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학원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저의 성격이 외향적이라서 옆 부서에서 일을 못할 정도로 회사에서 많이 떠드는 편이었습니다. 제가 여기로 파견된 이후 회사가 참 조용해 졌다는 소식을 누구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제가 여기에서는 언어 (영어) 때문에 저의 외향적인 성격을 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 말은 많은데 말을 잘 못해 성격을 죽여야 하는 가슴 아픈(?) 현실을 겪어 보지 않은 분은 피부로 와 닿지 않을 겁니다.
루벵 시내에는 각종 학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어 학원, 음악 학원, 공예 학원, 기술 학원, 그림 학원 … 등등 대부분 학원들이 학교 학기 시작과 맞추어 9월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9월에 학원 새학기 시작과 더불어 말 못하는 “설움”을 달래 보기 위해, 절대 빼먹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영어 반에 등록을 했습니다. 1주일에 2일 (총 4시간)을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영어 학원에 나갑니다. 참고로, 유럽에서는 모든 종류의 교육비는 거의 무료라고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부담하는 “1년” 수강료 합계가 10 만원 정도이고, 벨기에 국민들이 저의 나머지 학비를 충당할 세금을 내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이런 벨기에 사회 시스템이 괜찮은 것 같은데, 막상 벨기에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도 월급에서 당장 세금이 50~60% 가 빠져나가는 것을 무척이나 억울하게 생각하는가 봅니다.
제가 나가는 영어학원에는 기초1, 2급, Level 1~6까지 8개 반이 있습니다. 처음 학원에 등록을 하는 사람은 먼저 배치고사 (replacement test)를 보아야 합니다. 어느 급수에서 1년간 결석 없이 수업에 착실히 참석하고 중간/기말고사 통과하면 다음해에는 시험 없이 한 급수 올라갑니다. 기초1급은 진짜 영어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 속하고, Level 5 이상은 Speaking이 native speaker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며 고급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배치고사에서 기초1급 판정을 받으면 Level 6 까지 가기 위해 8년을 학원에 다녀야 한다는 계산입니다.
배치고사는 토익(Toeic) 필기 문제 같은 유형의 Part 1, 작문 능력을 테스트하는 Part 2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 회사에서 Toeic 점수가 900 점 이상인 사람이 이 시험을 보면 Level 5 또는 6 에 배치되는 그 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배치 고사의 문제점은 Listening 이나 Speaking 시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배치고사를 볼 때 "고의로" Part 1의 문제를 모두 풀지 않고 공란으로 일부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Part 1 의 문제를 여태껏 한국에서 열심히(?) 갈고 닦은 문법/독해 실력으로 풀면 아마도 Level 5 이상에 배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고의로 점수를 낮추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애초에 목표했던 Level 2 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Level 2 반의 약 20 여명 중에는 저 같이 비영어권의 외국인이 4~5명 되며, 나머지는 40~70대의 벨기에 할아버지/할머니/아저씨/아주머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 반의 벨기에 분들은 대부분 이 학원에 2~3년씩 다녀서 Level 2까지 자동으로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교육열이 강한 것 같습니다. 수업 시간 중 3시간은 표현, 문법 등을 배우며, 나머지 1시간은 어학실에 가서 말하기/듣기를 합니다. 표현/문법 시간에는 만인이 저를 우러러 봅니다. 어떻게 그 정도의 Writing (문법/단어) 실력으로 겨우 Level 2에 배치되었느냐고 심지어 선생님도 저를 의심합니다. 하지만, 어학실에 가면 "정확하게" 반을 배치 받았다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아무리 둘러 보아도 저보다 말을 못하는 학생들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할아버지/할머니들도 문법이나 작문을 시키면 완전히 헤매다가 말하기와 듣기는 제가 놀랄 정도로 잘 합니다.
제 경우와 정확히 반대되는 학생도 한 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국적의 한 40대 아줌마는 말하기와 듣기는 Native speaker 수준입니다. 미국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여기로 왔다고 합니다. 이 아주머니는 꿈도 영어로 꾸고, 사물을 보면 생각도 먼저 영어로 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선생님과 농담을 자연스럽게 하는 수준입니다. 모두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겨우 Level 2에 배치되었느냐고 의심스러워 했는데, 배치고사 덕분(?)에 Level 2 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 아주머니는 남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영어 문법이나 writing 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게 두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네수엘라 아줌마는 문법과 Writing이 강한 저를 제일 부러워한다고 하고, 저는 말 잘하는 그 아주머니가 제일 부럽고… 둘이 실력을 반반씩 나누면 어떠냐고 농담을 합니다.
영어 학원에 다니면서 가끔씩 스스로 한번씩 생각해 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과거 영어 교육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남의 나라 말이고 우리나라 현실상 native speaker 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적었으므로 외국 생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저 같은 사람이 피나는 특별한 노력 없이 speaking 을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과거에 그 악조건 하에서도 문법이나 쓰기 교육이라도 엄청나게 받았기 때문에 말 잘하는 베네수엘라 아줌마 앞에서 목에 힘을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imec 에서 업무를 하면서 말을 잘 못해서 stress 를 받는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지난 세월 한국에서 갈고 닦은 문법, 쓰기 교육 덕분에 업무 그 자체는 큰 무리 없이 follow-up 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우리나라 지난 교육도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한번씩 해 봅니다.
2001.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