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 설교 안에 그림같은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탁월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많이 듣고 많이 읽어보아야 한다. 그들의 있는 그대로를 모방하기 위해서 그리하기보다는 그들의 사고와 관점을 모방하고자 함이다. 우리 시대에 과연 누구를 가리켜 탁월한 설교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방송설교로 설교하시는 분들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그만큼 탁월한 설교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가 큰 만큼 역량도 크겠지만 무조건 설교를 탁월하게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의 변두리이자 외진 곳인 명일동과 고덕동에 자리잡고 있는 명성교회는 정말 큰 교회이다. 주일낮 예배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회도 네번씩이나 있으며, 그때 그때마다 들어갈 자리가 없다. 다른 큰 교회라 할지라도 수요일 예배에 참석해 보면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명성교회는 예배 시작 10분전에 가 보아도 앉을 자리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꽉 차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무슨 이유인가? 구역조직이 잘되어 있는가? 아니면 목사님께서 정말 잘하시는 것인가? 무엇이 이토록 사람을 모이게 하는가? 거기에는 매력이 반드시 있다. 무엇인지를 밝힐 수 없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이 설교에 있지 아니할까? 그리하여 명성교회를 찾았다.
1997년 4월 6일 주일 낮예배때, 고린도전서 3:16-17, 엡 1:22-23말씀을 본문으로 "교회,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김삼환 목사님께서 선포하셨다.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포하셨다. "교회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이 첫마디이자 결론의 말씀이었다. "교회와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교회와 예수님에 대하여 말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무리이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신비이다라고 했다.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고 난 후 교회에 대하여 설명해 나가셨다. 시중에 나와 있는 목사님의 다섯 권의 설교집을 대략 살펴보면 제목설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의 설교도 제목설교였다. 다루고자 하는 제목과 문제를 내걸고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여기 저기서 뽑아 그 제목을 증명. 지원하고 그 제목에 대한 목사님 자신의 결론적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셨다. 제목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그 위험성이 어느 정도 보였다. 본문을 읽으셨지만 본문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으셨다. 본론 부분에 들어가셔서 봉독한 성경말씀이 아닌 구약의 말씀으로 흘러갔다. "교회는 구약의 성소이다. 성소 안에는 3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진설병이다. 둘째는 향이 있었다. 셋째는 촛불이 있었다." 이렇게 전제하신 후 진설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떡이다. 생명의 떡을 먹어야 산다. 떡이 없으면 성전이 아니다. 예수가 없으면 떡이 없음으로 성전이 아니다라고 전개해 나가셨다. 향은 성도의 기도이고, 촛불의 기름은 성령이라 하셨다. 설교의 제목은 "교회,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 였지만 Point는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기도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예화사용에 있어서 목사님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예화와 예증은 진리를 밝혀 주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무엇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는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목사님은 예화를 적절하게 사용하셨다. 자신의 과거의 이야기들을 꾸밈없이 드러내 놓으셨다.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말씀과 잘 연결시키셨다. "설교자는 진리 그 자체를 전파하고 설교하려고 설교단에 서야 한다. 그 진리만이 두드러져야 하고 그 외 어느 것이든지 이를 보좌하는데 불과하다. 예화는 하녀에 불과하다." 는 로이스 존스의 말처럼 예화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예화 속에 진리의 말씀이 두드러졌다.
"나는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해 둡니다." 는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4월 6일 설교는 신학적이었다. 교회에 대한 목사님의 신학을 살펴볼 수 있었다. "교회란,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곳이다. 교회는 어머니이다. 방주이다. 광야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곳이다. 교회는 주의 보혈이 흐르는 곳이다. 교회는 죄인이 숨는 곳이다. 교회 안에는 3가지가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기도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을 계속 듣다 보니 신학교 강의실에서 "교회론"에 대하여 듣고 있는 느낌이었다. 제목이 "교회,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 이듯이 제목 설교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본문의 배경에 대하여, 왜 그런 말이 기록되어 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너희는 교회다. 교회에는…" 라고 이어가셨다. "내가 볼 때 설교자에게 있어서 신학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또한 조직신학을 알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는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그리한 것 같다.
교회에 대한 신학강의를 하는 것처럼 나가시다가 겔47장의 말씀을 가지고 결론으로 이어졌다.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가는 곳마다 회복이 있었다. 교회가 가는 곳마다 회복이 있어야 한다. 열매 또한 있어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워야 한다. 생활 면에서 낭비. 사치, 연락하는 것을 금하고 절제해야 한다. 회복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고 역설하셨다. 설교의 특징으로 말씀을 전하시다가 한 번 정도는 찬양을 하셨다. 말씀과 동떨어진 찬양이 아니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찬양을 하셨다. 설교자의 찬양하는 모습이 아름다왔다. 온 몸으로 연출하셨다.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셨다. 행동반경이 넓었다.
목사님의 인간이해에 있어서 "예수가 없으면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인간은 예수가 있어야 한다. 죄인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하는 죄인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사람 차별이 끝났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다." 라고 하셨다. 특별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고 하셨다. 당당하여야 한다. 죄인이지만 구원받은 죄인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죄인이요. 예수님이 거하는 성전이기에 당당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현실문제에 대하여 민감하셨다. 한보청문회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4월 6일, 13일, 20일 세 설교에서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거론하셨다. 북한의 현실태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북한이 굶주리고 있는 것, 남한이 잘 살고 있는 것, 다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인생이 없다. 다 죄인다. 잘 났는냐 많이 가졌는냐 하는 것이 중요치 않다. 우리는 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 앞에서 다 헐벗은 자이다." 북한의 현실태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그리되었다 하셨다. 한보청문회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입장을 바꾸어 보아야 한다" 고 하셨다. 내가 증인이라면, 내가 그 곳에 앉아 있다면 나는 뭐라 말할 것인가.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지만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아니한다. 이웃을 긍휼이 보아야 한다. 다같이 살아가야 한다. 사람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에 박수를 보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청문회의 증인으로 세워 놓고 물어보시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예수님이 질문하신다. 어떻게 살아왔소? 주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누가 밀어 주었소? 예수님이 밀어 주셨습니다. 누가 몸체요? 예수님이 몸체입니다." 이 말씀에서 남을 정죄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라고 하면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아니 그런 상황설정을 해 놓고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다. 4월 20일 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 전주 4월 13일 설교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보는 눈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는 달라야 한다."면서 "왜 그가 그리되었는가?" 에 대한 원인 분석을 하셨다. 그것은 어떤 외적인, 물리적인 힘보다는 자기 관리를 못했기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했다. 철저한 자기 관리, 엄격한 훈련이 없었다고 하셨다. 우리 마음이 안일과 부패에 빠지면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종로의 산부인과 원장의 노름 빚 이야기를 하셨다. 현실태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다. 민감하셨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진행되었던 한보청문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인들에게 이야기하셨다. "왜 그리 되었을까?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으로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요, 철저한 자기관리와 엄격한 훈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를 무조건 정죄하지 말자. 그를 긍휼히 바라보자. 그리고 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자. 나에게 하나님이 있는가? 내가 지금 어디에 기초하여 서 있는가? 환난, 재난이 한 사람을 넘어 뜨리는 것이 아니라 안일과 부패, 썩은 마음이 그를 넘어뜨린다. 우리의 썩은 마음, 부패한 마음, 각양 어두운 마음을 버려야 한다. 특별히 사생활에 깨끗해야 한다. 사생활이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면 그 사람은 자기 관리, 자기 훈련을 할 수 없기에 넘어진다." 는 것을 강조하셨다.
또한, 구체적인 생생한 현장에서부터 설교를 이끌어 내셨다. 이 시대적인 흐름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셨다. 선지자는 미래적인 예언보다 현재적 상황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 평화, 의, 죄에 대하여 선포하는데 이것은 현재의 상황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삶의 정황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할 때 청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감의 자리가 확보되어진 이후에 자연스럽게 본문의 자리로 나아가서 그들을 본문의 상황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4월 6일, 13일, 20일)는 제목설교였다. 6일에는 교회에 대하여, 13일에는 은혜에 대하여, 20일에는 자기 관리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설교는 현시대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예화 또한 개인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적절하게 사용하였으나 목사님 어머니에 관한 예화는 상당히 길었다.
제목 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는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또한 제목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훌륭하게 인도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전제 그 자체가 인간적일 수도 있고 위험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제목설교 위주의 김삼환 목사님의 설교는 그 바탕 자체가 기도로서 이루어 졌다는 강한 인상을 받게 한다. 매우 단순하여 분석조차 할 것이 없을 정도로의 인식을 갖게 하였고, 너무 쉽다는 생각으로 의아심을 갖게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영적 파워는 충분하다고 생각되어지며,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새벽예배를 4부로 드리는 신기를 창조한 교회, 어린 아이로부터 나이든 노인에게까지 교회 나오는 것이 즐겁고 기다려지게 하는 교회, 살아 있는 생명을 느끼게 하는 교회, 그 바로 뒤에는 하나님께 매임 받은 김삼환 목사님이 계셨고, 그 뒤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하고 계시고 이끌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