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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올라간 소년예수
누가복음 2:39-52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물을 드리고 경건한 사람 시므온을 만나서 주님의 구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는 고백을 듣습니다. 시므온의 예언은 요셉부부에게는 기이한 것이 많았지만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고백합니다. 그때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던 중에 아기 예수를 만나고 증거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1. 아기 예수의 성장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2:39-40)
요셉과 마리아는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게” 됩니다(39절). 이것은 누가가 예수의 부모들이 율법이 명하는 바를 열심히 준수하였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 내에서만 하더라도 예수의 부모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었는가 여러 차례 강조되고 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22절), 주의 율법에 쓴 바(23절),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24절), 율법의 전례대로(27절) 등 미루어 보건대 요셉 부부는 경건한 삶을 사는 유대인의 전형(典型)이었습니다. 본절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마침이 되시고(롬 10:4)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갈 4:4) 친히 율법을 지키셨음을 시사합니다.
누가는 마태복음 2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방 박사의 방문이나 애굽으로의 피난 기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가 마태의 기사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마태는 또 하나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실례를 들기 위해서 그 기사의 내용을 넣었겠지만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에 대해서 기술하려고 하는 누가에게는 그러한 내용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고 정상적인 어린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40,52절).
누가는 아기 예수의 성장에 대해서 다름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어릴적 성장 모습을 묘사한 1:80의 내용과 비교됩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52절은 이 구절에 대한 보충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12살이 되기(42절)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자라며 강하여지고’라는 표현은 신체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범한 아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며’라는 표현은 정신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는 표현은 영적 성장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어릴 때부터 지혜와 은혜를 가진 인물로 세례요한보다도 훨씬 탁월했음을 의미합니다.
2. 예루살렘에 올라간 요셉부부와 예수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2:41-42)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41절). 어려운 살림 가운데 마련한 경비를 가지고 여행을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부모가 율법을 성실히 이행하는 경건한 유대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 의식은 온갖 위선과 타락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구약적 차원에서 지켜야 할 율법 의식들은 여전히 중요한 구속력(拘束力)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이 그러한 의식에 맞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유대 성인 남자들이 연례행사로서 삼대 주요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지키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신 16:16). 그러나 바벨론 포로 시대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각처로 흩어지게 되어 이 행사에 매년 모두 참석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적어도 유월절 행사에만은 꼭 참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한편 모세의 율법에는 이 행사에 남자들만 참석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나 유대 랍비 힐렐(Hillel)은 여자들도 축제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그렇게 지켜졌습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어린 예수가 자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어린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및 인격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어려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삶에 훈련되어져 갔던 것입니다. 어린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는 소년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법대로 이스라엘백성은 “이 절기의 전례대로” 누구나 남자는 다 하나님 앞에 보여야했기 때문입니다(출 23:17).
3. 예수를 잃어버린 부모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2:43-45)
유월절과 무교절은 모두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출 12:15; 레 23:6-8; 신 16:3). 그리고 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은 적어도 이틀은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이 예수는 그의 부모들보다 예루살렘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43절).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결코 어리게만 간주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부모는 예수의 움직임을 일일이 살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어중간한 나이였던 예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행렬이나 남자 어른들과 제법 나이가 든 소년들의 행렬중 어느 한 곳에 끼여 여행했을 것입니다. 이 행렬이 이처럼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면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여행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서로가 착각한 사이에 하루가 끝나갈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44절).
한편 아이 예수는 그의 부모들이 찾고 있을 시간에 성전에서 최고 석학(碩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의 일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그를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맨 것입니다. 만일 그의 부모들이 예수의 메시야성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그의 신성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바로 성전에 가서 찾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아버지의 집은 바로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성전 절기 준수를 위해 성전으로 모이는 여행자 무리는 같은 마을 이웃들과 친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매일 저녁 때 이 무리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함께 모여 유숙하고 여행 일정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의 부모는 예수가 일행 중에 있을 줄로 알고 신경쓰고 있지 않았으나 저녁 식사 때 혹은 잠자리에 들려 할 때 그가 없음을 알고 아는 사람들 속에서 그를 찾아 나섰습니다(44절).
예수의 부모는 아이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45절). ‘찾으면서’의 헬라어 '아나제툰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며 줄곧 예수의 행방을 수소문하였음을 뜻합니다.
4. 성전에서 예수를 다시 만난 부모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2:46-51)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여행하고 나서 예수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44절). 이튿날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예수를 찾는데 하루가 걸렸을 것입니다(45절). 그리고 그 다음날 곧 '사흘 후에' 그들은 예수를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성전에서 아이 예수를 만난 부모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열두살의 아이 예수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46절). 성전 안에는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인의 뜰과 안뜰의 동남부 등 이렇게 세 곳에 회당이 있었다고 탈무드(Talmud)는 전합니다. 대체로 랍비들은 바로 이 안뜰의 동남부에 있는 회당에서 율법을 강론(講論)했다고 합니다. 당시 생존해있던 저명한 율법 학자들은 '힐렐'(Hillel), '샴마이'(Shammai), '가말리엘'(Gamaliel), '요나단'(Jonathan), '시므온'(Simeon), '니고데모'(Nicodemus) 등으로 짐작됩니다. 추측해 보건대 이러한 유명한 학자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중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예수와의 토론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외경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에서는 이때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또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며 천문학, 의학, 물리학,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 등도 논의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증거 자료는 없습니다. 아무튼 어린 예수께서 당대 최고 석학들과 함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토론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었습니다(47절). '기이히 여기더라'(여시스탄토)는 미완료 중간태 직설법으로서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놀라움을 나타내며, 그 원형 '에크시스테미'는 거의 기절(faint)할 정도로 놀랐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계속하여 반복해서 그 질문과 답변에 매우 놀라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놀라움은 어린 소년의 입에서 그토록 영특한 이야기가 넘쳐나온 사실로 말미암은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입에서 나온 지혜의 말씀 자체의 탁월성에 기인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지혜'에 해당하는 '쉬네세이'는 '이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킵니다. 예수의 답변과 하나님의 지혜는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神靈)한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입니다(골 2:3). 그 지혜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니 듣는 자가 다 기이히 여기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말합니다(48절). 누가는 예수의 부모가 예수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들의 처음 가졌던 감정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불과 12세에 불과한 소년이 당대의 석학들과 당당하게 토론하는 장면은 그들에게도 놀라움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의 탄생에 얽힌 신비스러운 일들이나 차츰 성장하면서 보여준 특출한 지혜와 인격에 대해 남다른 경험을 한 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경험한 바 계시에 대한 이해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신분이나 사역의 본질적 의의를 정확히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어서 마리아가 예수께 책망조로 탓한 사실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마리아는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로서의 걱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속상한 감정을 표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여준 말이나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고서 목자들이 와서 경배하고 천사들의 말을 전하여준 말들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이 예수가 점점 자라면서 지혜가 충족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아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 그분이신 것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말썽을 안 피운 아이 예수가 왜 예루살렘에 머물렀는지에 대해 한번 생각하지 못한 채 불평을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하십니다(49절). 이는 혈육상의 모친인 마리아에게 하신 삼가는 투의 공손한 말씀이지만 자신의 존재 의의를 분명히 천명(闡明)하신 단호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사항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1) 혈육상의 모친에 대한 순종과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종 사이의 긴장관계가 나타납니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한 가정의 아들로 탄생하셨기 때문에 그 부모에 대한 임무에 충실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러한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여념이 없을 엄청난 사명, 곧 온 인류에게 구원의 산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인간에 대한 모든 임무는 하나님의 계명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수행될 수 있을 뿐이며 우선순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18:29; 신 33:9; 마 6:33). (2) 예수는 자신의 전생애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전개되어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있어야 될 줄을'이란 표현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당위성(I must be...)을 강조해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에 대한 의무의 우선순위 문제, 그리고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 간의 양자택일 문제를 놓고 믿음의 용단(勇斷)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고 유일한 의미에서 자신의 아버지로 부른 최초의 언급이며(22:29; 23:46; 마 11:25; 막 14:36; 요 5:17),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내 아버지의 일'(My Father's business)로도 번역됩니다. New KJV는 본절 하반절을 '내가 내 아버지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Did you not know that I must be about My Father's business ?)라고 옮겼습니다. 이는 '집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이스'가 중성 복수로 '일' 또는 '사물'의 개념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일'이라 번역하든 '집'이라 번역하든 이 구절의 의미를 크게 바꾸어 놓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하나님의 일을 실천해 나가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있는 곳이 그가 머물 자리이고 그의 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이 예수가 자라시면서 얼마나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백성들이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아이 예수는 선생들이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 어떤 지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흘 동안 그 부모들이 찾는 중에도 선생들 중에 앉아서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양친은 아이 예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50절). 마리아에 임한 예수 탄생에 관한 계시를 생각해 보면 이 구절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정도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부부의 깨닫지 못 함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48절에서도 나타내었듯이, 설령 그들이 예수께 얽힌 여러 신비로운 계시를 접했다고 해도 그 의미를 확연히 깨달을만한 영적 수준에는 도달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시어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며 받드셨습니다(51절). 누가는 예수의 신성에 관해서 언급하고 나서 한 가정의 자녀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인자이신 예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수는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실 때까지(3:21) 18년 동안 갈릴리 나사렛에서 그의 부모와 동생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인 목수직을 이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습니다(막 6:3). 요셉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18년 어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요셉이 죽자, 장남인 예수가 그의 가족을 부양(扶養)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모친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을 때 그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이 복음서의 내용 중 일부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리아에게서 얻은 듯합니다. 그녀는 여기 언급된 세부 내용들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말'이란 본장의 사건 전반에 걸쳐 나타난 말들을 지칭합니다.
5. 더 사랑스러워 가신 예수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라는 말은 예수가 다른 아이들과 같이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지난 것을 말합니다. 누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 당시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에 대해 문제를 삼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정상적인 성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 지혜가 자라가며”라는 말은 인성으로서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성으로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인성으로서는 키가 자라가며 지혜도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외경의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도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비상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셨다고 전하지만 그 증거는 불확실합니다. 본문이 거듭 밝히는 바는,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신성(deity)을 도외시하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빌 2:6,7). 한편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됩니다. 이를 어떻게 번역하든 별반 차이가 없지만 '키'로 보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왜냐하면 '나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부연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자는 그 의미를 신체적인 성장이나 인격적인 성장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의 착실한 성장은 모든 이의 귀감(龜鑑)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그의 생활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졌습니다(행 2:47).
적용: 예수님을 더 알기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눅 1:35). 그리고 그녀는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을 때 목자들이 와서 천사들의 이야기를 전해준 말을 들었습니다(눅 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방문하였을 때 아이 예수가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길렀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예수님에게 대적하며,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도록 성경을 연구하여 예수님을 지적으로 알고, 말씀을 묵상하여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더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마리아를 통해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도, 만일 예수님의 신성이 없으면 부활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여일 지상에 계시며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행 1:9). 그러나 승천하신 뒤 10일이 지난 후 오순절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 120명에게 임하시어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행 2:1-3). 그후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역사하시는데 누가는 성령을 예수의 영으로(행 16:7)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하여 은혜를 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