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깨달음을 향한 제1보
「영도를 연다」는 것 자체가 「깨달음 그 자체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말하면 그것을 「깨달음을 향한 제1보」라고 생각해도 좋은 것은 사실이다. 평범한 인생에서 영도를 열어간다는 것에는 「불법진리에 눈뜬다」 「영적 인생관에 눈뜬다」는 의미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 결과, 그 본인이 어떤 인생을 그 후 살아간다 해도 「살아있는 육체의 몸인 채로 영적 세계를 엿보았다. 신이나 부처의 세계를 엿보았다」는 의미에서는 일보 전진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혼으로서는 제1보의 전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깨달음을 향한 제1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다만 이 영적 현상, 「영도를 연다」는 것 자체를 붙잡고, 「깨달음 그 자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향한 제1보」이며 「깨달음의 실마리」이기는 하지만,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영도를 연다」는 것을 「깨달음 그 자체」라고 오해하면, 여기에 큰 잘못이 생긴다. 여러가지 영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위 「말하는 대로」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완전히 지배당한다. 「자기는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우쭐해져 있으면 그런 영의 소리에 조종당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따라서 영도를 연 이후의 체크포인트, 단단히 유념할 만한 일로서 것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고급령의 말일지라도, 혹은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말일지라도 다시 한번 팔정도라는 필터에 걸러서 들어 본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자기자신 속에서 그것을 강하게 구하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그럴 수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고급령의 소리가 있어도 다시 한번 팔정도라는 필터에 걸러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으면 잠시 기간을 두고 보고, 다시 한번 그것이 올바른지 어떤지, 자기 마음에 들어맞는지 어떤지 생각해 본다. 이러한 자세가 중요하다.
다만 이것도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고급령이 무슨 계시를 보내도 「모두 자기가 판단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전부 자기가 멋대로 한다면, 이것은 그런 소리가 없는 것과 같다. 신도 부처도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며, 이래서는 「자기 밖에 없다」는 것으로 된다.
이것은 「아류(我流)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적 능력을 가지거나 계시가 있거나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어버린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자기가]」라는 우쭐대는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다만 고급령이라 생각되는 소리가 들려도 일단 필터를 통해 들어보고 「그 음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참으로 자기가 향상하는 길인가 어떤가」를 체크하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하다. 두 번째는 「남을 해롭게 하지 않는 길인가 어떤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체크포인트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서는 「전체적인 의미에서 신이나 부처의 마음에 어울리는지 어떤지」라는 것을 들 수 있다.
실은 이 점이 아주 어려운 점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취직하고 싶어 한다. 고급령으로부터 계시가 내려와서 「이런 곳에 취직을 하라」라고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자신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거기에 취직하고 싶은 것 같은 마음도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마음도 있다. 잘 알 수 없다. 이떻게 될까는 취직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취직해 보면 그런대로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은 느낀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다.
두 번째의 기준에 들어간다. 남을 해롭게 하지 않았는가 어땠는가, 특히 남을 해치지 않은 것 같기는 하다. 이러한 것에서 제2의 관문을 통과한다. 제3의 관문. 신이나 부처의 마음에 맞는가 어떤가, 이것도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그쪽이 유토피아 만들기에 아무래도 공헌하는 것 같다. 이런 판정이 생긴다.
그렇다면 「제1, 제2, 제3이라도 반드시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대충 그 수준을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 그 다음엔 전부 맡기고 그 길을 걸어간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심을 가지고, 「역시 나는」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를 내려준 것이 고급령이든, 신이든, 부처이든, 역시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하는 것이다. 자기가 생각했던 곳에 취직하는 거다. 자기가 생각지 않은 회사에는 가지 않는 거다」 라고 생각해서 하고 있으면, 이것도 또한 자아아욕대로 사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하나의 체크포인트는 일단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마지막에는 마음을 비워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신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신뢰감」이다. 전부 맡긴다. 신뢰한다. 「마지막에는 신이나 부처가 자기를 지켜 주시고 있으면 그런 불행한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런 생각도 중요하다.
완전히 「말하는 대로」 되어서는 안 되지만, 최후에는 신이나 부처에게 맡긴다, 그리고 어떤 형태라도 자기가 신이나 부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마는 끼어들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익을 올리면 된다. 자기의 욕망이 만족되기만 하면 좋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으면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지만, 「마지막에는 신이나 부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기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마는 끼어들지 못한다. 이것이 영적 세계의 진상이다.
그러므로 영도를 열어서 「깨달음을 향한 제1보」를 내딛은 분은 더욱 더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신과 부처의 사용인으로서, 일부분으로서, 볼런티어로서 자기가 살고 있는가 어떤가」라는 확인을 항상 헤 갈 필요가 있다.
「신의 볼런티어로서 살아간다, 그런 무료 봉사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음에는 그 마음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어쨌든 「영도를 연다」는 것은 「깨달음의 제1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증상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쭐대서는 안 된다. 「아직 아직 앞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도를 여는 것의 제2보에는 수호령과의 교신만이 아니라, 보다 상위의 고급 신령, 지도령들과의 교류가 가능해 진다. 다만, 일반에게 말해져 있듯이, 그러한 고급 신령과의 교류에 있어서는 「인격의 조화」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니치렌 성인의 영시를 받기 위해서는, 니치렌 성인의 영시를 받을 만한 그릇이 필요하다. 그만큼의 인격이 필요하다. 그만큼의 덕망이 필요하다. 지력이 필요하다. 감성의 번뜩임이 필요하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처럼 「고급신령의 통신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그릇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름만 말하고 「자기는 무슨 무슨 신이다」라는 형태는 수많이 있다. 이것은 일본 중국에 있는데 「영시를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은 대개 같은 레벨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역시 살아있는 사람의 행동과 실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한 사람이 아니면 그만한 통신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최고급의 지도령이라는 분이 여기저기에 나와서 지도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만한 실적이 있다, 행동력이 있다, 능력이 있다」고 보이는 사람한테만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판정에는 어려운 부분은 있다. 「나야말로 그런 사람이니라」라는 사람은 여기저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필터를 걸러서 「참으로 세상을 납득시킬 만큼의 재료가 있는가 어떤가」라는 점에서 검토해 가면 좋을 것이다.
「영도를 연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감도 있지만, 이것을 통과했을 때 더욱 큰 기쁨을 낳는 것이고 더욱 큰 인생관을 가져온다, 그러한 길이 있으므로, 아무쪼록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영도를 열어도 「나날이 겸허하게 노력하는 자세」만 가지고 있으면 전락하는 일은 없다. 용기를 가지고 그 길을 돌진해 가길 바란다. 그렇게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