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도 넘은 옛 교지를 만나니 그때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학생들 동료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내가 쓴 글이 눈에 띈다. 쑥스럽기도 하다만 또한 반갑다.
“漢江” 한강중학교 교지 제2호 -----1977. 1 발간
‘한강과 나’ 교사 崔 信 子
내가 한강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삼학년 때의 일입니다.
돈암동에서 살던 우리는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 30일, 상도동이라고 하는 이름도 처음 듣던 동리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차를 타고 오다가 보니 시원한 강줄기가 보였습니다. 여름이어서 푸른 강물 위에 뱃놀이를 하는 조각배가 몇 떠 있고 동작동 숲과 모래사장이 어울리어 마음에 드는 풍경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한강, 그때부터 나는 한강과의 인연을 맺은 셈입니다.
이튿날은 9월 1일 개학날이었는데 현재의 제1한강교를 바로 이날부터 새로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리를 다 놓는 1년이 넘는 동안을 강물 위에 띄어 놓은 군대의 쥬브 위에 구멍이 크게 뚫린 철판다리를 이용하였읍니다. 강 건너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리를 건너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됩니다. 다시 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며 하루를 마치는 생활은 그 후 고등학교 3년을, 대학교 4년을 계속되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엄동에도 바람은 내게는 싫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호흡조차 여의치 않은 빽빽한 버스 속에서도 강바람은 용케 알 수 있었고,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한강바람 특유의 청량함이 있었습니다.
다리를 다 놓고 개통한 뒤에도 얼마동안은 죽 걸어서 다리를 건너고 계속 상도동 고갯길을 넘어 숭실대학 앞의 집까지 돌아오곤 했었는데 “윗길동리(上道洞)“ 라는 그 이름이 실감이 나도록 높고 오르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버스 노선이 생긴 뒤에도 삼십분이 넘는 배차를 기다리려면 짜증도 괴로움도 차곡차곡 접어 두어야 했습니다. 매일처럼 만나지는 그 학생들, 그 손님들은 어느 사이 식구보다 더 반가운 형제들이 되고 있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공해가 적든 그 당시에도 그들은 공기 맑은 강 건너를 택한 인생행로의 동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삼년쯤 되어 결혼을 하였을 때 한강변 아파트 단지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이 창 아래 굽어보이는 조그마한 아파트가 다시 한강과의 인연을 이어준 셈입니다.
그때 벌판 아니면 쓸모없는 늪지대이던 자리에 그야말로 강변의 기적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강물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고 저녁녘이면 서쪽으로 짙게 물드는 노을이 삭막한 도시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강가 둑에 나와 강 건너 불빛을 바라보며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는 멋도 하루 속의 즐거움이 되고 남았습니다. 한강다리를 건너는 불빛의 행렬이 강물 위에 달리고 강가에 이야기꽃이 피어날 때는 운치도 있는 새 시대의 새 마을로 손색이 없었읍니다. 길가에 가로수를 우리 손으로 심고 공터엔 잔디를 입히고 버스 노선을 끌어 들이는 활기있는 생활의 번영이 뒤따라 왔습니다.
한강 수위가 위험수위를 육박하던 날, 서울 장안의 불안이 한강으로 총 집중되던 수해 때는 끼니 떼우는 것도 잊고 온 마을 사람들이 강둑에 나와 황하의 물살 위에 떠내려 오는 온갖 잡동사니를 바라보며 소리치고 흥분해 하던 장난같은 며칠도 있었습니다.
그 후로 호화판 아파트가 밀집하고 신천지의 풍경을 낳게 된 현재까지 많은 변화가 실로 삽시간에 이 마을을 휩쓸었습니다. 상점과 상가가 들어서고 학교가 생기고 수없이 많은 병원과 약국들, 동회가, 은행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한강은 바로 앞에서 흐르고 있읍니다만 앞을 가리고 들어선 건물들로 보이지 않고 강은 옛 강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어져 버렸습니다. 수양버들 가로수가 저렇게 아름이 굵어지도록 마을은 많이 변하고 나의 젊음도 많이 사라져 갔습니다.
1973년 3월 1일은 한강과의 또 하나의 인연이 맺어진 역사적인 날이었읍니다. 일천명 학생들과 스물 네 분 선생님들과 함께 한강중학교의 새 식구가 된 것이었읍니다. 즐겁고 기쁘고 그런 것보다 너무도 끈질긴 숙명적 인연이 날 놀라지도 놀랄 수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불교에선 길을 걷는 이들이 옷깃을 스치고만 지나쳐도 인연이라 한다는데 이건 정말로 너무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읍니다. 그리곤 운명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한강 속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 대하는 남학생들은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메웠든 여학생들을 까맣게 지워 버렸고 그들 앞에선 나까지도 잊으리만큼 날 사로잡았습니다. 올려붙이는 거수 경례에 체중이 뚫리듯 시원함이 있었고, 파르스름 빡빡머리에 반짝이는 두 눈들은 한강의 장래를, 아니 한국의 장래를 선명하게 비춰주고 있었습니다. 까만 교복, 보일 듯 말 듯한 하얀 칼라, 얼글을 받치고 있는 목선을 따라 둥글게 잘 아물려진 깃의 선은 참으로 예술적인 선임에 틀림없습니다. 언제 보아도 이가 맞는 한 번도 흐트러지거나 벌어져 있지 않은 깃은 차라리 성스럽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배움이 진실한 것이고 그들이 하고 있는 생활이 성실한 것인 만큼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수없이 교실에 들어서며 바라보는 한강, 기대도 희망도, 슬픔까지도 그 위에 띄어 보는 한강. 아침마다 부르는 ‘한강수 푸른 물결-----’교가 속에 한강의 기개를 굳히는 우리들.
한강은 푸르를 것입니다.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오래도록 푸르고 유유할 것입니다.
이십년을 이어온 한강과의 인연을 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인연이란 전생에서도 내세에도 이어지는 연분이란다면, 아! 꿈에도 잊을 수 없는 한강이여-----
<1976년 11월>
첫댓글 최선생!!!!!!!!! 이 글을 읽으니 ...짠해온다. 가입해서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반가움에 답글을 단다. 나두 여기 [다음]에 보금자리가 있지만 순전히 창고로 사진 보관 태그쓸때 유용하단다. 넌 한강에 얽힌 아름다운 추억에 그저 푹 빠져있음 매일매일이 천국이 되겠다.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품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누리며 사는 네가 한없이 부러워진다. 가끔 방문할게.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