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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주교구 주교좌본당 원문보기 글쓴이: 경 아우구스티노
축성, 축복, 봉헌
'하느님께 복을 비는 것'만을 축복이라 하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강복'이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서, 우리가 하느님께 '복'을 빌 때에 현세적인 복만을 비는 이른바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현세적이든 초월적이든 모든 복의 근원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온갖 생물과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실제로 교회는 인간 자체는 물론 하느님 경배와 현세 생활에 필요한 온갖 사물을 두고 하느님께 복을 빌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곧 성사와 준성사의 거행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 예식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축복'이 바로 지난달에 설명한 셋째 의미의 축복으로서, 전례에서는 '축성'과 '축복'의 형태로 나뉩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축성'과 '축복'과 '봉헌'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고 거의 다 '축성'으로 써 왔기에, 이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가며 구분하여 보겠습니다.
축성(Consecratio)
'축성'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어떤 사물을 세속의 일반적인 용도에서 떼어 내 신성한 용도로만 쓰도록 분리하거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하느님을 섬기는 경배에만 봉헌하는 것을 일컬으며, '성별'이라고 옮겨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별이나 봉헌은 구약성서에서부터 흔히 나오는 것으로, 그 예식은 대개 분리와 정화(또는 성화), 봉헌의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탈출기(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시나이 산의 계약을 비롯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의 사제 임직 예식(출애 29장)이 그러한데, 그 축성의 표징을 안수와 도유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의 축성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태어나는 모든 맏아들을 대신하는 레위인들의 봉헌(민수 8장)과 스스로 서원을 하는 나지르인들의 봉헌(민수 6장)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람들만이 아니라 성전과 제대, 맏물과 전리품 등의 성별 예식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구별 없이 쓰이는 이 말은 한번 성별되고 나면 영구히 신성한 것 또는 거룩한 사람으로 남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축성'과 '축복'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이 있었겠지만, 여기에서는 현행 [주교 의전서](Caeremoniale Episcoporum)와 [축복 예식서](De Benedictionibus)를 바탕으로 몇 가지만 구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고 그냥 '축성'이라고 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성찬례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는 축성입니다. 사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의 잔이다." 하고 말할 때에 빵과 포도주는 그 표징이 가리키는 의미만이 아니라 바로 실체가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성체성사에서 이루어지는 이 실체 변화는 동서방 교회가 항구하게 믿어 온 정통 신앙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축성이 이루어지는 성사가 성품성사입니다. 성직자들, 곧 주교와 신부와 부제는 성품성사로 축성됩니다. 이 축성의 주요한 표징 또한 안수와 도유입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우리는 주교 성성(Consecratio, 成聖)을 비롯하여 성직자의 축성도 그저 서품(Ordinatio)이라고만 합니다.
축성과 축복의 구분이 그 중요성에서 반드시 우열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차이를 두어 왔습니다. 축성과 축복으로 세속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가 되거나 하느님의 보호에 맡겨지는 새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예식에서는 축성이 축복보다 더 장엄합니다. 축성의 통상 집전자는 주교이고, 축복의 통상 집전자는 신부입니다. 축성에는 언제나 성유가 쓰이지만, 축복에서는 주로 성수가 쓰입니다. 축성으로 들어 높여진 사람이나 사물의 새로운 지위 또는 상태는 영구적인 것이고 축성 예식은 다시 되풀이될 수 없지만, 축복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축성과 결부된 은총도 축복으로 받는 은총보다 훨씬 더 많고 크다고 합니다. 축성된 사람이나 사물을 더럽히면 전에 독성죄(瀆聖罪)라고 하였던 신성 모독의 죄를 짓는 것이지만, 축복을 받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경우에는 언제나 그러한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전에 로마 [주교 예식서]에는 주교 축성과 더불어 네 가지 사물, 곧 고정 제대, 제대석, 성당, 성작과 성반의 축성 예식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발행된 [주교 의전서]와 [성당 봉헌 예식서]를 보면, 주교 축성은 서품식에 들어가 있고, 성당과 제대는 봉헌(Dedicatio)으로, 성작과 성반은 축복으로 되어 있습니다.1) 따라서 지금 성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축성은 크리스마의 축성만 있습니다. 주교가 성목요일에 축성하는 세 가지 성유 가운데에 견진성사를 비롯한 여러 성사에 쓰이는 '축성 성유'(크리스마)2)만 '축성한다'고 하고, 병자 성유와 예비신자 성유는 '축복한다'고 합니다.
축복(Benedictio)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사와 달리, 축복은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제정한 준성사입니다. 물론 미사 끝의 강복이나 장엄 축복을 비롯하여 모든 성사 예식과 성무일도 등의 여러 전례에서 축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성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축복 예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축복의 통상적인 집전자는 신부라고 하였지만, 중요한 축복 예식은 주교가 집전합니다. [주교 의전서]에 수록된 예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도원 대원장의 축복, 동정녀 봉헌, 수도 서원, 성당 머릿돌(부지)의 축복(기공식), 성당과 제대의 봉헌, (임시) 성당과 (이동) 제대의 축복, 성작과 성반의 축복, 세례대의 축복, 공적 경배를 위한 십자가의 축복, 종의 축복, 묘지 축복 등입니다. 또한 교구장 주교로서 베풀 수 있는 교황 축복 예식3)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부는 교황이나 주교에게 유보된 것들4)을 제외한 모든 축복을 줄 수 있습니다. 부제는 법으로 부제에게 명시적으로 허가된 축복들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축복들은 주교나 신부의 위임에 따라 또는 그 사안의 성격에 따라 평신도도 줄 수 있습니다. 1984년에 발행된 [축복 예식서](우리말로는 1986년에 발행)에서는 집전자의 자격 규정이 많이 완화되어 평신도까지 여러 가지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축복 예식을 집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일 때에는 그 가운데에서 가장 윗사람이 집전하여야 합니다. 축복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 7,7 참조).
축복의 대상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가정이나 부부, 어린이, 병자, 선교사, 교리 교사, 순례자들처럼 직접 사람을 축복할 때는 물론이고, 신자들의 각종 활동이나 건물, 전답과 목장이나 온갖 동물들,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이나 성물의 축복, 신심 증진을 위한 묵주나 성의 등의 축복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을 위한 축복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삶과 거기에 관련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며, 교회는 또한 그 모든 일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축복을 베풀어 줍니다. 인간 생활의 온갖 사건들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신앙 감각으로 새로운 사건이나 사물들에 대하여 축복을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물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도록 간청하고 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의식이 없으면 축복 예식은 단순한 기복 신앙 또는 천박한 미신이나 주술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축복 예식의 표준 구조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 그리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찬양과 천상 도우심의 간청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모든 축복이 하느님의 말씀 선포에서 그 뜻과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여 줍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 선포를 중심으로 권고나 격려, 강론 등으로 참석자들의 믿음을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 부분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의 말씀 곧 교회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이 부분에서는 신자들의 기도도 덧붙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와 성수 뿌림, 분향, 십자 성호 등이 축복의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때에는 간단히 십자 성호를 긋는 것만으로 축복을 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 없이 간단한 표징만으로 축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사제가 묵주에 십자 성호를 그어 주고 이를 '방사'(放赦)라 하였으나, 이 말도 '축복'으로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쓰는 묵주나 다른 성물들도 본당 공동체 등에서 어떤 날을 잡아 공동으로 축복 예식을 거행하는 일 또한 바람직하겠습니다.
축성, 축복, 봉헌
구체적인 의미로 이러한 말 쓰임새를 정리하여 보자면 이렇습니다. 성체성사와 성품성사에서는 축성이라는 말을 쓰지만, 성사 밖에서는 '축성 성유'(크리스마)만을 '축성한다'고 합니다. 거의 모든 준성사의 경우에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성당과 제대 등의 '축성'은 '봉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축성식은 성전 봉헌식이라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만 임시 성당이나 경당 또는 이동 제대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성작이든 묵주든 모든 성물은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준성사에서 일컫는 축성과 축복의 우열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만, 교회법전 초판에서 '축성 생활'(Vita Consecrata)이라고 하였던 말을 용어위원회의 심의와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봉헌 생활'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법위원회가 번역 시안에서 '봉헌 생활'로 옮겼던 것을 수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축성 생활'로 바꾸었고, 이를 다시 '봉헌 생활'로 바꿀 때에도 남녀 수도회 장상 협의회 또는 연합회의 의견을 물어 바꾸었습니다. 장상 연합회 등의 지도부가 바뀌어서 의견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용어위원회의 심의 결과와 주교회의의 결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축성'(consecratio)이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서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성별'(聖別)의 개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데에다 실제 용례에서도 '축복'(benedictio) 등의 용어와 혼동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법전에서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로 번역하여 또 다른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수도 생활은 본래 축성 생활보다 봉헌 생활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보아, 교회법전 번역 이전까지 수도 생활을 일컫던 좋은 말인 '봉헌 생활'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라틴 말의 consecrare는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현대 이탈리아 말에서는 consacrare, dedicare, deificare, divinizzare, immortalare, eternare, santificare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여 쓴다. 이를 consacrare로만 알아들어 '축성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다. 또 '수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더 좁은 개념이고 이에 대해서는 'vita religiosa'라는 또 다른 말이 있으므로, vita consecrata를 '봉헌 생활'이라 한다.
<각주>
1) 성당과 제대의 축성이 '봉헌'이라는 말로 바뀌었지만 그 예식이나 의미에서는 축성과 동일합니다. 성당 축성 예식서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두 가지를 다 '축성'으로 옮겼으며, 경당이나 이동 제대의 '축복'은 '강복'으로 옮겼다.
2) '축성 성유'에 관한 용어 설명`:'크리스마'(미론)가 곧 기름이고 성유이므로, '크리스마 성유'라는 말은 잘못된 용어일 뿐 아니라 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이며, 축성을 위하여 사용하는 성유가 곧 크리스마이므로, '크리스마 성유'를 '축성 성유'로 바꾸어 쓴다.
3) 교구장 주교나 그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성직자는 자기 교구에서 한 해에 세 번 대축일 같은 날에 미사를 집전한 다음 그 미사에 참석하고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한 신자들에게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구를 통하여 축복하며 교황의 이름으로 전대사를 베푼다. 이 축복을 교황이 직접 수시로 베푸는 축복과 함께 '교황 축복'이라고 한다.
4) 예를 들자면, 관구장 대주교가 착용하는 견대(Pallium)는 교황만이 축복할 수 있으며, 수도원 대원장의 축복은 주교만이 할 수 있다.
- 강대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행정실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