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成桂는 고려를 치기위해 위화도 회군한 사실이 없다
출처 : 李氏의 뿌리歷史
저자 : 율곤 이중재
高麗末 李成桂
고려말 우왕(禑王 AD. 1393~1394年) 때는 참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때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고려 25대 고종(高宗AD. 1232~1277年)때 몽고(蒙古)의 침략에 의해 강화조약(强和條約)이 아닌 강화조약(講和條約:상호협력조약)을맺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화친을 전제로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었으나 그후 고려왕들은 몽고식 이름을 갖게 되고 내정간섭을 받아왔다.
고려 23대 고종(高宗)때 몽고왕 7대 헌종(憲宗 AD. 1251~1260年)은 사실상 고려의 왕자(王子)인 준(綧)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고려의 장군 김보정(金寶鼎)과 어사 송언기(宋彦琦)가 고종 25년 겨울인 12월에 몽고에 파견사로 갔을때 몽고왕 헌종(憲宗)인 준(綧)은 스스로 고려왕자임을 밝혔던 것이다. 그러기에 강제조약이 아닌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443쪽에 기록하고 있다.(필자의 저서 새 高麗史 807~623쪽 참고)
고려말기가 되자 고려국은 우왕(禑王)의 패륜적인 행위로 고려는 더욱 패망의 위기를 걸을 때이다.
이때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AD. 1368~1398年)은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땅에서 명(明)나라를 세우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高麗는 16대 예종(睿宗 AD. 1124~1140年)때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17대 인종(仁宗 AD. 1141~1164年)때는 중국대륙 전체를 통일 했던 것이다. 그런고로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이 있었던 강소성 소주땅은 고려의 강역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 땅인 소주에서 명나라를 만든 주원장은 고려왕조의 쇠망을 틈타 지금의 북경으로가 십삼사(十三司)를 만들어 점점 세력을 강화하였다.
고려 우왕(禑王)의 실책으로 나라가 기우는 것을 본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은 高麗가 도읍하고 있던 지금의 서안(西安) 즉 옛 서경(西京)을 옮기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高麗王朝의 신하들은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이때 우왕(禑王)은 고민 고민 하다가 이성계(李成桂)장군을 불렀던 것이다.
그 당시 李成桂장군은 하북성(河北省) 일부지방과 산서성(山西省) 그리고 하남성(河南省) 북부지방과 멀리 섬서성(陝西省) 일부지방에서 왜적(倭賊)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띠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적(倭賊)들이 들끓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진(晋 BC. 895~376年)나라말기 위(魏 BC. 424~225年)나라와 한(韓 BC. 406~ 221年) 그리고 조(趙 BC. 408~222年)의 세 나라가 갈라져 나온 뒤 진(秦 BC. 221~207年)에 의해 위(魏)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된다.
이때 위나라의 한 무리는 중국대륙 남방인 호남성(湖南省) 남쪽지방에서 왜국(倭國)을 세우게 된다. 또 한 무리는 일부 新羅로 한무리는 百濟로 흩어져 갔으나 나머지 소수의 무리들은 중국대륙 각지로 흩어져 노략질을 하는 왜적(倭賊)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말기 나라가 방대했던 고려는 각처에서 왜적들의 횡포에 시달리게 되자 이성계(李成桂)장군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왜적을 소탕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의 쇠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도읍지인 서경(西京)즉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압박하였다.
본시 서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큰 나라는 당연히 西京에서 도읍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明나라 주원장의 압박이 강해지자 우왕(禑王)은 왜적(倭賊)을 토벌하고 있던 李成桂장군을 불렀던 것이다. 이때 우왕(禑王)은 李成桂장군에게 明나라를 칠 것을 명하자 이성계장군은 네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그 첫째가 작은 병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고 자칫 잘못하면 역적으로 되몰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여름에 병력을 출동할 수 없다고 했다.
셋째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군비를 충분히 확보해야하고 적은 병력으로는 머나먼 원정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넷째 지금은 더운 여름이므로 비가 오게 되면 무기의 기능이 약화되고 군사들의 질병이 염려되므로 안 된다고 하여 거절했던 것이다.
李成桂장군이 물러난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즉 상감을 직접 보좌하는 일품(一品)벼슬에 있던 최영(崔瑩)이 우왕에게 말하였다.
내일 李成桂를 다시 불러 한번 더 명을 내려 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삭탈관직을 시키라고 하였다.
다음날 우왕(禑王)은 이성계장군을 불러 다시 명령했으나 이성계는 똑같은 대답을 되풀이 하자 우왕은 이성계장군을 삭탈관직 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장군은 눈물을 흘리고 高麗國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하남성(河南省) 의주(義州)의 고향으로 향하였다.
義州는 지금 하남성(河南省)동북에 있는 급현(汲縣)이다. 황하가 흐르는 지류(支流)주변에 오리머리와 같은 푸른 녹색의 강이 흐른다고 하여 고려말에는 그곳을 압록강(鴨綠江)이라 불렀다. 이성계는 백마(白馬)를 타고 압록강변을 거닐고 있을 때 급보가 날아들었다.
최영(崔瑩)은 이때다 싶어 우왕에게 말하였다.
이성계를 삭탈관직 시켰으니 이성계를 따르는 많은 장군들과 군사들이 서경(西京)으로 쳐들어올지 모르니 빨리 왕은 피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우왕(禑王)이 도망가면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이성계를 제거한 다음 조민수(趙敏修)장수를 왕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잡기 위함이었다. 이때 겁이 많은 우왕은 도망을 가게 되었을 때 이성계장군은 비록 평민의 신분이었으나 장수들이 급보를 전해 준 것이었다.
이성계는 즉시 백마를 타고 서경(西京)으로 행할 때 서쪽과 북쪽, 남쪽에서 임무활동을 하고 있던 장수들은 이성계가 서경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방에서 군사가 모여 들었다.
西京에 도착해 보니 우왕은 간곳이 없었다. 급히 군사를 시켜 찾아오게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왕때 고려 말은 혼란상태였다. 그것은 왕의 패륜적 행위로 말미암아 高麗國은 패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義州에서 進軍하다
李成桂는 고려를 치기위해 위화도 회군한 사실이 없다.
고려사절요, 고려사 그리고 고려도경을 찾아봐도 위화도회군을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중국 고금지명대사전에도 義州는 있어도 위화도라는 지명은 없다. 뿐만 아니라 李成桂장군이 태어난 곳은 하남성(河南省) 급현(汲縣)인 義州태생이다.
최영의 간계에 의해 우왕(禑王)으로부터 삭탈관직 당한 후 고향인 義州주변에 있는 압록강(鴨綠江)변에서 백마(白馬)를 타고 고려를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있을 때 엄청난 비보가 날아들었다. 급히 말을 몰아 서경(西京)으로 달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서북남(西北南)에서 달려온 장수와 장병들은 이성계장군의 진군에 합세하였던 것이다.
어떤 엉터리 역사학자가 이성계를 위화도 회군(回軍)을 하여 고려를 찬탈했다고 기록했는지 모르나 고려사(高麗史)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조작된 기록으로 인해 충신(忠臣)인 李成桂를 역적으로 몰아 기록한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야 한다.
지금 조선왕조는 고려를 망하게 한 역적의 나라라고 알고 있다. 또 엉터리 역사를 배운 많은 국민들은 이성계를 역적으로 보고 있으며 조선이씨는 역적의 후손이라고 한다.
필자가 어떤 출판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재야학자 한사람이 말하기를 李成桂는 역적이라고 공공연하게 축사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필자는 언젠가는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밝힐 것을 결심하고 1995년 10월 드디어 새 고려사라는 방대한 저술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자나 국민이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이 기회를 통해 전주이씨의 뿌리 역사를 통해 밝히는 것이다.
이성계가 西京인 지금의 西安에 도착했을 때 우왕과 최영(崔瑩)은 보이지 아니했다. 병사를 시켜 급히 찾게 하였다. 태조(太祖) 李成桂l는 암방사(巖房寺)라는 절 북쪽고개에서 소라고동 소리를 불고 있던 병사를 데리고 와 수백명의 병사와 함께 우왕과 최영을 소리높이 불렀다.
이때 병사들은 우왕과 영비(寧妃)가 최영이와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숨어있다고 하였다.
곽충보(郭忠輔)장수 등 3, 4명은 직접 팔각전(八角殿)이 있는 곳을 찾아가 최영(崔瑩)과 우왕(禑王)을 잡아 가두려 했다.
이때 최영은 눈물을 흘리면서 곽충보에게 절하며 빌었다.
그리고 최영은 이성계장군에게 말하기를 이번 사건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여 백성들을 잘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하였다.
이번 일이 잘못되어 곤란에 빠지게 되었으니 하늘도 나를 원망할 것이다. 이미 좋은 때가 다 지났으니 이 일을 어쩌랴 하면서 최영(崔瑩)은 눈물을 흘렸다.
반역당을 다스릴 군신회의에서는 최영(崔瑩)이 처음 발령을 받고 부임했던 고봉현(高峯縣), 즉 귀주성(貴州省) 평파현(平?縣)동쪽 20리에 귀향보내기로 했다. 이 일은 삼사(三司: 입법, 사법, 행정)에서 반대하였으나 이임인(李仁任)의 달변에 시행키로 했다.
다시 정미(丁未)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성(城)안에서 회의가 있은 후 지장사(地藏寺)에 유배되어 있던 최영(崔瑩)을 합포(合浦), 즉 광동성(廣東省) 합포현 동쪽 75리로 유배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송광미(宋光美)는 감숙성(甘肅省) 원주(原州), 즉 고원현(固原縣)으로, 안소(安沼)는 감숙성(甘肅省) 환현(環縣) 120리인 안변(安邊)으로, 정승가(鄭承可)는 절강성(浙江省) 영해현(寧海縣) 동북인 영해(寧海)에 각각 귀양 보내기로 했다.
한편 판밀직(判密直: 문서를 보관하는 직책)에 있던 인원보(印元寶)는 하남성(河南省) 통허현(通許縣)에 있는 함창(咸昌) 즉 함주(咸州)에, 동지밀직(同知密直: 판밀직과 비슷한 직책)에 있던 안주(安柱)는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 즉 봉주(鳳州)로, 정희계(鄭熙啓)는 하남성(河南省) 음현(陰縣)인 음죽(陰竹)의 음지(陰地)로 각각 귀양 보내기로 했다고 고려사절요는 기록하고 있다.
이 당시 우왕(禑王)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강화현(江華縣)에 새로운 국모와 함께 모시기로 했다.
한편 우왕(禑王) 14年 7月 합포(合浦)에 귀양 보낸 최영(崔瑩)을 사천성(四川省) 충현(忠縣)인 충주(忠州)로 다시 귀양 보내기로 했으며 이때 귀양 보낸 정승가(鄭承可)는 참수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조규(趙珪)는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 동북 40리인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은 섬서성(陝西省) 부곡현(府谷縣) 북쪽인 풍주(豊州)로 귀양 보냈다고 했다. 이때 안소(安沼)와 송광미(宋光美) 그리고 인원보(印元寶) 등은 유배지에서 참수 시켰다.
이상과 같이 이성계는 관직을 삭탈 당한 후 최영의 농간에 의해 이성계는 의주(義州)의 고향에서 평민으로 진군했다는 것을 고려사(高麗史) 등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고로 이성계는 고려를 치기위해 역적행각을 한 것이 아니고 高麗를 살리기 위해 충성어린 의주(義州)에서 진군(進軍)을 했음을 볼 수 있다.
첫댓글 하남성 의주 고향으로 간 이성계, 고려를 살리기 위해 의주에서 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