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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자(字) 성징(聖徵), 호(號) 월사(月沙), 보만당(保晩堂), 치암(癡菴), 추애(秋崖), 습정(習靜), 시호 문충(文忠) ● 명종19년(1564) 서울 청파리(靑坡里) 생, 인조13년(1635) 졸, 수 72 ● 배(配): 정경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 ● 묘(墓): 인조13년(1635) 8월 용인 선영에 장사하였다가 인조 17년(1639) 8월에 가평 조종현(朝宗縣)으로 이장, 지관의 말에 따른 것 ● 부조전(不?典)- 영녕사(永寧祠:공을 비롯하여 청호공 휘 一相, 진암공 휘 天輔, 급건공 휘 時秀 모심) ▶등과(登科) ● 선조18년(1585) 22세로 사마시(進士)에 급제 ● 선조23년(1590) 27세로 문과 증광별(增廣別試)에 급제 ▶ 역관(歷官)-예판 9회 등 6조판서 역임, 양관 대제학 2회, 우/좌상 ● 선조23년(1590) 문과 급제,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종9품)에 선발 ● 선조25년(1592) 여름, 왜구가 쳐들어오자(임진왜란) 임금이 자주 공경(公卿: 정승과 판서)를 불러 전쟁 수행을 논의할 때 공을 가주서(假注書: 임시주서인듯, 정7품)로 임명하여 임금을 측근에서 보필. 임진왜란 때 공은 상중(선조26년 12월 1일 부친 삼등공 졸)이었는데 상을 제대로 치루지도 못하고 의주 행재소를 향하다가 성천에 이르렀을 때 세자(광해군)시강원 설서(說書:정7품)에 임몀됨 세자를 따라 명(明)나라에 들어갈 때 사관(史官)에 임명되었으나 경연(經筵)을 주재하기 위하여 급히 소환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정6품), 병조 좌랑(佐郞:정6품), 이조 좌랑 역임. ● 선조30년(1597)에 부친상을 치루고 돌아와 병조 정랑(正郞: 정5품)에 복귀하고 승문원 교리(校理: 종5품)와 한학 교수를 겸직. 명나라 마제독(馬提督)의 종사관으로 남정(南征)하여 전주에 이르렀을 때 다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소환되어 대소 기의(機宜: 상황에 따라 생기는 긴급한 일)와 문서 작성을 관장. 성균관 사의(司議:정4품), 승문원 교리(校理: 종5품), 한학 교수를 겸직하고,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정4품)도 겸직, 사헌부 집의(執議:종3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종3품), 대신들이 주청하여 승문원 부제조(副提조: 정3품) 겸직. 병조 참지(參知: 정3품), 대신(?)이 청하여 비변사(備辨司) 부제조(副提조: 정3품)도 겸직. ● 선조31년(1598)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공조 참판(參判: 종2품) 특진,무술변무(戊戌辨誣)부사(副使) 명에 갔다 와서 호조 참판(參判: 종2품), 예문관 제학(提學:종2품)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종2품) ● 선조33년(1600)호조 판서(判書: 정2품) 겸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 전비) 국장도감 제조(提調: 정2품), 와 지경연사(知經筵事: 정2품) 예조 판서(判書: 정2품), 계속 의인왕후 국장도감 제조(提調: 정2품) 겸무, 세자시강원 우빈객(右賓客: 정2품) 겸직 ● 선조34년(1601) 홍문관과,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으로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정2품) 겸직.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정2품)이 되어 명(明) 조사(詔使) 원접사로 용만에 가서 오래 기다렸으나 오지 않고 병이 나서 평양 영위사(迎慰使)로 옮김. 유영경 등이 모략, 환조(還朝: 조정으로 돌아와))하여 대제학, 빈객, 경연의 직을 사양하여 해직. ● 선조36년(1603)예조 판서(判書: 정2품)에 복직되고 빈객에 다시 기용. ● 선조37년(1604) 세자책례주청사(世子冊禮奏請使) 다녀온 후 언관들이 영상 유영경의 사주를 받아 역관을 늘려 데리고 간 것을 탄핵하여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자청하여 경기도 관찰사(觀察使) ● 선조38년(1605) 조정에서 국(局)을 설치하여 동국시문(東國詩文)을 선집(選輯) 할 때 윤근수, 이호민이 공이 필히 참여할 것을 아뢰어 공은 왕래하면서 참정(參定). ● 선조38년(1605) 경기 감사 임기 만료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2품)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정2품) 겸직, 가을에 과거시(科擧試)를 주관. 영상 유영경과의 불화로 모든 공직을 사양하고 두문불출, 선조40년(1607)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정2품)에 환직. ● 선조41년(1608) 선조 승하로 국장도감 제조(提調: 정2품), 선조대왕의 행장(行狀) 찬, 병조 판서(判書: 정2품), 광해가 의혹과 꺼리는 것이 많아 오랫동안 궁성 경비를 강화해 왔기 때문에 완화할 의견을 폈다가 파면되고, 다시 세자시강원 빈객(賓客: 정2품)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정2품)와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정2품). ● 광해1년(1609) 명나라에서 사제칙사(賜祭勅使) 웅화(熊化)가 오자 접대를 담당.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와서 책례(冊禮)를 선포하니 호조판서 김수로 하여금 접대케 하고 공이 접반(接伴), 예문관과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정2품) 겸직. 실록청 부총재(副摠裁)로써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수찬(修撰), 다시 예조 판서(判書: 정2품)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加資), 이조 판서(判書: 정2품) ● 광해7년(1515) 형조 판서(判書: 정2품), 호조 판서(判書: 정2품) ● 광해8년(1616) 관복주청사(冠服奏請使: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면복(冕服: 왕후 추존을 말함)로 명에 감. 돌아오기 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에 가자 사신 복명후 병을 핑계하고 모든 관직을 사임. ● 광해11년(1619)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에 제수하고 진주사(進奏事)로 명에 갔다가 신원(伸寃)하여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려 할 때 신종(神宗) 붕어하자 공이 청하여 무영전(武英殿)에 행례(行禮) ● 광해12년(1620)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강홍립 투항) 다녀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2품), 공조 판서(判書: 정2품) ● 광해14년(1622) 명나라 감군자사(監軍刺使) 양지원의 접반사(接伴使) ● 인조1년(1623) 예조 판서(判書: 정2품)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정2품)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종1품) 의정부 우찬성(右贊成: 종1품)에 이어 좌찬성(左贊成: 종1품)으로 세자이사(世子貳師: 종1품), 명(明) 사신 왕(王), 호(胡) 두 명나라 책봉조사(冊奉詔使)가 오자 관반사(館伴使),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종1품)로서 예조 판서(判書: 정2품) 겸직. ● 인조4년(1626) 강일광, 왕몽윤 두 명나라 조사(詔使) 관반사(館伴使), 좌찬성(左贊成: 종1품)으로 예조 판서(判書: 정2품) 겸직. ● 인조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 판서(判書: 정2품) 겸직. ● 인조6년(1628) 7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 정1품) 곧 이어 좌의정(左議政: 정1품)으로 세자부(世子傅: 정1품) 겸직 ● 인조12년(1634) 입기로소(入耆老所: 70세 이상, 국가 원로로서 지금의 국정자문위원에 해당) ▶ 공적(功績)과 미담(美談) ● 공에 관한 만사록(輓詞錄) 찬자(撰者) 행장(行狀): 좌의정 문충공 포저(浦渚) 조익(趙翼) 시장(諡狀): 대제학, 우의정 문충공 계곡(溪谷) 장유(張維) 묘지(墓誌): 이조판서 문정공 택당(澤堂) 이식(李植) 신도비명(神道碑銘): 좌의정 문정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외교활동 (사신) - 선조31년(1598)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공조 참판(參判: 종2품)에 특진하여 무술변무(戊戌辨誣) 부사(副使)로 명에 갔다(대성공) - 선조37년(1604) 세자책례주청사(世子冊禮奏請使) 정사(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옴(실패) - 광해8년(1616)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면복(冕服:왕후 추존을 말함)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 정사(正使)로 명에 다녀옴.(성공) - 광해12년(1620) 광해11년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1만 군사가 명나라 원군으로 출정하여 심하전투에서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조기 항복하고 조명군이 대패한 후 명나라에 이를 해명하기위한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 정사(正使)로 명에 다녀옴(성공) 이 때 명나라 신종이 죽고 광종이 즉위하여 명나라 조정은 공을 황제의 즉위식에 하반(賀班)으로 참석토록 허락하였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이례적인 예우였다. 또 좌유덕 왕휘는 공에게 '조천기행시(朝天紀行詩)'를 청하여 보고 스스로 서문을 지어 출판케 하였고, 서승 엽세현등이 이 판본을 가져다가 강남지방에 널리 퍼트리기도 하였다. (귀국 후 권관들이 대간들을 사주하여 공을 탄핵상소 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외사 접반) 월사공이 중국 사람들을 접촉한 사례를 그의 행적에서 찾아보면 ① 선조27년(1594) 공은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으로 외교문서작성을 관장하고,또 중국어에 능통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한편 외사접반(外使接伴)의 일을 많이 했는데 명나라 사헌이 사신으로 왔을 때 원접사 이덕형의 종사관으로 뽑힌 이래 여러 차례 명나라 사신 접대. ② 명나라 경리 양호가 평양에 와서 우리나라 군병(軍兵), 성지(城池), 양도 (糧道) 등 군사관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이, 호, 병 삼조 판서를 불렀으나 조정에서는 그로 하여금 대신 왕래케 하였는데, 공은 원군 장수를 대하는 행동과 접반에 빈틈없이 하면서 우리의 의견을 충실히 전하였고, 또 제독 마귀를 따라 남정하여 전주까지 갔다가 다른 임무 때문에 소환되었다. 양호와의 대화 내용과 행적을 엮어 「양경리첩(楊經理帖)」을 지어 올리니 임금이 명군 장수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어 크게 탄상(歎賞)하였다. ③ 공이 성균관 사예(司藝)로 있으면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고 있을 때 하루는 당직청에 있는데 명나라 양안찰사(梁安察使)가 갑자기 궐 밖에 와서 임금이 접견하려는데 통역관이 없어 공에게 통역 하도록 하였다. 공은 명사와 서로 눈이 마주치면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그 뜻을 임금에게 전하여 한치의 실수도 없었다. 접견이 끝난 다음 임금이 몹시 기뻐하며 "이정구의 재주가 이렇게 훌륭한 줄은 몰랐다"고 하면서 관직을 7계급이나 뛰어 올려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 ④ 월사가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승문원 부제조를 겸하였는데 명나라 장수가 관왕묘(關王廟: 관우의 사당) 낙성식에 임금이 함께 제사 지내기를 청하여 어가가 이미 떠났는데 미처 제문(祭文)이 준비되지 않아 임금이 몹시 당황하면서도 사신(詞臣: 지제교)을 부르지 않고 공에게 제문을 짓도록 하였다. 그자 지늠 제문을 보고 임금과 명나라 장수가 마음에 흡족해 하였다. 일이 끝난 후 공을 병조참지로 영전시켰다. 이후로 모든 예빈(禮賓) 행사 때는 공을 꼭 임금 곁에 있게 하였다. ⑤ 선조31년(1598) 월사가 지은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는 그의 문장이 중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된다.(상세내용 별도 '무술변무주') ⑥ 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에서 고천준, 최정건 두 조사(詔詞)가 왔을 때 공이 원접사가 되어 비로 소 평시의 예에 따라 소홀함이 없이 접반하였다. 원접사로 떠날 때 임금이 방한모를 하사하였다. ⑦ 해1년(1609) 명나라에서 사제칙사(賜祭勅使) 웅화(熊化)가 오자 접반 하였는데 웅화는 공의 시문을 보고"글자마다 당나라 시인(이백, 두보)의 혼이 박혀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 「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부탁하여 써 주었더니 훗날 월사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융숭한 대접과 공무의 편의를 제공했다.(공과 웅화의 인연에 관해서는 '延安李氏이야기'291쪽'妃非則飛'참조) ⑧ 이 외에도 월사가 명나라 사람들과 공사적으로 접촉한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 광해 년( ) 명나라 사신 태감(太監) 유용(劉用)이 와서 책례(冊禮)를 선포하니 호조판서 김수로 하여금 접대케 하고 공이 접반(接伴) - 인조1년(1623) 왕(王),호(胡) 두 명나라 책봉조사(冊奉詔使)가 오자 관반 - 인조4년(1626) 강일광, 왕몽윤 두 명나라 조사(詔使) 관반(館伴) ●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1년 후 조선에 나와 있던 경략 형개 휘하의 병부(明 兵曺) 주사(主事: 실무자) 정응태가 조명연합군의 1차 울산성전투가 끝나고 2차공격을 준비 중에 명군 장수 양호 등과 조선 조정을 싸잡에 20여가지를 무고하여 이듬해 조선관련 5가지(誘倭入犯, 愚弄天朝, 交通倭賊, 稱宗稱祖, 朋欺天子)를 변무하기 위하여 공모하였는데 변무주문에 월사공의 것이 채택되어, 이항복을 정사, 공이 병조참지로 특진하여 부사로 임명되어 명 나라에 가서 황제와 조정 요로에 통쾌히 변무. 이 때 공이 지은 변무 주문은 중국에서 높이 평가 받아 공의 문장이 중국전역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延安李氏이야기 207쪽 戊戌辨誣奏이야기'참조) 이 때 비화 한가지. 칭종칭조(稱宗稱祖) 문제에서 공은 주문(奏文)에서 「소방(小邦: 우리나라) 전세(前世)로부터 국내 신민이 그릇 사존(私尊)하기 위한 인습(因襲)을 고치지 못한 것으로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위법과 거역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썼는데 영의정 유성룡이 " 이 일은 큰 일로 주책(誅責: 엄하게 꾸짖음)이 클 것인 즉 사실대로 자백할 일이 아니다"하며 의 견이 달랐다. 그러나 선조는 "군신(君臣)간은 부자(父子)간과 같은 것이니 어찌 꺼릴 것이 있겠는가"하여 고치지 않고 공이 쓴 원문 그대로 하기로 하였다. 명나라에 가서 변무주를 황제에게 올리고 논의 할 때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중신들을 둘러보며"군(君)을 섬김에 있어서 이렇게 숨기고 꺼려함이 없으니 참으로 예의의 나라다"고 하며 흡족해 하였다. 그 후 명 나라 장수나 사신이 선조를 배알할 때면 모두가 '상주문(上奏文)이 좋은 문장'이라고 칭송하였고, 국내 선비들도 앞 다투어 전송(傳送)하였다. 또 정응태가 무고에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실려있는 조일간의 외교문서에 왜국연호를 대서(大書: 크게 쓴 글씨)하고 명나라 연호를 분서(分書: 주해로 작게 쓴 글씨)한 것을 물증으로 제시한 '교통왜적(交通倭賊)'.즉 조선이 왜적과 은밀히 통교하면서 반명(反明)을 획책하였다는 문제는 변무하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공은 변무주에서 「春秋因魯史所作大書(춘추인노사소작대서) 魯元年其下分註周平王幾年(노원년기하분주주평왕기년) 亦可因此而有疑於尊周之義乎(역가인차이유의어존주지의호) 況其國王關白皆書死尊奉者果若是乎(황기국왕관백개서사존봉자과약시호)」라 하였다. 이를 해역하면 "공자(孔子)가 쓴 춘추(春秋)는 노(盧)나라 사기(史記)인고로 노나라 원년을 대서(大書)하고, 그 아래 주(周) 평왕(平王) 몇 년이라 분주(分註)하였는데 이것도 존주(尊周: 주나라를 존경함)의 의혹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물며 의혹받고 있는 해동제국기에는 그 나라(왜국)의 국왕(國王)과 관백(關白)의 이름까지 모두 사자(死字: 작게 쓴 글씨)로 썼으니 이것이 과연 그들(왜국)을 존봉(尊奉: 높이 받듬)하는 것이라 하겠습니까?"라고 되묻고 있다. 월사는 당시 중국 황제로부터 모든 사대부가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기본적인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공자를 끌어들여 그(공자)가 한 데로 한 것이 조선과 왜국이 은밀히 통교하면서 반명을 획책한 물증이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 반론도 제기할 수 없도록 야무지게 변무하고 있다. 또 해동제국기에 왜왕과 관백의 이름을 사자로 쓴 것을 들어 이것이 왜를 높인 것이냐고 반문한다. 참으로 공의 기발한 착상이요 세심한 관찰력이 아닐 수 없다. ● 폐모론(廢母論) 반대 광해8년(1616) 명에 다녀 온 직후 조정에서는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여론)이 일자 병을 칭하고 두문불출하여 폐모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 이후 광해 기간 내내 당시 실세들의 공격을 받아 늘 위험한 처지에 놓였으나 광해군의 비호 아래 무사하였다. 광해군이 공을 비호한 것은 대명외교 등 그의 정권 유지에 공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 유고(遺稿)-증보문헌비고 (서적류)동국시문(東國詩文)(선조38년, 1605, 경기감사) (저술류)동인제작시부(東人製作詩賦, 선조38년, 1605) (사기류)선조실록개수(宣祖實錄改修, 인조원년, 1623) (유가류)서연강의(書筵講議), 대학강어(大學講語,선조27년, 1594) (문집류)월사집 68권(부록5권 포함) 별집 7권, 총 75권 ● 월사집(月沙集) (내력) 임진왜란 이전의 글은 병화로 분실하고, 저자의 자편고(自編稿)를 졸한 다음해(인조14년, 1636)에 문도 최유해가 공주에서 전집을 목판으로 초판하였으나 50여년 동안에 파손, 손자 매간공 이익상과 당질 지촌공 이희조가 민정중의 도움을 받아 중간을 계획하고 숙종46년(1720) 대구에서 별집 7권을 포함하여 중간 1982년 경문사에서 연세대학교 소장본으로 영인 발간하였고, 199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규장각 소장본을 대본으로 편찬하였으며 2001년에 국역 (장판각 藏板閣) 숙종46년(1770) 증손자 이희조가 월사집을 중간 목판이 대구 용연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일제 1928년 절측의 요청으로 충북 옥천 이원으로 옮겼다가 1987년 가평 상면 태봉리 삼대대제학 묘하로 이전 보관 숙종14년(1688) 제작 원집 63권의 815판, 숙종46년(1720) 제작 별집 7권의 79판, 1930년 제작 연보 2권의 53판, 총 77권 2책의 목판 947판 월사집외에 이은상(李殷相)의 동리집(東里集) 목판 ( )판도 함께 보관 |
장판각 내부 목판 보관 전경 |
(월사집 내용) 서문: 왕휘(汪煇), 강왈광(姜曰廣), 양지원(梁之垣) 이상 明人, 장유(張維),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문 5편 1-18권: 1800여수의 시 수록, 주지번(朱之蕃),웅화(熊化),양지원(梁之垣)등 명나라 사신과 함께 수행했던 이항복(李恒福),이안눌(李安訥), 권필(權?),차천로(車天輅) 등 문필가들과 수창한 것과 사신으로 오가며 접한 장관, 풍물, 세태 등을 보고 느낀 감회를 읊은 사행시(使行詩). 각 권에 <삼사수창록(三木差酬唱錄)> <무술조천록(戊戌朝天錄)> <갑진조천록(甲辰朝天錄)> <병진조천록(丙辰朝天錄)> <경신조천록(庚申朝天錄, 115수)> <동사록(東木差錄)> <빈접록(賓接錄)> <폐축록(廢逐錄,182수)> <권응록(倦應錄,830수)> 등으로 명명. 19-20권: 대학강어(大學講語)-삼사수창록과 상통 21권: 무술변무록(戊戌辨誣錄)-주문(奏文: 조선의 왕이 황제에게 올리는 '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 1편과 정문(呈文) 4편-무술조천록과 상통 22권: 주문(奏文) 13편 23권: 자문(咨文) 16편 24-25권: 계문(啓文) 2편, 게문(揭文) 68편 26권: 연중계사(筵中啓事) 7편, 연중강의(筵中講義) 5편 27권: 계사(啓事) 20편 28권: 의문(議文) 18편 29권: 소문(疏文) 17편 30-32권: 차문(箚文) 60편 33권: 잡저(잡저) 5편, 책문(策問) 8편 34권: 간첩(簡帖)-웅화, 왕휘, 마총(馬?) 등 명 문인과 수답한 편지글 35-36권: 서독(書牘)-이항복,신흠,김장생 등 국내인사들과 수답한 편지 37권: 용인포은선생서원기(龍仁圃隱先生書院記) 등 기문(記文) 12편 38권: 유기(遊記)-유천산기(遊千山記),유각산기(遊角山記),유의무려산기 (遊醫巫閭山記) 등 11편 39-40편: 서문(序文)- 태극문변서(太極問辨序) 등 29편 41권: 발문(跋文)- 회재선생오잠망기당서후발(晦齋先生五箴忘機堂書後跋) 등 9편과 2편의 상량문 42-56권: 비지류(碑誌類)- 신도비명 26편, 묘갈명 23편, 행장 5편, 제문 37편 60-63권: 남궁록(南宮錄)- 9회의 예조판서 국가 전례(典禮)가 문제될 때 개진한 의견 100여편 부록 5권: 23편의 제문(祭文), 33편의 만사(輓詞) ● 대학강어(大學講語): 선조27년(1594) 월사가 30세로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의 강관으로 있을 때 명나라 경략(經略: 원정군의 감독관) 송응창이 정주에 머물면서 강학에 자문을 요구하여 황신(黃愼)과 함께 월사가 선발되어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강론하였다. 이 때 명나라에서는 육상산(陸象山)의 학문이 높이 평가되고 있었고 또 송응창은 양명학(陽明學)을 배운 사람으로 당시 조선에서 성했던 정주학(程周學)에서 대학(大學)의 삼강령(三綱領) 중 친민(親民)을 신민(新民)해석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에 월사는 육상산의 학과 정주학의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명쾌히 구분하여 설명하고 또 선유(先儒)의 설(說)들이 집주(集註)에 실려 있고 그 지론이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송응창의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론 제기하니 송응창이 감동하여 그의 명으로 짓고 판각하여 간행케 한 것이 '대학강어'이며, 종사관 왕군영의 견해가 부기 되어 있어 그 시대 사상과 학문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공이 찬한 선현(先賢)의 비지문(碑誌文) - 영의정 문정공 신흠(申欽) 신도비문 - 이조판서 증영의정 문간공 이수광(李?光) 신도비문 - 중봉 조헌(趙憲) 김포 고택비문(故宅碑文) - 서산(西山) 청허당(淸虛堂) 휴정(休靜)대사 비문 - 영의정 오성부원군 문충공 이항복(李恒福) 묘지문 - 우찬성 증영의정 문성공 율곡(栗谷) 이이(李珥) 묘표 -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행장과 시장 - 우계(牛溪) 성혼(成渾) 시장 -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공의 사부) 제문 ● 신도비명(신도비명)-청음 김상헌 찬 조선 개국 후 문도(文道)가 크게 열렸네 (國朝百年文道大闢) 빛나도다, 아름다운 재걸(才傑) 하늘이 주신 바로다 (赫赫李公厥美天錫) 문강공(李石亨)의 빛난 업적 공께서 알뜰히 이었네 (文康遺業公實接之) 명 벽신(僻臣:정응태)의 참언(讒言:헐뜯음), 해명하니(講我明僻乃薦厥辭) 천자도 감동하여 무사(誣事)를 신원(伸寃)하였네 (乃動天子國誣乃伸) 뛰어난 재주와 책략으로 임금의 신임 날로 새로웠고 (才猷旣顯眷遇日新) 두루 관직 습렵하고 호조, 예조 올바른 판서도 거쳤고(晉陟地部春官正卿) 재앙(폐모론)에 미혹되지 않으니 밝은 식견 더욱 빛나(遇災弗迷神識益彰) 문원(文苑)에 이름 떨치니 문형(文衡)을 잡았도다 (盛之文苑?提其衡) 사류들 흠모하고, 업적 대전(大典)과 사책(史冊)에 빛나(衿紳歸仰典冊煌煌) 손님이 찾으면 관용과 지성으로 맞아 정성을 다하였고(有客我享鳴玉以相) 지극 충성으로 임금을 보필하여 나라의 광영 다하였네(??圭璋爲國之光) 오랑케 쳐들어와 나라 어지러우니 어찌 일이 없으랴 (日入明夷何事不有) 군자 도리 지켜 아무 허물 없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君子何傷履貞기咎) 공의 덕망 해와 달 같이 사방을 비춰 세상을 밝였고 (翔陽麗?品彙昭?) 생명이 경각에 있어도 의리 잃지 않고 분수 지켰네 (首急求舊踐以暖席) 양차의 파도 같은 왜구 침입 나라 운명 위태로웠으나 (大訌奔波國命絲髮) 통달한 공의 변론과 의리에 찬 충성은 위기를 물리쳐(議辯?山榮虜氣自折) 두루 육조 판서 거치고, 우, 좌상에 이르렀네 (從容六官出入貳極) 관직 높아도 먼저 입관하여 배속들 오기 기다렸고 (加額之望衆以爲遲) 만년에 선비들과 도(道) 논할 때 빼어난 식견 보였고 (晩始論道公所優爲) 지조 지키고, 예절 펴고, 옳은 일 아니면 행하지 않네(守志秉禮匪石可移) 옛날 성균관 공부할 때도 청도한 젊음 자랑하였는데 (昔公南曺靑陽載華) 예조판서 지낼 즈음에는 황발(黃髮) 희끗희끗 날렸네 (?公東閤黃髮??) 공에게는 좋은 일도 많았지만 어려운 일이 더 많았고 (原公所嘗九甛十辛) 중국사람(明), 오랑케(淸), 존경하지 않은 이 없었고 (華夏夷人罔不尊親) 집에는 책이 가득하고 백성에게는 은계를 주었네 (有書滿家有惠寄民) 공은 궁양(하늘)으로 갔지만 뜻은 남아 향기를 발하네(播之穹壤結爲淸芬) 금석은 혹시 훼손될지라고 공의 명성은 영원하리니 (金石惑沒公名不朽) 내가 쓴 이 비명도 공의 명성과 함께 영원하리 (余銘之託與公俱壽) ● 월사공의 검소 공은 입조 40년 동안에 전답을 늘이지도 않고, 장원(墻垣: 담, 울타리)과 가옥을 수리하지도 않았다. 공이 졸하자 인조는 근신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또 세자가 친임하여 조상하였는데 세자가 돌아가 관속들에게 말하기를 "이부(李賻: 공이 世子賻였음)는 삼공(三公: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사는 집이 매우 초라하였으니 그 검약한 바는 가히 숭상할 만 하다"고 하였다.(김상헌 찬 신도비문) ● 장릉(章陵: 단종) 수축(修築)과 사문(斯文) 숭상 - 예조판서로 있을 때 영월에 있는 노산군(魯山君:단종)의 묘소를 수축하고 사우(祀宇)를 세워 그 부인과 함께 제사케 하였다. - 용인에 포은서원(圃隱書院: 정몽주)을 세울 것을 주창하여 사액(賜額)과 치제(治祭)와 이름을 칭하지 않을 것을 청하여 윤허 받았다. - 오현(五賢: ?) 종사(從祀: 배향), 율곡(栗谷: 이이)의 증시(贈諡), 우계(牛溪: 성혼)의 무고 신원(伸寃), 복관(復官), 증시(贈諡) 청하고, - 남명서원(南冥書院: 曹植)의 훼손을 금할 것을 청하여 모두 실행되었다. ● 이런 일, 저런 일.(김상헌의 신도비문) - 공은 태어나자 마자 신구(神馬句: 神馬)가 땅에 내려와 천리마의 자태를 가진 것 같았다. 말을 배우면서 문자를 알게 되고 6세에 능히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백가(百家: 제자백가)의 글을 터득하고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곧 외웠다. 인조 13년 72세의 나이로 정침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 저녁에 구름도 없는데 번개가 치고 온 하늘에 적기(赤氣: 붉은 기운)가 가득하였다. 인조 임금이 밤에 공의 부음을 듣고 진도(震悼: 몹시 슬퍼함)하였으며 3일간 철조(轍朝: 조회를 폐함) 하고 소식(素食: 고기, 생선 등이 없이 반찬이 간소한 식사 )하였다. - 공이 7세 때 기자헌(奇自獻: 권모술수에 능했던 사람으로 선조 때 영상까지 오름)이 공과 친교를 맺고자 금대(금대: 비단 띠)를 주었으나 부정한 것이라며 굳이 돌려 보냈다. - 공은 성년이 되어 재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허심(虛心: 마음을 비운 것)으로 사람과 사물을 대하 고, 아속(雅俗: 아름다운 풍속)을 좋아하고, 술자리에서는 담소(談笑: 유모어) 하여 사람들이 더욱 친밀감을 가지게 했다. - 공은 육조판서를 모두 거치고 특히 예조판서를 아홉번 지내고, 양관 대제학을 두 번 맡으면서 예악 (禮樂: 예절), 전장(典章: 제도), 의식(儀式)에 있어 윤색(潤色: 윤이 나게 함)된 바가 많았다. -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의주에 가 있을 때 공이 가주서(假注書)로써 임금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는데 공 의 영자(英姿: 자태)가 뛰어나 자주 임금이 눈여겨 보았는데 공이 기주(記注)할 때는 붓끝이 울고, 시원스러우며, 민첩하여 참으로 볼 만했다.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공이 글 쓰는 것을 내려다 보다가 어느날 어연(御硯: 벼루)이 떨어져 먹물이 공의 옷에 튀겨 황급히 중관(中官: 내시)에게 명하여 씻어주도록 하니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하며 부러워하였다. - 공이 동부승지 겸 승문원 부제조로 있을 때 관왕묘(關王廟: 관우 사당)가 완성되자 명 장군이 왕과 함께 치제(致祭: 제사지냄) 할 것을 청하여 어가가 떠났는데 미처 제문을 갖추지 못했다. 공은 행행(幸行: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가는 것)하는 행렬을 총 감독 중이었는데 임금이 사신(詞臣:)을 쓰지 않고 공에게 급히 쓰도록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선 자리에서 제문을 지어 바치니 임금의 마음에 꼭 맞았다. 이후 채패(綵幣: 비단옷과 폐물)를 내리고 병조참지를 제수했다. - 선조33년(1600) 예조판서로 의인왕후 국장도감을 겸하여 맡아 산릉에 가 있는데 장례 전날 한밤중에 영악전(靈幄殿: 시신을 모신 곳)에 불이 나서 시위 장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관을 꺼내왔다. 백관과 유사(有司)들이 어쩔 줄 모르고 허덕이는데 공이 침착하게 집사관(執事官)에게 명하여 각각 맡은 물건을 가지고 불을 피하게 하고, 낭관을 보내어 임금에게 보고케 하고, 총호사(總護使)와 함께 세자에게 고하고, 제문을 지어 위안제(慰安祭)를 행하여 장례절차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공은 위기에 임해서도 이와 같이 침착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 하루는 공이 경연(經筵)에에 입시하였는데 간원(諫院: 대사간)김상용(金尙容: 김상헌의 백형)이 궁 중의 금기와 왕자에 관한 일 등을 극간하자 임금이 전에 없던 어조로 질책하여 분위기가 몹시 사나워졌는데 이 때 공이 풍자적인 규간(規諫: 사리에 맞게 간함)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임금의 심기가 풀렸다. - 선조36년(1603)예조 판서(判書: 정2품)에 복직되고 총관사(總管使)에 임명되어 관북(關北:함흥)의 원(園: 태조 조상을 모신 곳, 和陵) 시찰하고 귀경 때 풍악(楓岳: 금강산)으로 돌아서 왔는데(이 때 쓴 유고 遊金剛山記 上, 下권이 있음) 강원도 노부(老父) 수 십 명이 도계를 넘어와 스스로 흡곡현백성이라 하면서"상공이 호조에 있을 때 우리 고을을 살려 주었으므로 그 덕을 잊을 수 없다"며 공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며 고수사은 (叩首謝恩: 머리숙여 은혜에 감사함)하고 돌아갔다. - 선조37년(1604) 공이 세자(광해군)책례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실패) 행상(倖相: 요행으로 정 승이 된 사람, 유영경을 말함)의 사주를 받고 언관들이 공이 '함부로 역관을 늘려 데리고 갔다"고 탄핵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은 해당 관청에 계청하여 비준을 받은 것이나 공은 이를 스스로 밝히지 않고 외직(경기감사)을 자청하였다. -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수개월 만에 밀려있던 많은 문서와 업무를 말끔히 처리하였다. 녹봉의 일 부를 쪼개어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연천에 있음)을 개수하고, 왕씨(王氏)의 후손을 찾아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으며, 죽주(竹州: 죽산)와 수원의 산성을 개수하고 기문을 썼다. - 명나라 사신 태감 유용 왔는데 접반을 맡은 호조판서가 중국 귀인은 접대하기가 끝이 없는 계곡과 같다며 "태창미(太倉米: 나라에서 관리하는 쌀)를 다하여 십만금을 예축하여야 한다"고 하니 공이 "웅칙사(웅화)는 공탁(空?: 빈 손)으로 돌아갔으며 탁지부(度地部: 호조)에 남은 돈으로 수응(需應: 수요에 응함)하기에 족하며, 지금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을 구척(救瘠: 구제)하는 것이 목전에 있음으로 구황 정책을 먼저하고 조사 접대는 우려할 일이 아니다"하니 모든 사람들이 의심하였으나 공의 말대로 되었다. - 광해군이 생모를 후(后)로 추존하려 할 때 공은 비(妃)로써 별묘(別廟)로 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 아들여지지 않았고, 선묘(宣廟: 선조 사당)에 부묘(?廟: 신주를 옆에 봉안함)할 때 공이 예의사(禮儀使)가 되어 조천(?遷) 절차를 의논할 때 공이 "민생이 바야흐로 급한즉 가요(歌謠: 음악)와 결채(結綵: 화려한 장식) 등 화려한 행사는 정지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광해는 불열(不悅: 불쾌)하여 공을 반용반불용(半用半不用: 반은 쓰고 반을 쓰지 않고)하였다. -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국구 김재남이 사사되어 조정이 대비의 상복 문제를 논의 할 때 공은 "부자의 윤리는 가히 폐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상복을 올렸으나 임금이 서궁에 조알(朝謁: 아침 문후)하지 않으니 공이 내의원 제조로서 동료들을 거느리고 서궁에 위문을 드리니 간당(奸黨: 간사한 무리)들이 공을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고 예조를 해직하고 중추부로 옮기게 하였으나 공이 극구 사양하고 또 대제학등 본직과 겸직을 모두 사임하였다. - 인조10년(1632) 인목대비 상 때 공이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산능에 갔으나 병이 심하므로 집으로 돌아오니 임금이 어의를 보내 위문하였다. 20여회아 급장(急章)을 올려 사임을 청하니 체직하여 판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병이 조금 나을 즈음에 인정전(仁政殿)에 벼락이 떨어져 공이 임금 앞에 등대(登待)하여 말하기를 "이변(이변)에 응하고 재앙을 푸는 도리는 인주(人主: 왕)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한결 같은 마음은 그 본원이 징철(澄澈: 속이 다 들여다 보이도록 맑음 )한 것이니 매사에 성실하면 하늘도 가히 감동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서 경연에 나아가 공의 선조이신 문강공(文康公: 이석형)의 저서 '대학연의집략(大學衍議輯略)'의 설을 추연(推衍: 추가로 해설함)하면서 경외(敬畏: 공경하고 두려워 함)를 숭상토록 하고, 일욕(逸慾: 감추고 욕심냄)을 경계토록 하며, 내치(內治)를 엄밀히 하고, 민정(民政)을 정찰(正察)하는 등 4개 조를 진주하였는데 이는 병이 깊어 약을 먹으면서도 시종 임금을 알뜰히 보필하고자 함이었다. 임금도 그 뜻을 알고 포답(褒答)으로 털옷을 하사하였다. ● 성품괴 인품(신도비문) 천성이 호탕하고 시원시원하며, 재주가 뛰어났지만 거만하거나 사납지 않았고, 화이(和夷: 사이 좋고 베품)한 가운데서도 정대(正大)함을 요체로 삼았다. 지성으로 문사(文士: 글하는 선비)를 좋아하여 혹시 한 사람이라도 가려지지 않을까 근심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대하면 춘양(春陽: 봄볕)과 같이 온화함을 느끼면서도 버릇없이 굴지는 못하겠다 하였다. 또한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다. 유명인사와 많이 사귀었으며 사람들이 하나같이 공을 '본 받을 만하다'하였고,.문숙공 정엽(鄭曄)이 당대의 인물을 논 할 때 공을 수위(首位)에 두었다. ▶ 월사공 시조(1수) 님을 믿을 것가 못 미들슨 님이시라 미더온 時節도 못 미들줄 아라스라 믿기야 어려오랴마는 이니밋고 어이리(청구영언144, 해동가요119) (해설) 님(임금: 광해)을 믿겠는가 못 믿을 것이 님이로다 믿어 온 시절도 (사실은)못 믿을 것으로 알고 있었도다 믿기는 어렵지 마는 그렇다고 또 아니 믿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 광해조의 난정 속에서 자신의 처신하기 어려운 처지와 광해군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