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네 등반기(문종국)
드디어 파이네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등반허가서를 받기위해 버스를 타고 라구나 아마르가(Laguna Amarga)를 지나 공원관리사무소(Administration)로 향한다. 너무나 맑고 깨끗한 노르덴스키요드 호수(Lago Nordenskjold)와 작은 언덕, 동물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아름답긴 하지만 클라이머에겐 그저 밋밋하기만 할뿐...
겨우 이런걸 세계 제일의 자연경관이라 했는가...코 큰애들의 농간에 또 한번 속았구나 분해하며 다시 창밖을 보는데, 찰나 짙은 먹구름이 살짝 걷히며 구름속에 어슴푸레 느껴지는 쿠에르노(Cuerno)의 시커먼 윤곽을 예측할 수 있었을때 그 거대함의 미학에 공포와 소름을 느낀다.
12월 19일 출국, 20일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확인하니 시철형의 개인 카고가 없다. 항공사에 분실 신고를 하고 다시 이동,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식량 및 장비구입, 짐 정리를 다시 한다. 본래 일정은 다음날(21일)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로 향하는 것이었지만 분실 짐 때문에 일정을 변경하여 이곳에 하루 더 머무르기로 했다.
1월 22일,
결국 짐은 별 소득없이 7일 이내에 못 찾을 경우 항공사측의 보상만 약속받고 푼타 아레나스를 출발,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거쳐 파이네 국립공원에 도착했다. 라구나 아마르가(Laguna Amarga)에서 내려 다른 트레커들과 섞여 입장료를 낸 후 나는 공원관리사무소로 등반허가서를 받으러 가고 시철형과 나머지 대원들은 호스테리아 라스 또레스(Hosteria Las Torres)에서 합류하기로 한다.
공원관리사무소에 들어가니 다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서 등반허가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 가버네이션(Gerbernation) 빌딩에서 입산신청을 하니 크리스마스에 일요일 연휴라 27일이 되어서야 등반허가서가 도착할거라 한다. 6년전 쎄레또레 등반으로 파타고니아의 날씨상황을 잘 알기에 길지 않은 우리의 등반일정에 좋은 성과를 내려면 산에서 지내는 시간을 하루라도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정식의 절차를 밟아 등반하기로 하고 백번 양보해서 기다리기로 했다.
식단이 거의 한국식이라 벽 등반을 위한 팀치곤 상식을 넘어선 짐이다. 썩 바람직하지 못함을 느끼며 등반허가서를 기다리는 동안 베이스까지 짐이나 나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26일 제패니스 캠프(Campamento Japones)에 베이스를 설치할 때 까지 오르락 내리락하며 시간을 죽인다.
정찰겸 등반장비를 데포시키러 베이스에서 2시간 거리인 비박지까지 다녀왔다. 도데체 쉬운 것이 없다. 말이 2시간이지 돌밭을 지겹게 걷는다. 겨우 벽 밑의 데포지점에 도착해 또레스 델 파이네를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별로 크지 않다. 오히려 빙하 건너편의 포트리스(Fortress)나 에스쿠도(Escudo)가 더 웅장하게 느껴진다. 눈 앞에 가까이 있어서 그럴까...
1월 27일,
드디어 27일, 또레 캠프(Campamento Torres)에 상주하는 레인져 알렉시스(Alexis)에게 무전을 부탁, 공원관리사무소에 물어보니 등반허가서는 아직 도착 안했다고 한다.
‘그래 결심했어, 그냥 등반하자!’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어서 등반허가서 없이 등반에 나서기로 했다.
1월 28일,
1월 8일까지는 일정상 되든 안 되든 등반을 끝내고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해야 한다. 1월 7일이 마지노선인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오늘부터 포함해도 앞으로 열흘, 쎄레또레와 비교하며 파이네를 우습게 볼 정도로 그동안 좋았던 날씨가 등반하기로 결심한 날부터 나빠지기 시작한다. 신은 항상 자기 멋대로 이며 강자의 편이다. 다시 한번 그 놈의 배신에 치를 떨며 빈둥거린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좋은날을 기다려 등반하는 것보다 등반중 좋은날을 기다린다는 것이 더 맞을 듯... 불면증에 시달렸던 쎄레또레에서의 지난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봉우리에 구름이 걷히기만 하면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무조건 뛰었다. 그러다 눈보라에 쫒겨 내려오고 바람에 밀려 내려오고... 그 이 갈리던 악천후, 파타고니아의 날씨에 설욕의 날만을 기다려 왔다. 그 날씨에 맞서 싸우지 못했던게 후회됐다. 그 날시 상황속에 있어보고 싶었다. 그 날씨를 견뎌보고 싶었다.
나에게 나쁜 날씨는 오히려 기다려왔던 상황이다. 그러나 나쁜 날씨가 주는 정신적 부담은 없었지만 나를 포함한 팀의 부실한 등반력은 부담이 됐다. 그래서 몇 안되는 경우의 수를 가지고 무진장 머리를 굴린다.
등반루트 개념도가 있다는 것은 그 루트가 많이 등반된다는 증거이며 그 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루트가 아닌 경우 자신이 등반 할려는 루트의 피치 개념도를 가지고 있는 클라이머는 운 좋은 사람이다. 등반계획서에는 ‘우나 삐나 리니아 데 로쿠라(Una Fina Linea de Locura·6b/A3)’루트를 등반할 것이라고 했었지만 그것은 부족한 자료 속에 그 루트에 대한 등반정보를 알고 있던 것뿐이지, 특별히 매력 있다거나 꼭 해보고 싶은 것 때문은 아니었다. 현지에 도착해 더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면 등반루트는 당연히 변경할 생각이었다.
허나 그것은 내 김칫국이었다. 물어볼만한 다른 클라이머들도 없거니와 신뢰할만한 이야기들도 없다.
음.. 자존심 상하지만 여러 이유로 좀더 쉬운 중앙봉의 영국루트나 날씨 상황을 봐서 여차하면 북봉이라도 등반하기로 했다.
2005년 1월 1일,
내일 새벽 2시 출발을 위해 오늘 일찍 잠자리를 준비한다. 지난 5일간 내린 비(벽에는 눈이 왔으리라) 때문에 등반 루트상에 눈과 얼음이 끼어 어려움이 더 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몸이 사려진다.
그러나 예상보다 작은 벽의 규모와 노멀루트(Normal Route)이자 난이도가 쉬운 인기있는 루트(Popular Route)이기에 별일 없는 한 성공적 등반이 될 거라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나에겐 등반 개념도가 있지 않은가...
등반전 항상 죽음이 떠오르고, 이만저만한 걱정과 온갖 잡념이 끓는다. 그 근본적 원인은 아마도 공포에 있으리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등반은 시쳇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온 마음 가득한 정열만 가지곤 인생도, 등반도 깊은 맛이 없다. 도전의 그 순간이 임박할수록 더한 초조감, 그러나 벽과 딱 마주치면 그 순간 모든 것은 사라진다.
1월 2일,
새벽 1시 30분, 시철형님과 성득형, 종철형이 안주무시고 밥까지 해 놓으셨다. 고마움을 뒤로하고 형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2002년 클라이밍지의 골든 피톤상에서 파이네 연봉 릿지등반으로 솔로부문 아차상(?)을 수상한 스티븐 슈나이더와 함께 출발한다. 슈나이더는 여자친구와 같이 북봉의 몬지노(Monzino) 루트를 등반할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가(경주와 나) 앞장서 가는데 얼마쯤 가니 슈나이더의 랜턴 불빛이 안 보인다. 나중에 내려와서 들으니 슈나이더는 바위에 얼음이 얼었다고 하며 그냥 내려갔다고 한다. 데포지점에 도착하여 장비를 착용하고 출발준비를 하니 6시 30분이다.
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내린다. 경주의 얼굴을 보니 ‘겨우 이 정도 날씨에 도망 가냐’ 하는 비겁자를 보는 눈빛이다. 베이스에서 기다리는 형님들에게 미안한 생각과 경주의 등반하고픈 마음을 외면 못하겠다. 일단 콜 비치(Col Bich)까지 가서 벽 생김새라도 확인하고 날씨가 개면 등반을 계속하고 상황이 그대로이면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데포지를 출발한다. 2시간이 넘게 걸려 벽밑까지 도착하니 9시다. 다시 자일을 풀고 등반을 속행, 북봉의 3피치까지 등반을 해도 비는 계속 온다. 하단부의 바위는 부실해서 힘을 주면 떨어져 나간다. 그야 말로 살금살금이다. 몸은 땀과 비에젖어 으슬으슬 춥고 찝찝하다. 햇볕이 보이지 않으니 심리적으로 더 불안하다. 몸이 젖음으로서 체온저하와 그로인한 합병증이 유발된다. 선등자는 그래도 낫지만 후등자는 확보 보면서 죽는다. 경주가 올라오는 대로 하강을 시작하여 데포지까지 내려오니 오후 6시다. 물에 빠진 생쥐꼴로 하산하면서 경주와 한마디씩 한다. ‘슈나이더 나쁜 놈’
이렇게 악천후로 중도 철수하면, 다음날은 피곤한 몸의 휴식이나 젖은 장비, 옷등을 말리게 되는데 클라이머를 싫어하는 하늘은 꼭 이럴때 날씨가 좋아진다. 그러나 이젠 벽 상황을 확실히 파악했으니 다음번 등반은 이변이 없는 한 계획대로 등반을 마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경주는 비박을 하루 더 해서라도 등반하고 싶어한다.
‘형님, 하루 더 비박하면 되죠...’
‘이놈아, 비박하기 싫어서 차라리 등반 안 할련다’
벽에서의 비박은(벽에서 보내는 시간은)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 만큼 위험해질수 있다. 또, 춥고 배고프고 불편하고....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1월 6일,
결국 마지노 선인 1월 6일까지 와버렸다. 그런데 날씨가 최악이다. 눈이 베이스 캠프까지 내려 온통 하얗게 덮여 버렸다. 아무리 악천후에 대들고자 했지만 이건 너무하다. 날씨가 너무하다는게 아니라 그 타이밍이 너무 심술궂다. 그나마 다행은 저번 시도 때처럼 비는 오지 않는다.
날씨를 물으면 이곳 사람들의 대답은 ‘It's Patagonia'라고 한다. 그만큼 날씨 변화가 심해 종잡을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악천후지만 등반을 준비하면서 ‘It's Patagonia'를 빌었다. 이곳에서의 등반은 인공이든 프리이든 빠른 등반이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보통의 클라이머가 도전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물론 실력을 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가진 재주 내에선 등반루트 선택의 문제인 것 같다. 파이네 중앙봉의 영국루트나 북봉의 몬지노 루트 경우 누구나 오를 수 있을 만큼 쉬운 곳이긴 하나 날씨가 나쁠 때는 가장 최악의 루트로 변해버린다.
이렇게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악천후에는 노멀 루트에선 답을 찾을 수가 없다. 홀드를 찾기 위해 픽켈을 이리저리 긁어대고 젖은 손을 입으로 빨아 대며 한동작 한동작 등반한다면 타임아웃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유등반보다 인공등반을 더 잘하는 우리 팀에겐 어차피 악천후 속에서 등반할거라면 어설픈 자유등반보다 장갑이 젖지 않고 빙벽화도 신을 수 있는 인공등반이 훨씬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마지막 출발하는 날 내린 눈은 내 선택을 명확히 하게 해주었다. 북봉의 가장 짧은 루트로의 인공등반. 저번에 후퇴하며 봐놨던 오버행의 깨끗한 크랙라인이 눈에 선하다.
데포지점에 도착하여 장비를 착용하고 출발하려는데 미친 바람과 눈보라가 불어댄다. 아침에 출발할 때만 해도 잘하면 오늘 하룻만에 북봉 등반을 마치고 내려갈 수 있겠다 라는 생각으로 베이스를 나왔는데 이건 벽 밑까지 6시간을 넘게 허비해 버린다. 깊은 눈과 강한 바람, 슬랩 바위면의 얼음으로 서로 확보를 봐줘야만 했다.
북봉의 등반라인쪽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비박자리를 만들었다.
1월 7일,
다음날 간단하게 비스켓과 사탕으로 아침을 먹고 7시부터 등반을 시작한다.
1피치, 너무 쉬워 보이는데 컨디션 난조(?)로 못 올라가겠다. 어제 많이 지쳤던 경주가 오늘은 얼굴에 생기가 돈다. 여지껏 내가 너무 앞장섰기에 ‘네가 해볼래?’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예’ 하며 흔쾌히 수락을 한다. 역할을 바꿔 경주가 선등을 서는데 월출산 시루봉 올라가듯이 꾸역꾸역 잘도 올라간다. 약 40m쯤 올라가 암각에서 1피치를 끊는다. 난이도는 5.9.
2피치부터 정상까진 일자로 곧게 뻗은 오버행 직상 크랙이다. 후렌드가 확실히 먹는 A1구간. 재심의 여지없이
‘네가 끝까지 올라가라’ 하니
‘형이 보여 주십시오’ 한다.
‘이 새끼가...네가 해 임마’
마지못해 ‘예’ 하지만 후렌드를 꼽고 일어서는데 주저함이 없다.
50M는 족히 올라 갔을까 ‘등반완료’소리가 들린다. 과연 확보는 튼튼하게 잘 했을까 불안해하며 쥬마에 체중을 건다. 기분좋은 인공등반을 제공하는 단단하고 반듯한 깊은 크랙들이다. 확보지점에 도착하니 교묘히 슬링을 걸 수 있는 턱이 있다.
다시 2피치에서 그대로 이어진 크랙을 타고 출발한다. 가까워 보이는데도 40M를 다 올라가서야 등반완료를 한다. 다시 쥬마를 걸고 3번째 피치에 올라서니 그 위로는 큰 바윗장들이 너덜처럼 쌓여져 있다. 이젠 북봉의 정상방향으로 쉽게 전진하면 될 것이나 시간이 이미 6시가 다 돼간다. 날씨 또한 바람과 짙은 가스가 차기 시작, 파타고니아 특유의 악천후로 돌변해간다. 자일이 하늘로 치솟는 광풍이 불어 대기 전에 빨리 내려가야 한다.
사람 눈은 다 똑 같다. 할만 하겠다 싶어 등반을 시도하며 속으론 ‘신루트’였으면 했는데 피치마다 헌 하강슬링이 걸려져 있었다. 무슨 루트인지는 모르나 어떤 나쁜놈이 남의 밥상을 가로챈 것이다. 그 자리에서 사진 촬영 후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비박지에 내려서니 저녁 10시가 다 되었다.
‘등산은 인생의 축소판이다’라는 말과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에 동감하며, 원정등반도 긴 인생 가운데 하나의 짧은 이야기인 것 같다. 그래서 ‘산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를 자각하며부턴 원정 계획서를 시놉시스와 프롤로그로 짜기 시작하였고, 이번에도 그 문화활동에 충실하기 위해 등반 후 바릴로체와 이구아수를 일정에 포함시켰다. 쉽게 갈 수 없는 남미의 자연을 보게 해주신 쎄레또레 사장님과 노시철 선배님, 그리고 수고하신 성득형, 종철형, 경주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