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제 12 장 : 역경의 유익함에 대하여
1. 이따금 어려움과 시련을 당함으로써 이득을 볼 경우가 있다. 흔히 어려움과 시련은 우리 인간을 자기 성찰의 길로 인도하고, 스스로를 현세에서 유형에 처해 있다고 생각케 함으로써 제반 인간사에 의존하는 마음을 두지 않도록 한다.
이따금 우리가 반대에 부딪치는 것도 유익할 경우가 있다. 비록 자신의 행동과 의도에 추호의 잘못된 점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우리는 흔히 겸손을 터득하여 허영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공공연히 남으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불신당하게 되면 내면의 증인으로서 흔히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
2.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모름지기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절대로 다른 인간으로부터 큰 위안을 얻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선한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거나 유혹을 받거나 사악한 생각으로 시달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절대적 필요성과 하나님 없이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귀중한 사실을 더욱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또한, 이럴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하며 기도한다.
이러한 경우에 선한 사람은 삶을 더 오래 영위하려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더 기다리게 되며 육신이 완전히 소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또한 이럴 경우에, 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완벽한 안전과 충만한 평화를 절대로 보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료 출처 :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 조항래 역, 예찬사, 1988년 11판)
토마스 아 켐피스의 새롭게 쓰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장에서 역경과 시련이 단순히 피해야 할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다듬으시는 거룩한 도구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현대인은 편안함과 안정, 인정과 성공을 추구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배우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우리는 누구나 평탄한 길을 원합니다. 질병도 없고,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인간관계의 상처도 없는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을 통해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놀랍게도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 고백의 의미를 압니다.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병상에서 눈물로 기도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잘될 때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던 사람이 실패를 경험한 후 비로소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즐기던 사람이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인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학교에서 자녀들을 훈련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시지만,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고 믿음을 정금같이 연단하십니다.
평소 우리는 자신을 실제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이 견고하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시험 하나에도 쉽게 흔들립니다.
자신의 사랑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작은 상처에도 분노합니다.
그러나 시련은 우리의 참모습을 드러냅니다.
폭풍이 불어야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듯이, 시험이 와야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낮추심으로써 우리 자신을 알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경을 허락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겸손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가 강조하듯이, 사람은 본래 다른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가족과 친구, 교회를 통해 위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모든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눈물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어떤 상처는 하나님만 만지실 수 있습니다.
어떤 외로움은 하나님만 채우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회상하며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9)는 사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때로 문제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 대상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의지하던 손을 놓고 하나님을 붙들어라.”
이것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세상의 한계를 가르쳐 줍니다. 건강도 영원하지 않고, 재산도 영원하지 않으며, 인간관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안전도 없고 완전한 평화도 없습니다.
청교도들은 고난을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지팡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시선을 아래가 아니라 위로 향하게 만듭니다.
존 번연은 감옥에서『천로역정』을 기록했습니다. 육체는 갇혀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시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본향을 더욱 사모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가 피하고 싶은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있다면 먼저 이렇게 질문해 보십시오.
“주님, 이 일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낮추고 계실지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을 의지하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눈물 없이는 깊은 위로도 없습니다.
광야 없이는 약속의 땅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고난을 헛되게 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눈물의 의미를 아시는 주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평안은 좋아하면서도 고난은 싫어하고, 축복은 원하면서도 연단은 피하려고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때로는 역경과 시련을 사용하셔서 저희를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 원망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자이심을 경험하게 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으로 저희의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특별히 지금 눈물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과 관계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하늘의 위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이 땅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게 하시고,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시련 가운데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주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고난을 친히 담당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