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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 풍
글/리 태 근
기막힌 일이였다. 하루 아침에 자그만치 사십호도 안되는 동네 에서 여섯호가 집단 이사를 떠난다고 이사짐을 수레에 싣고 나섰다. 온 동네가 포격맞은 전쟁터라고 할가 모두들 반세기나 함께 살아온 정을 두고 어딜 가느냐 몰인정 하다고 쌀되박이며 옷고름 끝에 달달 숨겨 두었던 꼬깃꼬깃한 옆전들을 떠나가는 아낙네들의 손에 꼭 쥐여주며 언제라도 좋으니 살다가 맘에 안들면 돌아오라고 눈물뿌리며 리별을 호소한다.
나는 그만 억이 막혀서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것도 내가 정간 (精简) 맞 아 내려와서 정치대장을 맡은 첫 해에 이런 비극이 일어났으니 울지도 웃지도 못할 귀신이 곡할 일이 생겨났다. 내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 나자면 이번 이사풍부터 무존건 막아야 한다. 이사가는 고장이 작으만치 천리도 넘는 만주리벌 료녕성 영구인데 그곳은 수수댕이로 흙을 버무려 집기둥을 만드는 고장이라 나무는 보고 죽자고 해도 없는 고장 이라고 벌써부터 누군가 밤새 마구잡이로 달려 들어 생산대 창고까지 허물어서 싣고 간다고 이사짐을 짜 놓았다. 해방된지 반세 기만에 끌끌한 로력이 10여명이나 빠진다는게 장난이 아니였다.
나는 천방백계로 이사풍을 막아 보려고 젖먹던 힘을 다 하였는데 역부족 이였다. 밤마다 대채를 따라배우라는 인민일보 사론을 학습시키 면서 그옛날 대 채를 버리고 떠 나던 사람들이 대채가 가난해서 돌아서서 오좀도 싸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떠났던 사람들이 대채가 몰라보게 변하니 너도 나도 되돌아 오겠다고 울며 불며 받아달라고 애걸복걸 한다는 생동한 기사를 비유하면서 마치도 와룡8대의 행복한 래일이 당장 눈앞에 펼쳐지기나 한것처럼 가지말라고 한사코 설복하였다.
내가 이사풍을 결사적으로 반대해 나서는 데는 솔직하게 말해서 소학교 동창이자 함께 고향에 돌아온 후썅(回乡) 지식청년이요 생산대의 부녀 대장이자 동네 맏며느리 감으로 소문난 애자가 이번 이사풍에 휩쓸려 나서는것이 안타까 웠기 때문이였다. 말없이 일잘하고 얌전하고 듬직한 애자, 애자없는 동네가 싫 어서였다. 래일은 어떻게 되던지 몇해라도 애자와 함께 청장년들을 똘똘뭉쳐서 소근장처럼 새로운 새농촌으로 건설 하고 싶어서였다. 뭣이던지 맘 먹은대로 만들수 있다고 나를 믿는다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보겠다고 졸졸 따라다니 던 애자가 이붓아버지의 욕망에 동요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결사적으로 반대하면서 맞불질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빠서 떠나는게 아니라 세월이 나뿌고 고장이 나빠서 좀더 넓은 벌에가서 한번 맘껏 살아보겠다고 나서는데 도 무지 떠나는 그들을 막아낼수 없었다. 사태가 악하되여서 하는수 없이 촌의 당지부에 반영하였다.
촌당지부에서는 절때로 락호증을 떼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때 세월에 락 호증 (落户证)을 떼주지 않으면 어디던지 마음대로 이사가지 못하게 되였다. 촌 지부에서는 지부서기가 직접 내려와서 전문회의까지 불러놓고 누구든지 촌의 비준이 없이는 절때로 이사를 가지 못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당지부 결정은 권동력이자 호소력이 였다. 련며칠 드세게 불어치던 이사풍이 누구러든것 같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영구에다 집까지 마련하고 돌아온 세련하집 원칠이가 오는날 밤중에 내가 모르게 소조 회의까지 벌리고 누가 뭐래도 도망이사를 갈 계획을 세우고 밤중에 이사짐을 꾸리기 시작한단다. 나는 사태의 발전을 면밀히 주시하면서 대무위원회를 여러번 열고 애자부터 설복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입당 지원서까지 바친 적극분자 들은 당을 배반하는 일은 하지말아야 하지않겠는가 내놓고 애자를 설복 하였다.자기를 위해 안간힘을 다 쓰는 나를 안탑갑게 바라보며 겉으로는 절때 동요하지 않는다고 시름 놓으라고 하지만 어딘가 나와 정면으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부자연 스러운 행동에서 나는 어쩐지 점점 불안해났다.
그래도 몇년간 입당신청서도 여러번 쓰고 <무쇠처녀>라고 칭찬이 자자하던 그녀가 정말 이렇게 중도 이페하고 전도를 망치는 우둔한 짖은 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그녀의 이붓아버지가 (애자네는 아들딸 넷이나 살았는데 부모가 같지않은 두배치였다) 기어코 소코 제코라고 우기면 철저히 계선을 나눌수도 있다고 그러면 입당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입당만 하게되면 대학이나 공인으로 추 천받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그녀의 찬란한 앞날을 손금보듯 환하게 펼쳐주었다. 그녀가 정말 이사풍에 휩쓸 리지 않고 계선을 철저하게 가르면 나는 신성한 사랑까지 고백할수도 있다고 암시를 하면면서 최후의 신성한 사랑의 맹세까지 내걸었다. <떡 도 차레지지 않는데 김치국부터 차린다고 > 온몸이 입이되여 필사적 으 로 설복하였다. 그날밤 하현달이 훔쳐보는 생산대 회의실에서 그녀와 함께 새 하얗게 날을 밝혔다.
나는 애자아버지 사상공작을 잘하라고 로당원 손포수까지 동원해서 애자 아버지 생일날을 리용해서 술잔도 함께 나누며 속심을 나누라고 주도 면밀하게 사상공작을 전개해 나갔다. 여북했으면 어머니까지 내가 하도 애쓰는 꼴을 지켜보다 못해 옥수수죽을 퍼들고 나서서 애자 어머니를 설복했을가 자그만치 십년넘어 같이살아온 고장인데 가긴 어디로 간다고 아무데를 가도 이산골 만한 인품좋은 고장은 없다고 래년에는 캐황도 마 음대로 하게 한다는데 장차 애자를 언녕 맏며누리 감으로 정해놓은 약속을 어기지 말라고 ...
관건은 사람은 그런대로 도망이사를 갈수있는데 락호증(落户证)이 문 제였다. 나의 권력관을 넘는건 둘째요 촌지부에서 칼로 두부모를 베듯 에누리 없이 잘랐는데 누가 감히 번접할수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궁 리해 보아도 해마다 설이면 무우밥도 마음대로 해먹을수가 없어서 떵떵 얼어튀는 탈곡장에 나않자 북데기를 들추면서 햇 세월에는 좀 낮겠지 하고 뒤가 나오는줄 모르고 일해 봤댔자 그새 장새라 이 고장에 있어 보았대자 한공수에 미누스 8전도 못가서 한뉘 <우표생산대>라는 딱지를 한평생 벋지 못할건 불보듯 뻔한 일이란다.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영구는 땅이 넓어서 한족들이 수전농사를 할줄 몰라서 량식까지 푼푼하게 준비하고 집까지 공짜로 주겠다는데 계약서까지 받았는데 그까짖 락호증이 뭐가 대수인가
토지개혁, 호조조, 대식품, 인민공사 집체식당까지 실물나게 살아온 사원들이 살길을 찾아 나서는 이사풍은 그 누구도 막을수 없었다. 두만 강을 넘어온 하얀 계례들이 또다시 거치른 만주리벌을 희망을 바라고 필사적인 삶을 희망을 구걸하는 그들의 투쟁의 앞길을 단순한 깡깡마른 정치공세로 막아낸다는 것이 모래로 물막이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무너지는 물먹은 담벽인줄 뻔히 알면서도 마지막 힘 자라는데 까지 끝까지 막아냈다.
촌과 현에까지 반영된 반사회주의 이사풍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다고 상급 에서는 절때로 이사짐을 싫으라고 집체소를 내주지 못한다고 치렬한 로선투쟁으 로 취급하란다. 마치도 대만이나 남조선으로 도망가는 오류분자들인양 계선을 똑똑히 나누란다. 하지만 선불맞은 노루처럼 마구 날뛰는 세려하집 원칠이와 그가 인솔하는 패잔병들은 야장간 모루 우에서 두둘겨 맞는 무쇠처럼 때리면 때릴수록 퍼렇게 살아났다. 아직까지 국가에도 막지 못하는데 피눈물 뿌리며 두만강도 건너왔는데 만리장성이 라고 못 넘어 가겠는가 기어코 간다고 헌이불리며 헌이사짐을 싸들고 이고 지고 나섰다. 친 동기간을 그대로 보낼수 없어서 내가 촌지부로 회의 하러간 틈을타서 생산대 소를 내서 이사짐을 싣고 간다고 법썩거린 다. 하느님도 보다못해 눈물이 나는지 어느세 눈곷을 날리는데 가자니 못 간다니 큰길에서 눈물뿌리며 <생리별>하고 있는 눈물겨운 장면이 펼쳐 진다.
뒤늦게야 이소식을 듣고 달려온 나는 저만치 멀어지는 이사짐 수레를 따라 나서는 사원들의 눈물 없이는 볼수없는 력사적인 이 장면을 보고 그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눈보라 몰아치는 두만강을 넘어오던 부대끼리 언잰가는 잘살아 보겠다고 찾아온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또다시 쇠가마를 뽑아들고 헌 이불짐을 싸들고 눈보라 몰아치는 만주벌로 찾아가는 그들이 앞길이 과연 안탑 깝기 그지없었다.
과연 무었이 그들을 또다시 삭막한 이사바람에 내 몰았는가? 모두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내가 당장 벼락이라도 칠것같안 내가 뭐라고 소리치며 소고삐를 돌려 세우라고 고래고래 소리칠것만 같은 내가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앞장서서 소를 몰고 팔가자 쪽으로 처벅처벅 걸어 나서자 모두들 눈물을 뿌리며 따라 나섰다….
나는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붇쳐주고 락호증은 그곳에 가서 잘 살게되면 그때 떼가도 무방하다고 아무때 던지 떼주겠다고 그리고 생각과 달리 말처럼 모든일이 잘되지 않으면 아무때도 돌아오라고 장장 반세기 허물없이 한입안에 사탕도 나눠먹던 사원들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는 사람들을 부추겨서 기차에 태워 보냈다,. 기차는 애처로운 부녀자들을 싣고서 애처로운 기적 소리 울리며 만주리벌로 정처없이 내달렸다…
마지막으로 기차바곤 맨끝에 매달린 애자는 뭐라고 말하는지 자꾸만 노울 비낀 고향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손을 젖는데 감히 내 얼 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것이였다…나도 어쩐지 하염없이 눈물 뿌 리는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볼수 없어서 그만 모진마음 먹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해에 생각밖에 고향을 사랑하는 나와 사원들이 충성심이 하느님을 감동 시켰는지 농사가 잘되였다. 사원들은 처음으로 분홍을 (分红)타보았고 도막불에 이밥을 먹는 고장이라던 텅빈소문이 현실로 되였다 생산대 총결날에 돼지를 잡고 떡을쳐놓고 술을 마시며 모두들 이사간 사람들을 외우는 것이였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모든게 생각대로 되지않아서 모두들 뿔뿔히 헤여졌다고 하는데 내가 언녕 짐작한대로 세련하집 원칠이 속임에 들어서 신세를 망치고 말았다고 한다. 원칠이가 끌끌한 조선족 벼농사 기술 인재들을 후려오는 대가로 엉뚱한 돈을 떼먹고 달아났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도 알길이 묘연하다 왜냐하면 그때 이사갔던 사원들이 거이다 사망되고 박세일이와 춘세네는 그후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몇해 못살고 사망되였던 것이다 애자네는 돌아올 차비가 없어서 그럭저럭 꾹참고 있었는데 모르긴 해도 애자는 그까짖 개도 안먹는 자존심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것이 불보듯 뻔하다.
이사풍이 몰아친 그 이듬해에 나는 사원들의 추천을 받아서 길림 공 농병 대학으로 가게되였다. 어찌보면 그번 이사풍이 나의 앞길에 검은 구름을 가셔버리고 해빛찬란한 활주로를 활짝 열어놓았는지도 모른다. 또 어찌보면 애자가 나의 인생길에 말없이 푸른꽃잎이 되여서 나를 지금까지 얼음우에 박밀듯 슬슬 풀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은 근히 그번 이사풍에 휘말려간 사원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으며 더우기 애자를 한번도 잊은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내말을 듣지않고 이사간것을 그렇게 후회하면서 억지로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리였다. 나는 다시는 고향의 수수한 나리 꽃같은 애자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썩후에 인편에 들을라니 그후에도 해마다 돌아온다고 이시짐을 부둥 부둥 싸들고 나섰지만 끝내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런대로 눌러않고 말았단다. 고향말만 나오면 나의 상황을 여러번 알아보더라는데 과연 그 녀가 무슨생각을 하고 나를 찾았는지 나는 환하게 알고있었다. 언젠가는 한번이라도 꼭 만나고 싶었지만 알길이 묘연 하다, 그녀도 말로는 만나고 싶다고 하지만 내보다 잘나가지 않으면 절때로 나를 만나지 않으리 라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더 잘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있 는지?...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쩍하면 한국이요 일본이요 미국이요 하는데 좀만 머리가 트인 사람들은 인생을 개변하는 것이 시간문제인데 애자처럼 똑똑한 녀인들은 외국에 가서나 찾겠는지 그때 사람들을 찾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내 인생에 애자와 와룡8대 사람들의 인생에 한없는 후회와 희노 애락을 안겨주었던 이사풍을 두고두고 잊을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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