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였죠. 2명의 어린 소년들이 우리에게 Pink Floyd의 숙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Pink Floyd의 사인 받기를 몇년동안 고대해 왔다고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나는 Floyd가 이 호텔에 머무르고 있냐고 반문했죠.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길거리에서도 부담없이 거닐 수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믹 재거나 로드 스튜어트처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20년 넘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믹 재거가 60살이 넘어서까지 활발히 활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Pink Floyd는 우리가 70살이 되어서도 건재할 것입니다."
"진보(Progress)란 무엇인가?" 쉽고도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해 열이면 열 모두가 다른 대답을 하겠지만, 적어도 그 단어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서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Rick Wright의 위의 말을 통해서 "진보"적이려고 하는 이들의 중요한 특성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Sigma 6이라는 그룹으로 출발, Pink Floyd의 결성, Syd의 탈퇴, 레이져 쇼, Roger와 다른 멤버들 간의 갈등, 로저의 Berlin Wall live 등 Pink Floyd가 가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수많은 화제거리가 생겨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Art Rock 5 호 전체를 할애하더라도 다 못할 것이다. 그만큼 프로그레시브 락 하면 떠오르는 그룹이 바로 Pink Floyd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떠나게 될 Pink Floyd 시간 여행은 문화적으로는 비틀즈의 등장과 히피즘의 유행으로, 정치적으로는 제 3 세계에 대한 팽창을 목적으로 했던 월남전으로 대변될 수 있는 1960년대의 초반부터 시작된다.
Roger Waters, David Gilmour, Syd Barrett 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기타를 연습하며 알게된다. 64년 로저 워터스는 런던의 Regent Street 건축공예 학교에서 Nick Mason과 Rick Wright를 만나게 되고 이듬해 가을 이들과 함께 Sigma 6 라는 그룹을 결성하는데, 이 그룹에는 Juliette Gale(보컬), Keith Noble(보컬), Clive Metcalf(베이스)가 더 있었다. Sigma 6 는 그 후 T-Set, Meggadeath, Abdabs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활동하는데 그들이 주로 연주한 것은 R & B였다. Abdabs 시절 Keith 와 Clive 가 탈퇴하고, 보컬을 담당하던 Juliette이 Rick과 결혼함으로써 그룹은 해산된다. 그러나 Nick, Rick, Roger 는 재즈 기타리스트 Bob Close와 Roger 의 고교시절 친구인 Syd Barrett를 받아들여 그룹을 5인조로 재편성한다. 그룹의 이름은 미국 조지아주 출신 블루스 연주자 Pink Anderson과 Syd가 즐겨듣던 Floyd Coucil의 첫이름을 따서 Pink Floyd라 지었다. Rolling Stones나 신비주의를 좋아했던 Syd와 달리 Jazz를 좋아했던 Bob은 결국 음악적 취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달도 채 못 되어서 그룹을 탈퇴하고 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알고있는 Pink Floyd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서 첫 멤버들에 대해 간략이 살펴보고 넘어가자.
Roger Keith (Syd) Barrett : 1946년 1월 6일 캠브리지의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남. 어릴적부터 예술적 재능이 탁월했으며, 11살때 그의 부모가 사준 밴조를 1년 후에는 친구들을 통해 기타를 배움. 캠브리지에서 David Gilmour와 음악적 교류를 함께하면서 그로부터 여러가지 기타 주법을 배움. 고등학교 졸업후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고, Roger와 함께 생활하면서 주로 Rolling Stones의 곡들을 연습함.
Richard William Wright : 1945년 7월 28일 런던의 부유층 집안에서 출생. 17살 때 Regent Street 건축학교에서 Roger 와 Nick을 만나 Sigma 6라는 그룹을 결성함.
Nicholas Berkeley Mason : 1945년 1월 27일에 버밍햄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런던의 고급 주택가에서 자람. 피아노와 바이얼린을 배웠지만 드럼을 좋아해서 결국은 모두 포기함.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Regent Street 공예학교에 들어가서 Roger 와 Rick을 만나게 됨.
George Roger Waters : 1944년 9월 5일 캠브리지에서 태어남. Syd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Syd의 2년 선배) 그의 기타공부에 도움을 주기도 함. 60년대 초반 유럽을 강타한 반핵 운동에도 참가해 캠브리지 반핵 집회의 명단에 오름
Pink Floyd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이키델릭 밴드로서였다. Floyd는 매주 일요일 오후 Marquee Club에서 열린 'Spontaneous Underground'라는 코너에 출연했다. 그들이 처음 Marquee에서 연주한것은 1966년 3월 13일인데, 여기에서 Pink Floyd는 유난히 큰 음으로 'Louie Louie', 'Roadrunner'와 Chuck Berry의 곡들을 연주했다. Floyd는 Marquee에서 Peter Janner, Joe Boyd, John Hopkins 등을 만나는데, 이들은 DNA라는 독립 프로덕션을 이끌고 있었다. 이렇다할 아티스트를 찾지 못하던 DNA는 뉴욕에서 돌아온 John Hopkins의 여자 친구가 가져온 Velvet Underground의 테잎을 들어보고 Andy Warhol과 연락을 취해보지만 그는 이미 Velvet의 프로듀스를 다른 이에게 맡긴 상태였다. 맥이 풀려버린 그들이 다음으로 주시한 것은 Pink Floyd였다. John Hopkins가 개최한 한 Workshop 에서 Pink Floyd는 Light Snow - 비록 움직이지 않는 슬라이드 필름을 보여주는 원시적 수준이었지만 - 를 처음 접하게 된다. Nick은 이때의 충격을 이렇게 말한다.
"몇몇 사람이 음악에 맞춰 빛과 영상을 비추긴 했지만, 처음에는 느끼지 못할 정도였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강력해진 그 빛은 음악과 조화를 이루면서, 실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Light Snow는 Floyd의 공연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였고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는 그들의 음악보다도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영국 최초의 언더그라운드 잡지 IT(International Times)의 창간 기념 공연에 Soft Machine(당시의 라인업은 Kevin Ayers, Deavid Allen, Robert Wyatt, Mike Ratledge)과 함께 참가하여 좋은 반응을 얻는다.
1967년 3월 Floyd는 첫 싱글 'Arnold Layne'을 발표하는데, 이 곡은 Syd의 작품으로써 가사의 내용이 여자의 속옷을 훔치는 도둑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 가사가 너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방송국에서는 금지곡이 되기도 한다. 하여튼 Syd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곡이었다. 5월에는 클래식 콘서트 장소로 유명한 Queen Elizabeth Hall에서 "Games For May"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하게 된다. 이 공연에서 Floyd는 영국 최초로 4채널 PA 시스템을 설치하여 입체감을 증폭시켰으며, 화려한 조명장치를 도입한다. 이 공연을 위해 Syd가 쓴 'Games For May'라는 곡은 후에 'See Emily Play'로 제목이 바뀌어 데뷔 앨범에 수록된다.
여름이 되면서 사람들은 Syd에게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DNA 프로덕션의 멤버로서 Floyd의 첫 레코드의 프로듀서를 담당했던 Joe Boyd의 말이다 ; "7월 2일 UFO 클럽에서의 공연이 끝나고 나서입니다. 모두들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Syd와 인사를 나누는데, 이전에 Syd에게서 보였던 반짝거리는 눈빛은 간데가 없고 인사말을 건네어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6월에는 'See Emily Play'가 싱글로 발표되고, 이는 "Record Mirror"챠트에서 7주동안 머무르면서 6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보인다. 8월 5일에는 대망의 데뷔엘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이 영국에서 발매된다. 이 앨범의 제목은 Syd가 Kenneth Graham의 동화 'Wind InThe Willow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앨범을 들어보면 Pink Floyd의 첫 출발은 분명히 사이키델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작품이 애초부터 신비주의와 사이키델릭에 관심이 많았던 Syd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이었다. 11월에는 싱글 'Apples And Oranges/Paint Box'가 발표된다.
Roger 와 Syd가 Pink Floyd를 결성하기 위해 캠브리지를 떠났을 당시 David Gilmour도 Jokers Wild라는 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68년에 들어서면서 Syd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Roger와 다른 멤버들은 Syd에게는 작사만을 맡기고 무대에는 세우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타리스트를 물색하던 중 David에게 그룹에 들어올 것을 권유한다. 결국 마약 복용, 정신이상 등의 소문만 남긴채 Syd는 3월에 그룹을 등지고 만다. 데뷔엘범에서 Syd이외의 멤버는 누구였어도 상관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Floyd의 Syd에 대한 의존도는 컸고, 막상 이러한 순간이 닥치자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6월말에 발매된 두번째 앨범에서 3개의 곡에는 Syd가, 4개의 곡에는 David이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두명의 서로 다른 기타리스트가 혼재된 이 앨범에서 우리는 별다른 차이를 못 느낀다. 적어도 기타 사운드에 있어서는.... David은 캠브리지에서 Syd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에게 기타주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고, Syd는 그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평론가들은 David 의 연주가 Syd를 모방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Syd가 중심이 되었던 1집에서 확연히 나타났던 사이키델릭 지향성은 이 앨범에 와서 많이 약화되었으며, 타이틀 곡 'A Saucerful Of Secrets'는 앞으로 Floyd가 지향할 음악적 방향성이 어떠할 것인가를 예측하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이 곡은 Syd의 도움없이 만든 곡으로 그들은 만족해했고, Syd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된다. 또한 Floyd의 대부분의 자켓과 수많은 Progressive Rock 아티스트의 쟈켓을 담당했던 Design Group "Hipgnosis"가 이 앨범부터 디자인을 담당하게 된다.
69년은 1집과 2집에서 거둔 성과를 토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공연에 할애하는데, 그 와중에도 7월에는 영화 "More"의 사운드 트랙 앨범을 8일만에 완성해내고, 10월에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이전의 최고 걸작이자 2면이 Live로 2면이 Studio 녹음으로 구성된 독특한 앨범 "Ummagumma"를 발표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벌인다.
"ZabriskiePoint"란 영화의 사운드 트랙 중 일부를 담당하는 것으로써 70년대를 연 Floyd는 2만여명이 모인 7월의 런던 하이드 파크 공연에서 색다른 시도를 하게된다. Rick Wright의 Organ 솔로 연주 후에 어디선가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렸고, 관객들은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소리는 테잎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던 것이다. 이는 그 이후의 정황으로 추측하건데 Roger의 시도였음이 틀림없다. 79년에 발표된 "The Wall"의 구상을 이미 이때부터 하고 있었던 것일까? Floyd가 본격적으로 효과음을 도입한 것은 "Ummagumma"에서부터인데, 이는 기존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도였고, Light Snow와 함께 Pink Floyd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손꼽히게 된다. 효과음이 빠진 "The Wall"이나 "The Final Cut"을 상상할 수 있을까?
Floyd는 보통의 아티스트들이 앨범을 발표한 다음 콘서트를 가지는 것과는 달리 앨범 발표 이전부터 앨범 홍보를 위한 대형 콘서트를 열곤 했는데, 미국에서의 Atom Heart Mother Tour와 동시에 5번째 앨범 "Atom Heart Mother"를 공개한다. 한편, 나름대로의 활동을 계속해 오던 비운의 인물 Syd는 1월과 11월에 "The Madcap Laughs"와 "Barrett"을 발표하는데, David와 Rick은 프로듀스 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도 연주해 주는 우정을 보인다. Syd의 두 앨범은 74년 9월에 "Syd Barrett"이라는 타이틀로 재발매된다. 그리고 12월에는 Roger가 "Atom Heart Mother"에서 편곡자 겸 멜로디 작곡가로 참가했었던 Ron Geesin의 도움으로 실험성이 지나치다 못해 장난으로까지 느껴지는 그의 첫 솔로 앨범 "Music From The Body"를 발표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Pink Floyd의 앨범 중에서 두가지 자켓으로 발매되었던 앨범이 있다. Floyd의 초창기 싱글과 미발표곡을 담았던 "Relics"가 바로 그것인데, 하나는 자켓 앞뒤로 흉칙스런 모습을 한 남자와 여자의 탈(혹은 인형) 모양의 쟈켓이고, 또 하나는 Nick Mason의 그림솜씨가 돋보이는 멋진 성의 모습을 한 쟈켓이다. 71년 5월에 공개된 이 앨범에는 이전의 앨범에 수록되지 않았던 Syd의 작곡의 첫 싱글 'Arnold Layne'과 멜로트론을 도입부에 이용한 슬픈 분위기의 미발표곡 'Julia Dream'(68년 녹음)이 수록되어 있다. Pink Floyd와 Mellotron.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어색함이 갑자기 머리를 혼란시킨다. 그러고 보니 Rick 이나 Roger가 Mellotron을 다루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King Crimson과 Genesis가 Prigressive Rock에 있어서 약방의 감초격인 Mello-tron을 즐겨 이용해 왔던 반면, Floyd에게 있어서 멜로트론은 별로 매력없는 장치였던 것 같다.
"Atom Heart Mother"에서 한 면 전체를 타이틀 곡에 할애했던 Floyd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곡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을 느꼈는지 11월에 공개된 "Meddle"에서도 이러한 시도로 20분이 넘는 대곡 'Echoes'를 만드는데, 이 곡은 그들의 Live무대시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정적만이 남아있는 동굴 속 깊은 곳에 고여있는 물 웅덩이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은 작은 파장을 일으키면서,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Floyd가 Rock 계에 남긴 흔적을 대변해 주듯이...우리나라에도 소개된 Floyd의 몇 안되는 Music Video 중의 하나인 "Live At Pompeii"에서 Floyd가 보여주는 'Echoes'의 Live연주는 너무도 진지해서 요즈음의 랩 팬들에게는 지루하기까지 하다. Rick의 말이다 ; "'Echoes'는 무대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었죠. 공연에서도 'Echoes'는 스튜디오 앨범에서와 전혀 다른 것없이 연주되었습니다. 연주하기 어렵지 않은 곡이었거든요."
자, 이제 우리는 72년 2월의 런던 Rainbow Thertre공연에서 Pink Floyd의 또다른 음악적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이 공연에서 Floyd는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Set The Contrls For The Heart Of The Sun', 'Echoes'등과 함께 다음 앨범에 수록될 신곡을 들려주는데, 그 주제의 선정에 있어서 초창기 음악이 지향했던 초감각적이고 우주지향적인 주제보다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의 두려움이나 문제점들에 촛점을 맞춘 것이었다. 6월에는 La Vallee(69년에 발표된 "More"의 영화감독 Barbet Schroeder의 작품)의 음악을 "Obscure By Clouds"라는 이름으로 발표한다.
73년에 들어서면서 Pink Floyd가 처음으로 한 것은 다음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레코딩 세션의 리허설이었다. 3월 24일 많은 화제속에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발표된다. 모든 작사는 Roger가 담당했으며, 작곡에는 멤버 전원이 참여했다. 이 앨범의 제작과정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내용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고, 약 스무명의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심리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주제로 선택한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광기와 두려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방법에 있어서 우리는 이 앨범이 콘서트 앨범이라는 것 이외에는 기존의 앨범과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우리의 꿈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였거든요." 심장의 고동소리, 남자의 비열한 웃음소리와 교차하는 비명소리,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발자국 소리. 이 모든 것이 Floyd가 인간의 소외감, 고독, 광기 등을 나타내기 위해 택했던 소리였다. Floyd의 관심사는 이제 비로소 "인간과 인간사회"가 된다.
Floyd의 무대공연은 더욱 환상적인 빛의 영상과 함께 박진감을 더해갔는데, 귀에 익숙한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으로 시작되었으며,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전곡이 연주되는 동안 스테이지에서는 활주로의 착륙신호가 반짝거리고, Spotlight가 비행기를 찾기 위해 번쩍거린다. 비행기가 나타나 관중위를 날으면서 결국은 무대로 추락하며 화염에 휩싸인다. 관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고, 이어 'Money', 'Us And Them', 'Brain Damage', 'Eclipse'등이 차례로 연주된다. 그해 말 그들의 첫번째, 두번째 LP가 하나로 묶여 "A Nicde Pair"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74년 여름 프랑스와 영국 공연에서 Floyd는 새로운 곡들을 연주하는데, 그것은 'Shine On', 'Wishing You Were Here', 'Raving And Drooling'("Animals"의 'Sheep'), 'Gotta Be Crazy'("Animals"의 'Dogs')등이었다. Floyd는 두드러진 활동없이 몇개의 콘서트만을 진행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티켓을 사기위해 밤을 세워야 했고, 판매후 1시간도 채 안되어서 티켓이 모두 매진되곤 했다. 이 무렵 Floyd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의 솔로활동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지만, 그것은 물론 그들의 해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발표된 2년 후에야 그들의 새 앨범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이 결코 돈 맛을 알거나 자만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Floyd는 예전의 앨범에 그랬던 것처럼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영국에서는 어느 정도 인기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또한 그들은 상업적인 이윤만을 위해서 무리하게 강행하는 투어에는 더더욱 반대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의 상업적 흥행여부는 2차적인 문제였다. 그들은 그 상황에 만족해했으며, 나름대로의 취미도 즐겼다. 75년에 들어서면서 Floyd는 다음 앨범 준비를 위한 레코딩 세션에 들어갔고, 9월에는 그들의 9번째 앨범 "Wish You Were Here"가 발표된다. 그들은 지쳐있었고, 전 앨범의 성공에 대한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받았다. Roger는 좀 색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며, "Shine On You Crazy Diamond"를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다른 곡들을 넣을 것을 제안했다. 또한 'Have A Cigar'에서는 Roy Harper에게 보컬을 요청하기도 한다. 'Shine On You Diamond'는 그들이 Echoes에서 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멤버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연주를 해가면서 고치고 또 고치는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졌다. 이때까지도 Floyd가 Syd를 잊지 못했다는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Shine On You Diamond'의 가사는 그룹을 등진 Syd를 생각하며 쓴 것이었고, 'Wish You Were Here'녹음시 뚱뚱하고, 뭔가 나사가 풀린 듯한 모습으로 찾아온 Syd를 보고 멤버들은 눈물짓기도 했다. 그만큼 Syd는 상징적인 그 무엇으로써 Floyd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76년 겨울 40피트나 되는 거대한 돼지 한마리가 하늘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카메라 맨들은 놀라워하면서 셔터를 눌러댔고, 돼지의 연결선이 끊어지면서 돼지는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돼지를 본 최초의 목격자는 Heathrow공항으로 가던 제트기 조종사였고, 그는 곧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신 그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경찰 헬리콥터가 출동하였지만 5000피트가 넘는 높이로 이미 올라가 버린 돼지는 잡히지 않았고 모든 비행사들에게는 비상이 걸렸다. 결국 돼지는 런던 근교에서 잡히긴 샜지만, 런던의 석간 신문들은 날으는 돼지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다루었다. 많은 이야기꺼리를 남기면서 77년 1월 말 "Animals"를 발표한 Floyd는 독일 공연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과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가진다. "Animals"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을 돼지(자본가, 가진자), 개(정치가, 선동가), 양(무지한 일반대중)에 비유하여, 추악하고 이율배반적인 자본가, 정치가와 잘못된 것에도 복종할 줄밖에 모르는 일반대중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 앨범은 동물을 빗대어 인간을 풍자한 죠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비유되기도 하며, 'Dogs'에서는 개짖는 소리를 표현하는데 신서사이저의 일종인 Vocoder를 사용하여 좋은 효과를 거둔다.
그룹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역할이 너무 커지고, 그럼으로 인해 다른 멤버들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을 많은 사례를 통해서 볼 수 있다. Syd 이후 거의 모든 곡의 작사를 담당했던 Roger는 실질적인 팀의 리더였으며, Pink Floyd의 음악적 방향성을 결정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Roger의 역할은 커졌고, 상대적으로 다른 멤버들은 위축되었다. 이러한 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Floyd의 팬들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의구심은 각 멤버들의 활발한 솔로활동으로 더욱 커가는데, 그 시작은 Nick으로 영국의 펑크그룹 Damned의 두번째 앨범 "Music For Pleasure"와 Gong의 기타리스트였던 Steve Hillage의 "Green"을 프로듀스해주었다. 5월에 David은 그가 Floyd에 가입하기 전에 함께 일했던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데뷔 솔로 앨범을 발표한다. 이 시기에 Rick역시 David과 같은 스튜디오(프랑스의 Super Bear 스튜디오)에서 그의 유일한 솔로앨범 "Wet Dream"을 발표하는데 'Pink's Song'이라는 곡에서는 그의 부인 Juliette Gale(Pink Floyd의 전신 Ab-dabs에서 보컬을 담당하기도 함)도 참여했다.
79년 6월 Pink Floyd는 떠도는 해산설에 대해 일격을 가하기라도 하듯이 그들의 새로운 앨범을 EMI에 넘겨주었다고 발펴했다. 하지만 실제 작업은 11월까지 계속되었고, 그 앨범이 두장으로 나올것인지 세장으로 나올 것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11월 16일 싱글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ll'가 발매되어 영국에서 5일반에 34만장이 팔리고 1주일만에 챠트 1위를 기록하며 플래티늄 디스크가 확실시되었다. 이 곡의 가사중 Islington Green School 의 학생들이 부르는 "We don't need no education"이란 부분은 언론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1월 30일 공개된 70만불의 제작비를 들인 "The Wall"은 미국에서도 앨범, 싱글챠트에서 동시에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지방 방송국에서는 Pink floyd의 콘서트 티켓을 게임의 상품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Animals"에서부터 강도를 높인 Roger의 사회 비판은 그의 자서전적 작품 "The Wall"에 와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서(Midnight Express), Fame등으로 잘 알려진 영화감독 알란 파커에 의해 영화화된 "The Wall"을 보는 것이 필자의 어수룩한 100번의 설명보다 나을 것이다.) 사회적 무관심, 지식만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 전쟁과 허위 등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통해 Floyd는 음악적인 면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정치적인 면에서도 "Progressive"한 그룹이 된다. 이 점이 Floyd를 다른 진보그룹들과 구별짓게 하는 가장 큰 요소이다.
"The Wall"이 표출하고 있는 이러한 주제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현실과도 너무나 들어맞았고, 그러한 이유로 앨범 전체가 금지곡이라는 영광스럼(?)뺏지를 달게 된다. 제 입으로 "우리는 문화 후진국이요"하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파급효과는 위로부터의 억압에 굴하는 법이 없어, 오히려 다운타운가를 중심으로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ll"는 인기를 끌게 된다. 심지어는 Pink Floyd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곡을 듣고는 "아하, 이 노래가 그 사람들 노래야?"하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이 앨범은 우리나라에 불과 몇 년전에야 라이센스화되었다. 이제는 당국도 대중문화를 대중이 판단하여 수용할 수 있도록 생각의 전환을 해야겠다.
세계적인 화제를 뿌리면서, Floyd는 The Wall Concert에 나서게 되는데, 장비 이동 등의 문제로 LA, 뉴욕, 런던에서만 공연을 하게 된다.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에는 약 420개의 인조벽돌로 31피트짜리 벽이 쌓이고, 공연의 막바지에는 "Tear Down The Wall"이라는 외침과 함께 벽은 무너진다. 이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장애와 편견, 허구의 벽도 함께....
그러나 인간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깨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Roger였지만, 그는 자신과 그룹내의 다른 멤버들과의 사이에 존재했던 벽을 허물지는 못했다. "Animals"때부터 약해지기 시작한 Floyd의 일체감은 "The Wall"을 통해 더욱 약해진다. Nick과 Rick은 Roger가 모든 것을 다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David은 "The Wall"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많이했고 단지 Roger의 힘만으로 "The Wall"이 탄생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Rick이 Roger와 사이가 벌어진 것은 "The Wall"을 통해서였다. 그는 Roger의 일방통행에 거부감을 느꼈고, 탈퇴의사를 밝히면서 Wall Tour에는 단순히 세션맨의 자격으로 참여한다 (보수를 받고 참여함). 아이러니컬하게도 Pink Floyd는 공연에서 스펙터클한 무대장식과 거대한 장비의 운송 등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적자를 보았으나 Rick만은 흑자를 보게 된다. 그 후 Rick은 거의 7년동안 은퇴상태에 머물게 된다.
Rick이 빠진 채로 82년 초부터 다음 앨범 "The Final Cut"의 레코딩에 들어간 Floyd는 83년 3월에 이를 발표한다. 제 2차 세계대전시 미 공군 비행사로 참전도중 운명을 달리한 Roger의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만든 이 앨범은 많은 음향효과가 전쟁의 긴박감, 비참함과 황량함을 더해주고 있다. 주제의 선정에서나 전체적인 곡의 구성면에서나 모든 것이 Roger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The Final Cut"을 만들면서 Nick과 David역시 Roger의 독단적인 행동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David은 84년 그의 두번째 솔로 앨범 "About Face"를 발표하고 Roger도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을 발표한다. (새벽 4시 30분 첫 곡으로 시작된 Roger의 이 앨범은 5시 11분 마지막 곡 "The Moment Clarity"로 정확히 끝은 맺는다. Roger다운 발상이라 하겠다.) 데이빗의 앨범이 "Animals"이전의 작품과 비슷한 풍이었던 반면에, Roger의 작품이 그 이후의 작품과 비슷한 구성을 가졌다는 점은 David과 Roger가 이미 회복하기 힘든 관계가 되었음을 나타내기에 더욱 안타깝다. 그 후 86년까지 Pink Floyd는 거의 해산상태에 이르게 된다.
Roger는 대체로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으로 소문이 나있다. Roger와 Floyd의 공연에 모두 참여했던 Tim Renwick은 이렇게 말한다 ; "Roger는 매사에 악착같았고, 모든 일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면서 일을 하죠. 이것이 그를 혼자있게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David의 성격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고, 일은 일을 맡은 사람의 자율성에 맡겨지거든요." Roger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고, 이러한 그의 자세는 가끔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에서 Eric Clapton을 참여시킨 것이 그 예다.
자신은 결코 그룹을 떠나지 않겠다고 Roger에게 말해왔던 David은 그룹활동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The Wall"의 프로듀서였던 Bob Ezrin의 도움으로 Nick과 함께 87년 여름 "A Momentary Laps Of Reason"을 발표한다. Roger는 참여하지 않았고, Roger가 빠진 Floyd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Rick의 복귀였다. 그도 역시 Floyd를 그리워했고, "A Momentary Laps Of Reason"의 레코딩 과정에서 일부의 트랙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앨범의 안쪽 커버에서 단지 David과 Nick의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아직 정식 멤버로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Wall Tour에서 그랬듯이 보수를 받으면서 이 앨범에 참여했다. 이런 과정에서 화가 난 것은 Roger였다. 그는 New Floyd(현재 그룹명의 사용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임을 감안한 것임)를 비난했고, David과 Nick을 상대로 그룹명의 소유권에 대해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이제 Roger와 다른 멤버 사이이 갈등은 더욱 감정적으로 되어갔다. Roger는 비참한 현실로부터 왜곡된 의식을 갖게되는 한 인간이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주제에 있어서는 "The Wall"과 비슷하기도 하다.) 또하나의 문제작 "Radio K. A. O. S"를 발표한다.
88년에 들어서서 New Floyd는 "A Momentary Laps Of Reason"의 수록곡을 중심으로 월드 투어를 시작했고, 그 중 하일라이트가 그해 말 "Delicate Sound Of Thunder"라는 이름으로 발매된다. 공연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그들의 신곡이 소개되었고, 후반부는 우리의 귀에 친숙한 'One Of These Days', 'Time'과 "The Wall"에서 'Comfortably Numb', 'Run Like Hell'을, "Wish You Were Here"에서 타이틀 곡과 'Shinr On You Crazy Diamond'등이 연주되었다.
David은 환상적인 조명과 레이져쇼 등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Roger의 공백을 충분히 메꿀 수 있었으나, 음악적인 면에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그동안의 Roger의 역할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Syd가 그랬듯이 아니 그보다 더.... 'Time'에서는 긴박감이, 'Us And Them'에서는 은은함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의 주관이 지나친 것일까? Roger는 그의 3번째 솔로 앨범 "Amused To Death"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0년 7월 21일, 베를린에는 89년에 이미 철거된 베를린 장벽 대신에 또다른 벽이 세워진다. 동, 서 베를린 시장의 인사말에 이어 MFFDR(Memorial Found For Disaster)을 주관하고 있는 Tino Cheshire의 호루라기소리로 Rock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긋는 The Wall 공연이 시작된다. 역사의 현장에 모인 20만명의 관중들은 통일의 기쁨을 만끽했고, 모든 것은 완벽주의자 Roger Waters에 의해 하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되었다. 이 공연은 사람들로 하여금 'Pink Floyd의 진국은 역시 Roger Waters야!'라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벽이 무너지고, 참여한 모든 멤버들이 Roger의 3번째 앨범의 명곡 'The Tide Is Turning'을 함께 부를 때 관중들은 지난해의 감격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90년대의 활동만을 두고 보자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전해주는 면이나, 활동의 왕성함에 있어서 New Floyd보다는 Roger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다. 92년 Roger는 88년부터 준비해온 그의 4번째 솔로 앨범 "Amused To Death"를 발표한다. 누가 죽음에 닥쳐서 그것에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자신 또는 자신과 관계있는 이들의 죽음 앞에선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걸프전에서 전사한 군인들 - 특히 이라크군에 대해선 - 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앨범을 통해 Roger는 그가 이전에 그래왔듯이 현실을 직시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로 얻어진 결론을 가지고 인간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인간에 대한 편견, 매스미디어와 전쟁과 억압에 대해.... 그러나, Roger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세지를 준다. TV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원숭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다' 이다. 자신의 일일 수도 있는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무관심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단테의 신곡에서)
Roger가 49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창작 의욕에 불타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인간적인 그 무엇을 강조하는 Roger가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탈을 택한 것은 CD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인 메리트 때문일 것이다. CD의 녹음 제한 시간인 73분에 불과 30여초 모자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Roger는 CD의 출현을 반겼을 것이다.
"The Final Cut"발표 당시 팬들은 이것이 그야말로 Pink Floyd로서 발표되는 마지막 앨범이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Pink Floyd라는 이름을 가지고 Roger를 제외한 멤버들이 2매의 앨범을 내면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New Floyd와 Roger와의 재결합을 갈망하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고 마침내 휴전선의 철조망이 거두어지는 그날, 그 역사의 현장에서 Roger, David, Rick, Nick이 다시 모여 The Wall 공연을 하면 어떨까? 3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기와 영합하지 않고 오직 음악 하나에 승부를 걸었던 진정한 Progressive Rock그룹 Pink Floyd의 짧은 소개를 마치면서, 엉뚱한 그러나 Pink Floyd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음직한 생각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