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하림유사(遺事)>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관계자 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조성래(1959년 하림 출생) 합장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고바우 암벽에 새겨진 百世淸風(백세청풍) 글씨는 주자(1130-1200)의 글씨다.
백세청풍 글씨의 유래 : 중국 은나라 말엽, 주나라 초엽, 즉 B.C 1111년경에 살았던 백이와 숙제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중국 수양산에 그 두 사람을 위한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에 주자가 쓴 백세청풍(百世淸風) 글씨를 새겨 넣은 것을 조선시대 황해도관찰사 이언경(1653- 1710)이 1704년에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그 때 그 비석 글씨를 탁본해서 가져온 것을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있는 채미정의 현판에 새겨서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씨는 조선의 다른 지역의 몇몇 건물에도 걸리게 되었다. 원북의 채미정은 원래 서산서원 내의 부속 건물로 서원과 함께 1703년에 세워졌다. "采薇亭(채미정)"이란 현판 글씨는 대사헌(大司憲, 종2품, 감사원장) 권형(權瑩, 1678-1745)이 썼다.
"百世淸風(백세청풍)"이란 채미정의 현판글씨는 주자의 글씨를 중국에서 탁본해온 것을 1718년 무술(戊戌)년에 어계 조려 선생의 후손이 판각해서 붙힌 것이다. 채미정의 백세청풍 현판의 여백에 아주 작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백이의 가풍을 듣는 이는 염치와 완고함을 세울 것이고, ..... 歲戊戌(1718).... 後孫...謹識"
채미정은 세워진 지 오래 되어서 노후하기도 하고 규모가 작아서 1793년에 다시 크게 지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집권 1864년 - 1873년)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산서원과 함께 사라졌다. 1902년에 서산서당을 세우면서 현재의 위치에 채미정 건물을 다시 지었다. 채미정 건물은 1950년 6.25 전쟁 때 건물이 훼손되어,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1954년에 현재의 건물로 다시 지은 것이다.
함안조가는 왜 百世淸風(백세청풍) 글씨를 걸었을까?
함안조가도 생육신 중 한 분인 어계 조려(趙旅 1420-1489, 69亡) 선생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중국 정절의 대표적 인물인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고사리 일화를 빌어와서 어계 조려 선생의 생가 마을인 원북리에 채미정(采薇亭) 건물을 짓고, 백이숙제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주자가 그들의 비석글씨로 써준 백세청풍 글씨를 청나라에서 탁본해온 것을 채미정 건물의 현판에 새겨서 걸은 것이다. 이 채미정 건물의 현판의 백세청풍 글씨를 1940년경에 하림 새터의 조삼규님이 하림 고바우 암벽에 새겼다.
'고사리를 캐는 정자'라는 뜻의 "채미정(采캘 채 薇고사리 미 亭정자 정)"은 고사리를 캐먹으면서 끝까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절을 지키며 살았던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삶을 살았던 생육신(生六臣) 어계 조려 선생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채미정 앞의 산 이름을 '백이산(伯夷山)'과 '숙제봉'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은 백이와 숙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함안조가 내에 백이와 숙제와 같은 삶을 살았던 충신은 어계 선생만이 아니다. 어계 선생의 조부이고, 고려왕조 마지막 공조전서(현 국토개발부장관)를 지낸 전서공 조열(趙悅) 할아버지도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서 조선왕조를 세우자 장관자리를 내던지고 함안으로 내려와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백이와 숙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옮긴 글입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아들로 그들의 부친은 삼남 숙제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부친이 돌아가시자, 숙제는 장남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고, 그러자 백이는 부친의 뜻이라며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숙제 또한 왕위에 오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이리하여 고죽국인들은 할 수 없이 차남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 |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을 두둔하여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았다.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 |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 |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사람들은 왜 함안조가를 양반이라고 알아주는가?
함안조가들은 대대로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와 의리, 충절을 더 중요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고려왕조의 마지막 장관을 지냈던 전서공 조열 할아버지는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고, 이성계가 여러 차례 장관직을 다시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 청을 뿌리치고 함안으로 내려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살았다. 전서공 조열 할아버지의 손자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도 불사이군의 충절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고향 함안으로 내려와 평생 낚시를 하며 살았다. 함안조가는 대대로 눈 앞의 자신의 이익보다 정의와 의리, 충절, 애국을 더 중시하며 살아온 결과, 조선 최고의 양반의 성씨 중 하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13충과 1919년 3.1만세운동에 함안조씨가 주동하여 군북장날 만세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이고, 사상자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만세운동이었다. 또 조소앙 선생의 상해임시정부 수립 및 조명하 의사 등 독립운동에 많은 함안조가들이 뛰어들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또 함안조가의 선조들은 벼슬을 탐하지 않고, 초야에 은거(隱居)하며, 진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즐겨 도를 닦았다. 안빈락도(安貧樂道)의 삶, 즉 가난한 가운데 도만 닦는 삶은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곤란하지만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도를 닦아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도가 있지만 석가부처님의 도가 현대인에게 가장 맞는 게 아닌가 한다. 서구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부처님의 호흡관찰명상, 알아차림명상(Mindfullness Meditation) 등을 많이 한다. 요즘 미국 및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MBSR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영남일보 기사 [이야기가 있는 옛 현판(懸板)을 찾아서 .15]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30529.01020073132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