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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분석(亂中日記分析)
◉ 난중일기 분석(亂中日記分析) ◉
☞ 문화재명 : 이 충무공 난중일기 부서간첩 임진장초 (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 지정번호 : 국보 76 호 (지정일 : 1962-12-20)
☞ 소개 :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쓴 일기
☞ 분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 (합 9책)
☞ 시대구분 : 조선 선조
☞ 소재지 :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
☞ 상세설명 : 이 책은 임진왜란(1592∼1598) 때에 李舜臣(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 기로 연도별로 7권이다.
≪ 참고문헌 ≫ 正祖實錄, 李忠武公全書, 난중일기(李殷相 譯註解, 玄岩社, 1968).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소개 : 본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합 9책이다.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白岩里)현충사(懸忠祠)에 소장되어 있다.
(1) 난중일기 :
① 임진일기(壬辰日記) : 27매
② 계사일기(癸巳日記) : 30매
③ 갑오일기(甲午日記) : 52매
④ 병신일기(丙申日記) : 41매
⑤ 정유일기(丁酉日記) : 27매
⑥ 속 정유일기(續丁酉日記) : 20매(겉장이 없고 ‘丁酉’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丁酉에서 戊戌 정초에 이르고 있고 ⑤의 丁酉日記와 중첩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⑦ 무술일기(戊戌日記) : 8매 (총 185매)
(2) 서간첩(書簡帖) : 충무공의 서간집이다.
(3) 임진장초(壬辰狀草 ) : 표지에 ‘임진장초’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오른쪽 위에는 ‘만력 이십년(萬曆二十年)’이라고 써 있으며, 地面에는 여러 곳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인(全羅左道 水軍節度使印)’이라는 朱印이 찍혀 있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7년 동안 이순신이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간직해 온 것이다.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사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 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상세설명 : 이 책은 임진왜란(1592∼1598) 때에 李舜臣(1545∼1598)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연도별로 7권이다.
이순신은 28살 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으나, 불행하게도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실격하였고, 4년 뒤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봉사로 처음 벼슬을 시작했다.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詩)를 짓는데도 특출하였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지내던 때 곧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여수를 중심으로 배를 만들고 군비를 늘리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옥포대첩, 거북선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노량진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대첩 등 곳곳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대첩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지극한 충성심과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 일기의 구성을 보면
◎ 제1권은『임진일기』로 선조 25년(1592) 5월 1일부터 선조 26년(1593) 3월까지 27매,
◎ 제2권은『계사일기』로 선조 26년(1593) 5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30매,
◎ 제3권은『갑오일기』로 선조 27년(1594) 1월 1일부터 7월 28일까지 와
『을미일기』1595.1.1 -1595.12. 20 까지 52매,
◎ 제4권은『병신일기』로 선조 29년(1596) 1월 1일부터 10월 11일까지 41매,
◎ 제5권은『정유일기』로 선조 30년(1597) 4월 1일부터 10월 8일까지 27매,
◎ 제6권은『정유일기속』으로 선조 30년(1597) 8월 4일부터 선조 31년(1598) 1월 4일
까지 20매이나 약간의 중복된 부분이 있다.
◎ 제7권은『무술일기』로 선조 31년(1592)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8매로 구성되어 있다.
7년의 난 동안 이순신의 피와 눈물이 헤아릴 수 없이 배인 것이며,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쓴 것으로,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40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다.
이것은『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내용 중에는 수군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당시 군사제도에 대해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2. 난중일기(亂中日記)의 내용
☞ 진중에서 6년 9개월간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 본.
◉ 임진년 (선조 25년 : 서기 1592년(48세)) 1592년 1월 1일 ∼ 8월 27일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신묘 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한 충무공은 미구에 왜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좌수영 관할 아래 모든 군사를 훈련시키고 장비도 보강 하는
등 온갖 방비를 주력하였다. 임진년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 시범 항해를 하자 하루 뒤인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공은 전선 24척을 모아 5월 4일 출동하여 5월 7일 제1차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데 이어 5 월 29일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하고 6월 2일 당포에서 승첩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당포해전 이었다. 그리고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제3차 한산도 대첩을 거둔 후 9월 1일 부산 앞바다에서 제4차 부산 대 승첩을 거두어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 계사년 (선조 26년 : 서기 1593년(49세)) 1593년 2월 1일 ∼ 9월 14일
계사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자기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던 공은 7월 15일 여수 좌수영 본영을 그대로 둔 채 전투 본부를 거제 한산도 진으로 옮겨 왜적을 무찌를 준비를 하였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8월 15일 공을 임명하여 삼도수군을 통괄하는 한편 전라좌수사까지 겸임하게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공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무에 정진, 수 만석의 군량을 확보하고 전선을 만들었으며 각종 무기를 준비하였다.
◉ 갑오년 (선조 27년 : 서기 1594년(50세)) 1594년 1월 1일 ∼ 11월 28일
명나라 장수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고 싸움을 피하려고만 하였다. 3월에 명나라 지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고, 공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까지 하였다. 전염병으로 10여일을 앓는 등 자주 아팠으나 군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전염병으로 죽은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고 또 글(제문)을 지어 위로해 주었다. 10월에는 장문포의 왜군을 수륙 연합으로 협공하여 승리하였다.
◉ 을미년 (선조 28년 : 서기 1595년(51세) 1595년 1월 1일 ∼ 12월 20일
나라는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공은 한산도 진에서 항상 바쁘게 생활했다. 군량을 준비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며 전선을 정비하였다.
◉ 병신년 (선조 29년 : 서기 1596년(52세)) 1596년 1월 1일 ∼ 10월 11일
전쟁 중에도 공은 항상 어머님을 잊지 못하였다. 일기 도처에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나타나 있으며, 휴전중의 말미를 이용하여 잠깐 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면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였다. 병신년은 어머님이 82세 되시던 해로 10월 7일에 본영(여수)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모자가 만난 마지막 기회였던 것이다.
◉ 정유년 (선조 30년 : 서기 1597년(53세)) 1597년 4월 1일 ∼ 12월 30일
왜와의 화의가 깨어지자 왜적은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정월 선조대왕은 공에게 출병할 것을 명하였으나 일본 측의 간계를 꿰뚫어 본 이순신은 본영을 벗어나 함부로 출동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옥에 갇히고, 노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고음천(여천)으로부터 고향 아산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별세하였다. 28일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종군이 되어 나온 공은 아산에 가서 어머님의 영구만을 보고 치상도 끝내지 못한 채 전쟁터에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삼도수군은 전멸하였고,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공은 9월 16일 패잔 전함 12척으로 왜적 대 함대 133척을 무찔렀으니 이것이 저 유명한 명량 대 해전이다. 그러나 10월 10일 셋째 아들 면의 부음을 듣고 공은 비통함에 잠긴다.
◉ 무술년 (선조 31년 : 서기 1598년(54세)) 1598년 1월 1일 ∼ 11월 17일
임진란 이래 7년의 긴 전쟁은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갔으며 충무공에게는 최후의 전장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7월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결성한 우리 수군은 11월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순천 소서행장의 군대를 공격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 전투가 저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때 공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니 공의 나이 겨우 54세로 마침내 충무공은 자기의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 부언설명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전쟁 중에 쓴 일기. 7책. 부록 1책. 빠진 부분도 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1592)로부터 끝나던 해(1598)까지의 일을 간결·명료하게 기록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전적(典籍)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은 일기와 서간첩 및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다.
【친필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본】 난중일기에는 두 가지 전적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이충무공의 친필 초고 본으로 충남 아산(牙山)의 현충사(顯忠祠)에 보관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있다. 본래 충무공은 다만 일기를 썼을 뿐,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였던 것은 아니며 정조 때에 이르러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권5에서 권8에 걸쳐 수록한 다음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정조 19)에 완성되었는데, 그 편찬 작업은 윤행임(尹行恁)과 유득공(柳得恭)이 맡아 하였다. 그런데 충무공의 친필 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까닭은 전서의 편찬자들이 충무공의 친필 초고를 가져다가 정자로 베껴 판각에 올릴 때에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 정작 충무공의 친필 초고 본에는 빠진 부분도 있다.
즉, 임진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 그리고 을미년(乙未年) 1년 동안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가 누락되었는데, 이것은 필경 편찬 작업 과정이나 아니면 그 후에 유실된 것 같다. 친필 초고 본은 별책 부록까지 합하여 8책에 이르며, 제5책과 제6책은 두 책이 모두 정유년(丁酉年) 일기여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가 중복되어 있다. 그 까닭은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제5책에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곳이 많고, 또 내용을 보아도 제6책의 것이 비교적 자세하게 적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나중에 충무공이 시간 여유를 틈타 앞의 간지의 잘못을 바로잡는 한편 기억을 더듬어 보완하였던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내용】 국난을 극복해낸 수군사령관으로서 충무공의 엄격하고도 지적인 진중생활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유비무환의 진중생활, 인간 이순신의 적나라한 모습과 생각, 부하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 부하에 대한 사심 없는 상벌의 원칙, 국정에 대한 솔직한 간언, 군사행동에 있어서의 비밀 엄수, 전투상황의 정확한 기록, 가족·친지 ·부하장졸·내외 요인들의 내왕 관계, 정치·군사에 관한 서신교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가치】 첫째,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일기로서, 전란(戰亂) 전반을 살피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와 나라의 위급을 구해낸 영웅(英雄)의 인간상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생사를 걸고 싸우던 당시의 진중일기(陣中日記)로서 그 생생함이 더욱 돋보이며 단순한 전쟁사 이상의 가치가 있다.
셋째, 그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여러 부문에 걸친 측면사와, 특히 수군(水軍)의 연구에 도움을 준다.
넷째, 충무공의 꾸밈없는 충(忠) ·효(孝) ·의(義) ·신(信)을 보여주는 글이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다섯째, 무인(武人)의 글답게 간결하고도 진실성이 넘치는 문장과 함께 그 인품을 짐작케 하는 웅혼(雄渾)한 필치는 예술품으로서도 뛰어나다.
【소감 】<난중일기>는 ‘성웅聖雄 李舜臣’이 아닌 ‘인간 李舜臣’을 만나게 하는 책이다. 거기에 이 책의 참 의미가 있다.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은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 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을까?
<난중일기> 하면 누구나 기대하는 것이 익히 들은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일기는 그 전쟁 상황을 얼마나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을까? 그러나 <난중일기> 속 해전은 대개 생략되어 있거나 너무나 간략하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큰 싸움을 앞둔 장수에게 일기를 자세히 쓸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 난중일기>는 주요 해전 부분 일기가 오랜 기간 빠져 있는 부분에 이순신의 장계를 넣었다. 왕께 올린 이순신의 장계에는 각 싸움의 시작과 진행 상황,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와 잘못을 한 이, 적의 움직임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3. 난중일기 가치
(1) 사료(史料)
첫 번째 가치는 史料이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일기로서 전란 전반을 살피는 史料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상뿐 아니라 조선 수군 연구와 전략 전술에 대한 기록이다. 중앙과 감영 수영 읍진을 잇는 통치 체계, 체찰사(고려 말, 조선시대의 전시 총사령관). 순찰사(조선시대 전시에 두었던 무관직). 순변사(조선시대 변방의 군사와 정무를 돌아보고 조사하기 위해 임금의 명을 받아 파견된 특사. 주로 공문 등을 전달하는 우역(郵驛)이나 지방민들의 생활상, 그리고 농사의 잘되고 못된 형편을 살피는 농형(農形)과 변방의 군정실태 등 변방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는 일을 맡아보았다.) 수사, 만호 등의 군령 체계, 그 밖에 각종 어사, 선전관(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다.)의금부도사 등 중앙 관리가 파견되어 통제하는 실상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통해 당시 국방 운영 체계와 그러한 일을 책임진 유성룡. 이원익. 이수광. 유몽인. 윤두수. 남이공. 박홍로 등의 전쟁 중 활동도 볼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반 병사의 활동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수군 자체가 천한 역이었듯이 병사들은 천민이 많았다. 거북선을 만들거나 활, 화살, 총포 등 군기를 만들던 장인들의 활동, 심지어 그가 고심하여 잠 못 이룰 때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어 주면서 위로하였던 부하들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관직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참여한 의병들도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시대 천대받던 승려들이 만든 의병 부대(승장 삼혜와 의능) 그리고 성응지 등 여러 의병 부대가 나온다. 또 군량을 조달하거나 둔전을 경영하는 등 수영의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전쟁을 치르려면 재정이 필요하고 특히 백성들을 진정시키려면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줘야 했던 것이다. 둔전은 이런 점에서 매우 필요하였다. 같은 이유로 바다에서 전복이나 미역을 따고 생선을 잡는 일 등도 매우 중요하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2) 문학성(文學性)
두 번째 가치는 문학성이다. 이순신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한 면모는 <난중일기> 속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일기는 진중 생활 중 때때로 수루에서 달빛을 즐기거나 홀로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1593년 7월 15일 일기를 보면,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져서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덧 닭이 울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 1595년 9월 14일에는 함경도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선 수사에게 선사한 시를 보면 이러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北去同勤苦 南來共死生)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一杯今夜月 明日別離情)” 굳이 한산도 제승당 수루 현판에 걸려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하는 시를 읊지 않아도 간결하고 서정성 넘치는 그의 일기는 충분히 문학적 예술적이다.
(3) 이순신(李舜臣)
세 번째 가치는 이순신 그 자신이다. 이 책이 갖는 최고의 가치는 역시, ‘이순신이 쓴 이순신의 일기’라는 점이다. 영웅으로 또는 남들보다 조금 더 자의식 강한 인간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그 시작은 <난중일기>다. 난중일기가 주목하는 이순신은 ‘인간’이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꿈에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떠나 보내놓고 걱정스러워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린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 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다. <난중일기> 속에는 그러한 이순신의 여러 모습이 여실하게 담겨 있다.
진중에서 이순신은 늘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이순신은 1593년 5월 초4일 일기에“오늘은 어머니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모함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풀려나와 백의종군 중 어머니 상을 당한 1597년 4월 19일의 일기는 이러하다. (어머니는 4월 13일 별세)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니 강정(姜晶) · 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 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면·울(蔚), 조카 해·분(芬)·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 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아들과 조카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늘 염려하고 따스하게 보살폈다. 또 그의 병사나 동료 궁핍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596년 1월 23일 일기,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1597년 5월 13일 일기, “이종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하는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에게 이렇게 자상한 면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병사가 백성의 것을 훔쳐 먹었을 때는 엄하게 벌하고 대신 갚아 주기도 하는 철저한 조선의 관리이기도 했다. 또 진중 생활을 하는 가운데 종종 점을 치기도 한다. 아마도 힘들고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위로받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아들 면의 아프다는 소식에 점을 치고는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거나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라는 괘를 얻고는 좋아했다. 전쟁의 상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이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꿈을 꾸고는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는 것은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풀이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못마땅해 하거나 부하들이 다른 장수를 흉보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으며,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可笑(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싸움에 임했을 때의 이순신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 4월 임란 전에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그는 방어용 성과 못 그리고 봉수대 등을 수리하고, 전라좌도에 속한 녹도 발포 흥양 여도 방답 등 다섯 진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병선과 무기를 점검하였다. 군사 훈련도 철저히 하여 특별히 날씨가 나쁠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군관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4. 일반사항
(1)난중일기’는 충무공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7년간 진중의 안팎에서 있었던 일을 날씨와 함께 꼼꼼히 기록한 일기다. 글은 무뚝뚝하기 짝이 없다. 짧은 문장들은 감정 개입 없이 사실만 기록해 나간다.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날도 일기는 거르는 법이 없다.
좀체 흔들림 없던 그도 아군의 배가 좌초되어 습격 받은 날엔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고 적었다. 원균이 나오는 기사에는 온통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하는 짓이 흉측하기 짝이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옷이 다 젖도록 식은땀을 흘렸다”는 대목도 계속 보인다.
그는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싸우고 자신과도 싸웠다. 멀리 계신 노모를 걱정하는 내용은 민망하리만큼 많이 나온다. 꿈 이야기도 자주 보인다. 꿈에 자신을 괴롭히던 이일을 만나 호통 치며 나무라기도 하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왜적과 싸울 계책을 일러주기도 한다. 막내아들 면이 왜적에게 죽던 날 일기의 꿈 이야기는 가슴이 떨릴 만큼 슬프다.
읽다 보면 전쟁 장면이 눈앞에 생생히 되살아난다. 역사와 허구를 견주어 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부거리다. 기록이 왜 중요한지, 일기는 왜 써야 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읽다 보면 다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만행도, 뒷짐 진 채 딴청만 하는 명군의 오만한 작태도 힘없는 나라의 백성이 얼마나 처참하게 되는지도 다 알 수 있다.
(2) 난중일기는 충무공 전사 후 어떻게 전해져 내려왔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확실한 답은 없다. 일단 이순신의 죽음 설에 의견이 분분하고 그의 장례시기와 이장도 여러 번이라 확실한 답은 없다. 난중일기는 현재도 이순신의 초서체인 초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에게 뺏기지 않은 거 같고, 조선 정조 때 이순신의 초본을 간행한 일이 있으며 일제시대 일본인에게도 간행된 적이 있다. 두 간행 모두 초본의 어려운 해석에 각기 다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3)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
☞ 1598년 11월 19일 새벽 사망(?)추정. 60일 동안 아산에 가매장했다고 해도. 의문이 있는 부분. 자세한 기록이 없음.
☞ 1599년 01월 23일 이순신 사망 선조에게 알려짐. 한 달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음.
☞ 1599년 02월 11일 장례(충청남도 아산 금성산 아래 안장함)
☞ 1604년 10월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됨.
☞ 1614년 다시 한번 장례(충청남도 아산시 음보면 어라산 아래로 이장함) 왜 재차 이장
되었는지?
☞ 1643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음.
☞ 1706년 충청남도 아산에 현충사 건립.
☞ 1793년 영의정에 추증됨.
☞ 1795년《이충무공전서》완성. 규장각 문신 윤행임에 의해 편찬 간행 됨.
☞ 1999년 2월 충청남도 아산시 빙항산에 이장.
그 후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가 다시 빙항산 현 위치로.
(4) 이충무공전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면;
1795년(정조 19)에 완성되었는데 그 편찬 작업은 윤행임(尹行恁)과 유득공(柳得恭)이 맡아 했다. 그런데 친필 초고본과 《이충무공전서》의 내용은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까닭은 전서의 편찬자들이 친필 초고를 가져다가 정자로 베껴 판각에 올릴 때에 생략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 친필 초고 본에는 빠진 부분도 있다.
그 빠진 부분이라면 임진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 그리고 을미년(乙未年) 1년 동안과 무술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가 없다. 이것은 편찬 작업과정이나 아니면 그 후에 잃어버린 것 같다. 친필 초고 본은 별책 부록까지 합하여 8책에 인데, 제5책과 제6책 두 책이 모두 정유년(丁酉年) 일기여서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가 중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제5책에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곳이 많고 내용도 제6책이 더 자세하게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나중에 충무공이 시간 여유를 틈타 앞의 간지의 잘못을 바로잡는 한편 기억을 더듬어 보완하였던 것이 아닌 가 추측된다.
5. 난중일기 예문
난중일기의 예문을 통하여 그의 충성심 효심 유비무환의 진중생활 엄격함 그리고 부하와 백성을 사랑한 인간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 1592년 1월 16일 [양력 2월 28일]<정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와 색리(고을의 아전) 등이 인사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을 맡은 군관들과 색리들이 그들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곤장을 쳤다. 우후(지방 병마사영이나 수영에 첨사아래에 있는 무관)·가수(假守: 임시 직원)도 역시 점검하지 않아 이 지경에까지 된 것이니 해괴하기 짝이 없다. 공무를 허술하게 여기고, 제 몸만 살찌려 들며 이와 같이 돌보지 않으니 앞날의 일을 알만하다. 성 밑에 사는 박몽세(朴夢世)는 석수인데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서 해를 끼치고 이웃집 개에게까지 피해를 입혔으므로 곤장 여든 대를 쳤다.
◉ 1592년 2월 초1일 [양력 3월 14일]<임진>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가랑비가 잠간 뿌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선창(여수시 연등동 입구)으로 나가 쓸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때마침 방천 안에 몽어 떼가 밀려들어 왔기로 그물을 쳐서 이천 마리를 잡았다. 참으로 장쾌했다. 그 길로 전선 위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우후 이몽구(李夢龜)와 함께 새 봄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 1592년 2월 초8일 [양력 3월 21일]<기해>
맑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이 날 거북함에 쓸 돛베 스물아홉 필을 받았다. 정오에 활을 쏘는데 조이립(趙而立)과 변존서(卞存緖)가 자웅을 다투다가 조이립이 이기지 못했다. 우후가 방답에서 돌아와 방답 첨사가 방비에 온 정성을 다하더라고 매우 칭찬했다. 동헌 뜰에 돌기둥 화대를 세웠다.
◉ 1592년 3월 초5일 [양력 4월 16일]<을축>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군관들은 활을 쏘았다. 저물녘에 서울 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이 책을 보니 수전·육전·화공전 등 모든 싸움의 전술을 낱낱이 설명했는데 참으로 만고의 훌륭한 책이다.
◉ 1592년 4월 초1일 [양력 5월 11일]<경인> 흐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공무를 본 뒤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별조방을 점검했다.
◉ 1592년 4월 15일 [양력 5월 25일]<갑진> 맑다.
나라제삿날(成宗 恭惠王后 韓氏 祭日)임에도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 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왜선 아흔 여 척이 와서 부산 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병마사(최원)·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 1592년 4월 16일 [양력 5월 26일]<을사>
밤 열 시쯤에 영남우수사(원균)의 공문이 왔다.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 즉시로 장계를 올리고 또 삼도에 공문을 보냈다.
◉ 1592년 4월 17일 [양력 5월 27일]<병오> 흐리고 비 오더니 저녁나절에 맑았다.
영남 우 병마사(김성일)에게서 공문이 왔다.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에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한다. 저녁나절에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번을 그대로 서는 수군(仍番=上番)과 번을 새로 드는 수군(奔番=下番)이 잇달아 방비 처로 왔다.
◉ 1592년 4월 27일 [양력 6월 6일]<병진>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 (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 “‘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를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 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 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 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 올렸다.
◉ 1592년 5월 초4일 [양력 6월 13일]<계해> 맑다.
먼동이 틀 때에 출항했다. 곧바로 미조항(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앞바다에 이르러 다시 약속했다. 우척후 · 우부장 · 중부장 · 후부장 등은 오른편에서 개이도(여천군 화정면 개도)로 들어가서 찾아 치게 하고 나머지 대장선들은 아울러 평산포· 곡포 · 상주포 · 미조항을 지나갔다.(이 뒤로 28일까지 빠짐)
◉ 1592년 6월 초2일 [양력 7월 10일]<경인> 맑다.
아침에 떠나 곧장 당포 선창(船倉)에 이르니 적선 스무여 척이 줄지어 머물러 있다. 둘러싸고 싸우는데 적선 중에 큰 배 한 척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다. 배위에 다락이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은 되겠고 그 누각 위에는 왜장이 떡 버티고 우뚝 앉아 끄덕도 아니 하였다. 또 편전과 대·중·승자 총통으로 비 오듯 마구 쏘아대니 적장이 화살을 맞고 떨어졌다. 그러자 왜적들은 한꺼번에 놀라 흩어 졌다. 여러 장졸이 일제히 모여들어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자가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모조리 섬멸하고 한 놈도 남겨두지 않았다. 얼마 뒤에 왜놈의 큰 배 스무 여 척이 부산에서부터 깔려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서는 개도(介島: 통영시 산양면 추도 싸리섬)로 뺑소니치며 들어가 버렸다.
◉ 1592년 7월 초8일 [양력 8월 14일]<을축>
<장계에서> 이른 아침에 적선이 머물러 있는 곳(견내량)으로 항해했다. 한 바다에 이르러 바라보니 왜의 대선 한 척과 중선 한 척이 선봉으로 나와서 우리 함대를 몰래 보고서는 도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 척과 중선 스물 네 척, 소선 열세 척(모두 일흔세 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은 서로 부닥치게 될 것 같아서 싸움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뭍으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먼저 나온 적을 뒤쫓아서 엄습할 기세를 보이게 하니, 적선들이 일시에 돛을 올려서 쫓아 나오므로 우리 배는 거짓으로 물러나면서 돌아 나오자, 왜적들도 따라 나왔다. 그때야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학익진’을 펼쳐 일시에 진격하여 각각 지자·현자·승자 등의 총통들을 쏘아서 먼저 두세 척을 깨뜨리자 여러 배의 왜적들은 사기가 꺾이어 물러나므로 여러 장수와 군사와 관리들이 승리한 기세로 흥분하며 앞 다투어 돌진하면서 화살과 화전을 잇달아 쏘아대니, 그 형세가 마치 바람 같고 우레 같아 적의 배를 불태우고 적을 사살하기를 일시에 다 해치워 버렸다. 순천부사 권준(權俊)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도 먼저 돌진하여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쏘아 맞혀서 내 배로 묶어 왔는데, 문초하기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중상이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즉시 목을 베었으며, 다른 왜적을 비롯하여 머리 열두 급을 베고, 우리나라 사람 한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사도첨사 김완(金浣)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여섯 급을 베었고,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이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덟 급을 베고 또 많이 익사시켰다.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네 급을 베었는데 다만 사살하기에만 힘쓰고 머리를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두 척을 쫓아가서 쳐부수어 일시에 불태웠다. 좌 돌격장 급제 이기남(李奇男)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좌 별도장 본영 군관 전 만호 윤사공(尹思恭)과 가안책(賈安策) 등은 층각선 두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여섯 급을 베었다. 낙안군수 신호(申浩)는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일곱 급을 베었으며, 녹도만호 정 운(鄭運)은 층각대선 두 척을 총통으로 뚫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불태우고 머리 세 급을 베고 우리 라 사람 두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은 왜 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머리 세 급을 베었고,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은 층각선 한 척을 쳐부수자 여러 전선이 협공하여 힘을 모아 불태우고 머리 두 급을 베었다. 우별도장 전만호 송응민(宋應珉)은 머리 두 급을 베었고, 흥양 통장 전 현감 최천보(崔 天寶)는 머리 세 급을 베었고,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는 머리 한 급을 베었고, 우 돌격장 급제 박이량(朴以良)은 머리 한 급을 베었고, 내가 타고 있는 배에서 머리 다섯 급을 베었고, 유군일령장 손윤문(孫允文)은 왜의 소선 두 척에 총을 쏘고 산 위 에까지 추격하였으며, 오령장 전 봉사 최도전(崔道傳)은 우리나라 소년 세 명을 산 채로 빼앗았다. 그 나머지의 왜 대선 스무 척 중선 열일곱 척 소선 다섯 척 등은 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사백 여 명은 형세가 아주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한 척·중선 일곱 척·소선 여섯 척(모두 열네 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격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 1593년 5월 초7일 [양력 6월 5일]<경신>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앉아 공무를 본 뒤에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 했다. 순천의 이방(吏房)에게는 입대에 관한 일을 태만히 한 죄를 처형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미조항에 이르자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 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고 잤다.
◉ 1593년 5월 18일 [양력 6월 16일]<신미>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와 가리포 첨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종 목년(木年)이 게바우개(蟹浦: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이 날 접반사에게 적세에 관한 공문을 삼도에 한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 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방답 첨사가 와서 봤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새로 협선 두 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 1593년 7월 28일 [양력 8월 24일]<경진> 맑다.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고쳤다. 경상우수사(원균) 및 충청수사(정걸)와 본도우수사(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그러니 수사 원균(元均)의 나쁜 마음과 간악한 속임수는 아주 형편이 없다. 정여흥(鄭汝興)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 앞으로 갔다.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보자기 열 명이 왜놈 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 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고 했다. 곤장만 쳐서 놓아 줬다.
◉ 1594년 1월 11일 [양력 3월 2일]<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보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南宜吉)·윤사행(尹士行)·조카 분(芬)이 함께 가서 어머니 앞에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며 일어나지 않으셨다. 화가 나서 소리 내는 바람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다. 기력은 약하고 숨이 금방 넘어갈듯 깔딱거려 죽을 때가 가까워 진 것 같아 감추는 눈물이 절로 내렸다. 말씀하시는 대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날 저녁에 손수약(孫守約)의 아내가 죽었다는 부음(訃音)을 들었다.
◉ 1594년 1월 12일 [양력 3월 3일]<신묘>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떠나는 뜻이 싫어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船倉)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 1594년 7월 13일 [양력 8월 28일]<기축>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떨까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 보았더니 임금을 만나 보는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다시 짚으니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다 좋았다. 마음이 좀 놓인다. 또 류 정승의 점을 치니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의심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무척 좋았다. 저녁내 비가 내리는데 홀로 앉아 있는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저녁나절에 송전(宋筌)이 돌아가는데 소금 한 휘를 주어 보냈다. 오후에 마량첨사와 순천이 와서 보고 어두워서 되돌아갔다. 비가 올 것인가 개일 것인가를 점쳤더니 점은 뱀이 독을 뿜어내는 것과 같은 괘가 나왔다. 앞으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니 농사일이 염려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초저녁에 발포 탐후선이 편지를 받아 가지고 돌아갔다.
◉ 1594년 10월 초4일 [양력 11월 15일]<무신> 맑다.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육군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貂皮: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 1595년 1월 초1일 [양력 2월 9일]<갑술> 맑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 도 몰랐다. 또 나이 여든이나 되신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들과 여러 색리·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세배를 했다. 원전(元琠)·윤언심(尹彦諶)·고경운(高景雲) 등이 와서 봤다. 여러 색리와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 1595년 5월 초4일 [양력 6월 11일]<병자> 맑다.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다. 몸소 나아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멀리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녁나절에 활 열다섯 순을 쏘았다. 해남현감이 아뢰고 돌아갔다. 아들 편지를 보니 "요동의 왕작덕(王爵德)이 (고려)왕씨의 후예로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고 했다. 참으로 놀랄 일이다.
◉ 1595년 7월 초1일 [양력 8월 6일]<임신>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제삿날(仁宗의 祭祀)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만한 기둥 같은 인재(棟樑)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柱石)이 없으니 모르겠다.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워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하였다.
◉ 1596년 윤 8월 초1일 [양력 9월 22일]<을축> 맑다.
일식(日蝕)을 했다. 이른 아침에 비망(飛望) 밑에 이르러 이곤변(李鯤變) 등과 함께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저물어서 진중에 이르니 우수사·경상수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 1596년 10월 3일 [양력 11월 22일]<병인> 맑다.
배를 돌려 어머니를 모시고 일행과 더불어 배를 타고 본영(여수)으로 돌아와 종일토록 즐거이 뫼시었다. 이 날도 다 갔는데 흥양 현감이 술을 가지고 왔다.
◉ 1597년 4월 초1일 [양력 5월 16일]<신유> 맑음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 (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鄭琢)·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정형(李廷馨)·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 1597년 4월 13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 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 (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다."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 1597년 4월 16일 [양력 5월 31일]<병자>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 1597년 4월 17일 [양력 6월 1일]<정축> 맑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친다.
◉ 1597년 4월 18일 [양력 6월 2일]<무인> 종일 비가 내렸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今守)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저녁나절에 계원들 중에서 나 있은 곳에 모여 와서 곗일을 논의하고서 헤어졌다.
◉ 1597년 4월 19일 [양력 6월 3일]<기묘>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니 강정(姜晶)·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 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길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면·울(蔚), 조카 해·분(芬)·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 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 1597년 9월 16일 [양력 10월 26일]<갑진> 맑다.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 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이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면서 "적이 비록 천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것 같아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 조항첨사 김응함(金應陷)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위에 서서 몸소 안위(安衛)를 불러 이르되,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安衛)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金應陷)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安衛)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다투었다. 안위(安衛)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 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 안위(安衛)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 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 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고 하였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총통·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 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 1598년 10월 초6일 [양력 11월 4일]<무오>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는데 "제독 유정(劉綎)이 달아나려 했다."고 하니 참으로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지!
◉ 1598년 10월 초7일 [양력 11월 5일]<기미> 맑다. - ** 마지막 일기임 ** -
아침에 송한련(宋漢連)이 군량 넷· 조 하나· 기름 다섯 되· 꿀 석 되를 바쳤다. 김태정(金太丁)은 쌀 두 섬 한 말을 바쳤다.
◉ (** 날짜 없음)
군사에 관한 일. 이 달(10월) 3일 오늘밤이 조류가 이로워 싸움을 하겠다고 총병 유정(劉綎)에게 서신으로 허가를 받았다. 주 되는 일 즉 각 장수를 통솔하여 전함을 전진시키는 것은 각 고을의 군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제 몸을 돌보지 않고서 곧장 왜적선에 쳐 들어가 불태웠다. 10여 척을 끌어내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를 쏘았다. 한창 격렬히 벌어진 싸움을 생각하니 마침 조수(潮水)가 막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주 되는 일이 곧장 손짓하여 병사들을 거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앞에 있는 배들은 고함소리를 질러 하늘에까지 시끄럽도록 하였지만 포성(砲聲)은 우레 같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여 사선(沙船) 19척과 병사를 모은 뒤, 무서운 것은 왜놈들에게 빼앗기는 것인데 장수가 탈 배와 아울러 화약(火藥)으로 스스로 불을 내어 불타버렸다. 해당 진에서는 왜적을 사로잡기도 하고 진에서 눈을 잃은 병사를 빼고는 훤히 조사하여 보고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잔船) 9척 (모두 126척) 끝.
** 난중일기 例文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