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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랑과 슬픔의 역설적 미학
박철 시집 「그림자놀이」
◆ 임노순(시인, 문학평론가)
1.
시대가 시를 앞질러가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말은 시가 세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물
론 시가 세상을 앞질러서 인간과 자연을 이끌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건 꿈일 뿐이다. 왜냐하
면 역사상 시가 세상을 지배한 시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런 시대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인은 시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
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으로 밥이 되지도 않는 시
를 쓰고 있다. 문학작품이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가
능성의 표현이라면, 시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도 전
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이다. 그 알량한 가능성 때
문에 시인은 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시의 시대를 이루려
면 작품은 언제나 독자를 위해 생산되어야 한다. 독
자가 원하는 시를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잠들어
있거나 무딘 감성을 자극하여 보편적인 감동을 주어
야 한다. 보편적인 감동을 주려면 시인은 세상읽기
에 빼어난 눈과 가슴을 지녀야 한다. 세상읽기란 방
송, 신문을 통한 뉴스 읽기가 아니며 전문서적을 통
한 지식증대도 아니다. 시의 시대에 있어 리더는 당
연히 시인이 된다. 시인에게는 우리말과 글의 정확
한 구사능력은 물론이려니와 역사의식과 철학을 아
우르는 시정신이 있어야 한다. 시정신이 없는 시인
이 꿈꾸는 시의 시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자칭, 타칭 시인이 양산되고 있는 지금 모든 시인
에게 시정신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게다. 나름
대로의 변명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원리
에 의거한다면 원하지 않는 제품, 불량이거나 조악
한 상품은 도태될 터이지만 시는 예외적이다. 끊임
없이 시인은 배출되고, 시는 쏟아진다. 대중가요 가
사에도 못 미치는 시가 양산된다면 시는 정신의 구
원이 아니라 황폐의 매개일 뿐이다. 그래도 희망적
인 것은 좋은 시, 세상을 읽을 줄 아는 건강한 눈과
가슴을 지닌 시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잡석 속에서
발견하는 보석처럼 그런 시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의 글가운데 단한 줄의 좋은 시구(詩句) 가,
한 권의 책 속에 한편의 감동적 시가 있다면 그 글을
쓴 이는 성공한 시인이라는 말처럼 감흥을 불러일으
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성공적인 시인이 있다. 시집
『그림자놀이』를 펴내는 박철이라는 시인이다.
새
한 마리
날갯짓 마다
그리움 싣고
남쪽으로 간다
붉은 황토
파릇한 보리 싹
갯냄새 그윽한
나루터
어머니 산소
할미꽃 피고
그 곁에 누워계신 아버지
피 토하듯
새빨간 동백 한 송이
가슴 속에
툭
떨어지는
내 고향 남쪽
그곳으로
날아간다
-시 『향수』 전문
간결한 언어구사력 못지않게 화자를 ‘새’ 로 치환하
여 고향을 향하는 마음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주창한 객관적 상관물의 용
법과 C. D. 루이스가 권유하는 ‘언어로 그려내는 그
림’ 을 완성도 높게 그려냈다. 누구에게나 있는 고향
이지만 피치 못해 잊고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이 작
품은 큰 울림의 감동을 줄 것이다. 바로 보편적 감동
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수작이다.
2.
세계적으로 거의 무의미하고 무용한 공식 등단절
차가 우리나라에서는 계속 이뤄지고 있다. 능력 있
는 작가를 발굴하고 인정한다는 구실로 신춘문예,
추천, 신인상이란 이름으로 제도화하고 있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허명을 좋아하는 사이비 시인을 남발
하고 말았다. 이 엉터리 틀 안에 갇힌 시인들의 작품
은 일반 독자를 향하지 않고, 시인 자신이나 제도권
안의 시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박철은 이런 제도권과는 무관하게 인터넷 카페 ‘하
얀마음 하얀미소’ 를 통해 인터넷 독자를 향한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가입회원이 5만 명에 육
박하고 일일 조회 엄청난 사이트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읽힘성이 높다
는 것을 증명한다. 시집『그림자놀이』 에서 두드러
지게 돋보이는 쉽고 편안한 일상어의 사용을 들 수
있다. 무리한 이미지 구사를 위한 비틀림이 없는 시
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아가야!
아가야!
너 참 예쁘다!
아〜〜〜〜앙
울음소리가 대답이다.
-시 『우주』 전문
‘인간은 소우주다.’ 란 명제는 철학적이다. 왜 인간
이 우주를 담은 작은 형체인가에 대한 규명이 따라
야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운 주장과
논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는 설명이 아니라 표
현이라는 점에서 산문과 구별되는데, 표현의 특징은
증거가 내재된 주장의 제시에 있다. 화자는 거대한
우주를 관찰한 뒤 그 특징으로 다양한 ‘소리’ 에 관심
과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
리가 우주의 모든 소리의 시작과 같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철학적 사유와 달리 예쁜 아기가
태어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주의 소리를 들은
것이고 ‘우주 = 예쁜 아기 울음소리’ 라는 은유적 표현
으로 ‘인간은 소우주다.’ 란 철학적 명제를 재해석해
냈다. ‘아가야’ ‘예쁘다’ ‘울음소리가 대답이다 ’라는
가장 보편적인 일상어로 표현해내는 능력은 신선하
다 못해 신기하다.
일상어 표현능력 말고도 박철의 탁월한 읽힘성은
평이한 소재의 선택을 들 수 있다. 그의 눈에 포착된
대상은 다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글감이 고갈되
어 시를 못 쓰겠다는 시인을 자주 만난다. 이쯤이면
초등생 일기쓰기의 기본도 모르는 무능의 극치이다.
인간과 세상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듯 모든 대상은 시
인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분명히 변화된 모습이다.
변화하는 대상을 포착하고 예감하는 일이 시인의 임
무이자 권리이다.
박철의 능력은 하나의 소재로 다양한 시를 쓴다는
사실과 포착된 대상이 다 시의 소재가 된다는 점에
서 그 가치가 있다. 제목만 봐도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시가 6편이나 된다. 4부에서는 16편 모두 길을 대
상으로 다른 시를 쓰고 있다. 읽힘성의 특징으로 많
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박철에게 있어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그가 과거지향의 시를 쓰는 것 같지만
반드시 현재와 미래를 언술하기 위한 과거는 시간적
장치일 뿐이라는 점이다. 과거지향의 시는 대부분
후회와 반성으로 일관해 독자들에게 외면당하고 있
다. 시가 대중가요 가사만 못하다는 소리가 그래서
나왔다. 최소한 박철은 오늘의 제도권 시가 왜 독자
들에게 외면당하는가를 알고 있는듯해서 미덥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다
등신불, 그 순고한 모습
생명의 본질이 아버지로부터
이어오고, 가는 것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도
한숨도 모두 돌려주고
홀연히 떠나는 것
가볍게, 가볍게 해야 멀리 날수 있는 것
시작의 순간으로 다시 가는 것일까?
아버지의 혼이 나에게 머물고
아들에게 전해지는 천리를
기쁨도 반쯤, 슬픔도 반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당신의 온정.
오늘 나에게 다가와
희망의 싹으로 자라고
당신이 새삼 그리워지는 건
내가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ㅡ 시 『등신불』 전문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본 것은 과거이다. 그러나 아
버지의 죽음으로 ‘가볍게, 가볍게 해야 멀리 날수 있
는 것 / 시작의 순간으로 다시 가는 것’ 임을 깨닫고
‘기쁨도 반쯤, 슬픔도 반쯤 /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것이라는 현재의 삶에 대한 이치를 얻었다. 마지막
두 행 ‘당신이 새삼 그리워지는 건 / 내가 아들을 바라
보는 순간이다’ 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미래지향이며 시 『등신
불』 은 결국 다음 세대에 아버지가 될 아들에게 주
는 좌우명과도 같은 시가 되는 것이다.
3.
박철 시에는 대상을 바라보는 밝은 눈과 대상을 포
용하는 따뜻한 가슴이 확실하게 보인다. 5부로 나누
어진 시집 『그림자놀이』 의 시들은 크게 나누어 가
족이야기, 고향이야기, 타향이야기, 길, 자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족과 타인을 동일한, 동등한
관계로 바라보고 있으며 타향에서의 일탈이 아니라
제2의 고향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대를
얻게 된다. 그러한 건강성은 자연조차 인간과 하나
임을 역설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대나무로 담장 만든 뒤뜰
감나무 그늘아래
오롯이 놓여있는 장독대
정화수 올려놓은 섬돌위로
밤하늘 별빛 총총히 내려앉고
어머니의 두 손은 벌써 화롯불이다.
“터줏대감님
시월상달에 모든 일 잘 돌봐 주시고
박씨 가중에 말끝마다 향내 나고
웃음마다 꽃이 피고
낮이면 물을 맑히고 밤이면 불을 밝혀
삼천리 서서 구만리 돌봐 주시고
동서남북에 팔도강산을 다녀도
박씨 가주 실수 없이 해 주시고
남대감은 져 드리고 여대감은 여 드려서
불어나고 늘어나게 해 주소서”
빌고 비는 기도문은
새벽어둠을 뚫고 창공에 메아리친다.
마음속에 모진광풍 담아두고
자식 주위엔 꽃과 향기만이 맴돌게 한다.
고운 심성 사랑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그 온기로 자식은 눈물겹다.
항아리처럼 큰 마음씨
독개 그릇에 나누어지고
서러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이
자식들 키워 보내고 슬픔에 겨워 우는 그 마음
오늘 닦는 항아리에서 빛난다
끝없는 사모의 정이
오늘따라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은
손수 달인 햇간장의 진한 맛이
그리워서다
ㅡ 시 『항아리』 전문
살아계시던 돌아가셨던 어머니는 영원히 가슴에
내재하신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인륜이다. 현
대인에게는 그 사랑이 엷어지고 있으며 폐륜도 나타
난다. 항아리는 언제나 볕이 잘 드는 마당 한편에 있
는 듯 없는 듯 어머니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새벽이
면 그 곳에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가족의 안녕과 행
운을 기원하며 두 손 모아 기원했다. 여기까지는 근
대까지 이어온 우리 민족의 역사이자 민속이다. 그
러나 대다수 젊은 현대인들은 전설로만 알고 있다.
간절한 기원과 믿음이 종교인들만의 의식행위로 굳
어졌지만 우리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는 생활의
일부였다. 과학만능의 시대에도 종교가 번성하듯 우
리 삶의 8할은 그분들에 의해 성장했으므로 어머니
와 할머니의 기원과 믿음은 계승되고 확산되어야 한
다. 이런 전통을 알리고 계승하는 몫이 문학인에게
도 있으며 그 것이 세상을 읽고 알리는 일 중에 하나
이다. 그 임무를 박철은 시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에도 항아
리와 정화수 등의 자연적 상관물과 관계 맺는 탁월
한 능력을 보여준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항상 살갑던 어머니
큰아들 하늘나라 보내고 시름시름 하더니
시나브로 사시랑 되어
겨울나무 같던 어머니
굴타리 오이가 몸에 좋다고
흙 묻은 손 쓱쓱 무지르고
건네는 어머니의 거친 손이 그립습니다
아들 온다는 소식에
노루잠 자며 기다리다
댓바람에 뛰어나와 얼싸안고
부비는 까칠한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
어머니 !
가만히 불러 봅니다
애옥살이 하면서 싫은 내색 없이
웃음으로 키운 아들
이제 당신을 그리매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계신 님
물빛 맑은 모습 그립고
눈으로 말하고
느낌으로 알았던 지난시절
쌓인 그리움 어이 할까요?
햇빛 찬란한 오월 하루
어버이날은 지나가고
카네이션 한 송이 쳐다보며
눈물만 떨구네요
ㅡ시 『카네이션 한 송이』 전문
항아리와 다르게 카네이션은 서양의 문화이다. 허
례와 허식보다는 간편한 감사의식으로 우리 삶에 정
착한 외래문화이지만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박철은
외래문화의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
다. 『카네이션 한 송이』 는 시의 핵심어가 아니라
소도구로만 쓰고 있다. 이 시의 핵심어 또한 어머니
의 사랑과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다.
4.
가족이야기 가운데 유독 어머니에 대한 시가 월등
히 많이 나타나는 한국시단(韓國詩壇)의 경향에 비해
시집『그림자놀이』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많다는 것
이 대상의 폭이 넓고 깊이가 남다른 근거요 장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아내와 자식에 대한 시도 고르게
선보인다. 그의 시선이 넓고 깊다는 것은 『울아버
『별』,『아내는 보약이다.』등에서 잘 나타난
다. 어머니의 사랑만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리
움과 사랑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눈물보다는 침
묵으로 ‘하늘한번 쳐다보’거나 ‘부산으로 아들 보내
면서/사라지는 명신호 한참을 바라보며 서 계시’기만
하셨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도 견줄 수 없는 큰 사랑
이었음을 깨닫고 있으며, 그것을 과거에는 무심하게
또는 서운하게 지내왔지만 화자가 자녀를 거느리게
된 오늘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보며 독자로 하여금
아버지로서의 자세를 추스르게 하는 이중적 효과를
얻고 있다.
그리움으로 다가오고
슬픔으로 멀어져가는 아버지
꾸지람 속에서도 정이 흐르고 다정히 손잡아 주시고
머리 쓰다듬던 아버지
아들 딸 낳아 보니 부모심정 안다고
용희 서울로 떠나보내던 날
하늘한번 쳐다보고,
부산으로 아들 보내면서
사라지는 명신호 한참을 바라보며 서 계시던 아버지
눈이 오면 생각나고
바람 불면 그리워지고
술 마시면 어느새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한 나
ㅡ시 『울아버지』부분
박철 시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별』은 슬픔에 대해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능청스
럽고 아름다운 가운데 눈물을 나게 하는 능숙한 표
현이 담겨 있다. 죽은 누이를 ‘별 따려 하늘로 올라’
갔다고 진술하며 저승에서도 할머니와 어머니, 누이
와 함께 ‘미리내에서 / 보름달 띄어 놓고 / 손잡고 노래
부르며’ 놀고 있다고 태연히 말하지만 독자가 슬픔을
행간에서 금방 캐낼 수 있는 지독한 역설의 시이다.
하늘이 땅에서 놀고
할머니의 마당에는 별들이 논다.
모깃불 타올라
둥근달 얼굴 감추고
코 흘리며 뛰놀던
조무래기들 웃음소리
별들이 흩어지고
반딧불 하나 날아든다.
별 따려 하늘로 올라간 누이
미리내에서
보름달 띄어 놓고
손잡고 노래 부르며
별은 별로 이어지고
옛이야기
꿈틀거리며
아름답게 피어난다.
하늘이 참 곱다.
할머니, 어머니 얼굴
별빛으로 가슴에 안긴 밤
할머니의 마당에
웃는 얼굴 하늘을 난다.
ㅡ시 『별』 전문
아내에 대한 사랑도 그 무게나 층위가 다르지 않
다. 아내가 차려내는 밥 한 숟갈 뜨며 ‘사랑 한 숟갈’
이라거나 고춧가루가 ‘꽃보다 아름’ 답다며 ‘아내는
보약이’ 라고 진술하는 표현은 지나친 미화요 과장으
로도 보일 수 있으나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가족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미루어 조금도 흠이 되지 않
는다. 과장법도 시적 표현의 한 방법으로 이해한다
면 오히려 건강한 웃음을 얻는 계기가 될 성싶으며,
그의 다른 시 『단미』 나 『밥상』 을 보면 그가 얼
마나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아내가 차린 밥상
사랑 한 숟갈
건강 한 숟갈
번갈아 나를 유혹 한다.
외식 보다
집 밥이 최고라며
무나물, 콩나물 무침, 산채 나물
줄지어 행보 한다.
청량고추 송송 썰어 넣고
조선된장 자박자박 끊인 청국장
꽃보다 아름다운 고추 가루
콧노래 흘러나오고
간결한 맛 나를 홀린다.
비틀비틀 거린
지난밤 춤사위가
북어 한 마리 잡고
아내의 손끝 매운맛 휘휘 저어
속 풀어 주는 해장국
응어리진 간장이 녹는다.
아내의 정성
생각보다 맛있게
봄빛 색깔 가득 담고
봄 향기 풍기면서
웃는 모습으로
향기롭게 몸속에 젖어 든다.
ㅡ시 『아내는 보약이다.』 전문
물덤벙술덤벙 으로 보낸 지난 시절
미운 정 고운 정 지고 온 십자가
손 모아 기도드리고
아름다운 열매로 맺혀진 아들, 딸
고맙고 감사해서
묵주 잡고 바치는 님의 노래
하늘 끝 어디에서
햇무리로 나타나
마음자리 깊게 심어지고
잔잔한 향기로
바람의 길 따라 다가오네.
ㅡ시 『단미』부분
5.
시집『그림자놀이』에 나타나는 박철의 가족에 대
한 사랑이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타주의적(利他主義
的)으로 나타난다.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사
는 인천생활에 염증을 느끼거나 일탈을 꿈꾸지 않
는다. 다만 이곳에서도 똑같이 황토밭에서 겨울을 이
겨내고 자라나는 청보리가 보고 싶고 그곳에서 부는
똑같은 바람을 맞고 싶은 것이다. ‘비 오는 소리에
꽃이 피’ 는, 그때 ‘대장’ 이었던 『유년시절』의 고향
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소외계층
의 사람에 대한 시를 읽으면 알 수 있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까?
자식은 몇 명일까? 마누라는 있는 건지?
<중략>
아침이면 밝은 태양과 함께 어김없이
좌판은 펼쳐진다.
황씨 ! 언제 술 한 잔 하면서
살아가는 얘기 들어볼 날이 올까?
ㅡ시『도장 파는 황씨』부분
아! 사랑하는 이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
당신이 예수로, 석가로 다가오고
현실은 넝마주이로 아님 폐휴지 줍는
하찮은 인간이라도
그의 눈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무지개로 찬란히 피어나고
정과 정 통해서 흐르고
이웃이 내게 다가와
아름다운 제물포 거리에 살아가는
군상들의 흐름
ㅡ시『휴지 줍는 김씨』부분
목도장 한 개에 2천원을 받는 『도장 파는 황씨』
와 술 한 잔 나누고 싶어 하며, 장애인인『휴지 줍는
김씨』 를 예수나 석가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가식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임은 그의 다른 시『시장을 거닐
며』 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옷깃에 남겨진 / 가난의
흔적 보듬으며 / 바람이 함께 울고 가는/ 소리를 / 나
는 들었다’ 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바람처럼 떠도
는 풀잎보다 더 못한 이들의 울음소릴 듣고, 그들 모두
‘스쳐온 인연의 사람들’ 로 기억하며 ‘우산 하나 준
비하’ 지 못한 걸 안타까워한다.
달이 태양을 삼키는 날도 있고
산이 바다에 빠지는 날도 있고
비도 오고
눈도 오고
바람이 불면
비오는 날
스쳐온 인연의 사람들
얼굴 그리며
우산 하나 준비하면 넉넉한 걸
홀로 걷는 길
당신이 있어 행복 하다.
ㅡ시『홀로 걷는 길』부분
구름도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어가고
노루 한 마리
연못에서 목축이고 가는 산방
아이야!
술 익거든
박 거사 불러 소리 한번 듣고
동네잔치 하자구나.
ㅡ시『일속산방도』부분
화자 자신도 외로운 타향에서의 삶을 그들과 같이
『홀로 걷는 길』 로 인식하며 함께 걸어가길 원하고
있다. 그는 ‘앎도/명예도/지위도 / 작은 빛에 만들어진
초라한 형상 / 큰 빛 다가오면 / 소멸되고 마는 것’이라
며 ‘세상 일’ 이『그림자놀이』 라고 단정 지었다. 그
림자놀이에서 벗어나는 길도 알고 있는 듯하다. 가
진 자는 마음을 비우고 베풀어야 하고 못가진 자들
은 어개를 맞대고 ‘우산’ 을 함께 쓰고 걷는 일이다.
박철의 시에 등장하는 화자가 길을 걷다가 최종적
으로 도달하고자하는 세계란 공간적, 지리적 의미의
고향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소통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곳이며 그곳이 행복의
세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며 ‘술 익거 / 박 거사
불러 소리 한번 듣고 / 동네잔치’ 할 수 있는 『일속산
방도』 의 공간일 터이다. 그런 공 간이 아직은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일지라도 박철이라는 시인
에 의해 이루어지고 기에 그의 독자는 분명 행복
한 사람들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박철의 시는 쉽고 아름다우며 자연스럽다. 시집
『그림자놀이』 에서 그의 시가 빛나는 것은 우선 세
상을 읽는 건강한 눈과 따뜻한 가슴을 지녔다는 점
이다. 그리고 언술에 있어서 역설적 미학이 돋보인
다는 점이다. 즉 사랑을 사랑이라고 직설적으로 말
하지 않고 슬픔을 내세우며, 슬픔은 슬픔 자체를 보
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기 위한 역설적
장치로 내세웠다. 보다 더 주목을 받는 것은 ‘서사적
서정(敍事的 抒情)’ 에 있다. 체험적이거나 경험적 진
술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한동안 한국시단에서 신종
플루처럼 유행하던 세칭 리얼리즘 시와는 거리가
있다. 현대시 이론에서 중요시 되는, 교과서적 표현
법의 하나인 ‘언어로 그리는 그림’ 의 단순성을 극복
하기 위해 적절한 서사(敍事)를 개입시켜 읽힘성
을 높이고 있다.
『인생길(旅路)』 에서 ‘고목은 바람에 팔 하나를 /
하늘나라에 보내야 / 의젓해 보인다’ 다고 했던가. 시
집『그림자놀이』 를 처녀시집으로 내놓는 박철은 머
지않아 시의 팔 하나를 내어주고 이 땅의 큰 시인으
로 우뚝 서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