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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호(延秉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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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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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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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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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槐山) 사람이다. 예수교인으로서 1919년에 승려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다시 귀국하여 서울에서 이병철(李秉澈)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국내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단체로서 5월에 조용주(趙鏞周)가 합세하여 서울 합동(蛤洞) 170번지 이병철(李秉澈)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그후 조직을 확장하는 중, 안재홍(安在鴻)도 가입하여 이병철과 안재홍을 총무로 추대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는데 간사장(幹事長) 김홍식(金鴻植)·외교부장에 김연우(金演祐)·재무부장에 김태규(金泰圭)를, 편집원에 이의경(李儀景)·외교 특파원에 조소앙(趙素昻)을 선임, 결정하였는데 그는 조용주(趙鏞周)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의 목표는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 등이었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에 재정자금을 전달하면서, 내각 각 부장을 상해(上海)에 집결하여 정부의 통일을 도모하고 열국 정부에는 직접 외교원을 특파하여 외교사무를 확장할 것, 일본 정부에도 외교원을 파견하며 국가의 독립을 정면으로 요구할 것, 대표를 연맹회의에 파견하여 외교사무를 집행하라는 등의 건의서를 작성하여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서울에 체류 중이던 이종욱(李鍾郁)에게 탁송하였다. 이에, 당시 국무총리였던 안창호(安昌浩)로부터 감사장을 수령하였고, 총무 이병철(李秉澈)은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이 발급한 경기도 애국금 수합 위원회의 사령서를 수령하였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의 위촉을 받아 '독립운동 참가 단체 조사표', '독립운동에 즈음한 피해 의사 조사서', '독립운동에 관한 가옥 피해 조사표', '독립운동에 대한 적의 반항행위 조사표' 등을 조사 보고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에 경상북도 도경찰 제3부는 예수교도가 중심이 된 비밀결사 대한독립 청년외교단과 대한독립 애국부인회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울 연건동 이병규(李炳奎)의 집을 수색하여 비밀문서 등을 압수하였으며, 청년외교단 총무를 비롯한 간부 안재홍(安在鴻)·이병철(李秉澈)·김홍식(金鴻植) 등은 물론 많은 당원들을 체포하여 청년외교단의 활동은 끊어지고 관계자들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도 이때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安昌浩)·김현구(金鉉九)·조소앙(趙素昻)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김용철(金容喆)·조 완(趙完)·이기룡(李起龍) 등과 함께 동회를 탈퇴하였다. 1925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박은식(朴殷植)이 2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동년 5월 31일 북경(北京)에서 이천민(李天民)·박숭병(朴崇秉)과 같이 이의 부당함을 성토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김 구(金九)·엄항섭(嚴恒燮)·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 진(洪震)·홍면희(洪冕熹)·김원식(金元植) 등과 회합하고 독립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이갑녕(李甲寧)의 저격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이 되었으며, 초대, 2대 국회의원으로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판결문(1920. 6. 29 대구지방법원)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7면 조선민족운동연감 167 168 198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2 36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0면 고등경찰요사 191 193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17·538·609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08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0·569·571·646·856·876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28·133·154 157 224 229 234 237 573 626 627 629 631 690 705 708 729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448·71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8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85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21 424 42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28 432 9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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