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읍내 왜놈거리 본정통(本町通) 이야기
이렇게 배고픔 속에서도 나는 한사코 학교에는 다녔다. 그때 우리 학급에서 칙칙한 무명베 바지저고리의 한복을 입은 사람은 나 한 사람이요 신발도 짚신이 아니면 소리(草履)를 신고 다녔으며 해방되어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양복이라는 것을 입었다. 선친께서는 양복입고 머리 깎은 놈은 모두 왜놈을 흉내 내는 것으로 여기셨다. 이때 식량 사정이 어려워서 우리 학급에서 도시락을 먹지 못하는 학생이 반수가 넘었었다.
이 무렵 우리 학급에 운동화 두컬레가 배급으로 나왔었는데 그 중 한 컬에를 담임선생님이 나한테 주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서 저녁에는 잠을 자지 못했었다. 그때 일본인 담임이 바뀌어 한국 사람이 담임으로 왔는데 그 분이 시게미쓰 강꽁(重光漢根) 신한근(辛漢根) 선생님이다. 신한근 선생님은 이리농림학교(裡里農林學校)를 나오셨다 했으며 수업시간이면 <삼국지(三國志)>를 즐겨 읽어주었고, 체조시간(체육시간)이면 의례히 씨름을 시켰었다. 특히 옹정 씨름과 대초리 씨름이 유명하다면서 옹정학생과 대초리 학생을 씨름을 붙여 놓고 좋아라고 하셨는데, 나는 옹정출신이라 언제나 나가서 씨름을 하였지만 힘이 부쳐 제 몫을 해내지 못했었다. 당시 행안면에는 국민학교가 없다가 막 설립되던 때여서 행안면 아이들은 모두 우리학교로 다녔었다. 신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스모(일본의 씨름)선수였다고 한다.
유일하게 꾀죄죄한 한복 바지저고리에 신발도 없는 옹정 사는 촌놈인 나를 선생님께서 측은하게 눈여겨 보시고 운동화 교환권을 특별히 내게 주신 것 같았다. 간신히돈을 마련 교환권을 들고 왜놈의 요시오까상점(吉岡商店)에 갔더니 6~7세 미만의 어린아이나 겨우 신을 수 있는 운동화를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은 것을 어떻게 신겠느냐며 큰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아무리 말하여도 왜놈 주인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래서 나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하여 왜 이렇게 하찮은 신발 하나에도 나는 복이 없는 것일까 하고 한탄하였다.
한일합방 후 왜놈들은 부안읍성 안의 옛 조선의 국권을 상징하는 관아(官衙 :군수의 집무처)와 객사(客舍 :임금을 상진하는 闕牌와 殿牌를 모신 건물), 기타의 공해(公力 :관아에 딸린 부속 건물)들을 가뭇없이 깡그리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지배자들이 군림하는 군청, 경찰서, 우편소, 신사당, 금융조합 등이 들어섰으며 그 앞의 웃 장터거리 일대를 이른바 본정통(本町通)이라 부르고 이 본정통을 중심으로 하여 왜놈들의 상점이나 요리집 등이 자리하여 경제권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본정통이라는 말은 혼마찌라는 일본말로 제일 번화한 중심거리라는 뜻이다.
부안의 객사 이름은 부풍관(扶風館)이었는데 고을에서 임금을 간접적으로 모시는 일종의 궁궐 성격의 건물인데 1926년에 굳이 그 객사마저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군청을 지은 것이 그 단적인 예인데 이웃 고을에 비하여 부안만이 유독 심하게 훼철되어버려 지금 옛 관아 등의 건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왜놈들에 빌붙어 적극 협력하였던 인사들, 즉 옛 관아의 이속들(吏屬 :향리, 아전들)과 그 후예들의 주체성 부족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일제는 옛 관아들을 모두 없애버리고는 관아 옆에 있는 내아(內衙 :고을 수령의 사택)를 헐고 그 자리에 그들의 신사(神社 :일본인들의 開國神을 모셨다는 사당)를 세웠다. 그리고 부안초등학교 동편 끝 매산메 공동묘지 옆에 왜놈들 절을 짓고 일본인 삼택(三宅)이라는 자가 일본식 불교를 포교하였는데 조선 사람들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덕천 마을에 있었던 신씨(辛氏)의 한옥을 옮겨지은 이 절집은 해방 후에는 한때 부안초등학교의 사택으로도 사용하였으나 부풍율회에서 이를 매입하여 지금은 부안의 시율풍류객들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에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본전통 거리
군청의 맞은편에서부터 왜놈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군청의 정문 앞에 금융조합이 있었고, 서편으로 그 무서웠던 경찰서가 있고, 경찰서 앞에는 왜놈 의사 관야(官野)가 운영하던 관야병원이(후에 봉래병원) 있었다. 경찰서 바로 옆 지금 공공도서관 자리에는 왜놈이 경영한 고급 요정 ‘마루모야’와 술집 ‘모리’가 있었다. 그 앞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택시회사격인 인력거집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버스정류장인 안전자동차부와 우편소가 있었으니 이 일대가 관공서 지대였다. 자동차부 앞 관야병원의 옆에 아이스케키집이 있어서 인기였는데 꼬챙이에 꿰어진 아이스케키 한개에 2전씩(100전이면 1원) 하여서 비싸서 쉽게 사먹지 못했었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면서 유일한 조선사람 정한수씨의 서림당양약방이 있고, 그 앞에는 왜놈의 사또상점(佐藤商店)이었으며 그 맞은편으로 철물들을 파는 중진상점(重津商店)이 있었다. 지금의 낭원다방 자리에 제일 큰 왜놈 상점 요시오까상점(吉岡商店)이요 그 맞은편에 마루하찌상점(丸八商店)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왜놈들이 부안의 상권을 지배하고 있었다. 왜놈들 거리가 끝나는 남문거리 근처에 소화극장(昭和劇場)이 있었는데 이는 이영일씨의 둘째아들 이병식씨가 지어 운영했던 유일한 극장이었다. 극장 뒤 옛 동초등학교 운동장이나 금일여객 일대는 모두 논이었으며 그 건너로 경찰서장 관사가 있었으며 관사 앞에 있는 공동우물의 물맛이 부안읍내에서 제일 좋다고 하였다. 극장 앞을 지나 동편으로 100m쯤 가면 숲정이인데 여기에 전교생 50명 내외의 왜놈 아이들의 소학교가 있었다. 숲정이는 이전까지는 남문 밖 애장터여서 혐오지대였는데, 이때에도 아름드리 고목들 4~5그루가 왜놈 소학교 주변에 남아 있었다.
이 본정통 거리는 왜놈들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던 거리다.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상점은 거의 없었다. 이 왜놈거리가 옆에 시장을 끼고 있어서 부안읍내의 중심거리요 제일 번화한 상가 거리였는데, 경제권은 완전히 저들이 쥐고 있고 중국인 화교들이 3~4집 있었는데 포목전과 중국요리집(청요리)이 아니면 빵집이 고작이었다. 1932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부안의 인구는 89,871명인데 비하여 일본인의 가옥 수는 189호에 인구는 763명으로 남자가 412명, 여자가 351명이고 중국인은 32호에 136명이었다. 이들 일본인의 대부분이 부안읍내에 살았지만 줄포에도 살았는데 한일합방 후 초기 20여 년은 경찰서가 줄포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 외에 백산과 평교에도 일부 살았었다. 기름진 농토를 수탈한 척식, 불이 등의 농장 관리인들이다.
나는 왜놈들이 사는 거리에 갈일이 거의 없지만 설탕가루나 연유(煉乳) 그리고 석유 등을 사려면 부득이 요시오카 상점이나 중진이 상점에 가야 했었다. 어머니께서 유도가 부실하여 동생들이 암죽으로 컸기 때문에 그 심부름은 언제나 내차지였었다. 특히 조선 사람들의 상점에는 설탕가루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30년대 후반에는 이영일씨가 설립한 부억택시회사 하나가 지금의 신용조합 자리에 있었는데 운전기사는 한판수씨였다고 하며 옹정의 삼천석 부자 조종택도 검은 자가용을 굴리며 겨울이면 엽총을 메고 사냥을 다니던 시절이다.
전쟁이 말기에 이르면서 물자가 귀해져 고무신, 운동화, 담배, 설탕, 광목, 석유, 비누 등은 마음대로 살 수 없는 귀한 물건이 되었으며 간혹 배급이 나오기는 하였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요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은 비싸서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 마을 33호 130여 명에게 배정되어 나오는 배급품의 양은 광목 한 통, 고무신 3~4컬레, 설탕가루 2~3근, 비누 5장, 석유 1통쯤이 고작인데 항시 제비뽑기를 하였지만 그것도 1년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실은 이보다는 많이 배당되었을 터인데 위의 높은 관리들로부터 마을의 구장과 애국반장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떼어먹고 나니 밑바닥의 풀뿌리 인생들은 얻어먹을 것이 모자라 항시 허덕이며 배가 고팠다.
당시는 초롱불을 켜고 사는 세상이라 특히 석유가 귀하여 밤이면 겨우 잠자리를 볼 때만 잠시 불을 켜는 실정이어서 석유배급이 나오면 병을 들고 애국반장네 집으로 가서 방의 수에 따라 반병, 한병씩 또는 한병 반을 타다가 아껴서 써야 하였다. 초롱불도 켤 수 없어서 피마자기름, 들기름을 접시에 부어 심지를 박아 불을 켰고 그도 없어서 돼지기름까지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소나무 굉이 관솔불을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니 원시시대로 돌아간 삶이었다.
조선 사람들에게 몇 가지 배급품이 돌아오기까지는 관계자들에 의하여 중간에서 이리저리 다 새어나가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배급품이 나올 때마다 주로 제비뽑기를 하였으며 꼭 필요한 물품은 암시장에서 비싸게 구해야 했는데, 이 시기에 막내 동생 형부(炯溥)가 태어나니 유도가 넉넉지 못한 어머니께서는 암죽에 넣을 설탕을 구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구장네 집과 담당 읍직원의 집에 몰려가 뒤지니 쌀이며 설탕가루며 광목, 석유, 비누 등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왜놈들에게 빌붙어 그들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해주었던 일부 공무원이나 왜놈들의 비위를 맞추며 친밀하게 지낸 친일적인 일부 인사들은 별 어려움 없이 잘들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