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제철 가난한 사람들의 직장새마을금고 - 손 관 형 - |
글쓴이 : 김기명
조회 : 15 |
(공장새마을 사례) 인천제철 가난한 사람들의 직장새마을금고 인천제철(주) 공장새마을지도자 손 관형 본 사례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서 손 관형 지도자가 연수생들에게 직접 발표한 내용을 글로 풀어 쓴 것으로 통신교재 8호에 수록된 것을 간추려 옮겼습니다. 제 고향은 황해도 옹진 입니다. 두메산골 가난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살림은 어려웠지만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제 나이 17세, 1.4후퇴 때 고향을 떠나면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홀로 전전하다가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제대하기까지 8년이란 세월을 군에서 배우고 생활하였습니다. 제가 군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그렇게들 좋아하는 휴가 한번 가보지 못하고 제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외롭게 지내는 것을 본 친구들의 주선으로 강원도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인천에 자리 잡게 된 것은 한발이라도 고향 황해도 옹진 가까이 있다가 빨리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고향이 가깝다고 갈 수도 없었고, 친척이 없는 저에게는 어느 누구 하나 찾아 가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때는 저에게 가족이라곤 우리 부부와 갓 돌이 지난 아기가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기가 갑자기 병이 났습니다. 엄마는 허둥지둥 소아과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입원을 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입원비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아빠가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입원비가 없다는 것을 안 의사는 ‘입원실이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구하러 하루 종일을 헤매다 돌아와 보니 아내는 울고 있었습니다. 아빠답게 돈을 척 내놓으며 병원으로 가자고 할 돈이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입원비가 없어서 제대로 치료도 해보지 못하고 이틀 만에 그 아기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젊은 나이고 어려운 속에서였지만 그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죽었다고 생각할 때 가슴은 더욱 아팠습니다. 저는 타향살이의 서러움, 고향의 그리움을 뼈 속 깊이 맛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라도 평소에 저축을 해야 하겠다고 뼈저리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60년 지금 제가 근무하고 있는 인천제철에서 직원모집 광고가 났습니다. 저는 인천제철에 가서 이력서를 내고 시험을 보았습니다. 이때 시험관이 당신은 무슨 일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는 것도 없고 그저 무엇이든지 돈만 많이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합격이 되었습니다. 그때 한 달 월급이 3만 환이었습니다. 비로소 우리 가정에도 일정한 수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직장이 생기고 보니 저축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더욱 컸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한 달 수입의 반씩을 꼬박꼬박 저축하였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만 하면 나는 잘 살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 부부는 악착스럽게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가계부를 계속 쓰고 있습니다. 두 식구가 얼마나 먹는다고 남이 자는 시간에 새벽 네 시만 되면 일어나서 1km나 떨어진 콩나물공장을 찾아가서 콩나물을 씻어주면 떨어진 콩나물대가리 외에도 좋은 콩나물을 한 보자기씩 줍니다. 이것을 가지고 와서 좋은 콩나물은 팔고 떨어진 것을 부식으로 생활을 하니 남의 눈에 흉하지도 않고 생활에 보탬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5년을 저축을 하니 사글세방에서 15만 원짜리 내 집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내 집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어느 듯 직장생활도 7-8년이 되어 회사와 동료들에게 정이 들대로 들었는데 같이 근무하던 직원들이 하나 둘씩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거의가 다 빚 때문에 퇴직금을 타서 빚을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은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직장에도 몰아쳤습니다. 공장 안에서도 사설 계가 성행하여 어려운 사람이 먼저 곗돈을 타고 제대로 내지 못하여, 계돈을 안 낸 한두 사람으로 인하여 전체공장의 분위기가 나빠집니다. 또한 자녀들의 입학기만 되면 학자금 때문에 가불신청이 600만원씩이나 쏟아집니다. 회사는 어려운 속에서도 가불을 해주나 그 가불한 돈은 1-2개월에 떼어서 정리하기 때문에 그 후 생활은 점점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학자금이나 갑작스럽게 당하는 가족들의 질병 등이 발생할 때는 사채인 고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해서 진 빚은 이자에 이자가 붙어 그 빚을 정리하기 위하여 회사를 그만두는 동료가 속출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을 같은 직장에서 고생하다가 빚에 시달려 사표를 내고 나가는 친구들은 백지 한 장 내던지곤 인사조차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저는 안타깝기 한이 없고 답답하였습니다. 또한 저자신의 지난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퇴근길에 몇몇 친구들을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그 동안보고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이것이 어찌 남의 일이냐? 우리 주위에는 없는 사람도 많지만, 있는 사람도 있으니 작은 것이라도 모아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일을 좀 해보자하고 시작한 것이 직장금고인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때가 1969년 6월 23일이었습니다. 처음 30명이 모여 1,000원씩 모아 3만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신감에 사로잡혀있는 그 사람들은 이 뜻있는 사업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저축할 돈이 어디 있느냐? 목돈 만들어 누구 좋은 일 시켜주려고? 그 손 관형이네 집이 얼마짜리나 된 다더냐? 하는 식으로 비웃었습니다. 또한 회사의 경영자나 관리자들의 이해부족으로 협조가 잘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기업이고 회사업무 아닌 다른 일로 회사 안에서 돈을 만지는 일을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회사간부들이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을 지겠느냐? 회사의 책임이 아니냐? 하고 따지는데 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이 들 때는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왜? 내가 같은 직원으로서 같은 보수를 받으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어려운 조합원들이 몇 푼의 대부금을 받아들고 생기를 찾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다시 힘을 내어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이 근본적인 취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차트도 여러 번 만들고, 보고도 여러 번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임원의 교류가 잦은 것이었습니다. 새로 와서 이해 못하는 임원에게 열심히 설명하여 어느 정도 반허락이라도 받아놓으면, 또 다른 임원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하며 겁을 펄쩍 내는 임원도 있었고, 호통을 치는 임원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회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속에서 회사 안에서의 어려움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이 구석 저 구석으로 쫓겨 다니며 일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었다면 전체 근로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 이외의 어떤 조직도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집어서는 집에서 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못마땅한 표정 속에서 이 눈치 저 눈치를 받아 가면서도 우리들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매일 퇴근 후에도 밤이 늦도록 임원회의를 하고, 조합원들을 설득시켜 서로 믿고 서로 도와서 잘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열심히 교육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교육을 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푼돈을 저축하여 몇 만 원쯤 되면 이것도 목돈이라고 찾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이 교육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직장이고 다 그러하겠지만 무슨 교육 무슨 교육해서 좀 많아요. 더욱 어려운 것은 일과시간외에 하는 교육이라 더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꼭 받아야할 교육이 있으니 안전관리교육은 전 직원이 꼭 받아야하는 교육이지요. 특히 안전관리교육은 동일직장에서 오래 근무하는 사람이면 매년 받는 의무적인 교육이기 때문에 이 시간을 할애하여 직장금고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면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듣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의 불신풍조는 누구의 책임입니까? 믿어야할 사람이 서로 믿지 못하고 나를 믿어주지 않으면 서로가 못사는 것이 아니냐 하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애를 쓴 결과 1970년에는 조합원 320명에 저축실적 91만원에서, 1974년에는 조합원수 680명에 저축실적 1,700만원으로 조합은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농촌과 도시에서는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고 있을 때 우리 회사에서도 공장새마을운동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 회사에서도 새마을연수원에 입교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먼저 교육을 가야하느냐 하는 대상문제로 논란이 구구하였으나, 이때 일선감독자들이 먼저 받기로 하고 각 공장 직장들부터 새마을연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때 제3기생으로 입교하여 말로만 듣던 새마을운동을 교육을 통하여 배우고 느끼게 되어 ‘하면 된다.’는 신념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새마을연수원에서의 교육은 너무나도 나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었습니다. 전부가 다 해야 할 일이고 또한 하고 싶었던 일이었습니다. 막상 수료하고 공장으로 돌아와 보니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이틀 밤을 생각한 끝에 같이 교육을 받은 8명의 지도자와 함께 30명의 단위공장지도자를 중심으로 새마을분임반을 편성하였습니다. 먼저 공장새마을운동의 점화사업으로 30분 일찍 출근하기, 환경개선하기, 고철 줍기 등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비웃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는 같은 지도자 중에서도 새마을운동이 밥 먹여주나 하는 식으로 거부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끈기 있게 설득하고 토의를 통하여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보는 사람이 인사하기, 화 안내기, 명령 안 하기, 입원환자 병원 방문하기, 남이 싫어하는 청소하기 등을 우리 지도자 분임 반에서 솔선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도자분임 반을 편성하여 각 공장 감독자인 직장들이 스스로 모여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10년이나 20년 가까이 한 공장에 근무하면서도 서로 관계되는 업무이외에는 모르고 지나던 사람들이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고 협조하게 되니 회사업무를 처리하는데도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생산 공장에서 자동차를 한번 쓰려면 배차신청을 하고 결재가 나야 차가 나오던 것이 이제는 전화 한 통화로 자동차는 굴러오고, 일을 하는 동안에 서류는 구비되어 정리되니 능률적인 작업을 수행할 수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도자들은 공장새마을운동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도로확장공사나 지붕개량 등은 농촌에서나 하는 사업으로 알았는데 우리공장에서도 환경개선사업을 시작해 보았습니다. 공장 안 비포장도로 길이 100m, 폭12m 공사비 204만원의 포장공사를 과외시간을 이용하여 17일간의 자체공사로 마무리하고, 새마을 제1로 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단장하면서 170만원의 원가절감을 하게 되자. 사장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금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77년도 새마을사업계획을 수립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협동사업으로 병원방문, 불우이웃 돕기, 스스로 일하는 자조사업으로 새마을 제2로 포장공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 우리의 힘으로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새마을운동의 힘이 뒷받침된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줄만 알았던 사장님께서 수원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을 수료하고 나오신 후, 새마을교육을 강화하여 300명의 직원들이 연수원을 수료하면서부터 상하간의 인간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으며 근로자의 복지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저희회사 사장님께서 새마을연수원을 나오신 후 달라진 것이 있으니 종전에는 과장급이상 간부사원들은 식사시간이 되면 여직원들이 식사를 날라다주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연수원을 나오신 후에는 손수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을 받게 되자, 이것을 본 간부사원들도 모두가 줄을 서서 밥을 가져와 직원들과 같은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게 되니 우선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또한 사장님께서는 매일 30만평이나 되는 넓은 공장을 순시할 때는 승용차를 두고 걸어서 다녔습니다. 이를 본 근로자들은 원가절감의식을 새로이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장님께서 수시로 공장을 순시하면서 개인면담도 하고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니 작업자들의 근무의욕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저희 회사가 새마을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은 사장님의 적극적인 뒷받침아래 새마을지도자 분임 반을 중심으로 전 사원이 참여하는 96개 새마을분임반 운영이었습니다. 분임 반들은 자기분야별로 생산성향상, 공정개선, 품질향상, 물자절약, 환경개선 등을 실천하기 위하여 월 2회 이상 분임토의를 실시하고 있으며, 각 공장별로 새마을회관을 마련하여 분임토의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수시로 분임토의장을 찾아와 분임반원들을 격려하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분임 반에서 토의된 내용은 매일 2개분임 반씩 13시부터 13시40분까지 전 간부사원들과 분임 장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발표회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토의 발표된 내용이 회사운영에 직접 반영된 결과 1976년도에 원가절감 실적이 20억에 달했으며, 1977년에도 15억 원을 상회하게 됩니다. 우리공장에서는 요즈음 새로운 말이 나왔습니다. ‘야! 빠르다 빨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마을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느냐하면 분임토의에 직접 참관하신 사장님은 그 진지한 모습들을 보고 분임토의에서 채택된 사항은 우선 처리해주도록 특별지시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구매전표가 돌아가도 무슨 새마을분임반이라고 확인이 되면 이것은 우선 구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마을사업이 빨라지고 우선권이 생기게 되니 새마을분임토의가 안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분임반 중에서 우수분임 반은 매월 첫 주 월요일 합동조회에서 시상을 하고 있어 많은 분임반이 상금을 타게 되니 이전 같으면 이 돈으로 한잔하자 하는 소리가 앞섰을 것인데, 이제는 그와 달리 분임반 활동에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각 단위공장별로 새마을기금 만들기 운동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금을 만드는데 는 상금만으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폐품을 모으기로 하였습니다. 그 전에는 청소시간이면 쓸어 모아 폐유를 부어가며 2-3시간씩 불태워 버리던 것을 이제는 각 공장마다 폐품수집운동을 전개하여 빈 박스, 빈 부대, 용접봉상자, 포장 끈까지 태우지 않고 심지어는 라면봉지와 담뱃갑 모우기함까지 설치하여 모든 폐품은 매월 새마을과를 통하여 팔게 되면서 3만원에서 많을 때는 10만원씩 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기로 공장 같은 데는 80만원, 중소형 공장 같은 데는 60만원씩의 자체기금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은 각 공장 지도자 명의로 직장금고에 입금되어 저축실적이 날로 증가하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공장새마을운동의 산 증거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공장새마을운동의 저변 확대와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지도자들은 새마을교육을 이수한 지도자와 직장(職長)들로 8명의 강사진을 편성하여 자체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제1단계 교육으로 직장, 반장, 분임장급 228명에게 새마을정신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교육과목은 1. 새마을운동의 의의와 필요성 2. 농촌새마을운동과 도시새마을운동의 비교 3. 내가 느낀 새마을운동과 내가 해야 할 일 4. 분임토의의 필요성과 토의방법 5. 공장새마을운동 추진 후에 우리들이 좋아진 점 등 다섯 과목으로 실시하였으며, 저는 내가 느낀 공장새마을운동과 내가 해야 할 일, 분임토의의 필요성과 토의방법이라는 과목으로 교육을 하였습니다. 더욱 이 교육에서 효과가 큰 것은 분임토의 방법에서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분임토의야말로 민주주의의 실천도장이며 인간계발(啓發)을 위한 산 교육장이기도 합니다. 벙어리도 말을 한다는 곳이 분임토의장입니다 처음에는 꿀 먹은 벙어리모양 눈만 껌벅 껌벅 하고 앉아 있다가도 어떤 문제가 제기되면 자기 말을 못다 할세라 앞을 다투어 발언을 하고, 심할 때는 언쟁이 오고 갈 때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해가 잘 안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각 분야별로 자기네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직접 작업자들이 모여서 토의하기 때문에 잘되고 못되는 것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이렇게 토의해서 찾아낸 문제점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개선하게 됩니다. 무슨 교육, 무슨 교육해도 이 새마을분임토의와 같이 세밀하고 실천력 있는 교육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장구호를 “모든 일은 하는 방향으로, 되는 방향으로, 부정을 없애고 긍정적인 일꾼이 됩시다.”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실시한 새마을정신교육을 전 직원에게 실시하여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렇게 공장새마을운동의 기운을 타고 일기 시작한 저의 직장금고는 1976년 말 현재 조합원수 1,500명에 저축실적 1억2천만 원에 도달하였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보람도 느꼈습니다. 지난여름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낮선 목소리로 누가 찾아왔습니다. 자던 눈을 비비며 나가보니 우리 조합원 최 병순씨- 나이 50에 일선 부원료 공장에서 일하는 분이었습니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말문을 열지 못하고 서 있었어요. 다시 물었더니 부인이 급성복막염으로 인천기독병원에 있는데 수술비 3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려가 보니 환자는 인사불성이요, 의사의 말은 수술을 해보아야 알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조합에서 긴급대부로 30만원을 대부하여 수술을 마쳤습니다. 며칠 후 병원에 들르니 그 아주머니는 아픈 몸을 움켜잡고 일어서며 내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깡마른 손과 마주잡은 손에는 보이지 않는 뜨거운 인정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나도 지난날을 생각하며 같이 울었습니다. 새마을지도자로서의 고생 속에서 처음 맛보는 보람이었습니다. 그 후 공장에서는 이 소문이 한입 두입 건너 전해지니 이제는 아기만 아파도 찾아오고 전셋집만 늘려도 찾아오며 약혼을 한다, 결혼을 한다,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 상의를 하니 이제는 일명 인생복덕방이 되었습니다. 이 작은 사례가 이제는 이웃 직장과 지역에도 알려져 지난번 인천시가 주최한 새마을성공사례 발표회에서 인천시내 지역 및 직장 새마을지도자와 새마을부녀회장 동장들을 모시고 이 말씀을 드린 후부터 각 반상회마다 소문이 퍼져 이제는 반상회 고문도 하고 있습니다. 각 동 단위 부녀회장들도 집으로 직장으로 찾아와 금고운영에 대한 문의를 하고 있으며, 몇몇 직장에서는 지도교육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되니 공장새마을운동을 하는데도 크게 힘이 되었습니다. 공장 안에서는 폐품을 모으고 푼돈을 저축한 것이 1억2천만 원이나 되니, 이것은 2천명 사원 1인당 8만9천 원씩 돌아가는 셈입니다. 연말에는 직장금고 이익금을 배당해주고 있는데 그 동안 연평균 20%의 배당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축 1억2천만 원이 문제가 아니고, 그 돈을 어떻게 모았으며 또한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 돈은 모두 종업원들에 대한 대부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월2000원 짜리 사글세 사는 어려운 종업원들로부터 중간 관리 층에 이르기까지 긴급한 사정으로 조합을 찾아오는 사람은 언제나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고리채정리, 병원비, 학자금, 주택자금 등으로 대출된 돈이 4억7천만 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 대출은 신용대출로서 동료 1-2인의 보증만 세워서 대부 신청을 하면 조합원들은 수시로 모여서 심사하여 긴급사유 순서대로 승인하여 주며 최고 대출액은 80만원, 상환기한은 36개월로 되어 있으며 이자는 월 2%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어나는 돈은 여수신 업무 외에도 조합원들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인천제철에서는 1976년 2월5일에 공장 중심지에 새마을소비조합을 설립하고, 우리들이 모은 돈 중에서 1천만 원을 투자하여 생활필수품을 공장도 가격으로 구입한 후, 실 경비만을 제외하고 염가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현금이 아니고 조합원 통장만 가져오면 외상으로 살수가 있습니다. 하루 평균 300명이 거래를 하고 있으며 매일 30만 원 정도가 거래되어 월 900만원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새마을소비조합이 없을 때는 어려운 조합원들이 한 달을 외상으로 살려면 동네 구멍가계에서 눈치를 보아가며 제값보다 비싸게 사던 것을 이제는 돈이 없어도 마음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기쁨을 새마을소비조합이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사업계획을 세워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집안 일손을 덜어 주는 새마을세탁소를 개점하였습니다. 우리 회사는 철강회사라 일꾼들의 옷에 땀이 안배고 기름이 묻지 않으면 일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 땀 냄새나고 기름 묻은 옷을 집으로 가지고 가면 어떤 부인은 아이들과 동네가 창피해서 밤에 세탁을 하고, 골목길에서 말린다는 이야기는 그대로 실화였습니다. 그래서 세탁소를 개점하고 두 사람의 어려운 직원가족을 채용하여 한 벌에 100원씩으로 하였더니 하루에 60벌씩 밀려 미처 처리를 못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이 소식을 듣고 세탁기계와 탈수기 등을 지원해 주어 또 하나의 어려움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모은 돈은 힘이 있어서 이렇게 지원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두 가지 가정과 연결시켜 보람된 생활을 하게 되니 저축의욕은 날로 늘게 되고 직장분위기가 좋아집니다. 공장 분위기가 좋아지면 생산성은 절로 높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공장새마을운동이요, 공장새마을운동의 성공은 저축을 장려하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축하고 이자가 늘고 대부상환으로 조합자산은 빠르게 증가하게 되니 1976년도 사업목표 1억2천만 원은 무난히 달성되었으며 77년 사업목표 2억5천만 원, 78년도 5억, 80년도까지는 10억을 목표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10억의 자금이 조성되면 집 없는 사원들에게 주택자금을 대여해주고 장학기금을 마련하고 퇴직 후에 생활안정을 위한 기금에 보태도록 할 계획입니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조국근대화의 행동철학이며, 민족통일을 위한 범국민적인 일대약진운동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이 새마을운동은 농촌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고, 도시를 정화하였으며 또한 공장새마을운동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근로자의 복지를 향상시켜 바로 기업을 살리는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확산되어 가는 공장새마을운동을 보다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더욱더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가 될 것을 저는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