고는 메기를 들고 우리 집 앞을 흐르는 도랑으로 갔다.
어제 저녁에 비가 왔기 때문에 도랑에 물이 많이 흐르고 있었다. 이 도랑을 따라 500m 만 가면 강물이 나온다.
난 고기를 도랑에 넣었다.
고맙다는 뜻인지, 내가 밉다는 뜻인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금방 돌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기분이 상쾌한 날이다.
1978년 9월 5일 화요일
셋째 시간을 시작하려고 책을 펴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어떤 깃발을 하나 가져 들어오셔서 펼쳤다. 그것은 '문창국민학교' 교기였다.
'우리 학교 이름을 문창국민학교로 바꾸는 게 정말이구나.'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며칠 전 아이들이 '우리 학교 이름이 문창으로 바뀐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기분이 좋지 않다.
왜 우리 학교 이름을 바꾸는지 모르겠다.
선생님께서 그 깃발을 설명해 주셨다.
"글월 문(文), 창성할 창(昌), 즉 지식이 번창한다는 뜻이다. 내가 지은 이름이다. 팔등은 너무 촌스러워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며칠 후에 교육청에서 허락이 나면 그때부터는 진짜 팔등 대신 사용된다. 문창이 팔등보다 이름이 더 좋지?"
나는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왜 '팔등'이라는 이름이 나쁘단 말인가? 비록 조금 촌스럽기는 해도 그래도 의미는 확실히 있는데 말이다. 단밀에서 보면 산등성이가 8개라서 팔등, 지형을 본따서 지은 마을의 고유한 이름이고, 그 마을 속에 위치해 있어 팔등국민학교라 했는데……. 이 얼마나 좋은가!
나는 적극 반대한다.
나는 셋째 시간 내내 공부는 안하고 공책과 책에 이렇게 크게 썼다.
"우리 학교는 팔등국민학교"
"나의 학교는 팔등국민학교"
도대체 아무 연관성도 없는 '문창'이 뭐길래 선생님은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주] 그 이후 언제부턴가 공식적으로 학교 이름이 '문창'으로 변경되었고, 초등학교 졸업장에는 '팔등'이 아닌 문창국민학교로 되어 있다. 요즘같은 '신토불이' 분위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아마 그런 식으로 학교 이름이 변경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그 문창국민학교도 1996년 2월에 완전 폐교되었다.
1978년 9월 6일 수요일
1교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선생님께서는
"오는 13일 단밀국민학교에서 붓글씨, 그림, 글짓기 이 세 가지 분야를 겨루어 각 분야 별로 한 명씩 면내 대표를 뽑는다. 여기에 통과된 사람은 또 군대회에 단밀면 대표로 참가한다. 글짓기는 유규, 붓글씨는 세억이, 성진이, 그림은 용구와 만연이가 출전해라. 며칠 동안 글짓기는 5학년 선생님께 지도 받고, 붓글씨는 4학년 선생님, 그림은 3학년 선생님께 방과후에 지도를 받아라."
대회가 13일이기 때문에 기간은 겨우 6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 6일 동안 모든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을까?
오후에 나와 성진이는 4학년 교실에 류성우 선생님께로 갔다. 그런데 5학년인 세봉이도 서예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았다. 세 명은 다시 1학년 교실에 가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연장이 좋아야 일을 잘하는 법인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붓은 너무 작아서 글씨가 예쁘게 쓰여지지 않았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큰 붓을 사라고 하셨다. 그래야 굵직하게 글씨가 된다고 하셨다.
나는 연장이 좋지 않더라도 내 힘껏 노력하겠다.
1978년 9월 8일 금요일
아침에는 비가 조금씩 왔다.
우리 6학년 남학생은 아침자습을 다 하고 밖으로 나가 야구를 하였다.
한참 재미나게 하는데, 비가 더 세게 왔다.
이미 옷은 축축하고, 공은 진흙이 묻어 한 번만 받으면 흙이 얼굴에 튀겨질 정도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우리들은 1교시 종이 울리자 손을 씻고 교실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몹시 화가나신 얼굴이다.
"세억이, 너 뭐 했어?"
"야구했읍니다."
"왜 비를 맞아 가면서 그런 짓을 해. 그렇게 할 일 없으면 책이나 읽지."
하시며 우리 모두를 꾸짖으신다. 우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맞아, 우리가 잘못했어. 비가 많이 오면 그냥 교실로 들어와야 하는데…. 하지만 선생님도 너무 심해. 놀다가 보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선생님은 어릴 때 비가 올 때 밖에서 놀지 않았는가? 비 올 때 축구나 야구를 하면 더 재미나는데….'
좌우간 옷이 엉망이 되어 교실에 들어오면 우리가 청소할 때도 힘드니까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1978년 9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에 화랑(한국):미국의 축구 경기를 보았다.
내가 TV 보러가니 이미 경기가 시작되어 우리 나라가 1:0 으로 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까 우리 나라가 드디어 한 골을 넣었다. 장내는 떠나 갈 듯이 함성이 울린다. 결국 전반에는 1:1 로 끝났다.
후반전이다.
누구 하나 지지 않겠다고 열심히 싸운다.
후반 4분쯤 지나니까 우리 진영에 위기가 닥쳤다. 결국 우리 선수 하나가 반칙을 해서 페널티킥을 허용했고, 한 점을 빼앗겼다.
다시 경기는 시작되었다.
한참 후 또 우리가 한 점을 얻었다. 2:2 ! 이젠 10여분밖에 남지 않았다.
드디어 또 우리 나라가 멋있게 한 골을 넣었다. 3:2 ! 우리가 이기기 시작했다.
"삑―"
후반전 끝이다. 3:2 로 이긴 것이다.
뒤쫓는 신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가 역전을 시킨 것이다.
마음 든든하였다.
이번 제8회 박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꼭 우리가 우승했으면 좋겠다.
1978년 9월 10일 일요일
오후 늦게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께서
"세억아, 할머니가 뽕잎 따러 갔는데 자전거 타고 마중 좀 가거라."
"안 돼. 나는 어디 볼일이 좀 있어."
하니 어머니께서는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잠깐 볼일보고 오니 또 어머니께서는
"너 아직도 안 갔어? 빨리 가 봐라. 할머니 혼자서는 못 가져 와."
나는 결국 자전거를 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길을 달렸다.
"할머니!"
"오냐."
할머니는 아직도 뽕밭 저 구석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자전거를 밭머리에 세워놓고 할머니 곁으로 갔다.
"혼자 어찌 다 가져갈까 했는데, 참 잘 왔다."
뽕잎 두 포대를 모두 자전거 뒤에 싣고, 할머니랑 다정한 얘기를 나누면서 자전거를 끌고 왔다.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1978년 9월 11일 월요일
저녁에 TV 에서 묘기대행진을 보았다.
한가지는 정말 재미있었다.
첫째 묘기는 마술이었다.
오늘 마술은 순 사람의 눈을 속여 가면서 하는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재미가 없었다.
둘째 묘기는 천재 소년이 한문을 외우는 것이었다.
먼저 아나운서가 한문 200 자를 보여 주니까 그 조그만 아이가 뜻을 말해가면서 모두 읽었다. 그 외에도 아무리 많은 한자를 갖다놓아도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또 아나운서 아저씨가 직접 한문을 쓰면 무슨 글자인지 척척 알아냈고, 어떤 글자는 다 쓰기도 전에 벌써 무슨 글자인지 알아냈다.
자기 이름도 한문으로 썼는데, 그 애의 이름은 '김일진'이었다.
정말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머리가 좋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일진 같은 천재 소년이 열심히 공부하면 우리 나라는 나날이 발전하고 부강해질 것이다.[1]
[1] 어떤 통계에 의하면, 당시에 매스컴에 천재라고 소개된 대부분의 아이들이 현재는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우리 나라에 천재 교육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1978년 9월 12일 화요일
내일이면 단밀국민학교에서 치러지는 '화랑문화제' 예선 대회에 나가야 한다.
그 동안 약 1주일 동안 방과후에 4학년 선생님 지도로 나는 서예를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나 아직 미진한 부분이 너무 많다.
아직 부족한 이유는, 먼저 연습 시간이 너무 짧았다.
다음으로 붓이 좋지 않다. 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어설픈 목수가 연장을 탓한다고 했지만, 나의 붓은 정말 너무 안 좋다.
오늘은 글자 하나하나는 연습하지 않고, 글자의 전체적인 배치와 이름 쓰는 위치에 대해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글자 하나하나의 모양보다는 글자들이 모여서 구성되는 전반적인 구도가 더 중요하다고 선생님은 계속 강조하셨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5학년 선생님께서 서예, 그림, 글짓기에 출전하는 모든 아이들을 모았다.
"내일은 책은 가지고 오지 말고, 그냥 필요한 용구만 챙겨서 등교해라. 오전에는 자료실에서 11시까지 연습하고, 점심 식사 후 12시에 뒷산을 넘어 걸어서 단밀국민학교로 떠난다. 각자 용구를 잘 챙겨서 등교해라. 알았지?"
"예."
종이에 몇 자 쓰려고 1주일 남짓하게 연습을 했다. 그러나 연습한 보람이 드러나도록 내일은 잘해야겠다.
1978년 9월 13일 수요일
오늘 오후에 나, 성진, 세봉, 분연 등 6명은 우리 학교 뒷산을 넘어 걸어서 단밀국민학교에 갔다. 나와 성진이는 붓글씨에 속해 있었다.
도착하여 조금 쉬고 있으니까 확성기에서 모이라고 하였다.
간단한 식을 하고 각 분야 별로 교실로 들어갔다. 우리 서예에서 겨룰 아이들은 가장 넓은 교실로 들어갔다.
칠판에는 오늘 써야 할 문구가 적혀 있었다.
"국어사랑 나라사랑", "이어받자 화랑정신", "총력안보 평화통일" 이 세 가지 중에서 "이어받자 화랑정신"을 택했다. 이미 학교에서 많이 연습해본 것이라서 쓰기가 쉬웠다.
그러나 한가지 좋지 못한 것은 붓이다. 내 붓은 굵기만 하지 끝이 다 닳아 살아있지 않다. 붓은 끝이 생명이다. 그 붓으로는 아무리 쉬운 글자라도 잘 쓸 수가 없다.
나는 걱정을 하면서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앉은 성진이가
"세억아, 이 붓으로 먼저 써서 제출해."[1]
난 성진이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성진이의 붓도 나처럼 좋지 않아서 성진이는 오늘 4학년 선생님의 붓을 빌려서 왔다. 그 붓은 크기도 매우 크고, 무엇보다도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라서 끝이 살아있다. 뭐가 좋아도 더 좋다.
나는 빨리 그 붓을 가지고 연습 한 번 못해보고 진짜 화선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야 성진이도 주어진 시간 안에 빨리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자의 오자도 없이 8자를 무사히 다 썼다.
성진이도 내가 다 쓰자 연습을 멈추고 진짜로 화선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성진이는 떨리는지 호흡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무사히 다 썼다.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감독 선생님들과 그 외 다른 학교에서 아이들을 인솔해 온 여러 선생님들은 한 입 모아 성진이와 나에게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와 성진이는 그제야 다른 학교 아이들은 어떻게 썼나 살펴보았다. 우리가 보기에도 다른 학교 아이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참가한 모든 아이들이 제출을 완료하였다. 잘 마르도록 모든 작품들을 교실 바닥에 펼쳐 놓았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우리 팔등은 성진이와 나의 글씨 모양이 똑 같았고, 위중은 위중대로 글씨체가 똑 같고, 단밀은 단밀대로, 낙정은 낙정대로 출신 학교 별로 글씨 형태가 똑 같았다.
운동장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까 글짓기, 그림에 참가한 아이들이 운동장에 나왔다. 선생님은 심사위원이라서 한참 후에 나오셨고, 우리들은 결과도 모른 채 선생님과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것도 우리 마을에 다 도착할 때쯤 선생님께서는
"오늘 우리 학교는 서예에서 세억이가 1등, 성진이가 2등을 했다. 다른 분야는 등수에 못 들었다. 오는 22일에 세억이만 단밀면 국민학교 대표로 의성 군대회에 나가야 한다."
기쁘긴 했으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내가 성진이의 붓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성진이가 1위를 했을 텐데……. 굉장히 미안하였다. 어떻게 성진이에게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
[1] 이 날의 일기 내용은 나 개인의 인생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내용이라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 생각이 난다.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대외적인 공식 대회를 치른 날이고, 이날 1등 했기 때문에 군대회, 또 도대회까지 나갈 수 있었다. 그 과정 동안 정식으로 붓글씨에 입문하게 되었고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계속 연장되었다.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유명한 작가는 되지 못했어도, 정신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현재는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 붓글씨를 쓰지 않지만, 그래도 유명한 서예 전시회에 가서 작품 감상 및 품평은 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 또다른 인생의 기쁨을 가진 셈이다. 당시에 성진이가 "세억아, 이 붓으로 먼저 써서 제출해"하면서 자기가 가져 온 붓을 나에게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날 이후부터는 붓글씨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성진이가 그날 이후 서예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성진이는 당시의 이 일이 기억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1978년 9월 14일 목요일
학교에 등교하니 어제 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서예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칭찬해 주셨다.
또, 우리 선생님께서는 나는 22일에 의성에 군대회에 참석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그래서 부지런히 류성우 선생님의 지도로 더 많이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다시 먹을 갈았다.
차분한 마음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어제보다 어쩐지 더 못되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긴장을 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일 학교에 가면 류 선생님께 기초부터 다시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군대회가 며칠 남지 않았지만, 기초부터 잘 배워야 나중에는 매우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1978년 9월 15일 금요일
5교시 때 공부를 하는데, 4학년 선생님께서 나와 성진이를 부르셨다.
"너희들 둘 다 빨리 먹 갈아라."
좀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상한 것은 여태까지는 6교시를 모두 마치고 연습을 했는데…….
"오늘 교장 선생님께서 면내 교장 회의에 갔다 오셨는데, 너희들 둘 중에서 21일까지 연습해서 잘 하는 애가 22일 의성에 간다. 그리 알고 연습을 열심히 하도록."
난 정말 이상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의성에 가야한다고 우리 선생님께서는 재차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누구가 출전할지 모른다니……. 더구나 나는 벌써 부모님께 의성에 가서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고 했는데, 만약 내가 출전조차 못 한다면?
좌우간 나는 먹을 다 갈고 정성껏 연습을 했다.
그런데 성진이는 무슨 고민이 있는지 통 연습을 하지 않고, 창 너머로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덤부링 연습하는 것만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진이는 무엇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오면서 성진이는 나에게 사실을 말해주었다.
"아까 류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거짓말이야. 세억이 너 혼자 연습하면 경쟁 상대가 없어 실력이 늘지 않을까 봐 나하고 같이 연습하라고 그러는 거야. 저번에 단밀에서 네가 1등 해서 의성에 가게 되었잖아. 그러니까 너는 열심히 해."
아무래도 성진이는 나보다 더 마음이 넓은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성진이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류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큰짐을 지우는 것 같다.
1978년 9월 16일 토요일
오늘 드디어 '계백 장군'을 다 읽었다.
이 책은 나에게 나라의 중요성과 충성심을 알게 해준 책이다.
온조가 나라를 건국한 백제는 칠백여 년 동안 면면히 이어온 나라다.
잘 난 임금인 의자왕이 한 때는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나, 그는 자기를 너무 믿고 교만해졌다. 그 말년에는 요사스런 여자들과 놀기만 하고 정치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결국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쳐들어오니, 의자왕과 같은 날 태어난 계백은 오 천의 군사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오 만의 군사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나는 백제가 이 계백 장군의 충성으로 말미암아 고구려, 신라 어느 나라보다 정신적으로는 더 강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결국 의자왕은 나라를 잃고 여러 신하들과 당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그 나라의 한 줌의 흙이 되었다.
나는 소년 계백, 청년 계백, 장군 계백을 통하여 충성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나라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
1978년 9월 17일 일요일
즐거운 추석이다.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그냥 큰집으로 갔다. 우리 문중에서 명절날 차례를 지낼 때는 큰집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장가 아이들도 모두 큰집에 모여들었다.
문중 어른들이 큰집에 다 모이자 차례가 시작되었다.
큰집 할머니는 간단하게 음식을 차렸다. 제사를 다 지내고 나니 어른들도 음식을 드셨고,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이들에게도 밥, 떡, 과자, 과일 등을 주셨다.
"세억이 큰집에는 음식들이 너무 적어. 뭐 먹을 게 없네."
세봉이가 이렇게 불평하였다.
"적으면 어때? 우리 큰집에서 조금만 먹어도 앞으로 차례를 지내야 되는 집이 지목이네, 세훈네, 세완네, 우리 집, 세봉이 너희 집이 남았는데, 앞으로 조금씩만 먹어도 배가 터질 거다. 특히 우리 큰집에는 할머니 혼자서 사시는데 음식이 많이 남으면 누가 다 먹겠어?"
"야, 세억이 너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써먹네."
"그래, 세봉이 너도 좀 써먹어라."
나는 큰집에서는 음식을 조금 먹었지만, 그 이후 둘째 차례인 지목이네 집에서 너무 많이 먹었고, 셋째 집인 세훈네 집에서는 조금만 먹었다. 그래서 실제로 넷째 집인 세완네 부터는 배가 너무 불러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었다.
특히 이렇게 명절 때 차례를 지내는 경우는 집집마다 음식을 좀 적게 해도 좋을 것 같다. 항상 음식을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절약하시는 큰집 할머님 얼굴이 내 마음속에 그려진다.
1978년 9월 18일 월요일
저녁 식사 때의 일이다.
"엄마, 22일 가을 운동회를 하는 날 나는 의성 가야 해."
"붓글씨 때문에?"
그때 옆에서 듣고 계시던 아버지께서는
"단밀을 대표해서 가는데 운동회보다 더 중요하지. 나도 그 날은 너무 바쁜데 잘 되었다. 나도 운동회에 안 가도 되겠구나. 너도 없는 운동회에 세란이 하나 보고 갈 수야 있나. 엄마만 가면 되지."
나는 아버지께서 한마디씩 할 때마다 느끼는 바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운동회에 참석하지 못하니까 내가 없어서 가봐야 흥미가 없다는 것이다. 가만히 떼어놓고 생각해 보면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난 운동회에도 참가하고 싶다. 국민학교 마지막 운동회인데.
"아버지, 의성에 가지 말까요?"
"왜 안 가? 운동회는 학교 아이들끼리 청군, 백군으로 싸우지만, 너는 군 전체 대회에 가서 싸우는데."
아버지께서는 정말 나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것일까?
1978년 9월 19일 화요일
"찌르릉, 찌르릉찌르릉, 찌르릉, 찌르릉찌르릉."
아침 자습을 하고 있는데 직원종이 울렸다.
"모두 자습은 그만하고 뒤뜰에 나가서 지금부터 청소를 깨끗이 하거라."
선생님은 나가시면서 우리들에게 청소를 하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바깥으로 나가시자 우리들은 부리나케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각자 하고 싶은 운동들을 실컷 하였다.
"찌르릉찌르릉찌르릉, 찌르릉찌르릉찌르릉."
1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교실에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벌써 들어 와 계셨다.
매우 화나신 얼굴이다.
"빨리 나가서 뒤뜰 청소해! "
우리들은 얼른 청소를 했다.
"청소 다 했으면 모여!"
매우 높으신 음성이다.
"기합을 받는가 보군."
누군가 이렇게 겁을 냈다. 우리는 정렬해서 모였다.
"너희들 아까 내 말 못 들었어?"
"……."
적막감마저 들었다.
"앞으로 한 번만 이런 행동하면 용서 못 해."
정말이지 오늘은 선생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다. 우리들은 매번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겠다고 일기장에 쓰면서도 사실은 틈만 생기면 생쥐처럼 달아나려고 한다.
왜 그럴까?
1978년 9월 20일 수요일
저녁 때 온 식구가 다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억아, 22일에 의성 갈 때 학교에서는 아무도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 오늘 부역하러 학교에 갔는데, 교장 선생님하고 류선생님께서 신신당부하더라. 길 잃어 먹지 않도록 인솔자를 잘 따라 다니라고 잘 이야기하라고. 그날 학교 소사 아저씨가 새벽에 단밀 중학교까지 너를 데려다 주면 단밀 중학교에서 선생님 한 분이 대표로 인솔해서 의성에 간다고 하더라."
옆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께서는
"그럼 담임 선생님은 안 가시고?"
"세억이 선생님은 바빠서 못 간대."
"애가 그 멀리 가는데 담임 선생님이 안 따라가서 만약 혼자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세억아, 아예 가지 말아라."
어머니께서는 적극 반대하셨다.[1] 아버지께서는
"뭘, 길 잃으면 이렇게 해라. 무조건 버스 정류장이 어딘가 물어보고 도리원 가는 차를 타거라. 도리원 와서 또 안계 가는 차를 타거라. 안계에 오면 길을 알잖아?"
나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 사실은 나도 걱정이 된다.
아버지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날 내가 따라 갈까?"
"뭐 하려고요. 나도 이젠 버스 타는 방법을 아는데요. 글자를 읽을 수 있고 돈이 있는데 뭐가 걱정돼요."
나는 아버지가 요즘 농사일에 너무 바쁜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걱정이 무지무지 된다.
[1] 촌놈이 태어나서는 가장 멀리 길을 떠나니 어머님도 걱정이 무척 되었을 것이다. 사실은 당시에 어머님도 평소에 혼자서는 그렇게 멀리는 길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1978년 9월 21일 목요일
나는 내일이면 운동회도 못 보고 의성 화랑문화제 군대회에 참석해야 한다.
학교에서 마무리 연습을 하고 집으로 올 때 류선생님께서는
"우리 학교가 생긴 이래로 처음 군대회까지 출전하고, 팔등 학교의 명예를 걸고 가는데 차비와 점심 값은 학교에서 다 대어주겠다."
하시며 1500원씩이나 주셨다.
다른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일부러 찾아오셔서 잘하고 오라고 하셨다.
집에 와서는 정성껏 붓을 씻어 신문지에 싸고, 벼루도 깨끗이 씻었다.
모든 준비를 해서 작은 가방에 넣고, 몸도 깨끗하게 씻었다. 모든 준비를 정성스럽게 했다.
할머니께서는 오늘 안계장에 가서 내일 입고 가라고 새 옷을 사오셨다.
나는 내일 또 몇 자를 쓰기 위해 약 1주일간 노력을 했다. 비록 연습기간은 짧았지만 그 동안 류선생님이랑 최선을 다했다.
내일 꼭 좋은 성적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은 8시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1978년 9월 22일 금요일
아침을 일찍 먹고 학교 아저씨의 자전거 뒤에 타고 단밀중학교에 갔다.
그곳에는 13일 날 보았던 다른 학교 아이 두 명이 벌써 와있었다. 한 명은 그림에서 1등한 속암국민학교 여자 아이, 한 명은 글짓기에서 1등한 단밀국민학교 여자 아이다. 중학생 3명도 오늘 출전한다고 한다.
우리를 인솔하시는 분은 중학교의 권태훈 선생님이라는 분이다. 이 분의 인솔 덕택에 무사히 의성에 도착하여 대회에 참가했다. 오늘 결과는 나중에 학교로 공문을 통해서 알려준다고 했다.
오늘 의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인상적인 광경을 보았다.
우리를 인솔하시는 선생님과 안계에서 단밀로 오는 버스를 탔는데, 우리 일행은 무사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오고 있었다. 도중에 버스가 멈추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께서 한 분이 탔고 그 할아버지는 자리가 없어서 버스 앞쪽에 서서 계셨다. 그때 버스 뒤쪽에 앉아 계시던 중학교 선생님이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저 앞으로 가서
"할아버지, 뒤에 가면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앉으시죠."
하시며 할아버지를 모셔와서 자리를 비워 드리는 것이 아닌가!
"아, 괜찮습니다. 난 단밀까지 가는데 서서 가도 됩니다."
할아버지는 사양하셨다.
"저도 단밀까지 갑니다. 앉으시죠."
결국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 앉으셨다.
옆에 앉아 있었던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단밀까지 다 오자 그 할아버지께서는 고맙다며 선생님께 대포집에 가자고 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은 사양하고 나에게는 조심해서 팔등까지 가라고 일러 주셨다.
나는 팔등에 도착하여 학교에 먼저 들렀다. 오늘 운동회는 거의 끝나 있었고,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은 벌써 술을 한 잔씩 하시고 모두들 풍물을 치고 있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도 기분이 좋으신지 풍물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풍물을 치고 있는 우리 선생님께 오늘 의성에 갔다온 이야기를 말씀드리러 갔더니
"이놈아, 그 동안 수고했다. 좋은 결과 나올 거다."
하시며 나를 붙들고 덩실덩실 춤을 치셨다.
1978년 9월 23일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들에 나가보라고 하였다.
오늘은 벼를 베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도 잔심부름이나 하려고 물을 한 주전자 들고 자전거를 타고 들로 나갔다.
"벌써 오니?"
"오늘은 두 시간밖에 안 했어요."
"잘 됐네. 다시 집에 가서 큰 물통에 물을 가득 가지고 오너라."
"벌써 가져 왔는 걸."
"한 주전자로는 모자란다. 큰 통에 가득 가져와야 오늘 하루 내내 먹는다."
난 자전거를 타고 집에 와서 다섯 되 물통에 물을 가득 담아 갔다.
나도 벼를 베어 보았다.
낫질이 쉽지 않았지만 되기는 된다. 재미도 있다.
"세억아, 너는 하지 말아라. 다친다. 중학생이 되면 해라."
그래도 나는 재미있어서 계속 벼를 베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제 6학년이고 키도 커서 어른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아직 나를 어린아이로 취급한다.
좌우간 오늘은 뿌듯한 날이다. 내가 거들어 벼도 베고 잔심부름도 해서 무사히 오늘 해야할 양을 다 베었다.
특히 우리 부모님은 여름 내내 고생한 결과로 오늘 드디어 추수를 했다.
1978년 9월 24일 일요일
오늘은 물 건너 논에서 벼를 베는 날이다.
오전에는 벼베기를 하기가 좋았고 재미있었다.
어머니께서 점심때가 되자 집에 들어가서 밥을 가져 오셨다. 점심을 먹고나자 내 마음 속 어느 곳엔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숙제를 아직 못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집에 오자마자 곧바로 들에 갔고, 어제 저녁에는 피곤해서 내일 하면 되겠지 했고, 오늘 아침에도 바로 들에 나왔기 때문이다.
숙제 걱정이 되어 벼를 베는 일이 갑자기 지겨워 졌다.
오직 집으로 가고만 싶었다.
아버지께서는
"빨리 해야지. 그래야 오늘 다 하지."
"집에 가야겠어요."
"뭐 할 일 있나?"
"숙제를 아직 하나도 못 했어요."
아버지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숙제를 다했다. 나를 이해 해준 아버지가 고맙다. 이제 숙제를 다 했으니 마음 든든하다.
그러나 어제처럼 끝까지 부모님 일을 거들지 못 한 것이 마음이 걸린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농사일이 바쁠 때는 숙제를 내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1978년 9월 25일 월요일
점심 시간에 집에 밥 먹으러 오니까 벌써 누에고치를 따고 있었다.
나는 벌써 몇 년 동안 누에를 보아 왔지만, 볼 때마다 정말 대견스럽다.
'깨알같은 알에서 아주 작은 벌레로 변하고, 점차 자라서 나중에는 자기 집을 지어 그 속에 들어간다.'
이렇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 사회 시간에 배운 '수출과 관계되는 산업'이란 제목이 생각난다. 그 중에서도 '옷감 수출'이 누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우리 농민들이 누에를 먹여 고치를 얻어서 팔면 자연히 농가 수입이 오른다.
둘째, 제사 공장이나 방직 공장에서 옷을 만들면 또 제조업이 발달한다.
셋째, 이젠 품질 검사를 해서 외국에 수출한다. 그러면 또 운수업이 발달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쥐고 있는 이 누에고치 하나가 외국에 나가서 우리 나라를 빛내는 역할을 하는구나 느껴졌다.
누에는 공이 굉장히 많이 든다.
만약 잊어버리고 한 번이라도 뽕잎을 주지 않으면 정상적인 경우와 차이가 크게 난다.
이 누에고치를 얻기 위해 애를 쓰신 할머니와 부모님께 머리가 숙여진다.
1978년 9월 26일 화요일
오늘 오후부터 나는 또 맹렬하게 붓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그것은 오늘 선생님께서 출장 가기 전에
"세억이, 너 군대회에서 가작을 차지했다. 그래서 10월 22일 대구 경상중학교에서 개최되는 화랑문화제 도대회에 의성군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도 직접 찾아와서 축하해 주셨다. 우리 학교에서는 경사라고 난리다.
점심 먹으러 와서 아버지, 어머니께 먼저 이 사실을 알리려고 했으나, 모두 누에고치 공판 때문에 단밀에 가셔서 말씀을 못 드렸다.
지금부터 도대회까지는 기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이번에는 연습을 많이 해서 이번에도 아무리 못 하더라도 입선은 해야겠다.
그래서 여태껏 나에게 서예를 가르쳐 주신 류성우 선생님이나 부모님, 그리고 학교의 여러 선생님께 기쁨을 드려야겠다.
1978년 9월 27일 수요일
점심 시간에 집에 오니 아버지께서
"세억아, 자전거 타고 가서 막걸리 한 되 하고 담배 50원 짜리 500원어치 사 가지고 오너라."
밥을 먼저 먹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게 앞에 가니 아이들은 벌써 학교에 다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리나케 집에 막걸리와 담배를 갖다놓고 늦을까봐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직 5교시 종은 울리지 않았다.
자전거는 나무 밑에 세워놓고 축구를 하였다.
방과후에는 붓글씨 연습을 해질 때까지 하고 평소처럼 집에 돌아왔다.
형이 학교에서 돌아 왔는지 형 자전거가 마당에 세워져 있었다.
"참! 내 자전거!"
가방을 마당에 던져두고 학교로 뛰어갔다.
자전거가 나무 밑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만약 도둑이 있었다면 이 자전거는 벌써 어디론가 날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이나 학교에는 그런 도둑이 절대 없다.
오늘 일을 생각하니 내가 멍청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온다.
1978년 9월 28일 목요일
오늘 드디어 유관순 전기문을 모두 읽었다. 틈틈이 조금씩 읽은 것이 오늘 비로소 끝을 냈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의 압박 속에서 잃은 나라를 꼭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한 애국지사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유관순, 손병희, 윤봉길, 김좌진, 안창호…….
이렇게 많은 애국자 중에서 유관순은 여자의 몸으로 우리 나라를 위해 꽃같은 몸을 이슬같이 날렸다.
이화학당에서 여러 학생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으나, 결국 일본의 방해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유관순이 아니었다. 고향의 동지들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유관순의 지방에서는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니, 누나는 곧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7년의 감옥 생활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약 1년 반쯤 지낸 후 만세를 부르고 조용히 숨졌다.
그 후 주검은 이화학당에 고이 안치되었다.
나도 유관순처럼 조국을 위해 한 번 뜻 있는 일을 해봤으면…….
1978년 9월 29일 금요일
오늘도 난 자료실에 들어가 붓글씨 연습을 했다.
아직 실력이 굉장히 미약하다.
오늘은 '산불막아 국토녹화'를 연습했다.
신문지에 한 번 써 놓고, 일어서서 내 글씨를 관찰했다. 관찰을 유심히 했다.
'산'자는 무난히 잘 되었다.
그 다음 '불'자는 받침 '?'이 너무 크고, 전체적으로 글자 모양이 세로 방향으로 너무 길게 써졌다.
'막'자는 쉬운 것 같았으나, '?'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에 힘이 생기지 않았다.
'아'자는 그 자체로는 쓰기가 쉬우나, 써 놓고 보면 전체적으로 글자 크기가 다른 글자보다 너무 작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화가 되지 않았다.
'국'자는 어느 정도 된 것 같았다.
'토'는 '?'이 잘 안되고, '녹'자는 '?'의 모양을 받침으로 쓰일 때와는 달리 해야 한다.
'화'자는 '?'의 동그라미 크기를 잘 조절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하였다.
관찰을 해서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진짜 화선지에 썼다. 그것을 보고 선생님께서는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는 직접 새로 한 장 써주시면서 집에 가서 연습은 못하더라도 벽에 붙여 두고 자주 쳐다보라고 하셨다.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이 쓴 것을 감상하는 것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선생님이 쓰신 것을 집에 가지고 와서 벽에 붙여 놓으니, 아버지께서는
"역시 류 선생님은 글씨를 잘 쓰시는구나."
하셨다.
1978년 9월 30일 토요일
가정실습이 났다.
10월 1일, 2일, 3일까지 가정실습인데, 1일은 국군의 날, 3일은 개천절이다.
원래 공휴일인 날이 1일과 3일인데, 그 중간에 끼어있는 2일 월요일을 넣어 3일 동안 가정실습이 났다.
학교에서는 농촌에 일이 바쁘다고 매년 이 때는 항상 가정실습을 실시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 기간 동안의 가정실습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 나는 어린이니까 당연히 노는 날이 많으면 좋다. 그러나 이때는 가을 추수 시기라서 일손이 매우 부족할 때다. 당장 우리 집만 보아도 형과 나, 세란이 세 명만 일을 거들어도 어른 2 명 몫은 해낸다.
이번 가정실습 기간엔 좀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 3일 날은 학교에 가서 혼자서 붓글씨 연습하기로 류 선생님과 약속했다.
내일 1일은 안계장날이므로 장에 가서 붓글씨 도구들을 더 사야겠고, 2일 날은 고구마를 캔다고 한다. 3일 동안 보람되게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