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숭명반청이 정치 철학이고 주자학을 절대시한 정치가이며 서인의 영수.
*윤증: 현실에 바탕을 둔 정치를 꿈꾸며 학문과 사상면에서는 자유주의를 도모한 소론의 영수.
먼저 시간에 논한 송시열과 예송논쟁 다음으로 노론이 절대 권력을 100여년간 행사하며 이에 맞선 정당이(?) 소론으로 압축할수 있습니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16C를 지나면서 조선 정계는 붕당정치에 휩싸입니다.
붕당은 조선 중엽에 모습을 드러내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 말까지 계속 이어지집니다.
처음에 선조때 붕당정치로 정국 주도권을 잡은 건 동인이었으나 인조반정과 정여립모반사건으로 서인이 정권을 탈취(?)했습니다.
서인은 숙종 초 거대한 핵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며 약 100여 년 가량 모든 정사를 막론하고 대립과 갈등 구도로 이어집니다.
노론과 소론의 중심엔 폭풍의 핵처럼 거대한 두 정치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송시열과 윤증입니다.
우암 송시열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붓으로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이라 전시간에 표현했죠!
선조때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그는 명재 윤증보다22살 더 먹은 선배 정치인입니다.
송시열은 세 살 때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일곱 살이 되어선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전해질 정도로 영특한 어린시절이 기록에 나타납니다.
여덟 살에 송이창 문하로 들어가 송준길을 만나 이후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내기로 약속합니다.
사계 김장생과 김집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우정을 나누며 병자호란 이후 아이러니를 연출합니다.
(서인: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윤선거........이렇게 라인이 형성됩니다)
ⓐ송시열VS윤선거
송시열은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20년 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집니다.
(사건의 발단과 과정은 복잡하므로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발단은 윤선거와 뜻이 같은 백호 윤휴가(올해가 백호띠죠!!) 4서 3경 중 중용에 대해 집주(해석)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인 건 다아는 사실이죠!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1편에서 이야기 했듯이 1,2차 예송논쟁으로 극에 달했고 윤휴는 숙종 6년에 허적의 서자 허견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사약을 받았습니다.(여러 해석과 설이 있지만 .....)
*******가끔 사문난적으로 시험에 출제되는 단원입니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달리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송시열/윤휴 입장차이 극렬)
오직 주자해석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자유? 창작?적인 시각이죠!(윤선거=윤휴라인형성)당연히 아들 윤증도 윤휴를 옹호.
윤휴와 송시열의 입장 차이는 효종때 황산서원(대전근교 계룡산 어디쯤으로만 대략...)에서 벌어진 토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윤증에게로 이어져 서인을 노론·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됩니다.(윤선거-윤증 부자지간=윤휴의 경전해석 옹호함)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윤휴·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가질 정도로 폭넓은 교류를 했답니다.
양명학에도 관심이 컸고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한사코 뿌리쳤답니다.
(윤증=윤선거=송준길=송시열)이렇게 서인의 계보를 형성합니다.이때까지만 해도.....
ⓑ송시열VS윤증
소론 영수로 나선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은 흔히 회니시비로 불립니다.
회니시비의 명칭은 송시열이 대전 시내의 동쪽에 자리한 회덕(지금의 신탄진)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군 니성(지금은 없어진 지명)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랍니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윤선거=윤증 부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윤선거의약점을 들추면서 시작됩니다.
(송시열VS윤선거=윤증=윤휴)
(윤선거의 약점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송시열 (원고 주장)주장: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성을 사수하기로 약속했으나 친구들은 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처도 자결지만
오직 윤선거만 살아남았을 뿐이고~~~~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을 뿐이고~~~~~
봉림대군 사신 일행이 성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어 노비로 위장한 뒤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빠져나온 비겁쟁이 일뿐이고~~~
윤선거/윤증부자(피고 측 변론)주장:
권순장과 김익겸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자신의 처가 죽은 것 역시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겼으며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나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을 펴지만 ~~~~~
헌법재판소(민심=노론) 판결문은 대략 이렇습니다.
양쪽 주장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다만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냈다.
죽을 때까지 강도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였다.
*****대략 윤선거=윤증부자의 약점?은 이렇습니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습니다.
ⓒ 송시열VS윤선거 제문
윤선거가 현종때 죽자 우암은 제문을 지어 보냅니다.
한데 송시열이 보낸 윤선거 비문을 둘러싸고 아들 윤증의 감정이 폭발하며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맙니다.
*******(사건의 대략 요점)********
윤증은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며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평소 윤선거=윤증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냅니다.
그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서는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라고 마무리했습니다.
~~~~~~~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줬답니다.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것이죠!!!!1
ⓓ송시열VS신유의서.
여기에 신유의서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싹이 확 틉니다.
신유의서는 숙종때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입니다.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라고 씌여 있죠!.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줬고~~~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고~~~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했고~~~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고~~~~둘은 의절했고~~~ 노·소론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었고~~~
ⓔ송시열VS삼전도비문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시비로 이어집니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습니다.
송시열은 숭명반청의 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변호했고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군신이 청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해 극도의 대립구도로 이어집니다.
(송시열=이경석VS윤증=소론)
ⓕ가례원류VS권상하
이는 다시 가례원류의 문제로 불이 옮겨 붙었고
윤증의 스승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 가례원류입니다
********사건의 대략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아들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습니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답니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햇빛을 보며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권상하는 노론 내에서 인물성동론과 이론으로 호락논쟁을 일으킨 송시열의 제자입니다)
(호락논쟁도 시험에 난이도 있게 출제되는 부분입니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고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였으며 숭명반청을 정치철학으로 삼았습니다.
반면에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꾸며
그 바람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처럼 갈라섭니다.
과연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지만
붕당정치 밑바닥엔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이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갈라선 서인은 노론의 우열속에 소론과 남인의 협력?등의 정치구도를 나타내며 영/정조, ㅌ특히 정조때 남인을 등용하며 정권의 향배는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후 노론은 사도세자의 문제로 이견을 달리해 벽파(사도세자가 잘못함)와 시파(사도세자옹호입장)로 분리되며 아버지를 옹호하는 시파를 정조는 좋아합니다.
정조사후 정순왕후가 벽파를 잠시등용하지만 그도 잠시로 그치고 정조때 절대권력자인 홍국영을 시발점으로 세도정치가 이어진다는 대략의 이야기 입ㅈ니다.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당되는 당파적 구도속에는 이런 실제 사건과 당파적 이해관계가 깔려있답니다.
다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