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구시청년유도회 원문보기 글쓴이: 송은석(사무국장)
2012년 대구시청년유도회 하반기 선현유적답사 성료
○일시: 2012년 10월 28일(일요일) 08시30분 - 21시00분
○장소: 대구시 남부, 동부지역
○일정:
☞ 08시30분: 향교출발
☞ 09시~09시30분: 인흥서원
☞ 09시35분~11시15분: 남평문씨 세거지
☞ 11시35분~12시: 월곡역사박물관
☞ 12시30분~13시10분: 중식
☞ 13시30분~14시10분: 녹동서원
☞ 14시25분~14시40분: 한천서원
☞ 14시50분~15시10분: 박곡서당
☞ 15시30분~16시: 무동재
☞ 16시10분~17시: 오천서원
☞ 청호서원,덕산서원,모명재(일정상 생략)
☞ 17시40분~18시50분: 옻골마을
☞ 19시10~20시30분: 석식
☞ 21시: 향교도착
○참석: 대구시청년유도회 배희구 회장 외 45명
(무순: 배희구,이갑규곽영선,권영탁,김수우,김재환,도기영류영숙,민택기,박정호,박주,박필선,배인성,송은석,신혜주,윤주양,이명교,이원균,이원우,이종한,이주은,이진아,이효식,전일주,정여호,정재남,조숙자,조익목,조정숙,조진형,조혜경,최덕수,최영기,최혜원,한정호,허미라,황경보,권정희,김필성,성호승,신진식,이성윤,이아영,정재호,최고경)
○사진과 함께 간단히 일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무동재(武洞齋) 기념촬영
광거당(廣居堂) 기념촬영
문희갑 전대구시장님의 거처인 사죽헌(思竹軒) 기념촬영
1. 인흥서원(仁興書院)
☞추계 추씨(秋溪 秋氏)
☞ 위치: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
☞ 명심보감의 편저자인 노당(露堂) 추적(秋適)선생(1246-1317)을 모신 서원이자
명심보감 판본으로는 국내 유일본을 소장하고 있는 서원.
이곳 인흥서원과 남평문씨 세거지 일대인 본리리는 과거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仁興寺라는 큰 사찰이 있었기에 이에 연유하여 인흥서원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문 사찰이기도 하다.
일연스님은 바로 이곳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역대연표를 작성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 추태호 선생님^^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 11대 회장님을 역임하신 분이다.
사모님과 함께 일찍부터 나오셔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다과 등으로
잊혀져 가는 우리 儒家의 멋스런 접빈객(接賓客) 문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셨다.
문헌공(文憲公) 노당 추적선생의 24세 종손 추연섭옹
구순의 연세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종손 어르신의 모습에서
우리 일행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몇해 전 홀로 인흥서원에 들렀다가 종손 어르신과 장판각에서
차를 나누며 많은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손은 떨지 않으셨는데...
안내판을 영어로 읽으시고 해석하시는 목청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셨다.
명심보감 판본을 보여주시겠다시며...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
인흥서원 명심보감 판본
명심보감 판본은 이곳 장판각에 소장되어 있다.
인흥서원 사우인 문현사(文顯祠) 알묘례(謁廟禮)
문현사는 추계추씨 사현(四賢)을 모시고 있다.
西로부터 문정공 회암 추황, 문헌공 노당 추적,
상서공 운심재 추유, 충장공 세심당 추수경
영정은 노당선생의 영정이다.
종손어르신^^ 부디 건강하십시오...
우리일행을 배웅하시는 추태호 전 회장님^^
"추회장님^^ 그리고 사모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2. 남평문씨(南平文氏) 본리 세거지
☞ 南平文氏
☞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401-2
☞ 인산재(仁山齋) 문경호(1812-1874)선생이 터를 잡고
증손자인 수봉(壽峯) 문영박(1880-1930)선생이 빛을 낸 대구의 대표적 兩班家
☞ 수백당守白堂(수봉정사壽峯精舍), 광거당(廣居堂), 인수문고(仁壽文庫) 등
남평문씨 세거지 맨 앞의 건물인 '수백당'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위창 오세창선생이 쓴 '수봉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예전에는 수봉정사로 불리다가 요즘은 수백당으로 불리는 건물이다.
거경서사(居敬書舍) 툇마루에서 가을볕을 쬐고 계시는
수봉선생의 손자이신 문태갑옹과 본회 전일주 부회장님
수봉선생은 국내에서 문중 문고로는 가장 규모가 큰 인수문고를 설치하셨고
손자이신 문태갑옹은 그 곁에 중곡문고(中谷文庫)를 설치하셨다.
인수문고
수봉선생께서 문중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중국으로 부터 사들인 1만권의 서책들을 처음엔
광거당의 만권당에 보관을 하였다가 이후에 신축된 이곳 인수문고로 옮겨진다.
인수문고 소장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 문희목 선생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의 재실이자 조선팔도 빈객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한 광거당.
광거당은 80년대 장미희 주연의 '황진이', 강수연 주연의 '씨받이' 등
사극의 촬영무대로도 유명하다.
광거당 누마루에서 짧은 시간이였지만 우리 일행들은 차를 마시면서
양재선생님으로부터 '고산경행루' 등의 시판들에 대한 특강^^ 을 들을 수 있었다.
참고로 얼마전까지 광거당 담을 따라 우거졌던 왕대나무가 지금은 철거되고
키작은 대나무로 교체되어 있다.
문희목 선생의 설명에 따르면 왕대가 너무 우거져
곁에 있는 소나무의 성장에 큰 지장이 있어 교체를 하였다고 한다.
대구청년유도회의 자랑 ^^대학생부원들^^
문희갑 전대구시장님의 거처인 사죽헌(思竹軒)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가 이 마을의 주산인 천수봉이다.
특강^^ 중이신 문희갑 전 대구시장님
남평문씨 본리 세거지 앞쪽에는 오래된 석탑이 1기 서 있다.
바로 그 옛날 인흥사의 유물이다.
현 종손이 살고 있는 종택은 인흥사의 대웅전 자리라고 전한다.
또한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의 이름은 지금도 고려정(高麗井)이라고 불린다는데...
3. 월곡역사공원·박물관
☞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833-1
☞ 단양우씨 열락당 종중(丹陽禹氏 悅樂堂 宗中)
☞ 임진왜란때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워 '선무원종1등공신'에 녹훈된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1569-1621)장군과
단양우씨 열락당 종중의 유구한 역사가 잘 보존되고 있다.
월곡역사공원 내에 있는 월곡역사박물관. 문중 박물관으로는 대단한 규모이다.
공원지구 안과 밖에 우씨문중의 유적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우리 일행은 다음 일정관계로 박물관과 낙동서원만을 둘러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답사 당일이 박물관 휴관일이었고 또한 우리 일행의 도착이 약속시간을 많이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우리들을 맞아주시고 여유있게 관람하시라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신
우종희 선생님^^
낙동서원(洛東書院)
主享(역동 우탁),
配享(불훤재 우현, 적성군 우길생, 양호당 우현보, 월곡 우배선)
4. 중식
우리 답사팀은 상인동 월곡역사공원을 끝으로 오전 일정을 모두 마친다.
점심은 가창의 '황우정'이라는 식당에서 갈비탕으로 든든하게 식사를 마쳤다.
5. 녹동서원(鹿洞書院)
☞ 사성(賜姓) 김해김씨(金海金氏)
☞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 임진왜란때 왜장의 신분으로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에 큰 공을 세우고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
모하당(慕夏堂) 김충선(일본명 沙也可)장군을 모신 서원.
☞ 최근 서원 옆에 새롭게 건립된 '달성한일 우호관'이 있다.
이 지역 지명인 녹동(鹿洞), 백록동(白鹿洞) 등은
사슴을 벗 삼고 지내고자하는 마음에서 모하당이 명명한 고을이름이다.
그 옛날 당나라 이발과 이섭 형제가 흰 사슴을 벗하며 글을 읽었다던 그 '백록동'...
주자의 '백록동서원'...
중국을 사모한다는 의미를 담은 당호(堂號) '慕夏堂'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날 주 답사지였던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일대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우리일행들에게 낯익은 이름들이 많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뒤에 나오는 대로 언급하도록 한다.
녹동서원의 사우(祠宇)인 녹동사(鹿洞祠)에 봉안된 모하당 영정
최근 새롭게 보수공사를 한 탓에 아직은 좀 낯설은 모습이다.
달성군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는 달성 한일우호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의 일대기를 3D 입체영상으로 관람할 수 있다.
녹동서원 방문자들께 꼭 권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소요시간 10여분)
6. 한천서원(한천서원)
☞ 옥천 전씨(沃川 全氏)
☞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871
☞ 팔공산 공수대전에서 왕건을 미복차림으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신숭겸, 김락 등과 함께 동수대전에서 순절한 고려개국공신
충렬공 전이갑(全以甲), 충강공 전의갑(全義甲) 형제를 모신 서원.
한천서원이다.
우리 儒家에서는 '寒泉'하면 떠오는 단어가 있기 마련이다.
주자께서 40세 되는 해,
모친이 돌아가시자 모친의 수묘(守墓)를 위해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세우고 강학 및 연구활동을 하게 된다.
'근사록'이란 책이 바로 이 한천정사에서 주자와 여조겸 선생에 의해 탄생된다.
주자는 '한천정사'의 이름을 후에 '회암(晦庵)'으로 고치게 되고
회암을 자신의 호로 삼게 된다.
강당 앞의 이 바위는 서원 인근의 야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전규열 대구향교 재단이사장님으로부터
거북의 등껍질을 연상케 한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거북바위·구암(龜巖)'로 보아도 무난할 듯 하다.
전규열 대구향교 재단이사장님께서 직접 한천서원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다.
한천서원의 사우 충절사(忠節祠)
충렬공 전이갑(全以甲), 충강공 전의갑(全義甲) 형제를 배향하고 있다.
달성군 보호수인 수령 1,000년의 한천서원 은행나무
아직은 절반의 노란 은행단풍...
대구와 청도의 접경지역인 가창
그래서인지 가창의 산골마을 곳곳에는 감이 붉게 익어가고 있다.
7.박곡서당(璞谷書堂)
☞ 옥산 전씨(玉山 全氏· 옥산은 현 경산의 옛 명칭)
☞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상원리415
☞ 여말선초의 문신인 문평공(文平公) 파계(巴溪) 전백영(全伯英,1345-1412)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추모지소(追慕之所).
전백영 선생은 파계(巴溪)를 호로 삼았다.
오늘 날 우리가 파동(巴洞)이라 부르는 바로 그 '巴' 字이다.
巴 자는 그 글자 모양이 뱀이 땅바닥에 바짝 엎드린 모양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파동, 파잠, 파잠이, 파집, 파계라는 명칭의 여러 유래 중에는
오늘날 중국의 사천성 즉 옛날의 파촉땅에서 그 유래를 찾는 설도 있다.
다시말해 파촉지역을 연상케하는 산세를 지녔다는 뜻이다.
문평공파 전정호 종손을 비롯한 문중 관계자분들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조용한 산골마을 깊은 골에 자리잡은 박곡서당
박(璞)이라 함은 '아직 탁마(琢磨)하지 않은 옥덩이'를 말하니
여기는 옥덩이를 갈고 닦는 탁마지소(琢磨之所)인 셈이다.
8. 무동재(武洞齋)
☞ 옥산 전씨(玉山 全氏)
☞ 대구시 수성구 파동 425
☞ 대구지역에 최초로 성리학의 문을 연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선생 외
옥산 전씨 문중 현조(顯祖) 10여 분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숙지소(齋宿之所)
무릉계곡 내에 있는 무동재 원경
동행하시던 선생님들께서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
"야~~ 이런 곳이 다 있었네!!!"
무동재(武洞齋)라는 재호(齋號)에서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주자의 강학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무동재는 16세기 대구지역에 최초로 성리학의 문을 연 계동 전경창 선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지는 매우 적절한 재호로 보인다.
답사 당일 가을볕이 너무 좋아
무동재 강당의 들어열개문을 들어올렸다.
폐쇄형이던 강당이 어느새 개방형으로 활짝 열리자
우리 일행 중 대학생 한 명이 들어열개문의 기능을 보고는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신기할 수가... 정말 신기합니다..."
무동재는 강당의 대청과 바깥 퇴칸을 개방하니 40-50명은 무난히 수용해낸다.
금번 답사의 하이라이트^^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의 자랑^^ 대학생부원들이 강(講)을 하는 모습이다.
'大學 經一章'을 능숙한 솜씨로 성독을 해낸다.
이제는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가 아니면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광경이다.
현존하는 유림단체로서 20대 젊은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단체는
전국을 통틀어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가 유일하달 수 있다.
또 이렇게 선현유적지 답사에서 20대 초반의 남녀대학생들이
서로 입을 맞춰 경전을 강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는 단체도
우리 대구시청년유도회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의 강이 끝나자 전규열 대구향교 재단이사장님께서 크게 격려를 해주신다.
"저도 과거 서당교육을 받았던 사람의 한사람으로서
사라져가는 우리 儒家의 講이라는 전통을 잘 잇고 있는
대구시청년유도회가 무척 자랑스럽다......"
옥산 全門의 전봉진 선생님 외 함께 자리해주신 옥산전씨 문중의 관계자분들 모두가
무동재에서 울려퍼진 학생들의 경전 성독 소리에 감동을 받으셨음이 분명했다.
학생들의 성독에 지긋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시는 양재 이갑규 선생님
무슨 말씀이 필요하리까??
이 모든 것이 이분의 헌신적인 교육활동에서 비롯하였음을...
(※ 학생들 성독 동영상 촬영하신 분이 몇 분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 카페에 동영상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학생들의 강에 이어 조정숙 여사님께서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암송하시며
경륜 깊은 노익장을 과시하시는데...
무동재를 뒤로 하고 오천서원을 향해 우리 일행은 무릉계곡의 산길을 더 오른다.
9. 오천서원(梧川書院)
☞ 중화 양씨(中和 楊氏)
☞ 대구시 수성구 파동 432
☞ 조선 성종조 문장과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대봉(大峯) 양희지(楊凞止) 선생을 모신 서원.
무동재에서 무릉계곡 오르기를 한 10여분쯤 되었을까?
드디어 좌측으로 오천서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중에 관계자분의 설명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천서원이 원래는 무릉계곡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종때 서원훼철을 피하기 위해 문중에서 야밤에 몰래 건물을 해체하여
무릉계곡 더 깊은 이곳으로 피해 이건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훼철을 피할 수는 없었다고...
오천서원 강당건물 안쪽 상부에는 사진처럼 2개의 중도리 안쪽에
통상의 경우처럼 1개의 종도리가 아닌 2개의 종도리가 있다(사진에서는 나타나지 않음)
새로 중건하면서 옛 종도리와 새 종도리를 함께 짝을 지어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오천서원에는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무릉재(武陵齋)가 있다.
무동재와 마찬가지로 주자의 무이정사를 떠올리게 하는 재호라고 할 수 있다.
중화 楊門의 양표환 선생 외 관계자분들께서 우리 일행을 환대해 주신다.
오천서원의 祠宇인 梧川祠 알묘례
오천서원 옆 중화양씨 시조단(始祖壇)
10. 옻골마을
☞ 경주 최씨
☞ 대구시 동구 둔산동 386
☞ 대암(臺巖) 최동집(崔東집1586-1661) 선생이 터를 잡고
대암의 5세손인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 선생의 유풍이 남아 있는
대구의 대표적 兩班家
금번 답사를 주관하는 집행부의 입장에서 그만 낭패를 보고 말았다.
일정이 너무 지체되어 해질녘이 다 되어서 옻골마을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최진돈 종손 어르신과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으신
이창환 전 대구시청년유도회 회장님께 큰 실례를 범하고 만 것이다.
백불고택 마당에서 동쪽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엔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 밤이었다.
"진짜 대구청유 답사는 명품답사다!! 끝까지 명풍답사!!"
어느 선생님께서 달빛 아래서 조용히 읊조리는 말씀이다.
늦은 시간까지 우리 일행들을 위해 해설을 해주시는 이창환 전 대구시청년유도회 회장님
특유의 해박한 지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오가는 명품해설의 진수를 보여주시는데...
가만 살펴보니 사진 우측 상단으로 보름 달빛이 살짝 보여집니다.
11. 저녁식사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도동 측백수림 바로 앞 백림정 식당에서
한방 오리백숙으로 저녁식사
건배제의 전일주 부회장님^^
대학생부원들^^
하루 전날 성주 나들이 길에서 오늘 답사를 위해 좋은 막걸리를 좀 사셨다면서
맛있는 막걸리 찬조를 해주신 김수우 선생님의 건배제의^^
끝으로 배희구 회장님의 건배사^^
"마! 당! 발!"
마주 앉은 당신의 발전을 위하여~~
이상 끝...
사진: 사무차장 한정호
정리: 사무국장 송은석
사무국장 송은석 頓首
첫댓글 역시 사무국장님의 후기가 제대로 입니다 !
처음으로 함께유적답사한 그날 아주행복했습니다.
잘정리된답사후기글과 사진을보면서 행복했던
어느가을날그시간을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명품답사, 감동답사!! 멋진 표현입니다~^^!!
사무국장님의 깔끔한 답사 후기 정말 짱짱짱입니다 !! 다시 한 번 답사한 날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근데,, 제 이름이 없어요 ㅠㅠㅠㅠㅠㅠ
본 글은 원본이 아니고 스크랩한 글이라서 제가 쓴 글이지만 수정이 안되네요... 두가지 사항 정정합니다. 1. 단양우씨 우희목선생님을 우희묵선생님으로 수정 2. 답사자 명단에 대학생부원 추나진양 추가 .. 참고로 스크랩글은 무슨 연유인지 일부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 댓글란 윗줄에 '출처: 원본보기'를 클릭하시면 정정 및 이미지 복원된 원본 확인 가능합니다...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