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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가 총 맞은 지 금년으로 벌써 33년이 되었다.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가, 197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란히 권총으로 피살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부부가 맞은 권총은...
미국제 스미스 앤 웨슨사의 38구경 리볼버 권총으로 똑같은 기종의 권총이었다.
현직 대통령 부부가 총에 맞아서 나란히 피살 당한 것도 세계 역사에서 희귀한 일이지만
똑같은 회사 똑같은 기종의 권총으로 당했다는 사실 또한 희귀한 기록이다.
현직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여사 33주기를 맞이하여
그 날 사건을 다시 한번 살펴 본다.
1974년 7월 18일 밤
일본 오사카 시내의 다카쯔 파출소의 숙직실에서 어느 간 큰 도둑이 들어와서 잠든 순경의 주머니에서 창고 열쇠를 훔쳐서는 창고에 들어가서 권총 2자루를 가지고 도망간 사건이 발생함. 이튿날 신문에도 이 사건이 보도됨. 도난 당한 권총은 미국 Smith & Wesson 사의 38구경 리볼버 권총 1정과 일본 신중앙공업사의 뉴 난부 38구경 리볼버 권총 등 2정이었다.
동년 7월 24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요시이 유키오(吉井行雄/1950년생)란 이름의 여권이 하나 발행된다.
본인이 받아 간 것은 아니고, 부인 미키코 여사의 고등학교 동창인 난죠 세쿠오(南條世光)란 사람이 대신 받아 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난죠 세쿠오(재일교포/한국명 문세광)가 요시이 미키코에게 은행 돈 빌리는 데 필요하다며 남편의 호적초본과 신분증을 빌려달라고 해서는 그것으로 여권을 발급 받았다.
동년 7월 30일
오사카의 한국총영사관에서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에게 관광비자를 발급한다.
동년 8월 6일
문세광이 여자친구의 남편인 요시이란 이름으로 오사카공항에서 대한항공을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조선호텔 1030호실에 투숙한다. 이 때에 일본 오사카의 한 파출소에서 도난 당한 일본경찰용 권총이 트랜지스터 라디오 속에 숨겨져서 들어 왔다. 오사카와 김포 공항 양쪽 에서 모두 그 라디오가 소리가 정말 나는 라디오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총이 들어올 수 있었다.
동년 8월 8일
문세광은 "모닝투어" 버스에 2,500원을 내고 서울시내 관광을 다녀 왔다.
동년 8월 10일
문세광은 청평으로 혼자 택시로 가서 모 여인과 나이아가라호텔에서 하룻밤을 잤다.
여자와의 마지막 밤이었으리라.
23세의 문세광은 일본에 5살 연상의 부인 강성숙 씨와 첫 돌 지낸 아들을 두고 온 유부남이었다.
동년 8월 15일
이 날 10시에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고
11시에는 청량리지하역에서 수도권 전철 및 서울 지하철 1호선의 개통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 오전 8시 경
문세광은 조선호텔에서 최고급 리무진 차를 한 대 내달라고 했고, 호텔에서는 없다고 했다.
마침 파레스 호텔 소속 포드20M 고급차가 들어오자 그 차를 타고 갈 것을 권유, 장충단 공원의 국립극장 현관까지 바로 들어감. (고액권이었던 5천원짜리 2장을 주고 기다리라고 함)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는 광복절 기념행사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행사장의 출입증을 발급한 곳이 서울시청, 대한광복회 등 여러 군데가 있었으나...
문세광은 최고급 검은 차를 타고 온 관계로 출입증 없이도 인사 받으면서 유유히 입장했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경호실의 결정적인 허점이었고 소지품 검사도 당연히 대충 건너 뛰었다.
== 저렇게 좋은 차에 저렇게 좋은 옷을 입었는데, 무슨 일이야 있을랴구... ==
미국제 권총을 무사히 가지고 국립극장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한 문세광--
권총을 꺼내어 빈 칸에 맞추어 두었던 총탄 위치도 맨 앞 칸으로 맞추어 두었고, 최종적으로 안전장치도 풀어 놓았다. 이제는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바로 총알이 나간다. 문세광은 복도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기다렸다.
옛날에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던 안중근 의사도 실수로 격발되는 걸 방지하기 위하여 한 발을 비워 두었고, 그것도 불안하여 안전장치를 잠그고 있다가는----
이토가 하얼빈 역에 도착할 시간이 되자 끼르륵 총알약실을 조정하고 안전장치도 풀어서 바로 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가
이토가 플랫홈을 걸어 올 때에 바로 뛰어나가 6발짜리 권총에 있던 5발을 모두 쏘아 명중시키지 않았던가
오늘 이 권총은 5발짜리 권총이라서 총탄을 4발만 넣은 것도, 안전장치를 지금 풀어 놓은 것도 모두 그 때와 상황과 똑같다. 시간과 장소만 조금 달라졌을 뿐!--
--이제 저 복도로 박정희 대통령만 나타나기만 하면 나 문세광은 안중근을 능가하는 이 시대 최고의 킬러가 되는 거다!--
문세광이 주머니에 권총 든 손을 넣고서는 복도에 서서 계속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경호실 직원이 와서는 정중하게 "각하께서 입장할 시간이 되었으니 장내에 들어가 계시죠" 하는 바람에 복도에 더 이상 있지 못하고 행사장에 그냥 들어와 버렸다. 가운데 줄 C열 맨 뒤에서 3번째 줄의 통로 바로 옆자리가 비어 있어서 앉았다.
"아까보다 더 멀어졌는데.... 이제는 어떡한다? 제일 가운데 줄 통로 옆에 앉았으니 앞으로 뛰어 나가기도 좋고... 이 자리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잠시만 기다려라... 근데 왜 이리 더워? 대형 선풍기나 앞뒤로 양쪽으로 팍팍 좀 털어놓지. 하여튼 이래저래 대한민국은 문제가 많다니까"
--- 10시 경
문세광은 계속 투덜대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식장 안은 무척 더웠다. 벌써 등어리에 땀이 흥건했고 총을 쥔 손바닥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윽고 10시가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입장하여 식이 시작되었다.
좌석 배치는 관객 석에서 봤을 때 왼쪽부터 안춘생 대한광복회장(안중근 의사의 5촌조카), 정일권 국회의장,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영부인, 민복기 대법원장, 양택식 서울시장 순으로 앞자리에 앉았고, 뒷자리는 조상호 의전담당비서관, 박종규 경호실장, 김정렴 비서실장 등이 앉았다.
--- 10시 20분 경
"-- 이처럼 말로는 평화통일과 민족의 단합을 운위하고 있으나, 그 실은 민족의 분열과--"
박정희 대통령이 연단에서 북한 정부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낭독하고 있을 때,
가운데 뒷자리 부근에서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어떤 남자 한 명이 중앙 통로로 발을 절룩절룩거리며 총 같은 걸 들고서는 앞 쪽으로 급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남자는 바로 아까 그 문세광이었고, 무더운 날씨가 결국 문제가 되었다.
방금 난 "퍽!" 소리는 문세광이 땀에 절은 손이 주머니에 달라 붙어서는 총 쥔 손이 주머니에서 얼른 빠져 나오지 않아서, 억지로 빼려다가 방아쇠가 당겨져서 그냥 총알이 격발되어 버렸는데 주머니 속이라서 총소리가 좀 이상해져 버렸다.
그리고 절룩절룩거린 까닭은 주머니 속에서 발사된 총알이 자기 자신의 대퇴부와 다리에 맞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다리야.... 무슨 안중근이 자기 다리를 다 쏘냐? 헉헉!"
피가 철철 나는 다리를 이끌고 20걸음이나 와서는 대통령 바로 앞 10미터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통령 연단을 향해서 두 손으로 정조준하여 "탕!"하고 총을 쏘았는데, 총알이 방탄으로 되어 있는 연단을 관통시키지는 못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키가 원래 작았던 데다 연단의 높이가 150센티나 되어 박대통령이 머리를 숙여 몸을 구태여 숨기지 않더라도 바로 연단 앞에서는 대통령의 모습이 잘 안 보일 상황이었다.
이 때 문세광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고 일어 선 사람은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왼쪽 뒷 주머니의 권총을 꺼내면서 앞으로 튀어 나왔다. 문세광을 두 번째로 빨리 본 사람은 관객석에서 보는 기준으로 오른쪽 마지막 자리에 앉아 있던 양택식 서울시장이었는데, 그는 앞으로 돌아서 뒤로 숨기 위해 벌떡 일어 섰다. 문세광을 세번째로 빨리 본 사람이 박대통령이었는데, 보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앉은 자세를 취하며 연단 뒤로 몸을 숨겼다.
잇달아서 앞자리에 있던 안춘생 광복회장,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등은 앉아 있던 소파 의자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뒷자리의 비서실장도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잇달아서 앞자리에 있던 안춘생 광복회장,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등은 앉아 있던 소파 의자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뒷자리의 비서실장도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왼쪽 뒷주머니에서 꺼낸 권총을 오른손으로 옮기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신문지를 바닥에 떨어트렸고...
많이 잡수세요", "많이 드시고 건강하세요"
이런 정겨운 말 한 마디가 노인들을 얼마나 감동케 했을까.
소매를 걷어 올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와 마찬가지로
노인들의 시중을 드는 여사의 서민적인 인간미.
노인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 이미 육영수 여사의 몸이 오른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고...
뒤늦게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여사 앞을 몸으로 가리려 했고..
또 같은 시각에 정체 불명의 남자가 연단으로 뛰어 들더니 육영수 여사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당시 객관적인 정황으로 봐서는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쏘았을 가능성이 가장 많기는 하나...
현재 제3의 인물이 다른 방향에서 쏘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8년 전 병사한 문병태 씨와 당시 47세였던 육말란 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난 문세광에게는 49세의 육영수 여사는 자기 어머니와는 종씨라서, 어떻게 보면 이모 뻘이 될 수도 있는 사이였다. 육씨네의 족보를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의 어머니 육말란 씨와 어떻게든 친척 관계가 될 수 있는 사이였다.
육영수 여사는 일본 낭인배들의 칼에 죽은 명성황후에 이어 현직 국모의 자리에서 피살당한 두 번째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육영수 여사는 자신의 장녀 박근혜보다 생일이 38일 정도 빠를 뿐인, 아들 뻘 정도밖에 안 되는 문세광의 총탄을 맞게 되었다.(박근혜 52년 2월 2일생 / 문세광 51년 12월 26일생)
문세광은 재일교포 민단 계열의 청년동맹회원으로 있다가 제명된 23세의 청년이었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사주를 받아서 그랬는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가 싫어서 그랬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문세광은 일련의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72년 민단 계통의 청년동맹에서 제명당했다고 한다.
일본 TV에도 방영되었듯이 문세광의 방 안 책꽂이에는 김일성선집, 모택동선집 등이 있었고, 대문 앞에는 "남조선 인민의 투쟁을 도와 주자"는 내용의 구호가 걸려 있어서 문세광이 조총련과 전혀 관련이 없다곤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총에 맞은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이윽고 몸이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어졌고...
다리에서 피도 계속 나오고 이제 더 이상 쏠 데도 마땅히 없는 문세광이 약간 주춤거리자, 이 때서야 용감한 대통령 경호실 직원들이 저격범 문세광을 덮쳤다.
문세광은 그냥 쉽게 무너졌고, 문세광이 놓친 권총은 허공에 튀어 올랐다가 서울시립 교향악단 바이올리니스트 김영목(32살)의 뺨에 2cm의 상채기를 내고는 땅에 툭 떨어졌다. 그 권총에는 아직도 총알 1발이 남아 있었다.
원래 4발이 들어 있었는데, 1발은 자기 발에다 쏘고 1발은 대통령 연단에다 쏘고 또 1발은 육영수 여사의 머리를 쏘고.... 나머지 1발은 아직 권총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당동 난민촌 방문 (1967년 4월 13일, 사당동)
정성을 다한 여사의 생활은 도시와 농촌, 서울과 지방..
어느 곳이든 이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문세광이 쓰러진 직후에 또 한 발의 총소리가 났다.
단상 뒷자리에서 박종규 경호실장이 갑자기 권총을 빼내 들고 벌떡 일어서더니 왼손의 권총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 오른손의 신문지를 떨어트리는 과정에서 "탕!" 하고 잘못 발사가 되었는지, 아니면 제3의 경호원의 오발인지 장 모르겠지만...
그 총에 맞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맨 오른쪽 줄 앞에서 8번째 줄에 앉아 있던 광복절 합창단 성동실업여자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 양이었다.
만약 박종규 경호실장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라면..
당시 세계사격연맹 부회장으로 있던 박종규 경호실장의 권총 다루는 솜씨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오른손잡이가 왜 왼쪽 뒷주머니에 권총을 숨겼을까? 왼손을 뒤로, 또 앞으로, 오른손의 신문과 박치기... 신문 버리고 권총은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시간상으로 엄청 낭비가 심했다.
1초만 더 빨리 권총을 오른손에 쥘 수 있었다면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여사로 향하던 총탄을 육탄으로 방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뒤늦게 육영수 여사 앞에서 허둥지둥하던 박종규 경호실장의 모습..
이 장면이 당시에 현장 생중계를 하던 채널 7번 TBC 동양방송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KBS, MBC는 육영수 여사가 쓰러지기 전 이미 "지지지직--" 중단되어 육영수 여사가 쓰러지는 장면은 방영하지 못했다.
( 당시 모든 신문방송에는 장봉화 양의 사망이 박 경호실장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보도가 안 되었고, 문세광의 제2, 제3탄이 터지기 전에 경호실장이 대통령의 연단 앞을 가로막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문제의 동양방송 화면은 곧 방송금지된다.)
채널 7번 TBC 동양방송은 삼성그룹, 중앙일보 계열의 민영 방송이었는데, 전두환 대통령 때에 KBS 제2방송으로 넘어갔다.
저격범 문세광이 경호원들에게 끌려 나가고 객석에 앉아 있던 탁금선(52세, 여) 씨가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서 쓰러진 육영수 여사를 부축하여 서울대 부속병원으로 급송되었다.
<월남파병 백마부대>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 가시는가 월남한땅 하늘이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에 뒤를 따르리라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에서 마지막 몇 줄 연설문을 마저 읽고 잠깐 자리에 앉았다가 공식행사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 섰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육영수 여사가 흘린 피를 보다가 남기고 간 핸드백과 고무신을 집으려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택식 서울시장이 육영수 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얼른 주워서는 비서들에게 건네 주었다.
정일권, 민복기, 양택식 3명은 11시에 열리는 지하철 1호선 개통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청량리로 향했다. 정일권 국무총리는 청량리에서 지하철을 시승하여 안양까지 갔다.
"안양"이란 지명은 원래 관악산 안양사라는 사찰 이름에서 따 온 명칭인데 불교에서 "극락정토" "천당"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 순간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있었고 정일권 국회의장은 본의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안양에서 육 여사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사찰 이름이나 그 정문에 안양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으면 그 절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다. 영주의 부석사 정문이 안양문인데 거기도 아미타불이 주불이다. 아미타불은 불가에서 극락, 즉 안양에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부처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충남 서산의 목장에 휴가 가 있던 박 대통령의 조카사위 김종필 국무총리는 육영수 여사의 피격 소식을 뒤늦게 듣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왔다.
(김종필 씨의 부인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셋째 형 박상희 씨의 딸이다. 박상희는 해방 직후 좌우익이 한참 싸우던 시절 대구 폭동 사건 때에 맞아 죽은 사람으로, 김종필은 장인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육영수 여사는 서울대병원에서 대수술을 했으나 그 날 저녁 7시 경에 숨을 거두었다.
그 날 같이 죽은 성동실고 장봉화 양은 17일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정부는 장 양 언니의 취업을 약속했고, 중학교 다니던 남동생의 등록금도 졸업 때까지 면제해 준다고 발표했다)
육영수 여사는 19일에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국화꽃으로 덮인 영구차를 청와대에서 떠나 보내는 박정희 대통령의 뒷모습은 당시 많은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결혼전에 수놓은 무궁화나무 소재의 작품>
그로부터 5년 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육사 동기생이자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의 총에 피살당한다.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아서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예이예이 예예..."
「사랑해」 노래의 후렴구를 흥얼거리다가 김재규의 총에 맞았다.
그 날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지 꼭 70주년이 되는 바로 그 날이었다.
김재규는 처음에 자신의 독일제 발터 ppk 권총으로 박대통령의 오른쪽 가슴을 쏘았으나
금방 죽지 않자 다시 바깥에서 부하의 총을 뺏아 와서는 대통령 머리에다 총을 대고 쏘았는데..
그 때 사용한 총이 바로 5년 전 육영수 여사를 죽게 했던 총과 똑같은..
미국 스미스 앤 웨슨 사의 38구경 리볼버 권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그동안 비밀리에 진행되어 오던 핵무기 확보계획도 중단되었다.
하루 0.85 그램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 규모의 자체개발계획은 이미 1976년에 미국 중앙정보부 CIA의 만류로 중지된 상태였고, 그 가음 계획으로 카나다, 프랑스 등으로부터 완제품을 사 가지고 오는 계획을 진행중이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독재자였기 때문이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지만
핵무기 개발 때문에 미국의 미움을 사서 죽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는 20세기 최대의 불행한 부부였다.
자주국방도 제대로 안 되는 약체 대한민국의 끊임없는 내분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의 멍에를 쓰고 부부가 나란히 비명에 갔지만,
따지고 보면 북쪽의 독재자 김일성처럼 정적을 모조리 죽여 버릴만큼 모질지는 못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금 없는 나라 민주주의 국가의 새로운 임금님 김일성은 정치 라이벌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 주고 편안히 늙어 죽었지만
마음 약하고 어설픈 독재자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오명만 뒤집어 쓴 채 아들에게 정권도 물려 주지 못하고, 5년 간격으로 두 부부가 나란히 총 맞아 죽는 비운을 맞이했다.
<한쌍의 원앙을 수놓은 작품>
신혼시절 박대통령은 이 족자를 이사 때마다 안방에 옮겨 걸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공무원으로 근무했는데도...
어머니가 없어서 어머니 이름으로도 연금을 못 받고 유자녀 박근혜, 근영, 지만 삼남매는 당시 나이 이미 20세가 넘어 버려 이래저래 연금을 한푼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쨋든 이 3남매는 순식간에 "부모 없는 고아"라는 종신형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것도 "독재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상당한 세월이 지난 지금 2004년...
북한 김일성 사망 10주년 조문 사절을 만들어 보내자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도..
육영수 여사 사망 30주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이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2007년 8월 15일 --- 33주기를 맞이하여...
삼가 육영수 여사의 명복을 빌면서...
대한민국 건국이후 시대의 최악 재앙인 기름 누출사고가 난지 보름이 지났지만 지역주민과
발길이 닿지 않는 섬지역 주민들은 누구를 원망할 겨룰도 없이 추위와 싸워가며 기름을 닦
으며 죽느냐 사느냐 하는 눈물나는 사투를 보고 있으면 이 마당에 문화예술 자체가 사치 스럽기도 하고 숙연해 지네요.
우리 대한민국의 전체적 일이고 자손 만만대 삼천리 아름다운 강산을 후손에게 길이길이 물러 주어야할 의무가 있는 소중한 자연적 유산이고 심각한일인데 남에 나라 이야기인양 그들만의 일인냥 언론과 방송에서는 반짝 이벤트이고 연일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하루 아침에 무엇이든 다해결해줄것 처럼 떠들어 되지만 오직 그곳에는 늘 말없는 자원봉사자와 힘없는 서민들이 의지하며 돕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